열세 번째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다이안 세터필드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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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헌책방을 돕고 있는 아마추어 전기 작가 마거릿 리에게 어느날 손편지 하나가 도착한다. 발신자는 놀랍게도 비다 윈터.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이자 금세기의 디킨스 혹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작가라고도 불리는 그녀는 56년 동안 56권의 책을 썼고 그 책들은 49개 언어로 번역되었다'(p. 19). 그런 그녀가 왜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것일까? 그것도 어떤 소년이 기자 행세를 하면서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마거릿 리는 도무지 이유를 짐작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비다 윈터를 만난 적은 물론 그녀의 책조차 전혀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시하려 했는데 어느날 부모님이 외출한 사이 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양철통에서 자신에게 원래 쌍둥이 자매가 있었으며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그것을 통해 왜 자신이 계속 알 수 없는 상실감에 젖었으며 항상 누군가가 자기 곁에 있는 느낌을 가졌는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녀에게 쌍둥이 자매의 죽음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다. 그 죽음의 진실은 자신에게 영원히 봉인되어 있었다. 마거릿은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다. 스스로 엄마와 자신을 결코 만날 수 없는 따로 떨어진 두 대륙으로 여긴다. 마거릿은 엄마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도 죽은 쌍둥이 자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을 보면 죽은 아이가 떠올라 자신과 거리를 둔 것이라고. 마거릿은 그래서 더욱 비다 윈터에게 엄마의 진실을 알려달라고 했던, 편지 속 소년에게 빠져든다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마거릿 리는 집안을 돌아다니다 주로 아버지가 희귀본만 보관하는 캐비넷에서 뜻밗에 비다 윈터의 책 하나를 발견한다. 그 책의 제목이 바로 '변형과 절망의 열세 번째 이야기'. 제목 그대로 변형과 절망의 이야기가 열세 개 모은 책이었지만 마거릿 리는 아무리 읽어봐도 열세 번째 이야기가 책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가 그 책을 희귀본으로 보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초판으로 나올 당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열세 번째 이야기가 아예 없는 채로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출판사가 그 사실을 깨닫고는 서둘러 발간된 책을 모두 회수한 뒤, 열세 번째 이야기 부분을 아예 삭제하고 '변형과 절망의 이야기'로 바꿔 다시 발간했다. 아버지는 미처 회수되지 못한 몇 권 중의 한 권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거릿 리는 열세 번째 이야기를 알게 되길 강렬히 원한다. 결국 그녀는 50년 이상 단 한 번도 진실 그대로 노출되지 않았던 자신의 전기를 써달라는 비다 윈터의 제의를 수락한다. 왜 그토록 명망 있는 작가가 자신과 같은 아마추어에게 전기 집필을 맡기는 것인지, 그 의문을 안은 채로 그녀는 비다 윈터의 저택으로 들어간다. 비다 윈터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언제나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그녀에게 무례하고 고압적이었다. 참지 못한 마거릿 리는 뛰쳐 나오려 하는데, 비다 윈터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를 잡는다.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면서 '옛날 옛날에 유령이 사는 저택이 있었지'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마거릿 리가 돌아다 보니 처음으로 선글라스가 아닌 비다 윈터의 초록빛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할 이야기는 진실이라는 것을 뜻하는 신호였다. 마거릿 리는 비다 윈터의 이야기를 계속 듣기로 한다. 원래 자신이 살고 있던 엔젤필드라는 저택이 자신이 열여섯 살 때 불타버렸는데 그와 함께 자신의 모든 것도 끝났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쌍둥이와 그 때 나타났던 유령의 이야기를...



 한 마디로, '열세 번째 이야기'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흡인력이 대단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시간만 허락한다면 한 호흡에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특히나 이 소설이 미스터리 형식으로 되어 있기에 더욱 그랬다. 여기서 마거릿 리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비다 윈터의 고백을 기록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그 고백이 과연 사실인지 조사하는 역할이다. 바로 거기서 마거릿은 탐정의 역할을 맡는다. 그녀가 탐정의 역할을 해야 할만큼 이 소설엔 수수께끼가 정말 많다. 비다 윈터의 정체도 베일에 쌓여 있고, 저택이 불탄 후에 쌍둥이 자매가 어떻게 되었는지, 비다 윈터에게 엄마의 진실을 알려달라고 간청한 소년의 정체는 또 무엇인지 그리고 가정 교사로 부임해 온 헤스터 배로가 본 유령의 정체는 무엇인지 거기다 마거릿이 비다 윈터 저택에서 본 유령의 비밀도 있다. 소설 도처에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앤 세터필드는 아무런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모두 하나의 이야기로 갈무리 하고 있으니 그녀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정말로 엔젤필드의 정원을 완벽하게 가꾸었던 정원사 존 같다. 필력도,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솜씨도 모두 만만치 않은 지라 이토록 매혹적인 이야기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작가 케이트 모스는 이 소설을 읽고, '이토록 푹 빠져 읽은 데뷔작은 없었다'고 얘기했는데 지금 내 심정이 그렇다. 읽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고 읽은 뒤에도 여운이 참 많이 남는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인간은 원래 남성과 여성이 서로 등이 붙은 한 몸의 존재였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안드로규노스라 불렀다. 이들은 더없이 완전체였으므로 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우스는 몸을 갈라 남성과 여성으로 나눠지게 만들었다. 완벽한 충족감에서 갑자기 분리되어 상대방에 대한 결핍을 느끼게 된 이들은 반대가 되는 서로의 성을 영원히 그리워하면서 영혼 깊이 상실감을 안고 살게 되었다. 원래 샴 쌍둥이로 태어나 분리 때문에 죽은 쌍둥이 자매를 가지고 있는 마거릿은 종종 분리된 옆구리에서 통증을 느끼는데, 여기서 '열세 번째 이야기'가 실은 플라톤의 안드로규노스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흔적을 볼 수 있다. 더구나 쌍둥이 애덜린과 에멀린이 자신들만의 완벽한 세계를 영유하면서 홀로 살고 있는 이들을 절단자로 부르는 모습은 더욱 심증을 굳히게 만든다. 그렇게 이 소설은 찰리가 여동생 이사벨에게 그랬듯이, 애덜린이 에멀린에게 그랬듯이, 출생의 진실을 모르는 오필리어스가 그랬듯이 그리고 마거릿이 자신의 엄마와 쌍둥이 자매에게 그랬듯이 홀로 떨어져 나와 언제든 존재감 없는 유령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상실이 가져온 아픔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게 이 소설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절망적이지 않다. 우리에게 이 고독에서 비롯된 불안과 상실이 안겨주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다. 이 소설이 비다 윈터의 고백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라. 비다 윈터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거릿에게 들려주면서 반전이 되는 사실이기에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스스로의 고통도 치유해 나간다. 하기사 비다 윈터는 이미 마거릿에게 보낸 첫번 째 편지에서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허구의 힘을 이렇게 강조하기도 한다.


