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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세컨즈 1 - 생과 사를 결정짓는 마지막 3초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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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영국의 미스터리 작가협회가 비 영어권 미스터리 소설중 최고의 작품에게 수여하는 '인터내셔널 대거'는 우리나라에도 스릴러 '비스트'로 소개된 바 있는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의 다섯번째 작품 '쓰리 세컨즈'에 돌아갔다. 이로써 그들은 이미 형사 발란더 시리즈의 헤닝 만켈과 '밀레니엄 시리즈로 지금은 스릴러의 대표적 이름이 되어버린 스티그 라르손을 배출하여 이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출간된 스릴러를 뜻하는 '노르딕 느와르'에 있어서 일종의 총본산으로 자리잡은 스웨덴 출신으로 바로 그들의 직계 계승자임을 입증하는 방점을 확실히 찍게 되었다.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르뽀타쥬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그들의 작품은 한 마디로 고발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 그들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단순히 읽는 재미만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직접 바로 작품 속으로 가져오며 독자들에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여파를 항상 직시하도록 한다. 그래서 대단히 묘사가 현실적이며 르뽀타쥬가 그렇듯이 때로는 논쟁이 유발되도록 그것이 지닌 다양한 측면을 가감없이 펼쳐보인다. 이게 그들의 스타일이 르뽀타쥬라고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문학은 현재 제기되고 있는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게다가 그것이 문학적 소재로만 그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사유든 행동이든 직접적이며 현실적인 참여를 불러 일으키도록 만든다. 즉 그 문제를 바로 독자 자신의 문제로 인지하고 관심을 가지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또한 그들의 문학은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며 그렇게 사실성의 충실한 복원을 위해 작가의 관점을 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묘사하는 사건을 되도록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만일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의 소설들이 뭔가 지금까지 읽었던 같은 장르의 소설들과는 다르다고 느꼈다면 아마도 바로 그들이 가진 이러한 특징이 당신의 의식 어딘가에 존재하는 현을 건드린 게 틀림없다.

 

 그들이 이런 특징을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 작가들 자신에게서 연유한다. 스웨덴의 노르딕 느와르를 이끌어갔던 대표주자들인 헤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은 모두 저널리스트 출신이었는데 바로 쓰리 세컨즈의 작가 안데슈 루술룬드 역시 저널리스트 출신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고발문학적 성격은 만켈과 라르손이 그랬듯이 바로 그러한 출신에서 기인되는 탓이 크다. 더구나 콤비인 버리에 헬스트럼은 실제 형무소에서 복역까지 한 범죄자 출신이다. '쓰리 세컨즈'가 보여주는 스웨덴 형무소의 압도적 리얼리티는 분명 이 헬스트럼의 공이다. 그런데 헬스트럼 자신이 소설에 뛰어들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불행에 빠지는 것을 막자는 동기도 있었다. 이런 면에서 그의 소설 쓰기는 어쩌면 사실상 참회와도 같은데 이러한 그들의 출신에서 비롯된 문제의식이 사람들에게 만연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고발문학적 성격을 띠게 만드는 것이다.

 

  '쓰리 세컨즈'는 '경찰 정보원'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경찰 정보원이란 범죄조직에 잠입하여 그들을 일망타진할 정보를 알려주는 존재를 뜻한다. 뭐, 이런 경찰 정보원에 대한 얘기는 사실 그리 새롭지 않다. 비근한 예로 홍콩 느와르의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무간도'에서 이미 접해본 바 있다. 하지만 거기서 경찰 정보원 역할을 했던 양조위는 그래도 어엿한 경찰 출신이었다. '쓰리 세컨즈'의 정보원 호프만은 경찰 출신이 아니라 범죄자 출신이다. 그는 범죄자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처음엔 돈을 위해 다음엔 가족을 위해 경찰에 의해 고용되어 정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홍콩 느와르에서 경찰 정보원은 경찰과 범죄조직 사이의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자였다. 경찰이지만 범죄자 역할을 해야만 하는 양조위는 그 때문에 자신이 경찰인지 범죄자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정체성 혼란의 문제를 겪게 된다. 이것은 사실 그대로 곧 중국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홍콩인 자체를 은유한 것이기도 했다. 양조위가 겪는 정체성의 혼돈과 불안은 그대로 역사적, 체제적 경험이 전혀 다른 중국에 이제 자신의 정체성을 맞춰야 하는 홍콩인들이 겪는 혼돈과 불안이었다.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이 가지는 상징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사실 97년 중국에로의 강제반환을 앞에 두고 있었던 홍콩인들의 특성 때문에 이러한 경계 위의 존재들은 늘 홍콩 영화에서 즐겨 사용되던 소재이기도 했다. 그 대표작이 바로 홍콩 느와르의 대부격이라 할만한 오우삼 감독의 홍콩 시절 마지막 작품 '랄수신탐(국내 개봉 제목은 '첩혈속집'이고 영어 제목은 'HARDBOILED' 이다.)이다. 여기서도 양조위는 무간도와 똑같이 경찰 출신 정보원 역할을 하고 있는데 (때문에 이 영화는 사실 무간도의 원본 같은 영화라 할만하다.) 그 경계 위에서 양조위가 느끼는 혼돈과 불안은 홍콩인 자체만이 아니라 곧 이제 홍콩을 떠나 미국에서 감독 생활을 해야 하는 오우삼 본인의 혼돈과 불안마저 드러내고 있어 흥미롭다. 사실 영화 랄수신탐은 쓰리 세컨즈와 비슷한 부분이 좀 있는데 우선은 영화 초반에 이 소설 '쓰리 세컨즈'에서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그 사건 그대로 한 경찰 정보원이 현장에서 사살당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그 정보원을 죽인 것은 바로 주인공 형사인 주윤발이었지만 이러한 상황, 그러니까 같은 동료 경찰인데도 서로의 정체를 몰라 어이없게 죽이게 되는 일들은 호프만을 정보원을 만든 유일한 경찰쪽 연락책 '빌손'의 말에서 직접 언급되기도 한다. 또한 정보원이 죽으면 연락책이 비밀리에 관리하고 있던 그 신원 증명을 위한 비밀 서류를 가져와 없애는 장면도 유사했다.

