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던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39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양영란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프레드 바르가스. 그녀를 나는 감히 이렇게 부르고 싶다. 프랑스 미스터리의 여제(女帝)라고. 사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을까? 프랑스 미스터리계에서 자신의 작품이 가장 많이 팔리는 여성 작가이고 미스터리 계에서 명망 높은 대거상도 세 번이나 수상했으니까 말이다. 이런 바르가스에게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역시 아담스베르그 형사 시리즈고 그 시리즈 중 최고 걸작이라고 한다면(물론 시리즈가 계속 중이기에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나온 것에 한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단연 '트라이던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엔 조금의 거짓도 없다.



 일단 매혹적인 플롯부터.

 주인공 아담스베르크는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기분에 빠지는 경험을 자주 한다. 마치 자기 내부에 자신이 알 수 없는 낯선 타자가 있어 돌연 거기에 정신을 사로잡히는 느낌이다. 곤혹스러워 하는 그 앞에 불현듯 포스터 하나가 나타난다. 바로 '트라이던트'의 원래 제목인 '넵툰의 바람 아래서'의 바로 그 넵툰이 그려진 포스터다. 마치 반복적으로 찾아왔던 그 이질감이 여기로 인도한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포스터엔 어린 시절 이후,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리고 평생을 두고 추적했었던 살인마의 서명과도 같은 흉기가 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넵튠이 든 트라이던트, 즉 삼지창이다. 때문에 아담스베르그는 그를 '세발작살'로 부른다. 그 존재는 자신의 동생을 파멸시켰고 그 때문에 아담스베르그는 평생 자책해야했다. 살인마는 자신의 트라우마였다. 그는 희미하게 깨닫는다. 최근 찾아왔던 기묘한 느낌은 경고였으며 그것은 그 살인마가 다시 활동하고 있음을 알려주려 한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곧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한 여성이 살해되고, 근처에서 범행의 기억을 잃어버린 노숙자가 살인자로 체포된다. 겉으로는 사건이 완벽하게 해결된 듯 보였으나 아담스베르그는 안다. 16년만에 범인이 다시 돌아왔음을. 왜냐하면 살인을 저지른 근처에 그것의 누명을 씌운 무고한 자를 놓아두고 체포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의 범죄 패턴이었으니까.


  비록 그 범인은 16년 전에 죽었지만.


 분명 그는 죽었다. 아담스베르그는 무덤까지 찾아가 확인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목도하는 이 살인사건은 분명히 그 자의 짓이다. 카피캣은 아니다. 평생에 걸쳐 수사했기에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령의 범행인 것일까? 죽은 자가 다시 돌아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담스베르그는 진실을 아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그를 쫓는다. 사람들이 아담스베르그를 불신하고 비웃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고립된다. 하지만 어려움은 그게 다가 아니다. 연수를 떠난 캐나다에서 그는 일대 위기를 겪는다. 우연히 만나 정사마저 치뤘던 여인 노엘라가 '세발작살'에게 살해당하고 자신이 '누명을 쓴 무고한 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스베르그조차 과연 자신이 무고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살인이 일어났던 밤의 기억이 없는 탓이다. 과연 함정인지, 자신이 저지른 범죄인지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는 이제 캐나다와 프랑스 경찰 모두에게 쫓긴다. 이 위기에서 빠져나갈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진범인 '세발작살'을 잡는 것. 30년동안 자신의 범죄를 완벽하게 감춰왔으며, 이미 16년 전에 죽은 범인을 그는 과연 체포할 수 있을까?


 매력적인 설정이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황당할 정도의 이야기인데 이것이 결국 아귀가 다 맞아떨어지게 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뛰어남을 증명한다. JJ 애이브럼스 감독처럼 떡밥을 이리저리 많이 뿌려놓지만 회수되지 않는 떡밥은 하나도 없다. 왜 범인이 그런 패턴의 범죄를 저지르고 그토록 트라이던트에 집착하는 것까지도 모조리 설명된다. 모든 것이 정교하게 세팅(setting)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이 소설의 장점은 아니다. 솔직히 아담스베르그의 진짜배기 매력은 이야기에 있지 않다. 바로 캐릭터에 있다. 그것도 아담스베르그 하나만이 아니다. 조연이라고 할 수 있는 박학다식으로 자신의 모자란 외모를 커버하는 당글라르, 능력으로 남자들을 일당백하는 여성 르탕쿠르, 조직을 넘어 그리고 국경을 넘어 아담스베르그에게 인간적인 우애를 드러내는 트라벨만 그리고 아담스베르그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 때마다 의지하는 할머니들까지. 소설엔 개성적인 매력으로 충만한 생생한 캐릭터들이 넘쳐난다. 이런 캐릭터들이 엮어내는 앙상블, 다양한 인간들의 드라마가 바로 이 아담스베르그 시리즈의 진짜 매력이며 그 매력을 최고로 발산하고 있는 것이 바로 '트라이던트'다.


 이것만으로 낚이지 않는다면 이제 내용 이야기를 해보자. 물론 스포일러는 최대한 피하면서.


 도대체 '트라이던트'는 무슨 이야기인가?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아담스베르그는 사무실에 있다. 사무실에서 그는 벌벌 떨고 있다. 보일러가 고장났기 때문이다. 그는 곧 가게 될 캐나다 연수를 걱정한다. 그것은 당글라르도 마찬가지다. 그는 비행기 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장 편하게 있던 공간이 결코 편하지 않다. 그는 점점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 도입부는 독자에게 이것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사실 그것이 바르가스의 목적이기도 하다. '트라이던트'는 2004년에 나왔다. 그것은 2001년 9.11 사태가 벌어진 뒤, 바로 다음에 나온 작품이었다. 9.11이 일어난 뒤 부시는 이라크를 상대로 확인되지도 않은 생화학 무기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다. 부시는 세계 여론을 등에 업고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UN 차원의 참전을 원했으나 안보리에서 부결되었다. 그 안보리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나라가 프랑스였다. 프랑스 입장에 대한 찬반양론이 세계적으로 일어났다. 한 나라의 안전 확보를 빌미로 타자의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는 전쟁은 정당한 것인가? 무고한 타자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프랑스는 반대했다. '트라이던트'도 그 입장에 선다. 아담스베르그는 소설이 진행될수록 타자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타인의 관할지로, 경찰에서 군인의 영역으로, 자신의 나라에서 캐나다로. 공간만이 아니다. 시간도 그렇다. 현재라는 시간에서 자신의 동생이 얽힌 과거의 시간으로 섞여든다. 시간만도 아니다. 신분도 옮겨간다. 범죄자를 체포하는 경찰에서 범죄자의 신분으로. 그렇게 아담스베르그는 타자의 영역에서 타자가 된다. 그것도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는 '프레카리아트'로.