 나의 불안은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에 대한 것이지요. 지어낸 이야기와 비교했을 때, 진실이 우리에게 어떤 위안을 주던가요? 포효하는 한 마리 곰처럼 굴뚝 위에서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밤, 진실이 도움이 되던가요? 침실 벽에 번개가 번쩍거리고 빗줄기가 그 긴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두드릴 때는 또 어떤가요? 전혀 쓸모가 없지요. 오싹한 두려움이 침대 위에서 당신을 얼어붙게 만들 때,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앙상한 뼈다귀 같은 진실이 당신을 구하러 달려올 거라고 기대하진 않겠지요. 그럴 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이야기의 위안이지요. 거짓이 주는 아늑함과 포근함이요. (p. 14)


 이 말만큼 소설의 주제를 집약해 보여주는 게 또 있을까 싶다. 저자는 마지막에 마거릿의 쌍둥이 자매가 유령이 되어(혹은 마거릿의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조우하게 하고 또 그것을 통해 오래도록 자리잡았던 마거릿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것을 더욱 확증한다. 쉽게 말해 '삶에서 겪는 우리의 불안과 고통을 잠재우기 위하여 이야기가 지닌 환상의 힘을 빌리지 않을 까닭이 뭔가?' 하고 저자는 우리들에게 묻는 셈인데, 이것은 '과연 실재(the real)란 게 무엇이냐?' 하는 질문과도 이어진다. 


 실재에 대해서라면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며, 메울 수 없는 균열이라고. 왜냐하면 우리가 흔히 상정하는 실재란 무엇보다 언어로 정의되는데, 사실 실재는 언어에 포섭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상징 질서란 허구의 규칙이며, 그 언어를 통해 어떤 존재가 아무리 실재하는 것으로 보여도 언어에 의해 환상적으로 구축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실재란 인간이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저편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환상의 가면을 씌워 일시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실재와 가상의 구분은 더이상 무의미하다. 


아니, 실은 진정한 실재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가상으로 생각하는 것에 존재하므로 실재 자체가 가상을 통해 오히려 건조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말해보면 어떨까? 인간을 실재라고 한다면, 유령은 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젝의 실재는 거꾸로 유령이 실재고, 인간이 가상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유령 때문에 인간이 인간으로 존립될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그렇지 않아도 데리다 역시 유령의 재래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변함없이 한결같은 연속성으로 흐르는 시공간의 세계 속에서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고 주체적으로 구성하려면 오직 그 연속된 흐름을 일시에 끊고 정지 상황 속에서 단번에 인식을 상승시키는 '비약'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바로 유령의 재래가 가져오는 시간들이 그런 비약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내가 왜 갑자기 유령으로 화제를 전환시켰나 하는 것은 아마도 이 소설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바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속에서 유령의 출몰이 그리고 실제적으로 유령의 존재가 마거릿이 대면하고 있는 세계의 진실을 깨닫게 하고, 알고 보면 그 세계를 떠받치고 있었던 진정한 주체였으니까 말이다.


 이런 유령의 존재는 비슷하게 엔젤필드를 관리, 통제하고 사회가 전혀 길들일 수 없었던 에멀린을 사회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애덜린마저 최신 과학적 방법으로 치유하려 함으로써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내는 가정교사 해스티에 비한다면 그 존재감이 참으로 얼마나 엷은가? 하지만 그 해스티는 어느 순간 정말 유령인 것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지지만, 유령이었던 그 존재는 소설이 진행될수록 존재감을 더욱 증가시켜 나간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소설은 왠지 회전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실체로 보였던 존재들은 어느 순간 유령이 사라지듯 사라지고, 마치 회전문을 동시에 들어오는 것처럼 저 바깥에, 가상인 것처럼 존재감이 약했던 이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리바꿈을 통해 소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 같다. 그렇게 소설은 우리에게 고정관념처럼 남아 있는 실용의 개념을 백지화 시키며 허구의 탐닉도 삶에 얼마든지 유용하다는 것을 충분히 설득시킨다. 매혹적인 이야기에 빠지는 것만큼 삶에 매력적인 일도 없다고 말이다. '열세 번째 이야기'는 그것을 납득시키고 경험하게 만드는 멋진 놀이판이다. 이왕 이렇게 놀이판이 마련되었으니, 마음껏 향유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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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감옥 모중석 스릴러 클럽 41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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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어릴 때, 익사할 뻔한 적이 있다. 엄마와 시장에 같이 갔는데, 연못 근처에서 까불다가 그만 빠져버린 것이다. 아직도 그 때 물 속으로 가라앉던 내 눈 앞에서 천천히 떠오르던 하얀 물옥잠이 선명하다. 왜 그것만 유독 또렷한 지는 모르겠지만. 물 속의 시간은 참 느리게 흐르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 그 시간만큼 천천히 목을 죄어오던 느낌들도 내 육체에 아련한 잔향으로 남아 있다. 엄마가 얼른 연못 속에서 날 건져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글을 쓰지도 못했으리라.


