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빔 벤더스의 영화들은 한 개인을 다룰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니콜라스 레이를 다루었던 '물 위의 번개'가 그랬고 오즈 야스지로에게 헌정되었던 '도쿄가'도 그랬다. 그의 영상은 아무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마치 전혀 모르는 낯선 인물을 처음 대하듯 하는 새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 새로움 속에서 마치 이제까지 그저 정사각형의 평면으로만 알아왔던 것이 정육면체의 입체라는 것을 알게 되듯 더 깊이 그리고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번에 나온 피나 바우쉬에 대한 영화도 그러하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나 '카페 뮐러'등 그녀의 작품들을 새롭게 재현하면서 또 그녀와 함께 했던 동료들의 회고담을 통하여 드러나는 피나 바우쉬는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피나 바우쉬가 아니라 재현된 그 순간, 절대로 똑같이 반복될 수 없는 동작의 한 순간이나 공중에 떠오른 물방울의 위치처럼,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비록 빔 벤더스의 필터를 거친 피나 바우쉬의 삶이라 할지라도 그건 빔 벤더스의 피나 바우쉬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순간 우리들 자신의 피나 바우쉬라는 점이다. 당신이 피나 바우쉬를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이 영화를 통해 만나는 피나 바우쉬는 오로지 당신만의 피나 바우쉬라는 것이다. 흔히들 영화는 공감을 토대로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빔 벤더스의 '피나'만큼은 여럿이 춤을 추더라도 개인들의 동작은 다 다른 피나 바우쉬의 무용처럼 피나 바우쉬와 당신만의 일대일 개인적인 대면이다.

 

 

 그것을 위해서 빔 벤더스 자신은 ;비록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지기는 하나 자신이 일종의 필터로 개입하는 것을 최소화 했다. 일단 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로 전개되지 않는다. 무용과 삽입되는 회고 인터뷰는 최소한의 안내도 없이 무작위로 관객에게 던져진다. 그 앞에서 관객은 마치 무작위로 내던져진 퍼즐 조각을 대면하는 듯한 느낌마저 가지게 된다. 이러한 불친절하고 낯선 형식 때문에 이 영화는 그대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가진다. 영화란 늘 누군가의 의식과 눈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관객은 그의 눈과 의식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소외효과'란 관객에게 미칠 수 있는 감독의 시각과 의식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다. 즉 관객이 오로지 자신의 눈과 의식으로 자기만의 이야기로 영화와 대화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빔 벤더스가 이 영화에서 불친절하고 낯선 형식을 가져온 것도 그 이유였다. 이 영화는 피나 바우쉬와 당신만의 대화이며 당신만의 이야기로 이 영화를 채우라는 것이다. 그것은 회고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거기서도 빔 벤더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터뷰 장면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늘 보아왔던 인터뷰 장면과는 달리 이 영화에선 그들의 말과 그들의 얼굴이 따로 논다. 말은 들리는데 보여지는 얼굴은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상과 음성의 불일치는 기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말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진짜 저 사람의 말이기나 할까? 하는 생각으로 영화에서 한 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빔 벤더스가 이렇게 하는 것은 인터뷰 역시도 지금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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