 프레카리아트. 이것은 사회적 약자다. 불안속에 끊임없이 동요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정의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불안정한(precarious)' 상태의 일차적 의미는 "다른 사람의 호의나 의향에 의해 지탱되는, 따라서 불확실한" 것이다. 불안정'이라는 이름의 불확실은 행동할 수 있는 힘의 이미 운명 지워지고 이미 결정된 비대칭을 시사한다. 그들은 할 수 있다. 우리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삶을 이어가는 것은 그들의 은혜 덕분이다'(도덕적 불감증, p.118)


 아담스베르그가 프레카리아트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비대칭이 소설에도 있기 때문이다. 범인 '세발작살'과 아담스베르그 사이엔 사실 엄청난 기울기의 비대칭이 존재한다. '세발작살'은 고명한 판사 출신의 인물로 프랑스 사법체계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그가 연쇄살인을 저지르고도 30년 넘게 완벽에 가깝도록 범죄를 감출 수 있었던 것은 그 권력 덕분이었다. 그가 누명 씌웠던 인물들이 모두 손쉽게 진범이 되어 형기를 살았던 것도 권력 때문이었다, 즉 '세발작살'은 자신이 누명 씌웠던 인물들의 운명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이 쓴 흉기의 소유자이기도 한 신 넵튠과 같은 신분이다. 그런 신 앞에서 누명을 쓴 인물들은 신에게 버려져 오로지 신의 자비에만 의존해야 하는 프레카리아트고 같은 운명에 처한 아담스베르그 역시도 마찬가지다.


 '트라이던트'는 바로 이런 프레카리아트의 존재를 보여주고 그들의 대변자가 된 아담스베르그를 통해 비대칭을 전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립은 당시 초유의 관심사였던 미국과 이라크의 관계이기도 하다. 미국의 무력 앞에 이라크는 프레카리아트였고 그런 이라크 앞에서 미국은 그야말로 넵튠이었다. 미국의 침공도 이라크에게 누명을 씌워 감행되었다. '세발작살'의 누명은 바로 이러한 미국의 조작과 허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넵튠이 살인마라는 것은 그대로 미국에 대한 비판이며 동시에 프레카리아트라는 타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커녕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유린하는, 미국에 동조하는 자들에 대한 비난인 셈이다. 그리고 비대칭의 전복은 결코 그들이 이기지 못한다는 것의 예언이기도 하다.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이렇게 '트라이던트'는 당대의 가장 뜨거운 이슈에 대해 윤리적 입장을 진하게 우러낸 작품이었다.


 이런 지점이 '갑툭튀'가 아니라 이야기와 절묘하게 조합되어 드러난다는 점에서 나는 더욱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한다. 이야기의 재미, 캐릭터 묘사 그리고 내용의 깊이가 완벽에 가까운 삼위일체(trinity)를 이룬다. 아직도 이 정도의 높은 순도를 보여주는 작품은 못 만났다. 그렇기에 주저없이 아담스베르그 시리즈 최고작으로 꼽는다. 프레드 바르가스는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실망한 적이 없기에 모르신다면 기꺼이 권해드리고 싶다. 그런 분들에게 '트라이던트'는 최적의 선택이 될 것이다. 물론 시작을 이렇게 최고작으로 하는 것은 다음을 생각하면 별로 좋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작가의 매력을 알리기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작품이기에 어쩔 수 없다. 감히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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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6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7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처럼 붉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1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누구나 안다. 삶은 동화가 아니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았던 여름. 하지만 어느새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문득 우리는 언젠가 깨닫는다. 정말 곤혹스럽게도 외투도 없이 겨울의 추위 속에 벌벌 떨며 서 있구나 하는 것을. 겨울이 예고도 없이 찾아오듯이 삶도 예측불가능하다. 그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지금은 그게 오히려 우리의 기회인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살라 시무카의 ‘피처럼 붉다’를 읽은 것이다.


 작가의 이름이 생소하다. 당연하다. 지금 막 우리에게 소개된 작가니까. 오래도록 서평 활동을 하다가 ‘피처럼 붉다’로 데뷔했다고 한다. 나도 서평이라는 것을 끄적이고 있어서 그런가 작가가 왠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급이야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제목에서 이미 눈치챘을 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은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피처럼 붉다’는 동화 ‘백설공주’의 앞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왕비가 창가에서 바느질을 하다가 그만 바늘에 손가락이 찔려 핏방울이 하얀 눈 위로 떨어진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진 여왕의 붉은 핏방울을 묘사한 그림. 이는 나중에 얘기할 안젤라 바렛의 그림책, 가장 처음에 나오는 그림이다.]


 그녀는 그것이 너무나 아름다워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길 바란다. 그것이 백설공주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백설공주와 그리 관련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굳이 제목에서 또 첫 부분에서, 이 소설이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걸 드러낸 것일까?


 내 취미 중 하나는 원서 그림책을 모으는 것이다. 지금까지 백설공주는 유명한만큼 많은 작가들이 자신만의 비전으로 그림책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영국 작가 안젤라 바렛의 것을 참 좋아한다. 살라 시무카의 ‘피처럼 붉다’를 읽으면서 틈틈이 바렛이 백설공주를 꺼내 읽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주인공 루미키가 바렛이 묘사했던 백설공주의 면모를 많이 지니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안젤라 바렛의 백설공주 일러스트를 배경으로 '피처럼 붉다'를 찍어 보았다. 백설공주가 여왕의 계략에 의해 왕궁에서 쫓겨난 장면으로, 바렛은 백설공주에게 참으로 가련한 상황이 아닐 수 없는 이 장면을 질주하는 모습으로 그려, 해방과 자유의 분위기를 더 강조했다. 하얀 옷에다 숲의 동물들까지 같이 움직이게 하여 대지의 여신으로서의 모성 이미지를 더 강조해 보인다. 이는 백설공주가 장차 일곱 난장이에 대해 맡게 될 역할에 비추어볼 때, 가짜 모성인 여왕에 대비하여 진짜 모성으로서의 여인 이미지를 투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피처럼 붉다'의 백설공주 루미키도 이와 연장선 상에 있다.]



 바렛의 백설공주가 독특한 것은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남성 사회에서 독립된 여성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냈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특히 백설공주의 아름다움을 시기하는 여왕과 백설공주를 묘사하는 것의 차이에서 두드러져 나타는데 바렛은 여왕과 백설공주를 문명과 자연 혹은 전원의 이미지로 서로 대비시킨다. 즉 여왕은 주로 폐쇄된 문명 공간 안에 갇혀 음모를 꾸미고 백설공주는 사방이 탁 트여있거나 열려 있는 공간에서 자유를 누리고 타인과 공존하는 것이다. 이는 그 문명이 왕이라는 남성에 의해 뒷받침 되는 질서라는 점에서 여왕이 가부장적 질서에 포획된 존재임을 나타내고 백설공주는 그 문명에서 탈주함으로써 독립된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하여 여왕이 백설공주를 죽이려는 이유가 아름다움의 시기가 아닌 전혀 다른 것으로 되는데 그것은 바로 백설공주만이 누리고 있는 독립된 자아에 대한 질투가 되는 것이다. 바렛의 백설공주는 그런 주제의 그림책이었다.