 익사하는 자에게 물은 정녕 감옥이다. 그것도 압도적인 두려움 속에서 서서히 질식되는 공포의 감옥이다. 한 번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물만큼 무서운 것도 또 없다. 그랬기에 '사라진 소녀들'로 우리나라에 첫 선을 보인, 독일의 스릴러 작가 안드레아스의 빙켈만이 2012년에 발표한 '물의 감옥'은 남들에게는 스릴러 소설로 읽혔을지 모르나, 내게서 만큼은 문자 그대로 호러 소설로 읽혔다. 소설은 처음부터 익사당하고 있는 여자로 시작하는데, 비록 욕조에서 익사당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억지로 익사당하고 있는 그녀의 심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어서 내가 가라앉던 기억이 저절로 오버랩 되면서 정말로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등 뒤로 비수를 은밀하게 감추고 지어보이는 살인자의 미소만큼이나 차디 찼던 물의 냉기. 육체 아래서 오래 잠들어 있었던 그 감각이 삽시간에 소환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필이면 겨울 새벽에 읽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게는 그 어떤 책보다 힘들고 무서운 책이었다. 그런 익사가 한 번도 아니도 내내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소설엔 익사로 연쇄 살인을 하는 범인이 등장한다. 그는 희생자를 호수 속으로 끌여들어 밑에서 그 몸을 잡고 익사되려는 순간의 고통을 충분히 느끼게 한 다음, 자기가 원하는 속도로 천천히 물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 저 호수 밑바닥 죽음의 심연으로 매장시킨다. 진정 나로선 가장 피하고 싶은 살인자임에 틀림없다. 그 범인은 스스로를 '물의 정령'으로 칭한다.



 물의 정령 하니 얼른 푸케의 '운디네'가 생각난다.

 운디네는 여러 모로 인어공주와 비슷하다. 물의 정령인 그녀는,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잘생긴 기사에게 반하여 그와 결혼하기 위해 인간이 된다. 결국 기사와 꿈에 그리던 결혼을 하게 되었으나 행복은 그리 길지 못했다. 기사가 그만 다른 여자와 정분이 나고 만 것이다. 배신을 당한 운디네는 남편과 결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키스를 해 달라고 말한다. 남편이 선뜻 키스에 응해주자, 운디네는 그 키스로 남편의 모든 정기를 빼앗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운디네는 배신의 아픔과 남편을 죽인 죄책감까지 더해 샘물이 되어 버린다. 혹시 스스로 물의 정령이라 칭한 범인도 자신이 운디네와 비슷하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알고 보니 그 역시 타인을 연쇄 익사시키는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던 이유가 타인의 배신으로 인한 커다란 상처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운디네가 그랬듯이, 그의 살인도 복수의 일환이었다. 그에겐 복수해야 할 대상이 있었다. 바로 유능한 독일 형사 에릭 슈티플러다. 범인이 익사시킨 여성들은 무작위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범인은 에릭의 전부인이나 관계를 가졌던 매춘부 등 그렇게 에릭과 관계 있는 여성들만 희생시켰던 것이다. 그는 왜 에릭과 아는 사이라는 것말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여성들을 죽여서까지 복수를 하려는 것일까? 도대체 둘 사이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의문이 이 소설을 끌고 가는 동력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사건이 더 끼어든다. 그것이 바로 소설 가장 처음에 나오는 욕조 익사 사건이다. 거기서 죽은 여인은 수잔 호프만. 그녀는 라비니아와 절친인데, 둘에겐 꿈이 있었다. 한때 라비니아 가족의 별장이었던 시칠리아의 작은 집을 다시 사서 둘이서 함께 사는 것. 그것을 위해 수잔은 매춘부 일을 하고, 라비니아는 만나는 남자가 수잔을 위험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멀리서 감시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 그만 수잔을 익사시키려 했던 남자를 만나고, 그 일이 있은 후 수잔이 욕조에서 익사당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살아남은 라비니아는 분명 그 때 수잔을 익사시키려 했던 남자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피해 달아나 숨는다. 그러는 한 편, 수잔의 못 다 이룬 꿈을 이뤄주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은다. 이 살인 사건과 물의 정령은 과연 어떤 관계일까? 수잔을 익사시키려 했던 남자는 정말 물의 정령이었을까? 그가 수잔을 욕조에서 익사시킨 것일까? 아니면 진범이 따로 있는 것일까? 이렇게 소설은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독자에게 안기며 놀라운 반전 속에 펼쳐지는 진실을 향해 점차로 다가간다.


 소설은 등장인물의 내면을 한 챕터씩, 번갈아 보여주면서 진행된다. 그렇게 우리는 에릭과 라비니아에게서 일상이 서서히 붕괴되는 것에서 오는 공포를, 프랭크에게선 뜻하지 않게 찾아온 사랑과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에 느끼는 절박함을 볼 수 있으며, 범인에게선 너무나 사랑했고 더없이 소중한 것을 갑작스레 상실해 버린 것에서 오는 상처와 원한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되며, 형사인 마누엘라에게선 남자 중심 조직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무시와 경멸 등의 성차별적 폭력들이 삶에 어떤 생채기를 남기는지 확인하게 된다.


 '물의 감옥'에서 주로 희생 당하는 자는 여성들이다. 라비니아는 남성 범죄자에게서 달아나고 있으며, 마누엘라는 남성 중심의 강고한 연대 속에서 고립되고 왜소한 섬으로 존재한다. 하나 같이 배제되고, 위축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때문에 이 소설을 어쩔 수 없이 페미니즘으로 읽게 된다. 더구나 에릭은 마누엘라에게 이루 말 할 수 없는 성차별적인 언어와 적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어 더욱 그렇게 보도록 만든다.