 

 시대와 국적의 차이는 있으나 그렇게 이 소설 '쓰리 세컨즈'는 홍콩 느와르와 마치 어깨를 나란히 하기라도 하듯 '경계 위에 서 있는 존재'를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콤비 중 하나인 헬스트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즉 그는 범죄자였다가 갱생하고 다시 작가로 새로이 삶을 시작하는 자이다. 앞서 랄수신탐의 양조위의 심리 상태는 곧 홍콩을 떠나 미국에서 새로이 작가 생활을 해야 하는 감독 오우삼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 말했었는데 바로 그와 똑같이 그러한 헬스트롬의 심리가 그대로 '쓰리 세컨즈'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작품이 지닌 색다른 재미 하나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작품 속 정보원 호프만과 연락책 빌손의 관계가 어쩐지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호프만을 정보원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삶을 가져다 주는 빌손은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갱생 프로그램을 취재하다 만난 헬스트럼에게 다시금 작가로 새로이 살게 해 준 안데슈 루술룬드와 비슷하고 호프만은 영락없이 헬스트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왠지 빌손과 호프만의 얘기를 그리면서 서로의 상황을 유추하면서 집필 중 낄낄거리고 있을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를 상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다른 쪽으로 잠깐 얘기가 샜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이 소설은 앞에서 말했던 대로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란 무엇보다 강요되는 변화에 직면한 존재다. 게다가 그건 스스로 초래한 모순적 상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삶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스스로 경계 위에 서 있을 것을 선택했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확고했던 정체성마저 혼란스럽게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들의 얘기는 일단 의도된 연기와 진짜 정체성의 경계가 사실은 상당히 가변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1971년 스탠포드 대학의 한 연구팀이 모의 감옥 실험을 했을 때 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그 실험에서 그냥 평범한 일반인들을 간수와 죄수로 나누어 그 각각의 역할을 연기하도록 시켰지만 어느새 사람들이 거기에 너무 몰입된 나머지 정말 스스로가 간수와 죄수인 것 처럼 행동하고 서로 반목에 반목을 거듭하더니 결국엔 폭력사태까지 일으키고 말았듯이 말이다. 그들은 그저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들의 연기가 그들의 진짜 정체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켄 키지의 소설 '뻐꾸기의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역시 이와 비슷한 것을 보여준다. 거기서도 일부러 정신병 환자인 것 처럼 연기하는 주인공은 나중에 가서 자신이 미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미친 연기를 하는 것인지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건 이 소설 '쓰리 세컨즈'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호프만은 정보원으로 일하는 동안 살아남기 위하여 내내 스스로 '범죄자 보다 더 완벽하게 범죄자 연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누누히 되뇌이는데 그와 같은 완벽한 연기 때문에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종종 잊어버린다.

 

 '쓰리 세컨즈'가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를 가져온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러니까 의도된 연기가 진짜 정체성마저 위태롭게 만드는 상황.

 그런데 왜 그들은 이것을 가져온 것일까? 바로 거기에 그들이 '쓰리 세컨즈'를 쓴 진짜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결론 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호프만을 두고 전개되는 비밀스런 공모와 음흉한 획책의 주체가 되는 '국가' 자체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란 게 말이다.