 [여왕은 이렇게 문명의 공간에 있지만 항상 갇힌 존재로 그려진다. 이런 식으로 여왕에겐 왕이라는 남성 중심 질서에 포획되어버린 여성의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다. 위의 백설공주의 그림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살라 시무카의 루미키도 그렇다. 즉, 여기서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한 것은 바렛과 똑같이 남성 사회로부터 독립된 여성상을 그리려 한 것이란 말이다. 루미키는 정말 그러하다. 그는 여러 면에서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의 모습과 다르다. 그는 남성들이 부여한 여성성에 초연하며 오로지 자신만의 삶의 원칙을 세우고 거기에만 맞춰 살아간다. 그녀는 가급적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며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웅크리려 했었다. 하지만 백설공주가 그랬듯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 일에 휘말리게 된다. 그것도 범죄에. 우연히 들른 학교의 암실에서 천장에 매달려 있는 무수한 지폐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도 사람 피로 범벅이 된 지폐들을...


 루미키는 처음엔 학교 당국에 고발하려 했지만 일단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그 일을 벌인 장본인을 찾기로 한다. 그러다 동급생인 투카, 엘리사, 카스페르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고 보니 그 돈은 형사인 엘리사의 아버지에게 조폭들이 보낸 돈이었다. 엘리사의 아버지, 테르호 베이새넨은 조폭을 위해 일하는 나탈리아라는 러시아 여자와 몰래 정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만 그녀가 지금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삶을 새로이 시작할 생각으로 조폭들이 베이새넨에게 보낸 돈을 가로챘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소설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것처럼 조폭의 총에 죽고 조폭들은 베이새넨도 거기에 가담했을 것이라 보고 협박조로 형사의 집 앞에 그 돈을 갖다 놓았다. 바로 그것을 우연히 집에 들른 엘리사와 친구들이 술김에 가져와 암실에 숨겨두었던 것이다. 돈이 사라지자 조폭과 베이새넨은 서로를 의심하고 갈등이 고조된다. 그러다 조폭은 형사에게 보다 강하게 협박하기 위해 그의 딸 엘리사를 납치하려 한다. 하지만 그 때 조폭은 그만 돈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엘리사의 옷을 빌려 입고서 위장 중이던 루미키를 엘리사로 오인하고는 납치하다 실패한다. 이로써 루미키는 그 돈이 아주 위험한 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엘리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일의 결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한편 조폭은 이 일에 제3자가 연루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제 루미키 일행을 표적으로 삼는다. 바야흐로 루미키가 조폭과 정면 대결할 순간이 무르익어 가는 것이다.


 ‘피처럼 붉다’는 이런 이야기다. 백설공주를 근간으로 한 이 이야기는 백설공주만이 아니라 빨간 두건과 신데렐라 이야기도 재치있게 엮어가면서 폭력으로 점철된 남성들에 대한 독립된 여성의 분투를 그린다. 동화 백설공주에서 분투는 아버지가 중심인 세계와 결별하고 자신만의 세상을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로 일곱 난장이와 함께였다. 그것은 아버지처럼 군림을 통한 누림이 아닌(바렛의 동화는 왕인 아버지를 늘 협소한 공간에 홀로 있는 것으로 묘사하여 그 질서가 오로지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바렛은 백설공주가 고난을 당하는 진짜 원인이 사랑하는 왕비를 잃은 자기 아픔 밖에는 모르는 아버지에게 있음도 내비친다.) 대등한 관계에서의 책임으로 이뤄진 세계였다.


 [백설공주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장면. 보는 방향에서 왼쪽의 작은 창에 갇힌 듯 보이는 남자가 바로 백설공주의 아버지 왕이다. 왕비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는 왕은 백설공주를 전혀 돌보지 않았고 결국 백설공주의 고난을 초래하고 말았다. 자기 본위의 남성 세계와 타자 지향 여성 세계를 극명하게 대비해서 보여주는 시퀀스다.]


 [알고보면 바렛은 처음부터 백설공주의 이런 면모를 강조했다. 인용한 그림은 여왕이 자기가 떨어뜨린 핏방울을 보고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백설공주가 태어나길 바라는 장면. 바렛은 벽을 세워 문명과 자연의 경계를 나누고 여왕이 그 벽을 건너 핏방울을 보는 것으로 묘사해 백설공주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독립된 여성으로서의 존재할 것임을, 이렇게 처음부터 암시하고 있다.]


 루미키도 그렇다.  엘리사, 투카, 카스페르가 일곱 난장이인 것이다. 루미키가 본격적으로 북극곰 조직과 얽혀들게 된 것도 다 엘리사를 보호하고 싶다는, 그렇게 엘리사에 대한 책임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루미키는 바렛의 백설공주와 궤를 같이 하면서 독립된 여성의 진정한 완성은 책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밀레니엄 시리즈의 히로인 리스벳 살란데르와 많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리스벳 살란데르 십대 버전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거침없이 남성들에게 한 방을 선사하는 그녀를 보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 타협은 없다. 굴종하여 배신당하느냐 아니면 맞서 싸워 자신의 독립을 지키느냐, 그 뿐이다.


 이야기 자체는 꽤나 재미있다. 무엇보다 문장이 냉소적이면서도 감각적이다. 군더더기 없이 여성의 심리를 논파하고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갈무리 한다. 마무리가 다소 허술한 감이 없진 않지만 원래가 삼부작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뒷맛은 꽤나 깔끔한 편이다. 시간을 들여 읽을만한 작품이다. 내겐 특히나 루미키가 매력적인 캐릭터라 더욱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면으로 치고 나온 북극곰에 맞서 루미키가 어떤 활약을 펼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2부인 ‘눈처럼 희다’가 어서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혹시나 인용한 백설공주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실 지도 몰라서...

  가지고 있는 것은 91년의 초판이다. 물론 영어판은 발간 5년만에 절판되어 할 수 없이 프랑스 판으로 구했다. 그래서 가격이 ㅠ ㅠ 십 수년 전에 웬디북이란 곳에서 구입했는데 그 때만 해도 개인셀러로 발송 주소가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되어 있었다. 지금은 어엿한 회사가 되어 파주에 있다. 한 마디로 격세지감. '백설공주'는 현재 표지 갈이를 하여 다시 발간되었는데 여왕이 백설공주에게 빗을 꽂는 그림이 표지가 되었다. 초판본 표지와 비교하면 좀 안습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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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1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31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 스토리콜렉터 3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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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엔 세월호가 있었고 올해는 메르스가 있다.

 우리는 강한 기시감을 느낀다. 수수방관이나 다를 바없는 무력한 대처도 모자라서 비밀주의로 일관하는 정부, 컨트롤 타워의 부재, 언론 통제에다 진실을 알려는 국민의 욕구마저 다짜고짜 유언비어 엄단이라며 협박부터 하고 보는 모양새까지 마치 좀 더 광범위하게 세월호 참사가 또 한 번 반복되는 것 같다.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든다. 메르스는 형벌이라고. 세월호 참사를 분명한 책임 규명과 엄중한 심판으로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들에 대한 신의 독화살이라고.