 이렇게 보자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 여성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바로 '라비니아'와 '마누엘라'이다. 일단 '라비니아'는 로마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를 건국한 아이네이스의 아내로, 한 마디로 로마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런 라비니아의 존재는 로마 건국의 역사에서 그리 중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역사는 오로지 남자 아이네이스 중심으로만 기술된다. 그 아이네이스를 노래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또한 마찬가지다. 라비니아는 아내의 이름으로 단 한 번 언급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라비니아의 존재감은 너무나 미미하다. 마치 로마를 건국하기까지 밥상을 차린 것은 전적으로 아이네이스이고, 라비이나는 그저 숟가락 하나 얹은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로마를 건국하기 위한 모든 힘과 자원을 가진 것은 사실 라비니아였고, 아이네이스야 말로 숟가락 하나 잘 올리고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라비니아는 라틴족의 기원이 되는 왕국 라티누스의 하나밖에 없는 공주였다. 많은 남자들이 라티누스의 권력과 재력을 가지기 위해 라비니아에게 구혼을 했다. 아이네이스도 그 중 하나였다. 더구나 그는 그 쪽 대지의 사람도 아니고 바다를 건너온 이방인이었다. 아이네이스가 라비니아의 베필로 선택된 것도 그의 신분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전적으로 운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라비니아의 아버지인 왕 라티누스가 꾼 꿈 때문에 결정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어느 날 꿈에서 라비니아의 베필은 바다를 건너 온 자로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을 믿은 결과 아이네이스를 선택했던 것이다. 만일 꿈을 믿지 않았다면 결과는 지금과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사실조차 실은 남성 중심 사회가 왜곡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도 라비니아는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여전히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상자 속에 있는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필요한 열쇠, 더 큰 야망과 교환되는 전리품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진실은 전혀 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화와 역사의 기록으로 그려지는 라비니아는 남성 중심 사회에 겹겹으로 포위된 존재다. 어쩌면 바로 이 때문에 정말로 빙켈만은 남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달아나는 여성에게 라비니아라는 이름을 준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에서 라비니아는 남성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다. 신화와 역사 속에서 로마 건국에 따른 모든 영광을 아버지와 남편에게 빼앗긴 라비니아와 똑같이. 그러고 보니 앞서 말한 물의 정령 운디네도 라비니아와 동일한 희생자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사실 때문에 나는 이 소설에 나오는 여성들을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장 처음에 등장하여 욕조에서 죽어가는 수잔은 과거고 라비니아는 현재이며 마누엘라는 미래라고 말이다. 과거는 소설이 재현하고 있는 절망과 죽음만이 가득한 세상이 어떻게 출현했는가를 설명한다. 그런 세계는 바로 여성의 죽음으로 도래했다고 말이다. 이런 수잔의 죽음은 소설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죽음, 그것도 모든 비극의 기원이 되는 한 여성의 죽음 때문에 더욱 명확해진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두 죽음에 얽힌 설정은 오늘의 어둡고 절망스런 세상이 바로 여성의, 여성성이 상징하는 모든 가치의 죽음으로 비롯되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라비니아는 그 세상이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는 현재 여성의 상징이 된다. 여기에 마누엘라는 미래가 들어온다. 왜 마누엘라를 미래로 생각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역시 이름의 의미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마누엘라는 '신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라비니아적 현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상징이다. 이런 마누엘라의 의미는 소설 속에서 라비니아와 마누엘라가 보여주는 차이로 인해 부각된다. 라비니아와 마누엘라에겐 가장 대조되는 차이점이 있다. 바로 라비니아는 자신을 포위하고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남성들과 맞서 싸우지 않지만, 마누엘라는 적극적으로 투쟁한다는 것이다. 라비니아는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는데도 회피로 일관하고, 마누엘라는 남성 중심의 조직 사회가 무시와 경멸을 연타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관통한다. 소설의 결말은 이런 차이가 어떤 종결을 가져오는지 보여준다. 그러므로 마누엘라는 하나의 대안이며 구원이다. 그녀는 정녕 도래해야 마땅한 미래이다. 아마도 빙켈만은 그것을 보다 더 뚜렷하게 보여주기 위해 '신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이름을 그녀에게 부여했을 것이다.


 내겐 더없이 호러 소설이었지만, '물의 감옥'은 이렇게 페미니즘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양산되고 있을 운디네와 라비니아의 비극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그것은 마누엘라가 제대로 보여줬듯이, 적극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라비니아에게 세상이란 그야말로 '물의 감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뛰쳐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바깥에 있는 누군가가 먼저 열쇠로 꺼내주기만을 기다렸다. 여기서 왜 빙켈만이 하필이면 살인의 형식을 익사로 가져왔는지가 보다 분명해진다. 생각해 보면, 익사란 수동성의 결말이다. 물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익사하니까 말이다. 살려고 적극적으로 발버둥치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죽음. 그것이 바로 익사의 정체다. 마누엘라는 발버둥을 쳤다. 상황을 파악하여 오류와 약점을 찾았고 스스로 뚫고 나가는 길을 만들었다. 물론 그녀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그런데 그 위기란, 남성에게 기댔을 때, 그러고 싶은 마음과 타협했을 때 찾아왔다. 그 조그만 타협마저 그녀를 죽음의 위기로 몰고 갔다. 이로써 빙켈만의 진언은 보다 확실해진다. 타협없는 부단한 투쟁만이 진정한 구원의 미래를 열어 젖힌다는 것을.


