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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전설의 확인이었다.

 59년에 나온 이 영화는 97년에 나온 타이타닉에 의해 기록이 깨어질 때까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아카데미 영화제 12개 부문에 수상 후보로 오른(그 중에서 11개 부문을 수상했다.) 유일한 영화로 영화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었다.(그리고 이 기록은 2003년,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에 의해 다시 한 번 깨어졌다.) 아직 못 읽었는데도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마치 아주 많이 읽은 것처럼 생각되는 책이 있듯이, 영화에도 그런 게 있다. 내게는 ‘벤허’가 그랬다. 일 때문에 나이 드신 분들과 이런저런 술자리를 가질 때가 많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꼭 ‘벤허’를 보았냐고 물었다. ‘아직…’이라고 대답하면, ‘허, 그 명작을 아직 못 봤다고, 당장 보게나. 내 인생의 영화야.’ 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거기다 TV에서 하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볼라치면, 참 자주 보이던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 그렇게 귀에 익고, 눈에 익었기에 ‘벤허’는 내게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느껴지던 영화였다. 어떤 분은 ‘이제 봐도, 진정한 벤허의 매력은 못 느끼지. 벤허는 반드시 커다란 화면으로 봐야, 영화가 가진 스펙터클을 제대로 느낄 수 있거든.’이란 말도 하셔서, 내 인생에 벤허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영영 오지 않겠구나 여겼는데, 웬걸 그런 기회가 불현듯 찾아왔다. ‘벤허’가 극장에서 재개봉된 것이다.


 

 알고보니 재개봉이 처음도 아니었다. 62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봉된 뒤로 72년, 88년, 97년, 2007년 등 10년을 주기로 꾸준하게 재개봉되어 왔었다. 이번의 재개봉도 그 주기에 속해 있었다. 이렇게나 꾸준하게 재개봉된 것만 봐도 많은 어르신들이 당신 인생의 영화로 꼽는 것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내겐 모처럼 찾아온 소중한 기회. 당장 극장으로 달려가 누리기로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정말 좋은 영화는 시대를 초월해 늘 똑같은 평가를 가지도록 한다는 것을. 단언컨대, 좋은 영화였다. 상영 시간이 길다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원래 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들은 다 길었으니까. 그런데도 이야기에 푹 잠겨서 보았다. 

 

 전차 경주 장면은 지금봐도 정말 압권이었다. 너무나 실감나고 박진감이 넘쳤기에, 그 때는 정말 CG 기술도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이렇게 찍을 수 있었는지 그 촬영 과정이 몹시도 궁금할 정도였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장면에만 들어간 제작비가 100만 달러라고 했다. 그리고 동원된 엑스트라만 해도 만 오천 명. 물론 경기장도 이탈리아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 실제로 세워진 것이었다. 전차도 모두 18 개가 제작되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중 반만 실제 경주 장면에 사용되었다. 영화를 보면, 단 번에 찍은 것 같은데, 무려 5주에 걸쳐 찍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5주 동안 찍은 것이, 마치 하루에 컷 없이 찍은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할 수 있는지. 왜 이 영화가 아카데미 편집상을 탔는지 납득하는 순간이었다.

 


 제작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영화의 총 제작비는 천 오백 구십만 달러라고 한다. 제작 연도가 50년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천문학적인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실로 엄청난 규모의 영화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것을 다 제외하고 출연한 인원만 보더라도, 대사가 있는 인물만 350명이고 엑스트라는 5만명에 이르니까 말이다. 이 엄청난 제작비 때문에 몇몇 영화 비평가들은 ‘벤허’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수익은 7배 가까이 났다. ‘벤허’는 무려 7천 4백 7십만 달러를 벌여들여 당시 파산 직전이었던 MGM을 기사회생시켰다. 이만한 규모의 영화를 감독이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물론 헐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서는 영화 제작의 전반적인 통제가 감독 보다는 프로듀서에 더 많이 이뤄진다고 하지만, 이 만한 규모에다 장시간 상영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흥행면에서나 비평적인 면에서나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는 것은 분명 감독의 역량이다.) 그걸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해낸 것이다.

 

 윌리엄 와일러는 1902년에 태어났다. 스위스 알자스 출신이나, 그 때는 독일 영토였다. 그리고 와일러는 유태인이었다. 그는 1923년에 미국 헐리우드로 건너갔지만, 2차 대전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 지는 이걸로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그는 공군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그 전쟁의 경험과 귀환한 뒤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영화사에 길이남을 최고 걸작, ‘우리 생애 최고의 해’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얼마나 대단한 지를 알려면 폴 오스터의 ‘선셋 파크’를 읽어보면 된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946)


 그는 성공한 삶보다 실패와 전락한 삶을 그릴 때 훨씬 더 뛰어났는데, 그것은 그 역시 인생의 부침(浮沈)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그가 헐리우드에서 초기 경력을 쌓을 때, 그는 “쓸모 없는 와일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영화 ‘벤허’에서 과거의 화려한 삶에서 추락한 벤허의 좌절과 고통이 실감났던 것도, 그런 인생의 그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는 대립 보다는 평화를, 갈등 보다는 화해를 강조했던 감독이었다. 유태인으로서, 독일의 만행까지 목격한 그로서는 더욱 반전(反戰)이 신념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우리 생애 최고의 해’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경향은 오드리 햅번의 매력을 미국에 최초로 알린 ‘로마의 휴일’에서도, ‘우정어린 설복’과 ‘벤허’ 바로 전에 만들어진 ‘빅 컨츄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우정어린 설복 (1956)


빅 컨츄리 (1958)

 

 물론 ‘벤허’는 남북 전쟁 당시 장교로 복무한 루 윌리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바로 전작 ‘빅 컨츄리’와도 설정이 유사하다. ‘빅 컨츄리’는 농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을 둘러싸고 두 가문이 갈등을 일으키는 영화였다. ‘벤허’도 메살라와 벤허의 갈등 구도다. 이런 ‘벤허’의 설정은 사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과 상당히 닮아있다. '벤허'의 이야기를 단순히 말하자면,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가 자기보다 못한 친구가 그것을 질투하여 음모에 빠뜨리는 바람에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러다가 마치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아주 우연한 인연으로 기사 회생하여 다시 친구에게 복수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다. 하지만 루 윌리스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발현된 용서가 ‘벤허’를 ‘몬테 크리스토 백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만든다.

 

 ‘벤허’를 쓴 루 윌리스는 원래 무신론자였다. 그는 남북 전쟁을 몸소 경험했고 전쟁의 참화를 통해 신은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현재 미국이 떠받들고 있는 예수가 실은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려 했다. 그는 자기가 모을 수 있는 한 최대치로 예수의 자료를 모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실제 예수가 복음을 전파했다는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이스라엘까지 몇 차례나 실제로 답사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는 예수가 실존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신은 있다고 믿게 되었고, 그런 회심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벤허’였던 것이다. 즉 소설 ‘벤허’에서 ‘벤허’는 루 윌리스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통해 얻게 된 믿음을 바탕으로 이 지옥과 같은 세상에도 구원은 도래할 수 있으며, 그것은 바로 상대방을 용서하고 사랑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고 소설로 보여주었다. 윌리엄 와일러도 이것을 강조한다. ‘우정어린 설복’은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반전을 부르짓는 영화이며, ‘빅 컨츄리’는 현재 미국의 기원이라는 서부 개척 시대로 돌아가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영화다(.이 영화에서 윌리엄 와일러와 맺은 인연으로 찰턴 헤스턴은 ‘벤허’의 주연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윌리엄 와일러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내내 반전 그리고 용서와 화해를 말해왔다. 왜 그는 이렇게 줄기차게 이런 말을 해온 것일까? 그것은 이 영화들이 만들어졌던 시대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바로 냉전시대였다는 것이다.