 세월호 참사를 우리는 일부만이 겪은, 그렇게 그들만의 아픔이라 여겼다. 하여 신은 그들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만들었다. 남의 일이기에 강건너 불구경했고 그랬기에 교통사고라며, 유족은 보상만 바라고 인양은 세금 낭비라는 망언도 서슴없이 했다. 하여 신은 우리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았고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말해야 할 것에 침묵했다. 누군가 비를 맞고 있을 때, 그 비 역시 언젠가 우리들이 맞을 수도 있을 폭우였기에 곁에 서서 함께 견디고 더불어 이겨나가야 했지만 우리 모두는 자기만 피할 수 있는 우산을 찾기 바빴다. 하여 신은 서로를 불안하게 보도록 만들고 아예 홀로 격리시켜 버렸다.


 메르스는 신의 집게 손가락이다. 그것은 똑바로 우리를 항하면서 다그치듯 책임을 묻고 있다. 어찌하여 외면했냐고,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왜 서둘러 잊어 버렸느냐고. 메르스는 우연한 재난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그랬듯이. 그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우리의 방관과 망각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자주 보지 않았던가?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자들에게 역사는 언제나 가혹하게 복수해 왔다는 것을. 모든 위정자들은 과거의 아픔일랑 서둘러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라고 잘도 말한다. 하지만 과거를 제대로 결착 짓지 못하면 미래도 없다. 그런 미래란 그저 다이너마이트의 심지에 불과하다. 저 끝에서는 과거에 행한 무책임한 망각이 계속 불꽃처럼 타 들어와 결국은 폭발시키고 마는 것이다. 지금의 메르스처럼. 그러니까 세월호를 강 건너 불구경 했던 우리에게 남아있던 미래란 심지는 고작 1년 뿐이었다. 진정한 미래는 심지를 끊을 때 보존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단절은 오로지 분명한 원인 규명과 엄중한 심판 그리고 통렬한 자성만이 가져올 수 있다.


 이제 한 권의 소설을 이야기하려 한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란 소설로 이제는 제법 우리에게도 익숙할 이름인 넬레 노이하우스의 '산 자와 죽은 자'라는 작품이다. 당신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읽을 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에게 이 소설은 정확히 지금 우리들 모습의 반영이었다. 소설은 복수극이다. 바로 그 복수를 당하는 대상에서 나는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복수자에겐 리스트가 있다. 오래된 과거에 한 여인에게 죽음을 선사한 자들의 리스트다. 그런데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의 죄책은 동일하지 않다. 이기적인 욕망으로 주도한 자들도 있고 단순히 조력한 자들도 있다.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협력한 자들도 있다. 하지만 복수자의 총탄은 동일하게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의 머리나 심장을 뚫는다. 죄질은 달랐으나 형벌은 동일하다. 얼른 떠오르는 말이 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복수자였던 이우진(유지태가 연기했던)의 말이다. "조약돌이나 바윗돌이나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인간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적극적으로 저지른 자와 그저 지켜보기만 한 자의 죄책이 같을 수 있느냐고 묻고 싶다. 맞다. 우리 형법은 분명히 '정범'과 '방조범'으로 구별하고 있다. 하지만 복수는 그렇지 않다. 복수자의 눈엔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다 '그 놈'이다. 중요한 잘못을 했든, 사소한 실수를 했든 그들 모두가 한 데 어우러져 대체 불가능의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장본인인 것이다. 복수자의 눈에 개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모두가 똑같은 일원인 집단이 있을 뿐이다. 시선이 다르다. 법정이라는 제3자가 아니라 당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방은진 감독의 영화 '오로라 공주'도 그러지 않았던가? 엄마인 주인공은 딸의 죽음을 초래한 이들 모두에게 행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죽음으로 복수하지 않았던가. 이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역사야 말로 우리의 방관과 망각에 대한 가장 가혹한 복수자라는 것을.


 "그들이 무관심이나 욕심 때문에 야기한 고통을 그들도 직접 겪게 하려는 거죠."('산 자와 죽은 자. p. 410)


 복수자인 역사는 단죄한다. "너희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는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우리는 문득 상기할 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가 당사자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이 시대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든 현실이라는 것을. 당사자인 우리에게 역사의 복수를 피할 구실 따윈 없다. 우리 모두가 한데 어울려 역사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므로. 그래도 우리는 변호하고 싶다. "나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침묵했을 뿐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닌 것 같다. 밥벌이의 힘겨움 앞에서 좀 더 제대로 된 현실을 만들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하는 것은 모두 다 쓸데없는 오지랖으로도 보인다. 나무가 잘 자라려면 가지치기가 필수이듯이 이 각박하고 피말리는 세상에서 생존하려면 적당한 무관심과 망각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그런데 역사는 바로 그런 우리의 생각을 비난한다. 그런 항변이, 변호가 역사를 망친 진정한 장본인이라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우리의 본심을 보기 때문이다. 무관심과 방관 그리고 침묵과 망각. 그 모든 것의 근저에 있는 것은 주도적으로 역사를 망친 장본인들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기에 그렇다. 어쨌든 모두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자기 본위적 욕망의 발로가 아닌가! 드러난 외형은 각자마다 다를지라도 뿌리는 같으니 역사에겐 모두가 똑같은 가해자인 것이다.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조약돌이나 바윗돌이나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다!"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다. 개체는 다를 지언정 가라앉는 본성은 똑같듯이 아무리 오대수처럼 그저 자신이 본 것을 친구에게 말한 것 뿐이라 해도 자신과 누나를 괴롭힌 자와 본성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는 정의의 여신 디케처럼 눈을 가리고 있다. 그는 우리 개인의 행위를 보지 않고 그것을 낳은 본심을 본다. 그리고 그 본심에 있어서라면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다. 