 '물의 감옥'은 한 마디로 열쇠를 바깥에서 찾으려는 자 모두에게 내리는 준엄한 경고이다. 진정 구원의 열쇠를 원한다면 빙켈만의 제안대로 내 주머니부터 먼저 샅샅이 뒤져보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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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1 0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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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8 15: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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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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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세 번째로 소개되는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은 내게 그야말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았다. 나도 제법 장르 소설에 대한 경험이 많이 쌓인 탓에 책을 읽을 때 어느 정도는 뒷 얘기를 예측할 수 있는데 이 소설만큼은 그게 허락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 다음의 이야기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이 부분에서 무턱대고 꺼낼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여간 그래서 그간 천편일률적으로 뻔한 전개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식상하셨던 분들이라면 얼른 이 책을 손에 들 것을 권해드리고 싶다. 종잡을 수 없는 예측불허의 전개만으로도 끝까지 읽게 만드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 소설의 주인공은 킬러 안데르스가 아니다. 비록 제목에 유일하게 고유 명사로 표기되고 가장 앞에 나왔어도 얘는 조연에 불과하다. 진짜 주인공은 바로 뒤에 나오는 '그의 친구 둘'인 것이다. 이 '친구 둘'이란 하나는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다. 얼른 커플인가 하는 생각이 드실 것도 같은데, 원래는 아니다. 둘은 주인공 남자가 점심을 먹다가 우연히 만났고, 더구나 그 때 여자는 남자에게 기도 하고 기도값을 받는 식으로 사기를 치려 했다. 그랬던 여자의 이름은 요한나 셸란데르. 전직 목사다. 그러나 지금은 설교 도중 사람의 성기 운운하는 쌍욕을 신에게 범해 강단에서 쫓겨나 노숙자 신세다. 그래서 신의 이름을 빌어 사기를 친 것이다. 사기를 당할 뻔 했던 남자의 이름은 페르 페르손. 작가 이름인 요나스 요나손 처럼 비슷한 발음의 나열이다. 그는 이 이름을 싫어한다. 그 이름을 물려준 가문에 대해 별로 좋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남자의 집안은 아주 잘 살았다. 할아버지 때만 해도 엄청 부자였다. 그 때 할아버지는 말 사업을 했다. 하지만 디젤 기관이 발명되고 자동차 산업이 활황하면서 할아버지 주력 사업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건 아버지 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시대가 가문의 앞길을 작정하고 막아서는 것처럼 하는 사업마다 시류를 잘못 만나 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현재 손님이 거의 찾지 않는 스웨덴에서 가장 음침하며 작고 허름한 호텔의 리셉셔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당연히 급료는 병아리 눈꼽만큼이고 사는 곳도 데스트 뒤에 딸린 원래는 창고로 쓰였던 작은 방이다. 사는 낙이 있을리 없다. 그에게 이름은 가문이 줄기차게 당한 불운의 겹침의 형상과도 같았다. 남은 것은 그런 이름을 가져다 준 가문에 대한 원망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복수심 뿐이다.


 요한나 셸렌데르도 다르지 않다. 그도 집안에 대한 원망이라면 페르 페르손 못지 않다. 그녀는 원래 대대로 목사인 집안 출신이었다. 그것이 여자인 그녀에겐 저주가 되어버렸다. 목사는 편견과 고집의 구현체나 다름없다. 요한나의 아버지가 그랬다. 그는 목사는 반드시 남자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은 불경이었다. 그런데 그만 딸이 태어나버린 것이다. 그는 딸을 태어날 때부터 원망했고, 그걸 신의 형벌이라 여겼다. 그는 딸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 딸을 낳은 어머니도 용서할 수 없었다. 무시하는 것 정도는 귀여운 애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갖은 학대가 자행되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방치했다. 딸은 결국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목사가 되었다. 마음 속에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끝내 반항 한 번 못했다. 그것이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 날 터져 나오고 말았다. 아버지와 그런 운명을 허락한 신에 대한 원망이 그 날 강단 위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그래서 쫓겨 났다. 이렇게 페르와 요한나는 혈통과 세상 그리고 신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을 공유했다.


 그런 그들 앞에 '킬러 안데르스'가 나타났다. 모두가 두려워 하는 호텔 '7호실'의 손님. 만일 그가 잠에 취하는 바람에 그에게 올 의뢰비를 페르와 요한나가 맡지 않았다면 페르와 요한나의 기상천외한 사기극도 없었을 것이다. 그 의뢰비 때문에 그들은 킬러 안데르스가 한없이 가벼운 자신들의 주머니를 빵빵하게 채워 줄 '귀인'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그저 있는 것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성깔과 탁월한 폭력 기술뿐 머리는 없는 안데르센을 꼬드겨 그의 매니저가 된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팔이나 다리를 뭉개버리고 싶은 사람을 킬러 안데르스과 연결시켜 주거나 홍보를 통해 얼마간의 수수료를 받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페르의 아이디어로 스웨덴 제일의 무서운 폭력배가 되어버린 안데르손 때문에 의뢰는 쉴 새 없이 들어오고 곧 페르와 요한나의 기대대로 그들 수중에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온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전직 목사였던 요한나가 안데르스에게 무심코 하게 된 예수 이야기 때문에 안데르센은 그만 더이상 폭력을 쓰지 않으리라 결심하게 된다. 사업에 중대한 위험이 닥쳐왔다는 것을 감지한 페르와 요한나는 이미 눈도 맞고 해서 의뢰비를 사기쳐서 잔뜩 받아서는 그것만 들고 둘이 같이 튀자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안데르스이 또 우연히 그 계획을 알게 된다. 하지만 역시 요한나의 화려한 말빨에 설득되어 같이 탈출하기로 마음 먹는다. 셋은 그렇게 튀고 의뢰비를 사기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스웨덴 최고의 범죄 조직의 수장 '백작'과 '백작 부인'은 그 대가로 그들의 죽음을 치르게 하기 위해 그들을 추적한다.