 

 때는 소련과 미국이 가열차게 서로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던 시기였다. 곳곳에서 분쟁이, 핵무기 실험이 이어졌다. 언제 또 다시 3차 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알게 모르게 만연해 있었다. 그래서 유태인으로서, 전쟁이 가져올 수 있는 비극의 밑바닥을 체험한 윌리엄 와일러는 서로에게 증오만 부추기는 냉전 시대가 하루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통해 내내 반전과 용서 그리고 화해를 부르짖어 왔던 것이다.

 물론 ‘벤허’도 마찬가지다.(그것이 너무도 잘 드러나 있었기에, 카톨릭을 신봉하는 바티칸마저 헐리우드 영화로써는 유일하게 진정한 종교 영화라고 인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신념, 용서와 화해를 통한 평화에 대한 절박한 간구가 영화에 투영되어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인생 영화로 꼽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이제서야 본 내게도 이 영화는, 그것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그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다시금 세상은 냉전의 그 때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니스에서 어린이를 비롯하여 수 십명의 사망자를 낸 트럭 테러나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갈등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비록 10년 주기로 우리들 앞에 찾아오는 ‘벤허’이지만 지금 우리 앞에 도착한 것이 그저 우연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벤허’가 강조했던 용서와 화해가 정말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와일러가 영화에 담았던 진심이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어, 사람의 삶이 무분별한 증오로 위협받지 않으며 조금은 더 평화의 시대로 다가가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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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성'을 봤습니다. 스포일러 많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말아 주세요. 이 영화는 스포일을 당하면 영화에서 가장 핵심 장면 중 하나인 후반이 의미없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오직 그것만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종구의 혼돈을 관객의 혼돈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믿음과 의심 앞에서 불안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약한 부분을 절감토록 하는 것. 그것이 목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스포일러를 무조건, 모조리 피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나홍진 감독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추격자'와의 유사성이었습니다.

 '곡성'은 여러 면에서 '추격자'와 비슷합니다. 일단 주인공 종구(곽도원 분). '추격자'에서 포주인 주인공 중호(어쩐지 이름마저 비슷하게 느껴지네요)처럼 여성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종구는 장모와 아내 그리고 딸로 이루어진 가족 내에서 유일한 남자입니다. 종구의 직업은 경찰. 중호도 전직 경찰이었지요. 사건에 개입되는 방식도 유사합니다. '곡성'의 첫 장면은 아침 일찍 갑자기 걸려온 전화로 인해 종구가 사건 현장으로 호출되는 장면입니다. 그는 그렇게 사건에 발을 디디게 됩니다. '추격자'에서도 중호가 직접 사건에 뛰어들게 되었던 것은 '4885'라는 전화번호 때문이었죠. 주인공 자신이 정말 마주해야 하는 사건이 다가오는 방식도 비슷합니다. 모두 소문이 먼저였습니다.


종구는 동료 경찰이 말해준, 지금 동네에 떠돌고 있다는 일본 외지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먼저 들었었죠. 중호 역시 '추격자'에서 자신이 데리고 있는 여자로부터 사건의 진짜 내막에 대한 소문을 먼저 듣게됩니다. 그 전까지 중호는 여자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돈을 떼먹고 도망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반응도 똑같습니다. 종구도, 중호도 처음엔 믿지 않습니다. 소문의 당사자와 첫 대면이 우연이라는 것도 겹칩니다. 종구는 일가족이 몰살된 사건 현장이자 불타버린 집터에서 사건을 모두 목격했다고 말하는 무명을 찾다가 느닷없이 조우하고, '추격자'의 중호도 자신이 미끼로 보낸 미진을 찾다가 자기가 살해한 집주인을 찾아온 부부를 살해하고 어디론가 떠나던 범인 지영민과 갑작스런 차추돌로 만나게 됩니다.



 '미끼'란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이미 '추격자'에서 미끼는 나와 있었습니다. 중호는 4885란 번호를 쓰는 사람이 자신의 여자를 납치해 팔아버렸다고 생각하고 그 자를 잡기 위해 미진을 미끼로 씁니다. '곡성'에서 종구의 딸 이름은 '효진'인데, 아이의 상태가 괴이하게 되자 도움을 청해 찾아온 무당 일광(황정민 분)은 아이가 미끼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효진은 중호가 사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 미끼이기도 합니다. 사실 종구는 효진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사건에 뛰어들지 않았을 겁니다. 영화는 초반에 종구가 얼마나 겁많고 소심한 지를 여러 장면을 통해 보여주니까요. '곡성'의 마지막에서 무명은 종구에게 놈이 원하는 것은 가족들의 피를 말리려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면에서도 효진은 피를 말리기 위한 미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광도 종구에게 "미끼를 통째로 삼켜버렸구만'이란 말을 하죠. 


 재밌는 것은 미끼가 되는 존재들도 비슷하게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일단 이름이 미진과 효진으로 비슷하고, 둘 다 미끼가 될 때 몸에 열이 나 아팠습니다. '추격자'에서 미진은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호소하며 남자를 만날 수 없다고 했지만 중호가 억지로 보냈죠. '곡성'에서도 효진이 완전히 달라지기 직전 종구에게 아픔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모두 그 호소는 의미 없게 됩니다.



 범인의 존재도 그러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추격자의 '지영민'과 '곡성'의 일본인은 적그리스도 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영민은 한 때 교회의 신자였으며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원래 교회 집사 부부의 집이었습니다. 지영민은 자신이 살해한 이들을 모두 그 집 정원에 매장하는데, 영화는 그 때까지 계속 예수상을 조각하는 지영민의 모습이나, 그가 살고 있는 동네의 밤이 십자가로 뒤덮인 장면 등을 통해 지영민을 기독교와 연결시켜 갑니다.(지영민의 골방에 붙어있던 그림과 일본인의 숨겨진 방 벽에 붙어 있던 사진들도 유사한 장면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영민을 이렇게 해석할 여지도 갖게 합니다. 지영민이 사실은 적그리스도고, 그는 살인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며 정원에 매장된 시신들은 모두 자신의 신도인 셈이라고.