 사실 레나테 롤레더, 파트릭 슈바르처, 베티나 카스파 헤세가 한 일은 중벌에 처해질 죄는 아니다. 이미 기억에서 지워지고 마음속에서 정리된 사소한 실수, 인간적인 실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소한 실수가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를 남겼고, 긴 시간이 지난 후 무시무시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p.473)


 메르스는 그런 우리에 대한 단죄이다. 소설처럼 세월호 참사를 남의 일이라며 무심히 정리하고 기억에서 지워버렸기에 날아온 총알인 것이다. 하여 우리는 소설 속 리스트의 인물들과 똑같이 치사율 40%라는 죽음을 앞에 두고 있다. 우리의 무심과 망각에 대한 대가를 이토록 뼈저리게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 자와 죽은 자'는 타우누스라는 가상의 마을 이야기라고만 할 수 없다. 사실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산 자와 죽은 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간단하다. 남의 비극을 사소하게 생각하지 말 것을. 아무리 오래된 과거의 아픔이라 하더라도 결코 잊지 말고 모든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관심을 갖고 기억할 것을 원한다. 소설에서 어머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버지의 진실을 찾아내려고 홀로 분투했던 여인 카롤리네 알브레히트처럼. 주인공 형사인 보덴슈타인과 피아 보다 바로 그 여인의 여정이 소설이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보여주기 위하여 넬레 노이하우스는 가족을 가져왔다. 시간적 배경도 크리스마스와 설날 전후로 가장 가족적인 분위기로 넘치는 때로 정했다. 가족에 유념해서 보다 보면 여주인공 피아의 결혼이 소설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 초반에서 피아는 신혼 여행을 앞두고 있다. 피아는 신혼 여행을 다녀온 뒤 동거 중인 크리스토퍼와 정식으로 결혼할 작정이다. 하지만 저격 살인이 일어나자 그녀는 도저히 사건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신혼 여행을 미룬다. 크리스토퍼는 홀로 외국으로 떠나고 피아는 독일에 혼자 남아 수사를 계속한다. 결국 크리스토퍼와 피아가 완전한 가족을 이루는 때는 사건이 해결된 다음이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일부러 에필로그까지 써가며 독자들에게 그들이 행복하게 결혼했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우리는 꼭 가족의 결합이 사건 때문에 저지당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도 가장 가족적인 분위기의 크리스마스와 설날 전후 내내 말이다. 이것은 마치 사건으로 인해 가족의 성립이 더 이상 불가능해 진 것처럼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범인은 이런 독백까지 한다.


 집에서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이들은 만화영화를 보며 즐거워했다. 그림 같은 풍경이다. 새 집을 얻은 행복한 가정. 그러나 이 밤이 지나면 가정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p. 453)


 궁금해진다. 작가는 왜 이런 설정을 한 것일까? 왜 구태여 가족을 소설의 중심으로 가져왔으며 사건과 가족의 불가능성을 연결짓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가족은 가장 개인적인 영역이다.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심함과 과거 잘못에 대한 망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 개인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 우리가 사회가 저지른 타인의 아픔을 방관하고 그 잘못을 무심히 쉽게 잊는 것은 대부분 우리 자신의 삶과 그다지 관계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 자신의 영역과 타인의 영역을 쉽게 나누고 담을 높이듯 그 경계가 확고하리라는 생각에 어디까지나 타인이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쉽게 치부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넬레 노이하우스는 묻는다. 하여 그녀는 우리가 세월호 참사에 대해 행했던 것처럼 그러한 타인의 비극과 사회의 잘못에 대한 무심과 망각이 만연된 상황에서는 그 어떤 사적 영역의 형성도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런 이유로 넬레 노이하우스는 용의주도하게도 범죄의 모습을 하필이면 '저격'으로 가져온 것이다. 날아가는 총알은 그 어떤 경계도 넘나들기에. 또한 피해자들은 가장 사적인 상황에서 살해당하지 않았던가.


 결국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는 것과 같이 그 어떤 개인도 사회가 초래한 타인의 비극, 사회의 실패와 과오로 부터 벗어날 수 없다. 조약돌이든 바윗돌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복수자인 역사에게도 몸통이든 깃털이든 다 똑같이 보이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사회의 가장 작은 자의 아픔이라 할 지라도 내 일처럼 관심을 갖고 귀기울이며 그들이 당한 일과 이유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세월호와 메르스처럼 무심과 망각은 언제나 반복된 비극을 낳기 때문이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 2차 대전의 과오와 만행을 어느새 잊고 날로 우익화 되어가는 독일 국민만큼이나 비슷한 착각과 오해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경고가 되어 줄 듯 하다. 타인을 아프게 하고 영혼마저 이기심으로 굳어버린 돌이 되지 않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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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파크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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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의 마천루 아래를 걷다가 스트로베리 필즈를 지나 센트럴 파크 깊숙이 들어가다보면 갈수록 점점 더 별천지에 온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내내 오감을 괴롭히던 회색빛 도시의 소음과 번잡함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문자 그대로 여유와 평온을 머금은 것 같은 초록빛 자연을 흠뻑 느끼는 까닭이다. 그 때의 기분은 뭐랄까,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 '뉴욕 뉴욕'에서 다음과 같은 가사랑 비슷하다.


These little town blues are melting away.

I'm gonna make a brand new start of it,

in old New York, and...

센트럴 파크의 모습


 너무나 다른 분위기라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지도 모른다. 요술문을 통해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은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니까. 문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는 삶이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자주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말로 묘사하기도 한다. 상상할 수 없었던 아주 뜻밗의 것을 만나는 것은 문을 열자 완전히 낯선 세계가 펼쳐지는 것과도 같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처음 오즈의 나라에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콘크리트 밀림에 대조적인 초록빛 가득한 센트럴 파크의 생경한 풍경은 실로 현실로 도래한 '오즈의 나라' 같다. 어쩌면 뉴욕 태생인 프랭크 바움은 정말로 센트럴 파크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오즈의 마법사'를 썼는 지도 모른다. 센트럴 파크는 바움이 태어난 바로 다음 해(1857)에 개장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마치 도로시의 후예이기라도 하듯, '센트럴 파크'에서 진실로 살면서 가장 낯선 경험을 하게 된 이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기욤 뮈소의 소설 '센트럴 파크'의 주인공 알리스이다. 그녀는 아침 햇살이 처음으로 뉴욕을 비칠 무렵 센트럴 파크에서 깨어난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거기가 어딘지 모른다. 기억하는 것은 어젯밤 친구들과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는 것 뿐. 집으로 돌아간 기억은 없다. 깨어나 보니 여기인 것이다. 그런데 위화감은 그것만이 아니다. 길바닥에서 일어난 것도 모자라서 한 팔엔 수갑까지 차고 있다. 더구나 그 수갑의 다른 한 쪽을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차고 있다. 이 수갑은 그녀의 것이다. 그녀는 사실 프랑스 경찰이고 강력반 형사다. 당황하며 일어나 살펴보니 놀랍게도 자신의 옷에 누군가 다른 사람의 혈흔이 잔뜩 묻어있다. 수갑 열쇠를 찾으려 호주머니를 뒤졌으나 그것도 없다. 설상가상. 도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그러나 더욱 경악할만한 사실이 하나 더 남았으니, 자신의 권총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남의 권총이 자기의 품 속에 들어와 있는 것. 더구나 그 권총엔 총알 하나가 사용된 흔적이 분명했는데...


 남자도 난다. 남자의 이름은 가브리엘. 그도 어쩌다 지금과 같은 꼴이 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더구나 그는 이 곳이 아일랜드라 여긴다. 그녀는 가브리엘에게 멍청하다면서 여기는 프랑스라고 말한다. 남자는 알리스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여기는 절대 프랑스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옥신각신. 하지만 수갑을 풀기 위해 도움 줄 사람을 찾아 나섰을 때 그들이 보게 된 것은 보우 브릿지. 센트럴 파크의 명물이라는 바로 그 다리.