 

  이 소설이 헤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의 것을 바로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 '쓰리 세컨즈' 역시도 스웨덴이 가지고 있는 다른 나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정확히 꼬집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호프만이 스웨덴 국가에게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스웨덴 사회에 마약을 만연시키려는 폴란드 마약 조직을 소탕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폴란드 마약 조직은 소설 초반에서는 사람들을 관광객으로 위장시켜 스웨덴 내부에 마약을 들여오고 급기야는 스웨덴 형무소를 모두 그들의 마약 시장으로 만들려 획책한다. 그 교도소에서는 사회 계층의 상하를 막론하고 모두 마약을 구입하는데 상류층은 높은 값을 지불해오는 수입원으로 하류층은 그들의 부하로 삼는다. 그렇게 폴란드 마약 조직은 교도소로 상징되는 사회 전체를 집어 삼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시 보면 정확히 몰려들어오는 외국인들이 자신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놓은 나라를 깡그리 망칠지 모른다는 스웨덴 자국민의 공포가 반영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즉 폴란드 마약 조직이란 이 소설에서 일종의 은유인 셈이다. 그러니까 스웨덴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을 드러내기 위한 은유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다음 질문은 이것이 다. 이처럼 스웨덴이 가지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과 호프만으로 집약되는 경계에 서 있는 존재가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를 가지는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정체성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외국인 혐오증은 확고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혐오증이다. 그렇게 스웨덴 스스로는 자신의 정체성이 고정적이고 불변적이라 생각해서 외국인들을 규정하고 혐오하는데 과연 정체성이란 그런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는 바로 이 소설을 통해서 보여준다. 무엇보다 호프만을 통해서 말이다. 그가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로서 자신의 연기와 진짜 정체성을 구별하기가 혼란스러웠듯이 그렇게 정체성이란 것도 알고보면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의도와 의지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존재임을 보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두 콤비가 경계에 서 있는 자를 소설의 핵심으로 가져온 이유였다.

 

   한 마디로 정체성이란 우연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스웨덴은 그것을 마치 운명적인 것 처럼 받들고 그로 인해 외국인에게 불합리한 혐오를 드러내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는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 편, 이렇게 정체성을 가변적으로 보는 것은 무엇보다 헬스트럼 작가 자신과 관계된 것이기도 하다. 그 역시도 범죄자란 정체성에서 새로이 작가의 정체성으로 탈바꿈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지금처럼 작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주위의 사람들이 정체성을 하나로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상황에 따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변모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주었던 것도 분명 한 몫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만연된 전과자에 대한 편견이 거기에도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다면 아무래도 작가로 성장하기엔 꽤 부담으로 작용했을테니까 말이다. 즉 우리는 여기서 헬스트럼 자체가 증명하는 바, 그러한 정체성이란 게 확고하다는 관념이 또한 존재가 지닐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 마저 사전에 압살할 우려가 있음을 본다. 바로 여기서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가 왜 이토록 외국인 혐오증을 문제시 하는가 역시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새로이 돋아날 무수한 가능성들이 오로지 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속절없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임을 말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책의 후반, 국가가 호프만이 위협적인 존재가 되자 행하는 책략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가급적 내용 노출을 막기 위해 이쯤에서 결론으로 서둘러 가자면, '쓰리 세컨즈'는 말하자면 이런 소설이다. 스티그 라르손의 뒤를 따라서 여전히 점증되고 있는 스웨덴 사회에 만연된 외국인 혐오증에 대해 그 혐오증의 기반이 되는 '정체성'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볼 여지를 줌으로써 오히려 외국인의 유입으로 더 다양해지고 풍성해질 가능성들을 지켜주려고 하는...  그 타자와 타자가 일으킬 변화에 대한 포용이 바로 '쓰리 세컨즈'가 가진 핵심이다.

 

  그렇게, '쓰리 세컨즈'는 이를테면 'ONE COIN CLEAR' 하듯이 잡은 순간 내처 끝까지 읽게 될 정도로 재미있는 스릴러이지만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남게 되는 건 재미 보다 더 한 '나'를 돌아봄이다. 어쩌면 정말 호프만이 그랬듯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으로 알고 있는 것은 그저 하나의 연기에 불과할 지 모른다. 사실 우리에겐 '~답다'라는 말에서 바로 드러나듯, 역할에 따라 걸맞게 행동해야 하는 정형화된 행위 형식들이 참으로 즐비하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그저 우리의 본성과는 상관없이 그 정형화된 행위 형식들을 답습할 뿐인데도 그것을 '진짜 나'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는 바로 거기로 나를 데려간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사실은 전제하고 있는 것... 내가 여기고 있는 '진짜 나'가 '정말 나'인지 알아보게 만드는 경계의 장소로 말이다.

  그 균열의 지점에서 문득 그 틈새로 지나가는 바람이 되는 것...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가 나에게 남긴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가변과 유동으로 넘쳐나는 존재인 바람...

 

  아마도 그래서 마지막이 그렇게 끝났을 것이다.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보자는 말로...