 이렇게 보면 '곡성'의 일본인과 정말 유사하죠. 마지막 장면에 얼핏 보이는 일본인 손바닥에 난 성흔, 카메라로 자신이 파멸시킨 영혼들을 속박하는 것 등. 그렇게 그 역시 '추격자'의 지영민처럼 신도를 모으고 있었던 셈입니다. 일광이 말하는 '살'로 표현되는 저주가 그의 복음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은 일광의 굿 장면을 통해 더욱 전면적으로 형상화되었습니다. 결국 살이 향한 곳이 다름아닌 효진의 영이라고 생각할 때, 일광의 굿은 굿이 아니라 예배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일단 그가 입은 옷이 전통 무복은 아니죠. 하얀 색이 많은 것이 목사들이 예배할 때 흔히 입는 옷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제 착각일까요? 더구나 말이 전혀 없고(우리나라 굿은 응답 과정이 있으니까요) 시끄러운 음악과 현란하면서 과장된 몸 동작은 부흥회 같기도 하고, 염소 도살 같은 것은 구약의 번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다 효진 방의 제단 위에 놓인 소도 있지요. 그 소도 구약 때 번제에 사용되던 대표적인 동물이었습니다. 특히나 일본인이 되살린 시체가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예수의 나사로를 뜻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죽음에서 나사로를 되살렸듯 일본인이 되살린 것이죠. 하지만 일본인이 되살린 나사로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가져 옵니다. 동일한 행위, 정반대의 결과. 일본인이 가진 의미가 보다 명확해지는 순간이죠.


 이런 면에서 '곡성'은 '추격자'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었던 기독교적인 종말론 분위기가 더욱 확대되고 뚜렷하게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수긍한다면 감독이 첫 작품부터 관객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지금도 반복하는 것이며 다만 이번엔 좀 다른 방식을 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추격자'와 '황해'에서 거듭되었던 감독의 말은,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지옥이 바로 우리 발 밑까지 와 있으며 거기서 우리를 구원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추격자는 그래도 중호가 희생자의 아이를 떠맡으면서 희망의 싹이라도 보였지만 '황해'는 그조차 없습니다. '황해'의 주인공을 우리는 구원을 위해 별 짓 다하는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주인공 이름이 무엇보다 여기에 대한 증거가 아닐까요? 구남. 그대로 구원(영화에선 아내로 표상되었죠.)을 구하는 남자로 해석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천신만고라는 말이 결코 비유가 아닐만큼 그는 갖은 구원을 향한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얻는 것은 구원이 이미 상실되었다는 사실과 자신의 초라한 죽음 뿐이었죠. 결국 그는 돌아가지 못하고 황해가 그의 무덤이 됩니다.


 저는 '곡성'에서 종구가 일본인을 잡기 위해 높은 절벽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눈에 띄더군요. '황해'에서도 구남이 추운 겨울날에 높은 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냥 하는 생각으로 들어주셨으면 하는데, 이것은 바벨탑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종종 인간의 능력은 '바벨탑'처럼 얼마나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는가로 그 우수성을 표현하기도 했었죠.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처럼 말이죠. 의미심장하게도 종구가 그 곳에 올랐을 때, 카메라는 흔들려 불안하게 그를 잡습니다. 비상 보다는 추락의 위험을 더 전해주기 위해서 말이죠. '황해'에서도 구남이 산으로 올랐던 것은 달아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총상마저 입어 그 높은 곳은 죽음의 접경이기도 했습니다.



 '곡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구의 몸은 비틀거리기까지 해서 더욱 추락의 위험을 가중시킵니다. 같이 간 친구들이 말리기까지 하죠. 인간의 위대함의 증거가 되었던 가장 높은 곳이 이제는 가장 위험한 곳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높은 곳으로 올라도 구원은 커녕 불안만 가중될 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올라간 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일본인이 바로 아래 있습니다. 이제 곧 지옥을 열 지도 모를 그 존재가, 바로 발 아래 보이지 않게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보기엔 '곡성'의 주제를 집약해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이 지옥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는 것.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 지라도 그것은 바로 우리 발 밑까지 와 있다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곡성'에선 주로 가족이 거주하는 집이 파괴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이렇게 영화 본편에서 한 가족이 살던 집이 파괴당하는 장면은 감독의 영화에서 없었습니다. '추격자'는 나중에 간접적으로 전해 들을 뿐이었죠. '황해'에서도 가족이 생계와 불륜으로 붕괴되긴 했지만 완전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곡성'은 시작부터 가족 몰살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앞 장면인 종구의 가족이 모두 모여 아침을 먹는 모습에 더욱 대조됩니다. 원래 종구는 아침을 먹지 않고 사건 현장으로 거려 했습니다. 그러나 장모가 이런 말로 그를 붙잡습니다. "사람이 죽었어도, 산 사람은 먹어야 한다."


 '추격자'와 '황해'까지는 그렇게 별개의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습니다. 시대가 불안할수록 종종 가족은, 그들이 거주하는 집은 유일한 피난처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럴 수 없습니다. 가족은 몰살당하고, 그 집은 전소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에 의지해야 하나? 남은 것은 신 밖에 없습니다. '곡성'은 감독의 작품 중, 처음으로 신이 우리 앞에 현현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마치 마지노선이 무너져버린 것처럼 신이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신이 거하는 장소가 두 번 잡히는데(감독은 성당의 모습을 똑같이 보여 단독자 신이 거하는 장소의 유일성을 강조합니다.), 외관은 언제나 요괴가 출몰하는 어스름의 시간대에 낮게 웅크려 있고, 그 내부는 어둡고 비어있습니다.(외관의 모습은 마지막 장면에서 신이라고 할 수 있는 무명이 앉은 모습과 비슷합니다.) 신부는 작고 초라한 몰골이고, 부제 역시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신인 무명 역시 종구의 비극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종구에게 종말이 닥쳐온 순간, 신은 무력하게 어두운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있을 뿐입니다.(무명을 신으로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영화에서 가장 먼저 경계를 넘는 자라는 것. 그리고 '금어초'로 경계를 만드는 자라는 것 때문입니다. 경계를 초월하고 짓는 것은 신의 대표적인 속성이죠. 그녀가 종구에게 '아이의 아비가 죄를 지어', '의심' 운운 한 것도 그녀가 신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아이의 아비'는 성경에서 흔히 나오는 표현 방식이고, 죄와 믿음은 종교에서 신의 권위를 위해 가장 강조하는 것들이죠. '욥기'에서 왜 자신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냐고 욥이 묻자 전혀 알 수 없는 대답을 하여 욥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신처럼 무명 역시 그렇게 대답합니다. 종구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신의 대답은 인간의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데 더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욥'에서 신이 자신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신조차 무력합니다. 손까지 잡았는데도 종구의 비극을 막지 못합니다. 무기력하게 쪼그리고 앉은 모습이 우리가 영화에서 마지막 보는 신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곧 어둠에 먹힐 것 같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없습니다. 영화 초반의 유모차와 마지막 효진의 모습에서 미래마저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남은 것은 이 끔찍한 지옥으로서의 현재. 종구는 언제가 효진에게 했던,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버린 말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면서(아마도 이름이 종구인 것은 이런 중얼거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마지막 장면의 그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끝내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 독백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닮았을 지 모릅니다. 장모가 처음 그에게 했던 말. '산 자는 산 자고, 죽은 자는 죽은 자다'. 그 말의 본질은 '아직 우리는 죽지 않았으니 괜찮다. 우리는 그것을 피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일 겁니다. '세월호'나 '강남역 무차별 살인' 같은 타인의 비극을 보아도 그게 적어도 내게 닥친 것은 아니니까 무심할 수 있는 마음의 본질에도 놓여 있는 말이죠.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아닐 거야, 난 그렇지 않을 거야' 하는 말은 종구의 마지막 독백처럼 허황된 주문에 불과합니다. 지옥은 벌써 우리 발 아래 와 있고, 언제라도 우리를 삼키려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이 바로 영화 초반에 언급된,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반복되는 누가 복음이 인용된 진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꼭 만져봐야 아느냐란 그 말은 직접 당해봐야 꼭 알겠느냐?'로도 얼마든지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 누가 복음 24장: 37~39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조우하는 비극들 중에 우리와 무관한 것은 없다. '곡성'은 그것을 보여주려는 영화가 아니었을까요? 그랬기에, 영화 초반 그 비극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처럼만 보였던 종구가 결국엔 같은 운명을 걷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영화 초반, 종구는 사건 현장에 가장 늦게 오고, 와서도 멍하니 구경만 했습니다. 카메라는 현장에서 멀찍하게 벗어난 종구나 화면 구석으로 밀려난 종구를 많이 보여주죠. 그렇게 멀리, 얼마든지 구경꾼이 될 수 있는 그였습니다만 사건의 당사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파출소 정전 장면은 그래서 더 인상적입니다. '버섯 때문이래' 하면서 소문을 전혀 믿지 않았던 종구가 느닷없이 현관 유리창 바로 앞에 나타난 나신의 여인을 목격하니까요. 문자 그대로 그것은 엄습입니다.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막을 수도 없습니다. 일광의 말처럼 이유도 없습니다. 종구는 이유를 찾고자 하지만 신의 대답은 아무 이유도 없다는 사실만 밝혀줄 뿐입니다. 그러니 더욱 어떤 비극도 나와 별개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타인의 비극이든 무심해서는 안되며 나의 비극인 것처럼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곡성'이 말하는 것은 달아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만이 피할 수 있고, 안심할 수 있는 문제란 없다는 뜻입니다.