보우 브릿지


 "그.. 그렇다면 여기는 뉴욕? 도대체 어떻게?"

 대뇌의 전두엽까지 미치는 충격의 전율 속에서 그들은 아연실색할 뿐. 그도 그럴 것이 하룻밤 사이에 하나는 프랑스에서 다른 하나는 아일랜드에서 뉴욕까지 와서는 그것도 센트럴 파크에서 수갑을 각각 한 쪽씩 차고 깨어난 것도 모자라 지갑도 없고 신분증도 없으며 옷에는 다른 사람의 혈흔이 묻어 있고 한 발을 쏜 남의 권총까지 소지하고 있으니. 하지만 이조차 겨우 예고편에 불과하다. 더욱 놀랄만한 일들이 그들의 뒤통수를 정조준하며 언제 한 방을 먹일지 잔뜩 벼르고 있으니까.


 기욤 뮈소가 오랜만에 선보이는 스릴러 '센트럴 파크'는 양파 껍질을 까듯 거듭된 반전을 좋아하는 이라면 환영할만한 작품이다.



 전혀 낯선 곳에서 기억을 부분 상실한 채 깨어난다는 설정 자체야 영화만 해도 '큐브'와 '쏘우'가 있고 같은 스릴러 소설에서도 '본 아이덴티티'가 있을만큼 참신한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을 흥미롭게 끌어나가고 독자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곳에서 뜻밗의 반전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좋기에 꽤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독자에 따라서는 마지막 반전을 심드렁하게 평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마도 그동안 기욤 뮈소의 소설을 즐겨 읽은 이라면 그다운 결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한편, 이 소설은 데니스 루헤인이 쓴 어떤 작품의 반전과 꽤나 유사하다.(제목을 밝히지 않겠다. 밝히는 것 자체가 이 책에 대한 스포일러가 되므로) 데니스 루헤인의 비난(어쩌면 소송까지)은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그건 그렇고 '알리스'라는 여주인공 이름 말인데 아무래도 배경이 '센트럴 파크'이다 보니 이 이름에서 바로 연상되는 것이 있다. 바로 센트럴 파크 동쪽 끝에 있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동상이다.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해보면 대략 이 동상의 크기를 짐작하실듯...

 꽤나 유명한 동상으로 아이들이 센트럴 파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상이기도 하다고 한다. 아마도 여주인공의 이름은 바로 이 동상의 주인공 엘리스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에서 그녀가 처한 상황은 상상도 못했던 낯선 상황에 빠져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그대로이니까 말이다. 더구나 소설에서 알리스는 센트럴 파크의 서쪽에 있는'램블'에서 깨어나는데 그것은 그대로 엘리스 동상이 있는 장소인 동쪽의 프랑스 여자가 서쪽의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깨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설을 읽어보면 기욤 뮈소가 센트럴 파크를 꽤나 열심히 답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어쩌면 그러다 이 동상이 마음에 든 그가 그대로 소설의 인물로 형상화 하자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남자의 이름이 가브리엘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성경에서 마리아에게 예수의 수태 고지를 한 천사로 유명한 가브리엘은 흔히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기욤 뮈소가 바로 그 천사의 이미지를 독자에게 연상시키고자 그 이름을 남자에게 부여한 것임을 무엇보다 마지막 반전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기욤 뮈소는 하필이면 왜 가브리엘 천사를 가져와야 했을까? 여기서 눈치 빠른 당신은 어쩌면 이 소설의 진짜 목적을 알아차릴 지도 모르겠다. 분명 이 소설은 스릴러이지만 실은 치유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소설의 여정은 지금 그들에게 닥친 낯선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그럴수록 밝혀지는 것은 지금의 사건이 과거의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 그녀는 프랑스에서 유명한 연쇄 살인을 단독으로 수사한 적이 있다. 임신으로 휴직한 상태였지만 언제나 아버지처럼 영웅적인 경찰이 되고 싶었던 그녀는 임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추적을 감행하여 결국 범인을 밝혀낸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오히려 범인에게 공격당해 태중의 아이가 죽고 그것에 충격받은 사랑하는 남편마저 불귀의 객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녀는 한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가족도, 같은 경찰들의 인망도. 그것도 영웅이 되고 싶었던 자신의 열망 때문에.


 나는 기억한다.

 2011년 11월 21일에 자만심과 허영심에 사로잡힌 나는 지나친 만용을 부리다가 내 아기와 남편을 죽게 한다. (p. 154)


  그녀의 고백 그대로다. 그런데 그녀와 함께 있는 가브리엘 역시 같은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너무 자신에게만 골몰하느라 가족과 생이별한 처지였던 것이다. 그렇게 둘은 닮았고, 닮은 그들이 지금 함께 역경을 헤쳐 나가고 있는 것이다. 뉴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그들의 여정은 그리하여 두 개의 매듭을 푸는 것과 같다. 하나는 지금 처한 현실의 매듭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기심이 빚어낸, 그리고 이제는 치유 불가능한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과거의 매듭이다.


 푸는 과정은 속도감 빠른 전개와 거듭된 반전으로 재미나게 읽히지만 기욤 뮈소는 그러다가도 문득 주인공의 과거 기억과 심리를 투명하게 건져내어 적절하게 던져줌으로써 비트가 빠른 댄스 음악을 한창 듣다가 불현듯 차분한 명상 음악을 듣게 되는 것과 같은 순간을 마련한다. 마치 어쩌면 언젠가의 나였을 지도 모르는 그들의 실수와 상처의 결들을 읽으면서 문득 페이지를 넘기려는 손을 멈추고 나는 어땠는가 헤아려 보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 빠지는 허영, 자만이란 어느 누구도 걸려들 수 있는 것이기에....


 소설은 정말로 이런 순간을 마련한다.