  그렇게 늘 다른 날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있는 존재는 바람 밖에는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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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03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콩 느와르가 한때 엄청났지요.. 그 허무함이라니.
그런데 그걸 홍콩의 상황과 연결시켜 생각해보지 못 했습니다. 제가 그런 방면은 워낙 잘 모르거든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요즘 자주 보이는 북유럽, 스웨덴의 소설의 배경에 대해서도 궁금해지네요. 워낙 그쪽 나라들의 역사는 몰라서, <밀레니엄>을 읽을 때도 재미있지만 묘한 괴리감을 느꼈었거든요. 그 이유가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를 읽으니 명확해지네요.

진짜 나, 정체성, 괴리감... 아마 내 안의 나는 알고 있을겁니다.
그런데 벗어날 수 없다면,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보자고 해야겠네요. 좀 쓸쓸하네요.. ^^

ICE-9 2012-04-05 02:55   좋아요 0 | URL
묘하게도 이 벗어남의 얘기를 온다 리쿠의 '달의 뒷면'을 통해서 또 이어가게 되었어요. 2001년에 나온 이 작품은 '삼월은 붉은 구렁'과 이어지면서 또 책을 통해 기존의 나를 벗어나 타자를 품은 보다 확장된 자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더군요. 해서 반가웠고 흥미로웠습니다. 뤼시앙 골드만이라는 프랑스 학자가 창안했다고 해야할까요 '문학 사회학'이라고 있는데 그 견해가 주로 사회 정치적 관점으로 문학을 해석하는 대표적인 입장인데 저 역시 거기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서 그렇게 자주 해석을 하는 것 같아요. 영화도 그렇구요.^ ^

홍콩 느와르는 우리나라엔 잘 소개가 안되어서 그렇지 아직은 꽤 번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두기붕 감독이 있지요. 미션, 흑사회 2부작등은 두 말할 것도 없는 걸작이고 그 외에도 다른 좋은 감독들이 아직 좋은 느와르를 종종 만들어내고 있더군요^ ^

재는재로 2012-04-04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느와르 하면 주윤발의 영웅 본색이 대표적이 었죠 지금은 그때의 영광은 사라지고
어린시절 주윤발의 이수시개 묻모습이 멋있었는데 지금은 다 추억이죠 킬러면서도 따뜻한
감성을 가진 이중적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네요

ICE-9 2012-04-05 02:56   좋아요 0 | URL
아마도 남자라면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의 매력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물질이 아닌, 타산이 아닌 오로지 의리라는 인간적인 가치에 전적으로 모든 걸 거는 거... 그 협객스러움. 저는 그게 정말 확 다가오더군요.^ ^
재는재로님 이렇게 방문해주시고 답글까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살인은 없었다 - 형사 외르겐센의 지식 수사 소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게오르크 요나탄 프레히트 지음, 안성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1985년 5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의 형사보 외르겐센은 수도 경찰의 지방 파견 프로그램(SASOWA)의 일환으로 외딴섬 릴레외로 5개월 동안 파견된다. 작고 평화로운 외딴섬에서 강력계 형사인 그가 무슨 할일이 있나 싶었지만 명령이니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는 생물학자인 여자친구의 부탁대로 그 섬에 사는 동식물들이나 조사하면서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편하게 보내자는 생각으로 그 섬에 오게된다.

  그런데 그 섬에 오자마자 예상과는 달리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라르센 노인의 장례식장 부터 인도된다.

 

  모든 것엔 동전의 양면이 존재한다. 목가적인 작은 섬에 와서 가장 먼저 겪는 일이 낡아 빠진 자동차로 공동묘지에 실려가는 것이라니. 그것도 아침도 먹기 전에...(P.19)

 

  아무리 평화로운 섬에 와서도 그동안 강력계 형사로서의 경험을 무시할 수 없었던 그는 '말테'라는 평생 그 섬에서 경찰로 살아온 이에게 부검을 했는지 물어보고 '릴레외에선 200년간 살인 사건이 한 번도 없었다.'라는 말과 함께 부검을 하지 않았다고 하자 독살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부검도 없이 매장하냐며 반문한다. 여지껏 평화롭게 섬에서 잘 지내온 정착민인 그에게 일흔 세살 노인의 심장마비란 그 무엇보다 자연스런 죽음일 뿐인데 이제 갓 들어온 외지인이 이렇게 항의하니 그런 의문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그저 너무도 황망스러워서 그는 차마 뒷 말을 잊지 못한다.