 타인의 비극에 대한 둔감과 망각이  결국은 우리 파멸의 열쇠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영화는 잘 보여주는 듯 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너무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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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 2016-05-27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무섭고 의미잡기가 어려운 줄만 알았는데, 그렇게도 볼 수 있다는 점.. 대단하시네요. 욥기의 주제와 관련시킨 점에 뭔가 머리를 둔기로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최근 <욥의 노래>라는 민음사의 시집에서 비슷한 해석을 읽었는데, <곡성>이란 영화도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랐습니다. 이 블로그를 여기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3467498 도서평에 소개할께요.^^

에일로이 2016-06-09 23:59   좋아요 0 | URL
페라리님, 댓글이 많이 늦었네요. 좋게 봐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곡성의 마지막에서 종구와 무명의 대면은 제게 꼭 욥과 하나님의 대면처럼 보이더군요. 욥이 그 때 신에게 자신의 고통에 대한 이유를 물었듯이, 종구도 무명에게 그런 것을 묻는 것 같았어요. 욥기를 다룬 시집이 있다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꼭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2016-05-30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0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6-07-2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그저께 되어서야 한 번 보고,
어제 안 되겠어서 한 번 더 보았답니다..... 참 어려운 영화예요.

댓글을 하두 늦게 달아서 헤르메스님이 확인이나 하실 수 있으실지, ^^, 의심과 두려움, 공포로 인해 악으로 빠지는 인간의 나약함과 그것을 흡수하여 점점 세력이 커지는 ˝악˝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했습니다.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우리는 지나치게 자주 의심과 두려움으로 빠지는데, 신은 그저 ˝하지 마˝ 라고 하시더군요.
 


 

 이제 한 해도 얼마남지 않았긴 하지만 이 뒤로 올해 어떤 영화를 보던지 이 영화보다 더 뇌리에 오래 남을 작품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정말로 너무나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그만큼 더 오랜 여운에 젖게 되는 영화다. 예상은 했어야 했다. 절망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린다면 그 어떤 작가보다 더 어둡게 그릴 수 있는 코맥 매카시가 원작자고 이 영화의 감독이 얼마 전에 친동생인 토니 스콧을 그의 자살로 잃어버린 리들리 스콧이었음을 알았다면 말이다. 이렇게 너무도 절망적이고 어두운 영화라는 걸 짐작은 해야했다. 나는 어쩌면 예고편에 속았나 보다. 시치미 뚝 떼고 너무나도 스릴러다운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꽤나 빼어난 재미의 스릴러일 것이라는 내 예상은 보기 좋게 깨어지고 나는 마지막 장면의 절망과 참혹함 앞에서 마치 소태를 곱씹듯 짜디 짠 소금의 심장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감히 말한다. 카운슬러는 절망의 기록이다. 아주 길고도 깊은... 



 

  요즘 대세 배우의 주연 마이클 패스벤더를 비롯하여 역시나 코멕 매카시의 원작을 바탕으로 했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후덜덜한 연쇄 살인마 '안톤 쉬거'를 연기한 하비에르 바르뎀하며 뭐, 브래드 피트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다 페넬로페 크루즈와 카멜론 디아즈까지. 이런 호화 배역으로 무장한 영화이니만큼 군침을 흘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 배역 앞에서의 나는 치즈를 바로 코 앞에 둔 생쥐와 같았던 것이다. 그것을 한 입 배어 물었을 경우, 혀 끝에 와 닿는 치즈의 달콤한 맛을 느낄 사이도 없이, 무정한 덫에 갇혀버리게 될 생쥐. 


 난 정말 그렇게 느꼈다. 물론 이 말이 이 영화가 엉망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천만에! 이 영화는 올해 내가 본 그 어떤 영화들 보다도 좋았다. 감히 걸작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걸작의 정의를 무엇으로 내리든 간에 어쨌든 이 영화는 참으로 오래도록 내내 곱씹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걸작이 그런 것 아니던가? 내내 그 영화가 만든 세계에 빠져서 허우적대며 헤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카운슬러'는 그런 영화다. 이건 늪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배들의 무덤이라는 사르갓소다.

 우리는 그 늪에서, 삶이라는 걸 본다. 삶이 가진 무정한 진실. 늘 우리의 예측을 빗나가며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항상 등에다 비정한 비수를 꽂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게 바로 삶이라는 잔인한 진실.



 페넬로페 크루즈는 그런 순진한 우리들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영화에서 한없이 착하고 그야말로 순결한 천사 같았던 그녀는 가장 끔찍한 모습으로 정말 문자 그대로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진다. 이토록 삶이 마련한 반전에는 선악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누가 착한 일을 하면 보상을 받는다고 그랬나? 삶이란 정글이며 가장 잔인한 형태의 약육강식만이 있을 뿐인 것을.


  그리고 그 약육강식에 포식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저 모든 인간적인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더욱 잔인한 형태의 진실만이 있을뿐.

코멕 매카시와 리들리 스콧은 한 목소리가 되어 말한다. "네가 서 있는 곳을 똑똑히 보란 말이야!"라고.


  여긴 영화 초반에 표범들이 질주하는 숨을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황야며, 우리들은 오로지 그들의 입에 먹히기만을 기다리고있는 멍청한 토끼들이라는 것을.

  그 사냥을 보며 하비에르 바르뎀은 '난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은 다시는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그의 여친인 카멜론 디아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너무 차갑군."

  그러자, 카멜론 디아즈는 이렇게 응수한다.

 "확실한 사실에는 온도라는 게 없어."