 우리의 생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당신이 지닌 모순, 두려움, 회한, 분노, 머릿속에 들어 있는 복잡한 생각을 그대로 인정하고 품어 안아주는 당신의 반쪽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p. 87)


 기욤 뮈소는 분명 자신의 소설이 그런 반쪽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랬기에 '센트럴 파크'를 굳이 제목으로 썼던 것이 아닐까 싶다. 진실로 정신없는 뉴욕을 걷다가 센트럴 파크에 들어서면 그동안 겪은 모순, 두려움, 회한, 분노,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이 한 순간 씻겨 나가는 느낌을 받게 되니까 말이다. 센트럴 파크는 그런 문의 공간이자 어찌 보면 뉴욕이 가진 구원의 땅이다. 뉴욕인들도 그것을 잘 알았기에 150년 이상이나 열심히 보존했던 것이리라. 제목인 '센트럴 파크'도 이 소설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기욤 뮈소의 바람이 투영되어 있다. 알리스가 그랬듯이 아무리 어둡고 고통에 찬 인생이라 하더라도 어딘가에는 꼭 '센트럴 파크'와 같은 곳이 있다는 믿음을 이 소설을 통해 주고 싶은 것이다. 비록 잘 보이지도 않고 찾기도 어려워서 자주 우리는 낙담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 소설이라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굳게 닫힌 절망의 문을 여는 희망의 바람이 되었으면 하는 뮈소의 소망이 담긴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의 주인공 독백은 차라리 기욤 뮈소의 간구 같기도 하다. 그 간구의 마음은 '아마도'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우리들에게 삶은 언제나  예측불가능으로 넘치는 '아마도'일 것이다. 너무나 세상의 고통과 불안에 지친 우리들은 그 예측불가능성을 오로지 절망의 무게로 여긴다. 하지만 기욤 뮈소는 너무 그렇게 보지 말고 오히려 잠재된 희망의 가능성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소설 마지막에서 많이 반복되는 '아마도'는(그 뒤에 따르는 내용과 결부지어 보면) 분명 그런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사르트르는 '작품이란 작가의 기도다'라고 말했다. 그대로 이 소설도 언젠가는 꼭 삶의 '센트럴 파크'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기욤 뮈소의 기도라고 생각된다. 이런 진심을 재미까지 놓치지 않으면서 그려내고 있기에 소설이 더욱 마음에 든다. 문득 궁금하다. 당신은 이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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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2-27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파 껍질을 까듯 거듭된 반전, 이런거 저는 완전 좋아합니다. ^^
기욤 뮈소는 이상하게 손이 안 가는 작가였는데, 헤르메스님 소개의 마력에 다시 빠져드네요. 에궁, 책임지세요.

ICE-9 2015-03-11 00:06   좋아요 0 | URL
반전은 진짜 많이 나오는데 결말 때문에 점수를 다 까먹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마녀고양이님도 분명 데니스 루헤인의 그 소설을 읽었을 것 같아서 말이죠. 물론 책임은 지겠습니다.
언제든 말씀 하세요. AS는 확실히 하겠습니다^ ^
 
이름 없는 자 - 속삭이는 자 두 번째 이야기 속삭이는 자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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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나토 카리시가 돌아왔다. 그것도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많이 팔렸다는 소설 '속삭이는 자'의 속편으로. 어떤 이들에겐 단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을 벗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내가 그렇다. '속삭이는 자'는 그 해 읽었던 미스터리 작품들 중에 최상의 만족감을 주었던 작품 중 하나였다. 그 속편이 나왔다는데 어찌 읽어보지 않을 수 있으랴. '이름없는 자'는 과연 도나토 카리시 작품답게 설정이 참으로 흥미롭다.



 시작부터 한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희생자들은 토마스 벨런이라는 제약 회사 사장의 일가족. 유일하게 생존한 막내 아들의 신고로 출동하게 된 경찰들은 토마스 벨런과 아내 그리고 그들의 아들과 딸이 각각 자신의 방에서 총에 맞아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토마스 벨런은 가장 마지막에 살해 되었는데 그건 범인이 그의 눈 앞에서 가족들 모두가 처형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전편의 주인공이었던 밀라는 여전히 실종사건 전담반인 '림보'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가 토마스 벨런 일가족 처형 사건 현장으로 호출된다. 살인사건인데 왜 실종사건 전담인 그녀를 부르는 것일까? 이유는 곧 밝혀진다. 알고보니 막내 아들의 신고 전화는 범인에 의한 것이었다. 범인은 막내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까지 가르쳐주고 떠났다. 이름은 로저 벨린범인의 정체는 이미 밝혀진 것이다. 밀라는 그 이름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림보'의 벽에 붙은 아직 찾지 못한 실종자 명단에서 늘 보아왔던 이름이었더 것이다. 그는 무려 17년 동안이나 실종자 상태였다. 말리는 바로 그 때문에 호출된 것이었다. 실종 이전에 로저 벨린은 병든 어머니를 혼자서 정성껏 보살핀 착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17년만에 느닷없이 나타나 일가족을 처형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또 한 명의 로저 벨린처럼 실종되었던 인물이 갑자기 출현해 한 남자를 처참히 살해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장기간 실종자로 분류되어 있다가 홀연히 나타나' 누군가를 살해하는 일이 잇달아 벌어진다. 거기엔 예전 '림보'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 형사도 있다. '도대체 이들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어디에 있었으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일들을 벌이는 것일까?' 밀라는 이런 의문 속에 수사에 나선다. 수사 도중 밀라는 이 사건의 배후에 20년 전에 일어났던 미궁 속에 빠져 버린 한 사건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른바 '불면증 환자 실종 사건'.


 20년 전, 일곱 명의 불면증 환자 실종 사건은 결말이 있었다. 수사에 착수한 연방경찰은 동성애 성향이 있는 전직 군인, 배달원, 여대생, 은퇴한 과학 선생, 과부, 수제 속옷을 만들던 가게 여주인과 대형마트 여종업원 사이에 있을지 모를 연관관계를 밝히는 데 수사의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모두가 불면증을 겪고 있다는 사소한 단서 외엔 뚜렷한 공통 분모를 찾아낼 수 없었다.(p. 265)


 경찰이 밝혀 낸 것은 이 일곱 명의 실종 사건이 오직 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 뿐이었다.

 그의 이름은 '카이루스!'


 그 이름을 이번 '장기 실종자 연쇄 살인 사건'에서 보게 된 것이다. 바로 범인이 남겨 놓은 다음과 같은 쪽지에서.


 긴 밤이 시작됐다. 어둠의 전사들이 이미 도시에 침투한 상태다. 그들은 그분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조만간 그분이 이곳에 오시기 때문이다. 마법사, 꿈의 주술사, 어둠의 주인, 천 개가 넘는 이름을 가진 카이루스님께서. (P. 188)


 20년을 사이에 둔 두 사건은 이렇게 연결되었다. 이 쪽지로 밀라는 한 명의 수사관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베리쉬. 20년 전 사건은 경찰 전체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던, 베리쉬도 소속되어 있었던 '증인 보호 전담반'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건 '카이루스'를 유일하게 목격한 한 여인이 증인 보호 도중 카이루스에게 납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실비아. 경찰뿐만 아니라 베리쉬 또한 이 사건으로 뼈아픈 트라우마를 안게 된다. 그는 실비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베리쉬의 트라우마는 여전하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한다. 매일 눈에 밟힌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를 알고 싶어 경찰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인류학을 따로 공부했을 정도다. 조직에서 그를 보는 눈이 곱지 않다. 이제는 마피아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오해마저 사게 되어 왕따까지 당한다. 경찰에선 아무도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는 베리쉬에게 인간적으로 다가와 편까지 들어주는 이는 오직 하나, 밀라 뿐이다. 그렇게 밀라와 베리쉬의 연대가 구축된다. 사실 둘은 닮았다. 둘 모두 트라우마가 있다. 밀라도 여전히 '속삭이는 자'에서의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건 무엇보다 그녀의 딸 '앨리스'와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엄마지만 밀라는 딸인 앨리스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다. 엄마 집에 맡겨두고 매일 밤 앨리스 방에 몰래 설치한 CCTV로 딸의 일상을 훔쳐보는 게 밀리가 엄마로서 하는 전부다. 밀라가 딸에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간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다. 타인의 아픔이나 괴로움, 고통 같은 것들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말리가 내내 실종 전담반 '림보'에서 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라진 인간을 찾는 것을 통해 그 감정들을 헤아리고자 함이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까닭은 오직 하나다.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의 옷을 벗겨보면 그 알몸의 신체엔 곳곳에 흉터들이 즐비하다. 아픔과 고통을 알기 위해 스스로 자해한 탓이다.