 여기까지도 흔한 전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돈을 둘러싼 주인공 일행과 범죄자들의 쫓고 쫓기는 전개는 많이 봐 온 것이 사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소설은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예수를 영접하고 회심하게 된 안데르스는 교회가 보일 때마다 돈을 마구 헌금함에 집어 넣는가 하면 기부도 아끼지 않고 해 버린다. 이 사실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안데르스는 여왕이 감사를 표할만큼 스웨덴에서 가장 유명한 기부 천사가 되고 그가 예수의 말씀을 따라 했다는 사실도 알려진다. 그래서 페르와 요한나는 안데르스를 목사로 내세워 헌금을 모아 가로챌 계획을 꾸민다. 처음은 세상에 대한 복수였고, 이제는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행운의 여신이 가문 대대로 불운을 선사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이번에도 행운이 마구 작용해 그들의 계획은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마냥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왕년에 스웨덴에서 가장 좋은 교회 지기라고 자부하던 한 인물에 의해 교회 사기극이 발각될 위험에 처하고, '백작'과 '백작부인' 또한 그들의 위치를 알아낸다. 한 쪽에서는 감옥의 창살이, 다른 한 쪽에서는 죽음의 창살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과연 페르와 요한나의 사기극은 무사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바랐던 돈을 들고 잘 달아나 꿈에 그리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순진한 희생자의 위치에 서 있는 킬러 안데르스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다면 직접 이 소설을 읽는 수밖에 없다.


 요나스 요나손은 주어진 삶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을 적극 지지하고 찬양해 온 작가다. 그의 이름을 우리나라에 처음 알린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부터 이 소설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까지 내내 그랬다. 생각해 보면 역사와 종교는 선험적으로 가장 굳어져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힘으로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이 바로 역사와 종교라는 말이다. 하지만 요나스 요나손은 거기에 균열을 일으킨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는 역사가 개인에 의해 새롭게 쓰여지고,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에서는 성경 말씀과 신이 전혀 다르게 응용되고 이용된다. 그렇게 역사와 종교는 더이상 인간을 지배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더욱 넓히는, 일종의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장(field)으로 바뀐다. 요나스 요나손은 그런 주체에게 간직된 역량을 무한히 펼쳐 보인다. 어쩌면 소설을 읽으면서 유쾌한 가운데 얻는 해방의 느낌은 바로 거기서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가 어디까지 강해지고 넓어질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똑똑히 봐!' 나는 그것이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세계가 들려주고 싶은 진심의 모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 신자유주의로 인해 더없이 개인이란 존재가 위축된 이 시대에 그의 소설이 각광받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런 나의 말은 어디까지나 사족에 불과하다. 때로 소설은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읽을 이유가 충분한 경우가 있다. 바로 재밌다는 것. 여기에 동의한다면 이 소설을 얼른 손에 들어도 좋지않을까 싶다. 솔직히 나는 정말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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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처럼 희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2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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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3부작으로 계획된 살라 시무카의 '백설 공주' 3부작 중 두 번째의 것이 드디어 나왔다.

 첫 권, '피처럼 붉다'가 내겐 너무나 매력적이었으므로 후속작이 얼른 나오길 기다렸는데 기다림이 길었다. 거의 1년이 되어서야 만나게 되었으니.

 제목은 '눈처럼 희다(As White As Snow)'.



 시리즈의 제목은 모두 그림형제의 동화 백설공주 첫 부분에서 따왔다. 주인공 이름은 루미키. 핀란드어로 '백설공주'를 뜻한다. 아, 혹시 이 작품을 이 글을 통해 처음 만나시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이 시리즈는 핀란드 작가 살라 시무카에 의해 원래 핀란드어로 쓰여졌다. 1편에서 뜻하지 않게 거대한 범죄조직 북극곰과 관련된 범죄에 연루된 루미키는 그 사건을 무사히 해결하고, 그로부터 4개월 후인 6월의 여름을 이제 체코의 프라하에서 보내고 있다.


 그녀는 홀로 관광을 위해 여기에 왔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온갖 이방인들로 넘쳐나는, 그야말로 타자들의 도시에.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지금 그녀가 있었던 세계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살라 시무카는 루미키를 괜히 이 곳으로 보낸 것이 아니다. '백설 공주 3부작'은 단적으로 정의하자면, '백설 공주 다시 쓰기(rewriting)'라 할 수 있다.



 (전작 '피처럼 붉다' 리뷰에서 소개했던 안젤라 바렛의 '백설공주'의 표지.

 '눈처럼 희다'의 루미키는 지금 이런 상황이라 할 수 있다.)


 1부의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동화 백설공주의 초기 부분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백설공주의 어머니가 죽은 뒤에 홀로 된 아버지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새 왕비를 얻게 되고 그러다 결국 백설공주가 쫓겨나는 부분말이다. 백설공주가 가혹한 운명 속으로 떨어지게 된 것은 따지고 보면 아버지가 더이상 아버지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통과 고독에만 너무 골몰한 나머지 자신이 정말로 돌보아야했던 딸을 밀어내고 모르쇠 했기 때문인 것이다. 읽어보면 아실테지만 이 부분은 얼개만 놓고 보자면 정말로 1권과 상당히 유사하다. 1권에서 우리는 루미키가 이름 그대로 백설공주의 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과거의 백설공주가 아닌 대안으로써의 백설공주 말이다.


 그렇다면 2부는?

 2부는 바로 태어나 처음으로 와 본, 한없이 낯설기만 한 숲에서 일곱 난쟁이를 만나는 부분을 리라이팅(rewriting)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작가 살라 시무카는 루미키가 처음 보는 낯선 국적, 인종들로 넘치는 프라하로 보낸 것이다. 숲으로 쫓겨난 백설공주와 똑같이. 거기서 루미키는 숲 속 백설공주와 마찬가지로 맨발로 있다.