 현실은 비정하기 이를 데 없고, 거기서 어떤 인간미를 찾는다는 건 오만이다. 아니, 그 비정함을 잊고 싶은 무익한 노력이 빚어낸 싸구려 환상일 뿐이다.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런 인간미가 아니라 먹느냐 먹히느냐 그것만이 전부인 것이다. 브래드 피트처럼 아무리 대비를 잘해도 어쩔 수 없다. 결국엔 먹히게 된다. 이런 세상은 진실로 단 한 명의 포식자만 허락하니까. 그런 세상에 발을 들였음을 주인공 마이클 패스벤더는 절규 속에서 깨닫게 된다.


 환영은 걷어치워!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세상이란 산타클로스가 아직도 있다고 믿는 유치한 아이들의 몽상에 불과하다고.


 하비에르 바르뎀의 목을 조이는 흉기에 대한 이야기, 브래드 피트의 스너프 필름을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 그걸 모두 듣게 되는 마이클 패스벤더는 그게 그저 지어낸 이야기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현실로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세상에 진짜로 존재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이 영화의 유일한 포식자가 나중에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몽상은 산산히 깨어지고 우리가 확인하는 건 내 발이 디디고 있는 이 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사실 뿐이다.


 '카운슬러'는 그런 영화다. 현실이 바로 지옥임을 알려주는 영화. 요한 계시록이 예언했던 지옥의 문이 이미 열렸음을 말하는 영화. 여기에서 달아날 길은 없다. 영화 마지막에 마이클 패스벤더에게 도달한 DVD 한 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이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서는 당신의 길고도 검은 그림자 속에서 갈퀴처럼 무수하게 뻗어나와 당신의 뒷덜미를 부여잡게 될 말이다.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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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1-1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런 영화였군요... 저도 스릴러인줄 알았는데,
마음의 준비를 하고 봐야겠네요. '현실이 지옥임을 알려주는'... 은 너무 슬퍼요.
그 지옥을 바로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요즘 정치판을 보면
저는 저런 문구가 꼭 거짓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ㅠㅠ

에일로이 2013-11-20 00:50   좋아요 0 | URL
저도 정말 후반으로 갈수록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역시 코맥 매카시더군요. 처음부터 기억해둘만한 대사들이 연속적으로 나와서, 리들리 스콧의 연출이나 배우들 연기 감상에 집중하는 것마저 다소 어려웠어요.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이름으로 안 불리고 계속 카운슬러로만 불러요.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그는 카운셀러해 주는 것은 없고 계속 다른 이들로 부터 카운셀러를 받는다는 것이죠. 거기서 바로 드러나는 것이,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빈약함, 순진함이죠. 이는 초반 다이아몬드 세공사의 말에서도 등장하는데 아무튼 이 영화는 우리에게 냉혹한 직시, 냉철한 사유. 이러한 태도를 자꾸 권유하는 듯 해요. 참혹하기가 이를데 없는 지금의 정치판을 보면 더욱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도 싶네요.ㅠ ㅠ
 

 

 

 

 

 

 

 

 솔직히 빔 벤더스의 영화들은 한 개인을 다룰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니콜라스 레이를 다루었던 '물 위의 번개'가 그랬고 오즈 야스지로에게 헌정되었던 '도쿄가'도 그랬다. 그의 영상은 아무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마치 전혀 모르는 낯선 인물을 처음 대하듯 하는 새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 새로움 속에서 마치 이제까지 그저 정사각형의 평면으로만 알아왔던 것이 정육면체의 입체라는 것을 알게 되듯 더 깊이 그리고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번에 나온 피나 바우쉬에 대한 영화도 그러하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나 '카페 뮐러'등 그녀의 작품들을 새롭게 재현하면서 또 그녀와 함께 했던 동료들의 회고담을 통하여 드러나는 피나 바우쉬는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피나 바우쉬가 아니라 재현된 그 순간, 절대로 똑같이 반복될 수 없는 동작의 한 순간이나 공중에 떠오른 물방울의 위치처럼,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비록 빔 벤더스의 필터를 거친 피나 바우쉬의 삶이라 할지라도 그건 빔 벤더스의 피나 바우쉬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순간 우리들 자신의 피나 바우쉬라는 점이다. 당신이 피나 바우쉬를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이 영화를 통해 만나는 피나 바우쉬는 오로지 당신만의 피나 바우쉬라는 것이다. 흔히들 영화는 공감을 토대로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빔 벤더스의 '피나'만큼은 여럿이 춤을 추더라도 개인들의 동작은 다 다른 피나 바우쉬의 무용처럼 피나 바우쉬와 당신만의 일대일 개인적인 대면이다.

 

 

 그것을 위해서 빔 벤더스 자신은 ;비록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지기는 하나 자신이 일종의 필터로 개입하는 것을 최소화 했다. 일단 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로 전개되지 않는다. 무용과 삽입되는 회고 인터뷰는 최소한의 안내도 없이 무작위로 관객에게 던져진다. 그 앞에서 관객은 마치 무작위로 내던져진 퍼즐 조각을 대면하는 듯한 느낌마저 가지게 된다. 이러한 불친절하고 낯선 형식 때문에 이 영화는 그대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가진다. 영화란 늘 누군가의 의식과 눈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관객은 그의 눈과 의식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소외효과'란 관객에게 미칠 수 있는 감독의 시각과 의식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다. 즉 관객이 오로지 자신의 눈과 의식으로 자기만의 이야기로 영화와 대화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빔 벤더스가 이 영화에서 불친절하고 낯선 형식을 가져온 것도 그 이유였다. 이 영화는 피나 바우쉬와 당신만의 대화이며 당신만의 이야기로 이 영화를 채우라는 것이다. 그것은 회고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거기서도 빔 벤더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터뷰 장면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늘 보아왔던 인터뷰 장면과는 달리 이 영화에선 그들의 말과 그들의 얼굴이 따로 논다. 말은 들리는데 보여지는 얼굴은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상과 음성의 불일치는 기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말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진짜 저 사람의 말이기나 할까? 하는 생각으로 영화에서 한 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빔 벤더스가 이렇게 하는 것은 인터뷰 역시도 지금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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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뷰인데, 검색을 해보니 영화 범주 자체가 사라졌군요. 아마도 영화 리뷰는 못 올리는 듯 하여 페이퍼로 올립니다.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프랑스의 교실 하면, 르네 고시니의 '꼬마 니콜라'에서 여실히 보여주었던 아주 소란스럽고 통제불가능한 교실이 먼저 떠오릅니다. 거기, 장학사가 시찰 나오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시찰 나온 장학사마저 니꼴라가 있는 교실 아이들에 엄청 시달린 나머지 결국은 담임선생님의 손을 꼭잡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무척 존경스럽습니다. 선생이란 직업이 이렇게
                         성스러운 것인지 정말 몰랐어요. 오늘에야 그걸 알았습니다.
                         용기를 갖고 계속 열심히 가르쳐보세요. 힘내세요!"

                                                                                   ( 꼬마니콜라 p.56 )

  프랑스에서 교실이 선생님과 아이들의 전쟁터가 된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같습니다. 우리나라 처럼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에겐 생경하게 보일지 몰라도 말이지요. 그렇게 우리 역시 엄한 규율 속에 교육을 받아와서 그런지 우리들은 같은 프랑스 교실을 다루고 있는 로랑 캉테의 이 영화 '클래스'에서도 어쩐지 선생님 마랭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그 선생님의 눈으로 학생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더없이 소란스럽고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선생님에게 당당하게 공격까지 감행하는 학생들이 당장 매를 들어서라도 질서와 예의를 가르쳐야 할 것 같은 말썽꾼들로만 보입니다.