 티셔츠를 벗으며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알몸을 쳐다보았다. 비쩍 마르고 상처로 뒤덮인 몸. 살이 찌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그랬다면 아마 칼로 그 살들을 다 도려냈을 테니까. 세월이 흐르며 그녀의 몸을 점점 뒤덮은 흉터들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고통을 의미했다. 자해하는 길만이 오직 마음속 깊은 곳에 자기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P.96)


 밀라는 이런 존재였다. 딸인 앨리스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는 것도 혹시 자신이 괴물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녀는 늘 생각한다.


 '넌 그 사람 거야. 그에게 속해 있어.'(P. 94)


 밀라가 인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 자해를 했듯이 베리쉬는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인류학'을 전공한다. 둘 모두 상실이 가져온 두려움에 대한 나름의 대처였다.


 '이름없는 자'는 결국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건 바로 '두려움'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인 감정은 다름 아니라 '불안'이라고 보았는데 그처럼 평생 그림자와도 같이 따라붙게 마련인 불안과 두려움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를  말하는 작품인 것이다. 밀라와 베리쉬만이 아니다. 실종자들 역시도 모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실종 또한 밀라의 예전 동료인 빈첸티가 잘 보여주듯이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카이루스는 바로 그 두려움이 낳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들의 존재 모두를 삼켰던 것이다. 


 하지만 대처하는 방법은 달랐다. 밀리와 베리쉬는 스스로 깨닫고 이해하려고 했다. 무시와 제거의 선택지는 그들에게 없었다. 하지만 실종자들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알기 보다는 무시를, 이해 보다는 제거를 택했다. '이름 없는 자'에겐 이런 '전선(FRONT LINE)'이 존재한다. 베리쉬는 그런 실종자들의 태도를 '악의 논리'라 부른다. 베리쉬는 말한다. 실종자들의 연쇄살인은 카이루스가 '악의 논리'로 그들을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악의 논리' 이것은 이 소설의 원제이기도 하다. 베리쉬는 '악의 논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미 사자는 자기 새끼들을 먹이기 위해 새끼 얼룩말을 사냥합니다. 그런데 이건 자비로운 행위입니까, 악의적인 행위입니까? 물론 어미 얼룩말은 새끼를 잃은 상실감에 괴로워하겠지만 그 반대의 상황으로 가면 어미 사자는 자신의 새끼들이 배고 고파 굶어죽는 장면을 지켜봐야 합니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유는 채식주의 사자가 없기 때문입니다."(P. 299)


 이렇게 악의 논리는 '선과 악의 모호성'을 전제로 한다. 선과 악의 절대적인 구분은 불가능하고 누군가의 선은 누군가에게 악이 되기 마련이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행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면 악행도 얼마든지 용납된다는 '악의 논리'가 만들어진다. 마키아 벨리의 말마따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연상해도 좋다. 그는 돈은 전당포 노파와 같이 쓸모없는 이보다는 자기와 같이 사회에 도움이 될 지식인을 위하여 쓰여지는 게 더 가치있다는 이유로 노파를 살해한다. 어떻게 보면 범죄란 게 모두 사실 '악의 논리'에서 태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카이루스 역시 바로 이 논리로 장기 실종자들을 살인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다른 이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설득하면 가능하다고 볼 수 있겠죠."

  "로저 벨린과 나디아 니버맨의 경우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어요. 그들은 범행대상을 고를 때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대상 중에서 선택했던 거예요. 동기로 작용한 것은 단순한 앙심이나 복수가 아니라 그들의 경험이었던 거예요."(P. 301)


여기서 그들이 두려움이 결국 살인까지 낳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제거로써 가진 두려움을 씻었고 '악의 논리'는 그것을 정당화해 주었다. 무시와 제거는 알고 이해하려는 것보다 손쉬운 방법이다. 감정적 차원의 시원함도 있다. 유혹은 거기서 온다. 덕분에 '악의 논리'는 꾸준하게 사랑받아왔다. 정당한 전쟁 논리엔 항상 그것이 동원되었다. 유럽의 십자군은 '악의 논리'로 이슬람 침공을 정당화 했고 독일의 나치는 '악의 논리'로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했다. 우리나라도 북한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악의 논리로 민주화의 열망을 탄압했다. 지금의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태도 마찬가지다. 보다 나은 내일이라는 악의 논리로 현재의 고통과 범죄를 서둘러 무마시키려고만 들고 있다. 일본이 원전 사태가 일어났을 때 했던 것과 똑같이.


 '악의 논리'가 횡행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모두 그 근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무조건 무시와 제거로 두려움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악의 논리에 귀기울이도록 만들었다. 도나토 카리시의 '이름없는 자'는 '속삭이는 자'의 속편답게 빼어난 드라마 아래 우리가 왜 '악의 논리'에 솔깃해지는 것인지 그 이유를 '두려움'과 관련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이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밀라와 베리쉬는 그를 위한 하나의 대안이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으로 '악의 논리'의 무서움을 보여주었다. 악은 이성을 통한 합리적 선택의 산물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었고 심지어 학살과 같은 거대악조차 누구에게나 가능했다.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은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지 않았던가. 두려움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악의 논리'에 유혹당할 수 있듯이 악은 어떤 특정한 자들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가 나치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그것을 오로지 나치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한 홀로코스트는 언제고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우만이 말하길, 그 비극의 반복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한다.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로 여기는 것. 즉 '악의 논리'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고 생활 속에서 지속된 자기 성찰과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수반되어야 풀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설에서 말리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말리의 삶은 괴물이 존재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원래 범죄학자인 도나토 카리시는 이렇게 해서 현대성의 가장 커다란 문제를 작품 속에 형상화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는 현대성 자체가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 비슷한 주제를 도나토 카리시는 소설로 말하는 것 같다.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을 기다리는 것은 소설의 재미가 가장 크지만 이런 지점도 있기 때문에 다음 작품을 더욱 기대하게 된다. '이름없는 자'의 결말은 열려있다. 밀라는 아직 종착지에 이르지 못했다. 분명 후속작이 나올 듯 하다. 현대성이 가진 비극을 관통하는 말리의 여정이 어디로 이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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