 

  외르겐센 안스가르 형사는 온갖 성가신 것을 가져온다는 '북쪽의 사도'를 뜻하는 안스가르란 이름 그대로 200년 넘게 조용하고 평화롭기만한 섬 릴레외를 의혹과 조사를 가져오는 미스터리의 공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결국 외르겐센은 그 노인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릴레외 섬에 얽힌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고 덴마크의 통합 과정에 있어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찾아낸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살인은 없었다'는 무려 692페이지에 이른다. 미스터리 소설 치고는 정말 압도적인 분량이 아닐 수 없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대부분 출판사들은 상, 하 양권으로 분권으로 내놓을 터인데 21세기북스는 고맙게도 단권으로 내놓았다. 덕분에 경제적 부담은 줄었지만 지하철에서나 혹은 가지고 다니며 읽을 때는 적잖이 불편했다. 이럴때는 좀 애매모호하다. 대부분의 독서 시간을 길바닥에서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서 편하게 휴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면 또 분권으로 인한 가중되는 경제적 부담이 신경쓰이고 고맙게도 단권을 해주면 이런 두께는 집에서 밖에는 읽을 수 없어 완독에 하염없이 시간이 걸리게 되고... 참 어느 것 하나 딱 이거다 하고 결정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외르겐센이 말했던 동전의 양면 그대로다.

 

  아무튼, '살인은 없었다'가 이렇게 많은 분량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다. 바로 프레히트가 외르겐센이 릴레외 섬에서 있어야 하는 5개월을 최대한 그대로 담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프레히트가 공을 들이는 건 이 소설을 미스터리로 알고 다가가려 했던 분들에겐 미안하지만 미스터리가 아니라 외르겐센이 섬에서 보내는 일상의 디테일한 복원이다. 그는 외르게센의 하루 일과중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필요한 것은 그 무엇이든 세세하게 담아내려 애쓴다. 그렇게 우리는 외르겐센의 수사과정에 관찰자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상에 동반자로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미스터리만을 기대했던 분들이라면 이 동반의 여정은 여지없이 지루해질 수 있다. 하지만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를 적당히 버리고 보면 어느새 외르겐센의 일상에 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프레히트의 묘사가 좋다.

 

  그런데, 왜 그는 미스터리를 표방하면서도 이렇게 공들여 섬에서의 그의 일상을 복원하려는 것일까? 내 생각엔 이것이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포인트 같다. 여기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책의 각 장마다 그가 붙인 소제목이다.  프레히트는 각 장의 소제목에 독특하게도 온갖 동물이나 곤충의 이름을 갖다 부텼다. 쇠돌고래, 장수하늘소, 고양이, 갈매기 등등...

 

 

   옆의 커버는 독일 원서의 것인데 보면 알겠지만 소제목에 나오는 것들을 하나의 도감 처럼 표현하고 있다. 표지란 것이 작품의 핵심적인 분위기나 주제 같은 것을 응축해 표현하는 것임을 상기해 본다면 소제목이 이렇게 도감을 보듯 동물과 곤충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뭔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 이것과 외르겐센의 일상에 대한 충실한 복원은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일까? 그건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 릴레외 섬에 간직된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고 덴마트의 통합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나는 여기서 소설의 마지막에 밝혀질 비밀을 말하고 말았는데 개인적으로 이것을 스포일러라고 여기진 않는다. 여기에 대해 뭐라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당신 역시 이 책을 읽게된다면 분명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는 것은 확신한다.)

 

  프레히트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있었던 세 나라의 통합 문제를 새삼 끌어들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유럽 통합의 문제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외르겐센의 집념으로 밝혀지는 역사적 진실은 이른바 '베르나도테 작전'으로 당시 베르나도테는 노르웨이와 통합하여 나폴레옹에 맞서려 했던 스웨덴을 치기 위해 프랑스, 네델란드, 스페인 덴마크 연합군을 이끌고 덴마크에 주둔해 있었다. 그런데 이 베르나도테는 그 후에 바로 적국인 스웨덴의 국왕이 되는데 과연 어떻게 해서 나폴레옹의 명령을 듣던 프랑스 군의 사령관이었던 그가 대적하고 있는 스웨덴 국왕이 될 수 있었을까? 외르겐센은 바로 그 까닭을 릴레외에서 알게되는 것이다.

 

 굉장히 드라마틱해 보이는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이다. 나폴레옹

처럼 일반 사병에서 시작했

던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

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사령

관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

전적인 인물이었다. 육군원

수가된 그는 출세과정이 여

러모로 나폴레옹와 유사하

여 자주 나폴레옹의 라이벌

로 여겨졌으나  덴마크에서

그를 배반하고 적국 스웨덴

의 황제가 됨으로써 공식적

으로 나폴레옹의 라이벌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그는 배신자가 되

었지만 스웨덴으로서는 구

세주가 되었다.

그는 스웨덴의 국왕이 되자

마자 덴마크에서  나폴레옹

의   군대들을 몰아  내었고

노르웨이를 통합, 스웨덴연

방을 만들어 러시아와 프랑

스의 협공으로  부터   보다

안전해질 수 있도록 만들었

다.  베르나도트에  의해 해

방된 덴마크는   그 때도 여

전히 독립국이긴 했지만 바

로 코앞에 스칸디나비아 반

도의 대제국이 세워지고 있

는 마당에  그 독립을  문자

그대로 유지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결국 독립국이란 명목상일 뿐이고 연방의 사실상 지배를 받는 국가로 전락한다.