 
 영화는 마치 그런 관객의 기분을 예상하기라도 한듯,
마랭의 아주 힘든 수업시간을 보여주고 그 뒤엔 아예 동료교사 하나가 마치 마랭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학생들에 대해 너무 분노한 나머지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폭발하는 모습마저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동료교사의 모습이 정말 이해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꼬마니콜라'에서 선생님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던 그 장학사처럼...
 

  마랭이 속한 선생님들의 세계에선 학생들에게 규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고 다른 아이들의 학습권을 보호해줘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들도 공감합니다. 뭔가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아이들로 부터 이러한 항변을 듣게 됩니다.

  "왜 자기들도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프레임으로만 가두려 하느냐"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그들도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아이들이 각자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그렇게 마랭이 학생들로 부터 이해받고자 했던 것과 똑같이 아이들도 마랭으로 부터, 마랭이 속한 선생님의 세계로 부터 이해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랭은 자기의 입장만 중요합니다.  그들은 마랭으로 부터 배워야만 하는 존재들이고
그 방향은 절대로 거꾸로 될 수 없다고... 학생들이 선생님을 이해해야지,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이해해달라 요구할 수 없다고...
  그건 이미 마랭에게 감정이입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해받지 못했던 아이들도 그렇게 동료교사가 폭발했듯이 결국 터져버리고 맙니다. '슐란'처럼 말이죠. 

  감독의 의도였는지, 이렇게 선생님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 각각에서 이해받지 못함에서 오는 분노에서 터져나온 '폭발'이 한 번씩 일어납니다. 영화는 마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처럼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날 것'의 현실을 아무런 형식없이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이처럼 묘하게도 댓구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전적으로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려고 하지만은 않고 보다 분명하게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개입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 쪽 세계의 구성원들이 한 번씩 분노로 인한 폭발을 일으킨다는 것도 그렇지만, 더하여, 영화의 앞부분에는 선생님들이 자신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소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의 끝부분에는 아이들 각자가 자신들이 무엇을 배웠는지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일종의 수미쌍관이랄까요? 아무튼 이러한 구성은 언뜻보면 교육의 방향이 절대로 비가역적일 수 없다는 마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영화는 전혀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배웠는가를 말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초반의 선생님이 가르치려 했던 것과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주려했던 것과 아이들이 얻게 된 것엔 아주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얻게 된 것도 선생님의 도움이 아니라 저마다 가지고 있던 개성들이 그저 발현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일례로 마랭을 가장 속썩였던 그래서 마랭으로 부터  창녀라는 모욕을 들었던 한 소녀는 교과 과정에는 전혀 없었던 '플라톤의 국가'라고 대답합니다. "정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져 묻는 마랭에게 그녀는 "왜 그러세요? 창녀라고 했던 제가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어서 놀랬나요?"라며 카운터블로우를 날립니다. 이렇게 영화는 마랭이 주장하던 '교육 방향의 비가역성'을 비틉니다.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은 연속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건 차라리 단절에 가깝다.' 이렇게 말이죠.


 

  결국 이러한 의도된 영화의 구성은 우리에게 그 단절, 그러니까 선생님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가 하나가 아니라 앙 쪽으로 갈라져있는 세계이며 교실은 바로 그 두 세계가 대치하고 있는 하나의 전장 처럼 느끼게 합니다. 무엇보다 캉테가 이렇게 단절과 대치로 교실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관객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관객들이 선생님과 학생간 관계를 바라보는 데 있어 흔히 끼고 보는 '수직적 권력 관계'라는 선입관 때문이죠.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마랭의 교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러한 선입관이 깊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니까요. 바로 캉테는 그러한 우리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떼어내기 위해서 질서 보다는 혼란을, 평온 보다는 전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캉테는 그것을 교실 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그 묘사를 담는 카메라의 움직임에도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특히나 카메라가 어떤 높이에서 인물들을 담는가를 보면 이것은 확연히 드러납니다.

  일단 영화에서 카메라가 '선생님들만의 세계' 혹은 '아이들만의 세계'(수업 시간 외에는 사실상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만)를 찍을 때는 그대로 눈높이에서 담습니다. 카메라가 찍는 높이는 바로 그 찍히는 대상을 향한 시선의 높이에서 관객이 받는 느낌 때문에 종종 어떤 권력의 역학관계를 암시하게 되는데 그 때문인지 로랑 캉테는 카메라가 위로도 아래로도 치우치지 않도록 아주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렇게 그저 서 있는 혹은 앉아 있는 눈높이에서 평등하게 선생님들만의 세계 나 아이들만의 세계를 담아내려 노력합니다. 마치 '그들만의 세계'는 지극히 평등하며 안정적이고 단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듯이 말이죠.
  

   이 두 세계가 충돌하는 교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마랭과 학생들이 설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더욱 더 그렇습니다. 클로즈업된 마랭과 똑같이 수평적 위치에서 잡히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세계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깁니다. 그렇게 그들의 주고받음은 마치 고대 그리스에서 저마다 동등한 입장에서 발언했던 민주적 광장의 상징으로 일컫는 '아고라'를 연상시킵니다. 거기엔 어떤 지배도 훈육도 없고 오로지 '동등한 참여'만 있는 것이죠. 하지만 종종 카메라가 반복적으로 잡아내는 장면 때문에 이 교실은 '아고라'와 더불어 다른 또 하나의 분위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 장면은 바로 학생들의 머리 위로 홀로 서 있는 마랭의 모습입니다.
 


  카메라는 자주 그것을 보여주는데 그저 머리와 뒷 모습만 보이는 아이들 위로 홀로 우뚝 서서 활발하게 손을 움직이거나 몸을 움직이며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는 마랭의 모습은 보면 볼수록 어쩐지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두고 군중과 대치중인 고독한 군인과 같아 보입니다. 특히나 아이들이 반론을 전개할 때 그가 보여주는 활발한 손놀림과 몸놀림은 마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듯 보입니다. 그렇게 영화는 그 장면의 반복으로 교실을 하나의 '전장'으로 만듭니다. 여기에 언젠가 과거 프랑스에 있었던 '파리 꼬뮌'의 기억이 끼어들면서 '아고라'의 개인적인 대치 관계가 '파리 꼬뮌'의 집단적인 대치 관계로 이행됩니다. 주의깊게 보면 카메라가 담아내는 장면들이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캉테는 교실이라는 하나의 공간에다 개인과 개인간, 집단과 집단간 동등한 소통을 집약시켜 보여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나 이러한 교실의 모습은 역시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선생님들 세계'와 비교해보면 더욱 더 두드러집니다. 선생님들의 세계는 교실과 전혀 다릅니다. 거기선 대화도 차분하고 조용하며 설사 견해가 다르더라도 서로 존중하지 비아냥거리거나 막말이 오고가지는 않습니다. 분로로 폭발하는 교사가 있더라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따뜻하게 위로해 줄 뿐입니다. 하지만 마랭의 교실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기습적 공격이 있고 연속적인 발포와 응사가 있습니다. 더러 수류탄 투척과도 같은 난데없는 인신공격까지 감행되기도 합니다. 이 두 세계의 모습이란 이렇게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캉테는 왜 이렇게 보여주는 것일까요? 이 두 세계의 모습은 그야말로 소통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나는 완전한 소통과 다른 하나는 불완전한 소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두 세계가 서로 성격이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세계는 단일한 세계라는 것이고 교실은 두 세계가 서로 대치중인 세계라는 것이죠.
 