 루미키는 돌벽에 앉아 샌들을 벗고 다리를 끌어올렸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젊은 여자 둘이 킥킥 웃었다. 맨발 처음 보나? 안녕하세요. 난 무민의 나라에서 왔어요. 무민도 맨발이잖아요.(p. 10 ~ 11)


 그런 루미키는 프라하에서 정말로 일곱 난쟁이를 만난다. 물론 진짜 난쟁이는 아니고 그 난쟁이들이 이루고 있던 공동체와 똑같이 작은 규모의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만나는 것이다. 그것도 종교 공동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루미키를 그 공동체와 만나게 해 준 장본인이 바로 그녀의 언니라는 사실이다. 루미키는 마치 무슨 운명의 장난처럼 자신의 언니라 주장하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젤렌카. 그녀는 루미키의 아버지가 프라하에 왔을 때, 자신의 엄마와 사랑에 빠졌고 결국 자신을 낳았다고 한다. 사실 젤렌카의 말대로 루미키의 아버지는 한 때 혼자 프라하에서 오래 머문 적이 있다. 그래도 여전히 반신반의했지만, 루미키를 대하는 젤렌카의 모습에 거짓은 느껴지지 않아서 결국은 어머니가 사고로 강물에 빠져 죽는 바람에 고아가 되어버린 젤렌카를 가족으로 거둬준 종교 공동체까지 가게 된다. 젤렌카는 완벽에 가까운 가족 공동체라고 말했지만, 루미키가 활약하는 '백설공주 시리즈'에서 '완벽하다'는 말은 그만큼 불길하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과연, 그 공동체의 어둠을 한 기자에게 발설하려 했던 남자가 뜻하지 않게 죽고 그 남자를 우연히 알아 본 루미키에 의해 공동체에 서려있던 불길한 어둠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제 프라하에서의 시간은 루미키에게 전혀 다르게 변한다. 관광의 시간이 아니라, 언니일지도 모를 젤렌카를 음험한 공동체에서 구해내는 것으로.


 '눈처럼 희다'에서는 백설공주에게 또다른 삶의 의미를 주었던 일곱 난쟁이의 공동체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백설공주'에서 일곱 난쟁이와 함께 한 삶은 완벽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따스하고 사랑이 넘치는.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런 일곱 난쟁이와의 공동체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지배와 종속, 거짓과 착취 그리고 탐욕과 죽음의 공동체로. 공동체의 리더는 늘 순수를 말하며, 구성원들 또한 순수를 주문처럼 외우고 다니며 스스로 순수하게 되리라 마음먹고들 있었지만, 실은 그 순수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 또한 자신을 좀 더 손쉽게 착취하게끔 만들어주기 위한 이념적 도구일 뿐이었다. 여기서 제목의 '눈처럼 희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의 모습에서 우리는 살라 시무카의 '백설공주 시리즈'가 실은 백설공주를 페미니즘적으로 다시 쓰고 있는 것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시무카가 리라이팅을 통해 동화 '백설공주'를 공격하는 것은 '일곱 난쟁이의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있다. 동화에서 백설공주는 가사 일에 전념한다. 백설공주는 혼자 그들을 위해 8인분 음식을 준비하고, 그들이 아침에 일하러 나가고 가면 여덟 명이 먹은 그릇들을 닦고 청소를 하며 빨래를 한다. 난쟁이들은 먹는 것도 함부로 먹고 옷이나 도구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으며, 옷이 더러워지는 것에 별 신경도 안 쓰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난쟁이라 할지라도 백설공주가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의 몫은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그 어느 판본을 봐도 난쟁이들이 백설공주와 그 일을 함께 했다는 말은 없다. 알고 보면 일곱 난쟁이들은 귀찮은 가사 일을 대신 해 줄 식모를 그것도 급여 없이 들여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일곱 난쟁이들이 안전을 대가로 백설 공주를 착취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들의 따스하고 사랑 넘치는 공동체는 바로 그것을 통해 이뤄지며 유지되고 있었다. 동화에선 백설공주가 주체처럼 묘사되지만, 실은 볼모에 지나지 않았다. '눈처럼 희다'의 젤렌카처럼.


 시무카는 자신의 소설에서 일곱 난쟁이와 비슷하게 만든 공동체를 통해 그것을 공박한다. 그 공동체 구성원들은 루미키에게 내내 자신들이 가족이라고 말한다. 가족은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화의 장소이다. 우리의 의식을 이루는 것들 중 아주 많은 부분이 바로 여기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인간형이라면 그 역시 토대는 가족을 통해 형성된다. 시무카는 그런 가족을 두 번째 소설에서 가져왔다. 바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여성성이 기초적으로 만들어지는 장소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1권, '피처럼 붉다'와 비교해 보자면 범위가 확장되었다. 아버지에서 가족으로. 그것은 그대로 여성성이 조직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착취가 수월한 여성성을 설계하고, 그것을 가족 제도로 유포하는 경로인 것이다.(어려서부터 읽는 동화들 역시 여기에 일조하고 있다. 그래서 원래 동화작가였던 살라 시무카는 가장 대표적인 백설공주를 삼부작을 통해 리라이팅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시무카는 삼부작의 각 권마다 그 내부에서 희생당하고 있는 여성들을 기워놓았다. 1부는 엘리사였고, 2부는 젤렌카였다. 3부는? 3부도 물론 있다. 그것은 2권에 와서 비로소 있는 것으로 밝혀진 '언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이 바로 진짜 백설공주들이다. 왜냐하면 동화 속 백설공주와 똑같은 아픔을 겪으니까 말이다. 루미키는 바로 이런 존재들을 구해낸다. 마치 새로 쓰인 백설공주가 옛날에 잘못 쓰인 백설공주를 구하는 형국이다. 그야말로 다시 쓰기(rewriting)'라 아니 말할 수 없다.