  외르겐센과 함께 그 진실을 찾아가는 은둔의 노학자 크리스텐센이 이렇게 안타까움을 슬회할 정도로...

 

   사실 우리 통합 국가의 마지막의 시작이었지. 현재는 북해지역에서 스웨덴이 대장 노릇을 하지. 그리고 우리는 거의 함께 뛰는 경기의 주자가 되지 못해. 그 때부터 우리 덴마크는 놀이의 대상이 되어 버렸어. 처음에는 베르나도테에 의해서 그랬고 그 다음은 비스마르크, 그리고 히틀러. 내가 짐작하기로 그 다음은 유럽연합일 것만 같아(P. 664)

 

  한 때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체를 지배했던 대국이었으나 이제는 힘없는 작은 나라로 전락해 버린 덴마크... 크리스텐센의 저 안타까움의 술회는 사실 강대국 사이에 끼여든 모든 나라들이 겪는 아픔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당한 하나의 주체로서 협상이 아니라 거의 강요에 의해 그들과 한데 섞여야 하는 우리나라와의 닮은꼴 때문에 덴마크가 그리 멀리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크리스텐센의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프레히트는 유럽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나라들이 독자성을 잃고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통합이라는 것이 덴마크의 어두웠던 과거 역사처럼 온전한 주체로서의 참여가 아니라 약하기에 마지못해 끌려들어간 억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강제된 통합에 대한 반감이자 오히려 그 때문에 온전한 주체가 서로 대등한 가운데 조화롭게 참여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통합임을 말하기 위해 프레히트는 앞에서 말했던 692페이지에 걸쳐 5개월간의 외르겐센의 일상을 충실히 복원하는 것이며 소제목을 하나의 자연도감 처럼 동물과 곤충의 이름으로 단 것이다.

 

   이 소제목 때문에 나는 찰스 다윈의 '비글호의 항해기'가 생각났다. 이 책에서 다윈은 항해 도중 발견한 동물과 식물들을 상세한 스케치까지 더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갈라파고스 섬에 대한 생태에 대한 그의 묘사는 유명하다. 독일 원서의 표지도 그렇고 프레히트가 이렇게 소제목을 일부러 도감처럼

달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어떤 '유(類)적 존재'로 환원되지 않는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고유한 개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도감에서 그 동물 하나 곤충 하나를 온전히 그 존재 자체에 바탕해서 설명을 하듯 그렇게 프레히트 역시 '살인은 없었다'를 통해 독립성과 고유성이 지워진 통합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생생히 살아나는 개체성으로써 일곱빛깔의 무지개 처럼 조화로운 통합이 진정한 하나임을 읽는 이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 이러한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는 것이다.

 

  때문에 외르겐센의 5개월간의 일상을 그렇게 세세한 것 하나까지 복원하는 것도 도감에 나오는 동물들의 생태에 대한 설명과 같은 것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 다듬어지고 주조되는 개체성이 아니라 그 자체 하나로 온전하고 전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가급적 가감없이 외르겐센의 일상을 복원한 것이다. 이렇게 도감 방식의 소제목의 차용과 '딮 포커스'식의 일상의 세밀한 복원은 강요된 통합에 대한 저항과 진정한 통합에로의 지향 때문에 비롯되어진 것이었다.

 

   얼마전에 날치기로 통과된 FTA 때문에 우리나라도 강요된 통합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FTA는 오로지 미국식 기준만 살아남는 한 나라의 고유한 개체성을 지우는 조약이다. 크리스텐센의 말마따나 우리 나라를 그들더러 마음대로 놀라고 놀이터로 내어주는 꼴이다. 과연 그렇게 무리하게 우리가 가진 독자성을 없애고 아메바처럼 들러붙는 것이 좋은 일일까? 프레히트가 692페이지에 걸쳐 거거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고 있는지는 더 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전에 아주 인기있었던 미국 드라마 '엑스 파일'의 한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거기서 한 유전적으로 돌연변이가 된 인간이 스컬리에게 다가와 멀더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생각해 봐요. 지구의 모든 사람이 저 멀더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당신이랑 멀더가 아무리 근사하게 생겼다고 해도 그렇게 다 같은 얼굴이 되면 과히 보기가 좋지만은 않을 거요. 이제 왜 우리 같은 존재가 있는지 알겠오? 자연이 그런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오. 자연은 정상성을 거부한다오!"