  그런데 영화에서 선생님들만의 세계는 그려지는데 어인일인지 아이들만의 세계는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모습만 나오는 것은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의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모습뿐입니다.  이것은 영화가 아이들이라는 주체를 배제시키겠다는 의미일까요? 만일 영화의 의도가 그런 것이었다면 굳이 교실의 풍경을 화면에 그렇게 담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엔 다른 의도가 분명 개입된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여기엔 '바라보기'의 주체가 있습니다. 운동장을 담는 카메라의 이동에서 드러나듯이 거기엔 교실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주체, 단일한 세계에서 대치중인 건너편의 집단을 바라보는 주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로 부터 고통을 당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보여도 선생님으로 부터 고통을 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영화가 잘 담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두 세계가 보여주는 소통의 서로 다른 모습 또한 그 중 어떤 세계의 소통이 나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세계에 서로 다른 주체들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어쩌면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치부될 수 있을 그 관계를 보다 넓혀서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로 보도로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잊고 있는 교육에 있어서 구조적인 측면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맞습니다. 여기엔 사실 구조적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점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경계선들이 있습니다. 그 경계선들은 시민권자와 이민자들을 나누고 잘 사는 계급과 못 사는 계급을 나누고 그 나라말을 할 수 있는 자와 할 수 없는 자를 나눕니다. 그렇게 교실인 한 개인의 문제만으로는 치부해버릴 수 없는 수 많은 모순들이 집약되어진 그러한 공간입니다. 때문에 마랭 혼자만의 힘으론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건 구조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점들이기 때문이죠. 때문에 얘기를 이어왔던 대로 영화는 관객들이 그것을 구조적인 시각으로 보도록 하기 위해 저렇게나 많은 세심한 연출들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연출들이 진정 의도하는 바가 눈에 뜨인 순간 우리는 이제 영화를 전혀 다른 쪽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거기에 있어 가장 큰 변화는 마랭을 바라보는 시선일 것입니다. 영화 처음 우리 눈에 마랭은 정말 희생자처럼 보입니다. 그가 선생님 권위 운운하며 아이들에게 훈계할 때 조차 안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죠. 결국 어쩔 수 없이 폭발한 슐란을 교장에게 데려가는 장면에선 한없이 나약해진 그의 모습에 동정을 보내기도 합니다. '열심히 하려는데, 이렇게 민주적으로 대하는데 아이들은 왜 날 이해하지 않고 따라와 주지도 않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원망하면서 때로 의자를 걷어차거나 홀로 식당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노라면 연민마저 느껴지면서 격려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마랭은 희생양으로 보입니다. 그저 소통하려 들지 않고 다혈질이기만 한 아이들 앞에서 피해자인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의 시선은 옳았던 것일까요? 영화가 보여준 구조적인 측면들이 눈에 띈 순간 우리들은 알게 됩니다. 그러한 우리들의 시선이 착각이었음을 말입니다. 왜 착각이었는지를 이제부터 말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번역하자면 '벽들 사이에서' 입니다.
제목만 봐도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바로 벽들을 가로지르는 '소통' 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목 대로 영화는 그렇게 구조적으로 단절된, 그렇게 벽으로 가로막힌 두 개의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백인들 중심의 선생님들 세계와 다인종으로 혼합된 아이들의 세계. 그리고 두 세계는 여러가지 면에서 분명 서열화가 가능한 세계였습니다. 그렇게 우월한 세계와 열악한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였습니다. 교실에서 마랭은 이 두 세계가 전혀 우열로 나뉘지 않는 공간임을 강조하지만 결국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음이 드러납니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영화는 차례로 떨어져나가는 학생들과 아예 존재감 자체가 지워진 학생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져나가고 지워진 학생들을 통해 거꾸로 벽이 없다고 말하는 교실에 분명한 벽들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다 분명히 함으로써 거꾸로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떨어져나가거나 지워진 이유들을 생각하면 '보이지 않는 그 벽들'의 정체가 보다 분명해 집니다.

  첫째는 언어입니다.

  이제 '꼬마 니콜라'의 교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랭의 교실은 거의 반수 가까이가 이민자의 자녀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프랑스어 하나로 완전히 통하던 시대는 이제 가버린 것이죠. 교실엔 아직 프랑스어에 익숙치 못하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대놓고 모국어와 혼용해서 쓰는 아이들까지 존재합니다. 마랭은 그런 그들에게 프랑스 문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영화는 중국이민자 "예예"와 결국은 퇴학을 당하는 "슐만"을 통해서 이 언어의 장벽을 드러냅니다. 중국인 "예예"는 말이 서툽니다. 그래서 아마도 아이들과 제대로 아이들과 어울릴 수가 없는 것인지 그는 거의 내내 홀로 있습니다. "슐만"은 결국 그릇된 학습태도로 퇴학을 당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 이유는 그가 글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슐만의 어머니 역시 영화에서 유일하게 통역이 있어야만 얘기할 수 있는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결정적으로 교장단 앞에서 프랑스어를 못해서 아들을 제대로 변호하지 못하는 바람에 슐만은 퇴학을 당하게 됩니다. 슐만은 퇴학을 당해 아프리카로 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예 역시 그의 어머니가 불법체류자로 체포되는 바람에 강제송환 당할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슐만과 예예는 결국 똑같은 이유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언어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면 그 사회에 머물지 못하고 떨어져나간다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것은 교실에 있는 저 많은 다문화의 아이들은 사실 언어로 인해 언제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의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온갖 난처한 질문과 야유로 마랭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이야 말로 언제 어느 때 사회로 부터 몰림을 당해 떨어져나갈지 알 수 없는 존재들 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려는듯 영화에 나왔던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영화 초반 그러니까 새학기가 시작될 때 분명 교실에 있었던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예예의 짝궁으로 같은 중국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우리는 영화에서 그녀의 존재를 볼 수가 없습니다. 마치 그대로 홀연히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듯 그녀의 존재는 영화에서 내내 지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프랑스 말을 하나도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언어를 못하는 것이 곧 존재의 상실로 이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실로 무서울 수 밖에 없는 묘사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교실에 있는 그 어느 아이도 이것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언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여전히 남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특히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아이들이 한 학기 동안 무엇을 배웠는가 말하는 장면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모든 학생들이 다 자신이 배운것이 뭔지 말하고 나서 교실을 나간 뒤 앉아있는 마랭에게 한 소녀가 다가옵니다. 그 소녀는 새학기가 시작될 때 마랭이 가장 먼저 말하게 했던 그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가 영화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마랭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직업학교엔 정말 가기 싫어요."
 