 '눈처럼 희다'는 한 번 잡으면 끝까지 내처 읽게 되는 재밌는 작품이다. 하지만 소설의 재미는 홀로 있지 않다. 은근슬쩍 동화 백설공주를 끌어들이며(무엇보다 '눈처럼 희다'에서 진정한 배후로 드러나는 사람은 백설공주의 그 분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어디를 가나 주체가 되지 못한 공주들이 문제다. 그러고 보면 백설공주의 영원한 악역 여왕도 이제는 달리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성의 구현체가 되었을 백설공주를 스스로 떠나게 만들어 자신만의 주체성을 만들도록 해 준 사람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남자들에게 둘러싸일 때마다 여왕은 나타나서 백설공주를 그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만든다. 예전부터 남성 사회로부터 독립하려는 여성들은 자주 마녀라든지 괴물이라는 외피가 씌워졌다. 여왕도 그런 매커니즘으로 악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여성성이라든가, 여성의 현실 같은 것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 시무카의 본심은 분명 여기에 있을테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주제가 서사를 해치도록 놔두지 않는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주제는 주제대로 잘 균형을 이루면서 빠져들고, 들여다 보는 깊이에 따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한 마디로 꽤 읽을만한 소설이다. 얇고, 십대 소녀가 활약한다고 해서 허투루 볼 작품이 아니다.


 (이왕 여왕 이야기가 나왔으므로 생각나는 그림책 하나가 있다. 바로 트리나 샤트 하이만의 '백설공주'다. 하이만은 칼데곳 메달상까지 받은 유명한 작가인데, 이 그림책이 이채로운 것은 여왕이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사실 백설공주의 이야기라기 보다 여왕의 이야기라도 보아도 무리 없을 정도로 꽤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하이만은 여왕이 왜 백설공주를 그렇게까지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추적하고 있다. 그림책에서 여왕은 자신의 늙음을 서러워하다 우울증에 빠져버린 보통의 중년 여인으로 그려져 있다. 아래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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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업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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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업'은 더글러스 케네디의 첫 단편집이다. 모두 12개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길이는 제각각이다. 나는 아직 케네디의 장편을 만나 본 적이 없다. 때문에 읽으면서 장편을 먼저 읽어보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짧은 호흡의 소설로는 그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이런 세계를 그리고 있는지 잘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모르면서 읽는 것은 내게 편하지 않았다. 내게 편한 독서란, 글에 투영된 작가의 마음이 오롯이 전달되어 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다가온 심상이 전적으로 내 착각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지만 그 불편함을 쉬이 눈감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일단 문체가 가볍고, 대사들은 살아 있으며 이야기가 중간에서 그만둘 수 없을만큼 흥미를 계속 잡아 당겼기 때문이었다. 339페이지에 담겨진 12개의 단편들을 읽는 데 들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일이 없고 장시간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반나절에 다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뭐, 이런 정보 따윈 당신에겐 별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보다 중요한 것은 ''픽업'이 무슨 이야기냐?' 일 것이다. 12개의 단편들을 모조리 관통하는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실패'라 하겠다. 스스로 완벽하게 세워놓았다고 자부했던 계획이 실패하는 이야기, 사랑에 실패하고, 결혼에 실패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우리와 별로 멀지 않은 이야기다. 살면서 우리도 겪는 일이니까 말이다. 다만 이렇게 실패하는 이들이 모두 사회에서 아주 잘 나가는, 그렇게 지위도 제법 높고 돈도 많이 벌며 능력도 제법 출중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우리와 차이가 날 뿐이다. 케네디는 유독 그런 인물들을 단편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 내가 원래 좀 이상해서 그런가 이것이 좀 더 내 흥미를 끌었다. '하필이면 왜 이런 사람들의 사랑과 결혼 생활을 다뤘을까?' 하고 말이다. 어쨌든 이런 사람들은 나와 멀다. 내겐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이 겪는 경험은 언제든 내 것일 수 있지만, 그들의 처지는 내 것일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아주 보편적인 실수요, 실패라는 걸 알리기 위한 것은 아닐까?'


 지위의 격차, 빈부의 격차 그리고 능력의 격차에 상관없이 우리는 똑같이 실수하고 실패한다. 자기에게 찾아온 진짜 사랑을 깨닫지 못하며, 지나치게 자신에게만 골몰하느라 정작 타인의 모습은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내 허기를 채우는 것에만 매달리느라, 무시된 타인의 허기가 결국은 내게 어떤 복수를 감행할지도 헤아리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청맹과니다. 나만 보고, 나 밖에 못 본다. 그래서 엎어지고, 상처입고, 눈물을 흘린다. 우리나 그들이나 똑같이.


 그렇다면 이것은 '조건'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 자체의 문제다. 내 지위가 높아진다고 해서, 능력이 뛰어나게 된다고 해서, 부유하게 된다고 해서 달라질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내 처지나 상황이 아니라 내가 달라져야 해결 될 문제다. 하긴, 우리가 만나는 문제들 중에 안 그런 것이 어디있겠냐 만은.


 단편집 '픽업'은 바로 그런 깨달음을 위해 '픽업(pick up)'된 12개의 이야기들이다. 본질적인 면에서 나와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 결국엔 바로 이것을 깨달아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왜 불행이 만연할까? 우리의 삶이 불확실하기 때문일까? 인생이 절망과 실패로 점철되어갈 때 우리는 왜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지 않는가?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아온 사람이 과연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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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6-09-22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글라스 케네디 ...좋아요ㅎㅎ

ICE-9 2016-09-23 00:06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이 좋아하시는 작가였군요. 저도 장편을 만나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