 

   저마다 가진 고유의 개체성이 말살된 획일화의 끔찍함이 비단 존재에만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그것은 똑같이 통용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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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15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이름도 거창한 지식 수사 소설이라,
너무나 멋져보이는데 제게는 벌써 리뷰부터 막히기 시작한다는 ㅋㅋㅋ

ICE-9 2012-01-15 23:57   좋아요 0 | URL
아, 이런 제가 너무 어렵게 써 버렸나요?
반성, 반성...
아무래도 생소한 덴마크의 역사인데다, 유럽통합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으니...
그렇게 되었나 봐요. 앞으로는 좀 더 쉽게 쓰도록 고민해봐야 겠네요.^ ^;
 
비스트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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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 22일 영국 범죄소설 작가 협회, 즉 CWA에서 그 해의 비 영어권 최고 장편소설에 주는 THE INTERNATIONAL DAGGER가 발표되었다. 수상작은 안데슈 루슬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그들의 세번째 작품 'THREE SECONDS'였다. 이미 수상 경력이 화려했던데다 뉴욕타임즈에서 이 책에 대한 리뷰(제목이 '라르손이 지핀 불 더욱 타오르게 하다'였다)를 따로이 할 만큼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은데 이 수상으로 이제 그 평판은 결정적이 되었다. 놀랍게도 만켈과 라르손과 똑같이 스웨덴 작가다. 게다가 라르손이 밀레니엄 1부 '용문신을 한 소녀' 로 수상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자신들의 데뷔작으로 이미 그 '글래스키 상(북유럽 최고 장르문학상)'을 수상한 바도 있었다. 마치 스웨덴의 은둔 고수를 하나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흥미로웠다. 그런데 때마침 글래스키 상을 수상했던 바로 그 데뷔작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그 작품이 바로 2005년에 나온 '비스트' 이다. 

 

  '비스트'는 표지에서 어느정도 추정되듯이 아동 성폭력을 주 테마로 하고 있다. 도입부 부터 아홉살 동갑내기 두 소녀를 유혹하여 무참하게 폭행 살인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 범인은 이미 검거되어 재판까지 끝난 채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그러던 중 치료를 위해 밤에 호송 도중 그가 탈출한다. 뒤늦게 경찰은 그를 잡기 위해 수색을 펼치지만 이미 그는 또 하나의 아이를 옛날과 똑같이 폭행하고 살해한 뒤이다. 아이의 이름은 '마리' 아이는 최근 이혼한 아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빠 프레드리크는 오로지 딸 아이 하나만을 삶의 유일한 의미로 알고 살아가던 남자였다. 하지만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아이 앞에서 그에겐 이제 다른 하나가 오로지 그를 살아가게 해 줄 삶의 의지가 된다. 그것은 바로 '복수' 그는 스스로 '마리'의 죄값을 묻기 위해 범인을 찾아 나선다. 

 전직 저널리스트(만켈도 라르손도 모두 저널리스트 출신이었는데, 루슬룬드는 스웨덴 국영방송에서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었다.) 출신과 전직 범죄자 출신의 의기 투합이라는 기묘한 조합으로 구성된 이 공동 작가의 데뷔작을 단순히 오로지 독자의 감각을 사로잡을 목적으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로만 버무린 비정한 복수극 정도로만 생각하면 정말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 소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동 성폭력 살인이라는 굉장히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한 것도 단순히 독자의 관심을 잡아두겠다는 게 목적이 아니다. 아무튼 그 오해를 풀기 전에 일단 이 책의 독특한 서술 스타일에 대해 먼저 말해보려 한다. 이 소설의 스타일은 해닝 만켈과도 다르고 스티그 라르손과도 다르다. 아마도 같은 스웨덴 작가로서 '비스트'와 가장 비슷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한다면 '웃는 경관'으로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마이 슈발과 펠 바르가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스웨덴 범죄소설의 신대륙을 열였던 그 전통에게로 회귀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안데슈 루슬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이 '비스트'에서 보여주는 것은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소설의 거대한 서사에 함몰되지 않은 채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 세상이 그렇듯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고립된 인생 살이를 해 나가지만 결국 모이고 모여 역사가 되듯이 '비스트'도 이와 똑같이 등장인물 각자의 생각과 행동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서사'를 이루는 것이다. 즉 이것은 여러 가지 목소리가 각자의 색깔로서 한데 모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모자이크 그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비스트'의 스타일은 모자이크적이다. 따라서 여기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주인공도 없고 조연도 없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서사의 흐름에 따라 주연도 되고 조연도 되는 것이다. '비스트'를 읽는 우리들은 그러니까 마치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그 천사와 같은 것이다. 천사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유영해 다니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사람의 머리에 대면 그 생각을 읽을 수 있는데 우리 역시도 '비스트'의 세계를 유영하면서 마치 손가락을 등장인물의 머리에 댄 것 처럼 그 생각들을 읽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스타일을 취하면서 굳이 그렇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소재를 사용해야 했던 것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범죄 소설이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그러니까 이제 앞서 말했던 그 오해를 본격적으로 풀 시간이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왜 이런 모자이크적 스타일을 사용하게 된 것일까? 바로 그 이유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재의 선택은 관계가 있다. 이 둘 모두가 사용된 이유는 '비스트'가 독자들에게 본질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타자를 심판할 수 있는가?" 

