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전설의 확인이었다.
59년에 나온 이 영화는 97년에 나온 타이타닉에 의해 기록이 깨어질 때까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아카데미 영화제 12개 부문에 수상 후보로 오른(그 중에서 11개 부문을 수상했다.) 유일한 영화로 영화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었다.(그리고 이 기록은 2003년,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에 의해 다시 한 번 깨어졌다.) 아직 못 읽었는데도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마치 아주 많이 읽은 것처럼 생각되는 책이 있듯이, 영화에도 그런 게 있다. 내게는 ‘벤허’가 그랬다. 일 때문에 나이 드신 분들과 이런저런 술자리를 가질 때가 많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꼭 ‘벤허’를 보았냐고 물었다. ‘아직…’이라고 대답하면, ‘허, 그 명작을 아직 못 봤다고, 당장 보게나. 내 인생의 영화야.’ 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거기다 TV에서 하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볼라치면, 참 자주 보이던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 그렇게 귀에 익고, 눈에 익었기에 ‘벤허’는 내게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느껴지던 영화였다. 어떤 분은 ‘이제 봐도, 진정한 벤허의 매력은 못 느끼지. 벤허는 반드시 커다란 화면으로 봐야, 영화가 가진 스펙터클을 제대로 느낄 수 있거든.’이란 말도 하셔서, 내 인생에 벤허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영영 오지 않겠구나 여겼는데, 웬걸 그런 기회가 불현듯 찾아왔다. ‘벤허’가 극장에서 재개봉된 것이다.
알고보니 재개봉이 처음도 아니었다. 62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봉된 뒤로 72년, 88년, 97년, 2007년 등 10년을 주기로 꾸준하게 재개봉되어 왔었다. 이번의 재개봉도 그 주기에 속해 있었다. 이렇게나 꾸준하게 재개봉된 것만 봐도 많은 어르신들이 당신 인생의 영화로 꼽는 것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내겐 모처럼 찾아온 소중한 기회. 당장 극장으로 달려가 누리기로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정말 좋은 영화는 시대를 초월해 늘 똑같은 평가를 가지도록 한다는 것을. 단언컨대, 좋은 영화였다. 상영 시간이 길다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원래 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들은 다 길었으니까. 그런데도 이야기에 푹 잠겨서 보았다.
전차 경주 장면은 지금봐도 정말 압권이었다. 너무나 실감나고 박진감이 넘쳤기에, 그 때는 정말 CG 기술도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이렇게 찍을 수 있었는지 그 촬영 과정이 몹시도 궁금할 정도였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장면에만 들어간 제작비가 100만 달러라고 했다. 그리고 동원된 엑스트라만 해도 만 오천 명. 물론 경기장도 이탈리아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 실제로 세워진 것이었다. 전차도 모두 18 개가 제작되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중 반만 실제 경주 장면에 사용되었다. 영화를 보면, 단 번에 찍은 것 같은데, 무려 5주에 걸쳐 찍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5주 동안 찍은 것이, 마치 하루에 컷 없이 찍은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할 수 있는지. 왜 이 영화가 아카데미 편집상을 탔는지 납득하는 순간이었다.
제작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영화의 총 제작비는 천 오백 구십만 달러라고 한다. 제작 연도가 50년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천문학적인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실로 엄청난 규모의 영화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것을 다 제외하고 출연한 인원만 보더라도, 대사가 있는 인물만 350명이고 엑스트라는 5만명에 이르니까 말이다. 이 엄청난 제작비 때문에 몇몇 영화 비평가들은 ‘벤허’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수익은 7배 가까이 났다. ‘벤허’는 무려 7천 4백 7십만 달러를 벌여들여 당시 파산 직전이었던 MGM을 기사회생시켰다. 이만한 규모의 영화를 감독이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물론 헐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서는 영화 제작의 전반적인 통제가 감독 보다는 프로듀서에 더 많이 이뤄진다고 하지만, 이 만한 규모에다 장시간 상영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흥행면에서나 비평적인 면에서나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는 것은 분명 감독의 역량이다.) 그걸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해낸 것이다.