  가장 마지막으로 학생의 말을 듣는 마랭의 모습을 이제 카메라가 보여줍니다. 묻는 여학생의 눈이 분명 보고 있을 그 모습 그대로 아래에서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마랭의 모습을 말입니다. 이건 영화에서 유일하게 보여지는 내려다보는 각도, 즉 권력의 시선이었습니다. 그토록 주의깊게 시선이 가지는 권력 효과를 지워왔던 캉테가 유독 여기에서만은 권력의 시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그녀의 물음에 마랭이 아무런 대답을 못할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캉테는 보다 직접적으로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의 미래가 교육으로 얼마나 나을 수 있는가를 말해왔지만 사실 당신이 해왔던 것은 그들의 미래를 거짓으로 꾸며 그들로 하여금 이 현재에 더욱 더 종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가. 당신이 가르쳤던 그 부르조아들만이 쓰는 프랑스 문법 처럼 그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팔아 현재의 비참함을 지속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었나?"하고 말입니다.
 

  캉테의 이 무언의 질문에서 우리는 언어와 더불어 또 하나의 벽을 선명히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계급입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읽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재생산'이란 책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가난한 이민자의 자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가난한 이민자 자녀들에게 직업학교는 선택사항이 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가게 되는 곳이고 그렇게 그들은 노동자 계급을 지속적으로 충원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열려진 유일한 미래라고 말입니다. 결국 부르디외는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현재 프랑스 공립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은 결국 안전하게 사회가 지속될 수 있도록 계급을 재생산하는데만 일조하고 있을 뿐이다." 라고. 부르디외의 이 결론과 캉테가 묻고자 하는 근본적 질문은 이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이 얘기들이 시작되었던 애초의 질문, 그러니까 왜 마랭을 희생자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착각이었나에 대해 보다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꼬마 니콜라'의 그 어린이들은 이제는 자라나서 프랑스의 주류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가 묘사하는 선생님들의 세계가 바로 그 니콜라의 세계처럼 단일한 백인들의 세계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캉테가 영화 내내 묘사해왔던 대로 단일해서 안정되고 안전한 세계였습니다. 마랭은 바로 그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어쨌든 '예예'나 '슐람' 그리고 그 여학생 보다는 배제되기 어려운 위치에  서 있는 건 사실이죠. 그렇게 피해자로만 보이던 마랭은 사실 갑각류 처럼 세계로 부터 아주 단단하게 보호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가해자들로만 보였던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사회적 조건들 때문에 언제 어느때 지워지고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드러나듯이 우리들은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캉테가 이렇게 우리의 오해를 지적하는 것은 보다 깊은 윤리적 목적이 있습니다. 앞서 영화가 두 세계를 그렇게 보여준다는 것은 '바라보기'의 주체를 설정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캉테가 교실이 은폐한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들이 하고 있는 오해를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캉테는 그 '바라보는' 윗 세계의 주체들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사정은 이러합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포용해주어야 할까요?"
 

   대답은 굳이 여기서 적지 않아도 명확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하지 못할 누군가를 위해 캉테는 눈높이 선생님 처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배려마저 잊지 않습니다. 바로 이 배려가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카메라가 점점 내려오면서 휴식시간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운동장을 담아내는 장면입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 장면들 속에서 카메라는 차츰 내려오다 결국엔 아예 아이들과 뒤섞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카메라의 하강은 재미있게도 영화에서 마랭이 처음엔 서 있다가 갈등을 거치면서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신체적 동작과도 일치합니다. 이러한 카메라의 하강과 마랭의 신체적 동작의 일치마저 보아버린다면 앞서 캉테의 질문 '우리는 누가 포용해주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단순하고도 명료합니다. 바로 마랭이 포용해주어야 하는 것이죠. 영화 초반 아이들 머리 위로 홀로 우뚝 서 있던 마랭이 그렇게 아이들과 마치 전쟁을 치르듯 선생과 학생이 아닌 그저 인간대 인간으로 소통을 하면서 부터는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앉게되는 것과도 같이 마랭이 먼저 내려가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넌지시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실은 마랭이 속한 저 위의 세계가 포용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적어도 그들은 '안전한 자들'이니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랭와 아이들은 언제 싸웠는가 싶게 서로 하나로 어울려 즐겁게 축구를 합니다. 늘 아래로 내려다보던 그가 그렇게 아래에 있는 자들과 한데 어울리는 것입니다. 캉테가 영화를 통해 내내 말을 걸고 싶었던 그 진정한 목적을  우리는 이 장면에서 비로소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장면에 뒤이어 영화는 흐트러져있는 의자와 책상들로 가득한 텅 비어버린 교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바로 직전의 가장 마지막 장면입니다. 



  사진처럼 정지된 화면속에 텅 비어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오스 야스지로나 후 샤오시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맥락없이 툭 튀어나왔던 풍경들이 연상됩니다. 아마도 캉테가 보여주는 이 마지막 풍경도 그 감독들이 마치 화두처럼 툭 던져주었던 그 풍경들과 비슷한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내내 듣는 관객을 상정하며 영화를 이끌어왔던 캉테로선 정말 어울리는 마지막 같습니다. 그러니까 관객 자신의 사유를 위하여 빈 여백 하나를 남겨두는 것 말이죠.
 

  저는 그 '여백'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한나 아렌트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사유란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악이란 것은 바로 사유하지 않음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사유란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캉테의 '클래스'는 비단 교육 문제에만 그치는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한나 아렌트가 했던 말과 똑같은 것을 지향하고 있을 겁니다. 마랭에게 있어 포용이란 그렇게 학생들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과 다름아니니까요. 예전 신문을 통해 마트의 냉동창고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다 가스에 질식해 차디찬 시멘트 바닥 위에서 숨진 20대 대학생의 얘기를 알게 된 적이 있습니다. 생계를 위해 일찍 군대에 갔고 전역해서도 내내 가난한 집안 살림과 높은 등록금 때문에 쉴 새 없이 일만하다 결국엔 그렇게 사고로 숨져야 했던 한 젊은 영혼을 보면서 정말 아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그 젊은 영혼 처럼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런 그들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정말로 보기는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문득 캉테의 이 영화가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캉테가 했던 말을 다시금 되새겨보고 이렇게나마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우리들의 포용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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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21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헤르메스님 글 올라왔네 하고서는 피곤하다, 자야지~ 하고서는 또 이렇게 들어와서 댓글남깁니다 ㅋㅋ
영화 서비스가 종료된게 참 아쉬워요. <부러진 화살>도 쓰고싶었고, 또 다른 영화들도 한 번쯤은 남겨보고 싶었는데 한 번도 저는 영화를 써본적이 없이 종료되었기에 더 아쉽죠. 그런데 이달의 당선작에 영화리뷰가 올라와있더라니까요 ㅋㅋ 아! 그럼 이제 다음달부터는 영화당선작이 사라지니ㅣ 이달의 당선작 뽑는 양을 좀 더 늘릴까...하고서는 생각해봅니다.
피곤한 밤이에요. 굳밤~:)

에일로이 2012-02-24 02:09   좋아요 0 | URL
아, 이런 소이진님의 '부러진 화살' 리뷰를 못보게 되다니 안타까운데요. 뭔가 알라딘도 사정이 있겠지만 영화 리뷰란이 없어진 건 정말 아쉽기 그지 없네요. 그동안 영화에 대해 좀 많이 써 둘걸 하는 후회도 들고... 아무튼 이렇게 페이퍼라도 소이진님의 영화 리뷰 좀 보여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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