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잠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읽고 있는 책은 하루키의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이다. 아래는 41쪽의 ‘챈들러 방식’이라는 제목의 에세이 중 일부분이다.
“...우선은 책상 하나를 딱 정하라고 챈들러는 말한다. 글을 쓰기에 적합한 책상 하나를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원고지며(미국에는 원고지가 없지만, 그에 준하는) 만년필, 자료 등을 갖춰놓는다. 반듯하게 정리할 필요까진 없지만 언제든 일할 수 있는 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매일 일정 시간 – 예를 들어 두 시간이면 두 시간 – 그 책상 앞에 앉아서 보내는 것이다......설령 한 줄도 못 쓴다 해도 아무튼 책상 앞에 앉아 있으라고 챈들러는 말한다......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멍하니 있어도 된다. 대신 딴청을 피워서는 안된다. 책을 읽거나 잡지를 뒤적거리거나......그러고 있다 보면 당장은 한 줄도 쓸 수 없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글이 써지는 사이클이 돌아온다. ..이것이 챈들러 방식이다.”
“...개인 취향 문제이지만 어니스트 헤밍웨이처럼 전쟁이 터질 때마다 외국으로 뛰쳐나가거나 아프리카의 산에 오르거나 카리브 해에서 청새치를 낚고는 그 일화를 소설의 소재로 삼는 방식을 나는 기꺼워하지 않는다.....”
1.
위의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우선, 일본에는 원고지가 있는데, 미국에는 원고지라는 것이 없구나하는 생각. 그리고 챈들러나 이런 사람들은 타자기로 원고를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 다 쓸데없는 생각이고...많은 소설가들이 중언부언했듯이 글은 결국 엉덩이로 쓴다는 바로 그이야기.
2.
요즘 짐바브웨의 국민사자 세실의 참혹한 죽음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다. 헤밍웨이 이야기를 읽으니 문득 생각나는데, 뭐 짐작이지만 우리의 존경하옵는 헤밍웨이 선생도 그 미국인 의사선생 못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어디선가 보니 쿠바에 있는 헤밍웨이의 자택에는 온갖 동물들의 대가리 박제로 가득한 으스스한 분위기라고 한다. 아시다시피 선생은 투우경기도 몹시 사랑했다. 아!!! 먹으려고 잡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재미로 동물을 고문하여 죽이는 것은 정말 비열한 짓이다. sijifs님이 올려놓으신 투우 페이퍼를 보라. 불쌍해서 차마 볼 수가 없다. 소생이 무슨 동정심 출렁 파도넘치는 박애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시지프스님 페이퍼 http://blog.aladin.co.kr/NayunofPhoto/7695541 (죄송해요~ 시지프스님 허락도 없이 그냥 복사해 왔어요..^^)
3.
글 쓰는 방식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이야기 하나 더. 요즘 표절 논란이 있는 박민규 작가 이야기다. 2010년도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인 '아침의 문'의 ‘문학적 자서전’ 코너에서 박민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 글을 쓴다. 앉고 보조용 테이블을 끼우고 노트북을 얹으면 끝이 난다. 그리고 쓴다. 이유는 한가지다. 이 의자가 지닌 거부할 수 없는 위력 때문이다....이 의자는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간이라는 장애를 - 인간은 언제나 장애로 가득찬 존재임을 – 휠체어는 말없이, 자신의 전부를 통해 나에게 전달해 준다.” 요즘도 박민규는 휠체어에 앉아 글을 쓰는 지 궁금하다. 뭔가 튀기위한 멘트 같다는 느낌이다. 소생의 개인적 생각이다. 박민규에게 무슨 나쁜 감정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소생은 삼미슈퍼스타즈를 정말 눈물나게 재미있게 읽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박민규는 '지구영웅전설' 뒤에 나오는 제8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수상소감에서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것은 마이크 타이슨이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던 세계 헤비급 타이틀 메치를 지켜보면서였다. 문득 세계의 귀라도 물어뜯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몇 년 후 정말이지 나는 소설이란 걸 쓰고 있었다. 그리고 치과에 다니고 있었다.”
이글을 읽고 어떤 분들은 문득 생각했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을 처음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의 이야기 말이다. 대충 이런 이야기다. 어느 햇볕 쨍한 날 진구구장 외야석 잔디밭에 앉아 야구를 보다가 외국인 용병선수가 딱!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2루타를 치는 그 순간 하루키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키는 이 이야기를 여러 번 여러 곳에서 세세한 정황까지 설명하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꾸 읽다보니 어느듯 나도 그말을 믿게 되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리고 본인이 그렇다고 몇 번이나 말하는데, 소생이 뭐라고 “그래도 그건 아니죠.어쩌고저쩌고...” 하며 우기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박민규의 이야기는 작가 본인에게는 약간 미안하고 실례되는 이야기지만 조금은 하루키 흉내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좀 말이 안되는 소리 같기도 하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은유적인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