윌리엄 와일러는 1902년에 태어났다. 스위스 알자스 출신이나, 그 때는 독일 영토였다. 그리고 와일러는 유태인이었다. 그는 1923년에 미국 헐리우드로 건너갔지만, 2차 대전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 지는 이걸로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그는 공군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그 전쟁의 경험과 귀환한 뒤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영화사에 길이남을 최고 걸작, ‘우리 생애 최고의 해’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얼마나 대단한 지를 알려면 폴 오스터의 ‘선셋 파크’를 읽어보면 된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946)
그는 성공한 삶보다 실패와 전락한 삶을 그릴 때 훨씬 더 뛰어났는데, 그것은 그 역시 인생의 부침(浮沈)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그가 헐리우드에서 초기 경력을 쌓을 때, 그는 “쓸모 없는 와일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영화 ‘벤허’에서 과거의 화려한 삶에서 추락한 벤허의 좌절과 고통이 실감났던 것도, 그런 인생의 그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는 대립 보다는 평화를, 갈등 보다는 화해를 강조했던 감독이었다. 유태인으로서, 독일의 만행까지 목격한 그로서는 더욱 반전(反戰)이 신념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우리 생애 최고의 해’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경향은 오드리 햅번의 매력을 미국에 최초로 알린 ‘로마의 휴일’에서도, ‘우정어린 설복’과 ‘벤허’ 바로 전에 만들어진 ‘빅 컨츄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우정어린 설복 (1956)
빅 컨츄리 (1958)
물론 ‘벤허’는 남북 전쟁 당시 장교로 복무한 루 윌리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바로 전작 ‘빅 컨츄리’와도 설정이 유사하다. ‘빅 컨츄리’는 농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을 둘러싸고 두 가문이 갈등을 일으키는 영화였다. ‘벤허’도 메살라와 벤허의 갈등 구도다. 이런 ‘벤허’의 설정은 사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과 상당히 닮아있다. '벤허'의 이야기를 단순히 말하자면,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가 자기보다 못한 친구가 그것을 질투하여 음모에 빠뜨리는 바람에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러다가 마치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아주 우연한 인연으로 기사 회생하여 다시 친구에게 복수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다. 하지만 루 윌리스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발현된 용서가 ‘벤허’를 ‘몬테 크리스토 백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만든다.
‘벤허’를 쓴 루 윌리스는 원래 무신론자였다. 그는 남북 전쟁을 몸소 경험했고 전쟁의 참화를 통해 신은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현재 미국이 떠받들고 있는 예수가 실은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려 했다. 그는 자기가 모을 수 있는 한 최대치로 예수의 자료를 모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실제 예수가 복음을 전파했다는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이스라엘까지 몇 차례나 실제로 답사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는 예수가 실존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신은 있다고 믿게 되었고, 그런 회심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벤허’였던 것이다. 즉 소설 ‘벤허’에서 ‘벤허’는 루 윌리스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통해 얻게 된 믿음을 바탕으로 이 지옥과 같은 세상에도 구원은 도래할 수 있으며, 그것은 바로 상대방을 용서하고 사랑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고 소설로 보여주었다. 윌리엄 와일러도 이것을 강조한다. ‘우정어린 설복’은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반전을 부르짓는 영화이며, ‘빅 컨츄리’는 현재 미국의 기원이라는 서부 개척 시대로 돌아가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영화다(.이 영화에서 윌리엄 와일러와 맺은 인연으로 찰턴 헤스턴은 ‘벤허’의 주연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윌리엄 와일러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내내 반전 그리고 용서와 화해를 말해왔다. 왜 그는 이렇게 줄기차게 이런 말을 해온 것일까? 그것은 이 영화들이 만들어졌던 시대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바로 냉전시대였다는 것이다.
때는 소련과 미국이 가열차게 서로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던 시기였다. 곳곳에서 분쟁이, 핵무기 실험이 이어졌다. 언제 또 다시 3차 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알게 모르게 만연해 있었다. 그래서 유태인으로서, 전쟁이 가져올 수 있는 비극의 밑바닥을 체험한 윌리엄 와일러는 서로에게 증오만 부추기는 냉전 시대가 하루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통해 내내 반전과 용서 그리고 화해를 부르짖어 왔던 것이다.
물론 ‘벤허’도 마찬가지다.(그것이 너무도 잘 드러나 있었기에, 카톨릭을 신봉하는 바티칸마저 헐리우드 영화로써는 유일하게 진정한 종교 영화라고 인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신념, 용서와 화해를 통한 평화에 대한 절박한 간구가 영화에 투영되어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인생 영화로 꼽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이제서야 본 내게도 이 영화는, 그것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그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다시금 세상은 냉전의 그 때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니스에서 어린이를 비롯하여 수 십명의 사망자를 낸 트럭 테러나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갈등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비록 10년 주기로 우리들 앞에 찾아오는 ‘벤허’이지만 지금 우리 앞에 도착한 것이 그저 우연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벤허’가 강조했던 용서와 화해가 정말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와일러가 영화에 담았던 진심이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어, 사람의 삶이 무분별한 증오로 위협받지 않으며 조금은 더 평화의 시대로 다가가길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