  바로 이 때문에 작가들은 가장 많이 대중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아동 성폭력 살인 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이다. 즉 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특히나 만일 당신이 그에게 자녀를 희생당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를 묻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우리의 대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을 것이다. 더우기 그 부모라 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소설 속 프레드리크 처럼 사적인 처벌도 얼마든지 수긍한다고. 사실 어느 부모가 희생당한 아이의 복수를 위해 범죄를 처단하는 아비를 욕할 것인가? 소설 속 한 형사마저(그 역시 똑같이 아버지이다.)  이렇게 울부짖는데 말이다. 

  이 일을 하면서 항상 저 자신이 이 사회에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아마 개중에는 잘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정말이지 아닙니다! (...)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앉아서 선생을 감시하고, 선생이 10년 동안 수감될 곳으로 호송해가야 하는 저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럽게 느껴지는지 말입니다. 솔직히 제가 경찰치고 거의 욕을 안 하는 편이긴 하지만 정말... 지금 이 상황은 정말 씨발, 완전히 미친 짓입니다!" 

   경찰은 프레드리크가 그 범죄자를 처단한 것을 정의롭다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범죄자가 되어 처벌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 그야말로 부정의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는 법을 수호하는 경찰이지만 오히려 법이 전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울부짖는 것이다. 심판은 언제나 정의와 관계된 문제다. 우리는 타자를 심판할 때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비스트'에 그렇게 공분을 일으킬 자극적 소재를 사용한 것은 그 '심판의 즉각성'을 문제삼기 위함이다. 보통 그런 케이스의 경우 우리는 종종 너무도 쉽게 타자를 심판하지 않는가. 아마도 이러한 경향 때문에 비스트의 작가들은 일부러 가장 분노를 자아내고 바로 심판의 칼날이 날아드는 이런 소재를 택하여 그렇게 즉각적이고 단정적인 심판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우리들로 하여금 생각케 만드는 것이리라.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심판할 수 있는 것일까? 행여 우리가 제대로 심판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냥 그대로 남아있게 될 것인가?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를 아프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수 많은 질문들이 '비스트'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목소리들에서 흘러나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귓가로 스며든다. 읽으면서 우리들은 정말로 타자를 심판하는 것에 관하여 다시금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내 톨스토이가 한 단편의 제목으로 썼던 그 말을 떠 올리게 될 것이다. 

   "신은 진실을 알지만 그러나 때를 기다리신다." 

   심판의 쉽지 않음은 우리의 정보가 딱히 부족해서도 인식 능력이 모자라서만은 아니다. 거기엔 또 하나의 제약 사유가 있음을 작가들은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 자체가 가하는 제약이다. 과연 언제나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했던 스웨덴 작가 출신답게 그들은 하나의 심판이 그대로 행해졌을 경우 일으키게 될 예측 못할 사회 전체로 일어나는 파급효과가 어떻게 심판을 어렵게 만드는지 또한 잘 보여준다. 여기서 그들이 왜 스타일을 굳이 '모자이크적'으로 했는지 그 이유가 돌연 드러난다.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민감한 주제에 대해 여러 다양한 목소리들을 독자에게 들려 줌으로써 독자에게 보다 가능한 모든 견해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심판이 그렇게 쉽지 않음이 바로 사람과 사람이 담쟁이 덩굴 처럼 얽혀 하나의 긴밀하게 짜여진 네트워크 같은 사회라서 어떤 하나의 결정이 마치 '나비효과' 처럼 사회 전체에 무시하지 못할 파급 효과를 미치기 때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쉽고도 간결한 문체에 여러 등장인물들이 각자 삶의 한 토막을 그대로 가지고 나와서 보여주기에 전혀 지루함이 없이 몰입해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는지라 조금은 가볍게 접근하려 했다가 큰 코 다쳤다. 데뷔작이지만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주제를 녹여내는 내공은 만만치 않았고 또한 은근히 깔려있는 주제가 진지하기 그지 없어 왠지 스릴러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회학 보고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났다. 그러고 보니 여기엔 주 소재인 아동 성폭력 말고도 동성애 같은 다른 사회 차별적 요소들도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보다 핵심적으로 비스트는 그 '심판'의 근저에 깔린 '차별'자체를 다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라는 사실이 너희는 우리보다 저열하다로 곧장 연결되는 그런 '차별' 말이다. 바로 그 차별이 파시즘의 토대임을 볼 때 우리는 여기서 '비스트'의 작가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파시즘과 작품을 통해 맞서 싸웠던 해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의 경향을 그들 역시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쉽게 읽히지만 만만치 않은 깊이와 여운을 맛보게 해 준 작품. 그들의 후속작이 정말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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