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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문학 기계
고미숙 외 지음 / 소명출판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문학 혹은 철학의 언어가 삶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우리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살 수 없는, 수 천 수 만의 삶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모으고, 그것들을 통해 다른 삶을 꿈꾸게 한다. 문학 혹은 철학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책머리에')
적극적인 의미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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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와 문학-기계> 책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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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소명출판 |
문학.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말들로 정의하기도 하고 그 정의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시, 소설, 희곡, 수필 등의 장르로 분류되기도 하고 때로는 참여문학, 순수문학이라는 식의 편가름으로 세상사와 다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느 경우에조차 거부될 수 없는 정의는, '문학이란 글의 형태로 삶을 표현하는 것이다'라는 명제일 것이다.
글의 형태로 삶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문학이란 다른 종류의 삶을 창조하는 것이고 다른 종류의 삶을 쓰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문학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문학이 삶에 관한 것인 한, 그것은 언제나 '이런 삶이 있었고, 저런 삶이 있다'는 식의 언표행위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은 평범한 삶이기보다는 특이한 삶을, 평균적인 삶이기보다는 극한적인 삶을, 주어진 것에 머문 삶이기보다는 그것을 넘어서는 삶을 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은 우리가 체험하는 세계를 넘어서는 여행이고, 끊임없이 경계를 넘어서는 '너머의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뜻에서 문학은 주어진 삶의 외부를 사유한다. 그것은 과거와 역사를 다루는 경우에조차도, 항상 '너머'의 삶, '외부'의 삶을 창조함으로써 다른 삶을 제안하고 촉발한다. 그러므로 문학은 항상-이미 삶의 외부에 있으며,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삶이다.
<들뢰즈와 문학-기계>는 문학이 가지는 이런 '너머의 삶', '외부의 삶'에 주목하고 그것을 철학적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문학과 철학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문학이라는 체계 속에서 스스로 안주하는 언어들, 곧 살아 움직이는 현실에 눈감고 만들어진 목가성을 찬미하는 문학과 투쟁하며 새로운 언어를 생산해내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작품은 특정한 배치 안에서 작동하는 '기계'다.그런데 이들은 왜 문학을 '기계'로 정의하고, 그 기계의 '용법'에 의해 문학작품의 '의미'를 정의하려고 할까?
"적극적인 의미에서 문학은 삶이라는 장 안에서 다른 종류의 삶을 창안하는 것, 그런 삶으로 우리를 촉발하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변용하며, 그럼으로써 이미 다른 삶을 사는 활동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문학작품이란 다른 종류의 삶을 생산하는 기계다. (…)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그 외부의 요소들, 가령 독자와 환경, 다른 책 등과 접속하여 작동하며, 그 접속하는 항들에 따라 다른 효과를 생산한다. 따라서 작품은 삶의 과정에 들어가는 특정한 배치 안에서 작동하는 '기계'라는 것이다." (이진경, "문학-기계와 횡단적 문학", 15~21쪽)여기서 먼저 알아야 할 개념은 '배치'다. 철학적이고 골치아픈 용어들을 제외하고 쉽게 설명해보자.
어느 사무실에 탁구대가 하나 있다. 이 탁구대에서 라켓을 들고 탁구공을 주고받으면 탁구대로서 기능할 것이다. 이 탁구대에서 가운데 그물망을 걷어내고 둘러 앉아 식사를 하는 공간으로 사용한다면 이 탁구대는 식탁의 기능을 한다. 마찬가지로 책과 노트를 펴놓고 세미나 장소로 이용한다면 탁구대는 책상으로서 기능한다.
이렇듯 특정한 사물이나 사건은 어떤 '배치' 속에서 쓰이느냐,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용도와 기능이 달라지는 것이다. 문학작품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문학을 한다는 것, 작품을 쓴다는 것이 다른 삶을 사는 것이라면, 그 결과물로서 작품은 어떤 삶을 살려는 욕망 내지는 능력이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작품은 그것을 생산하는 어떤 욕망과 능력이 작용하는 기계고 그런 욕망에 의해 방향지워지는 어떤 삶이 반복하여 출현하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 역시 어떤 외부와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내용의 작품이 되고 다른 효과를 발휘하며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마치 낫이 어떤 외부와 접속하느냐에 따라 농사-기계가 되기도 하고, 살인-기계가 되기도 하고, 혁명-기계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문학작품도 그 접속하는 외부에 따라 다른 문학-기계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작품은 하나의 '배치'이며, '기계'라는 것이다. 어떤 것과 접속하여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 되는 기계. 마르크스의 <자본>이 때로는 자본관계를 정당화하는 담론들을 비판하고 자본의 논리에 반하는 현실운동을 촉발하는 기계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본의 운동법칙에 대한 엄밀한 경제수학적 계산을 하는 기계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본주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기계가되기도 하는 것처럼.
<들뢰즈와 문학-기계>는 이러한 방식으로 카프카, 보르헤스, 세르반테스, 로렌스, 헨리밀러, 버지니아 울프, 조나단 스위프트, 미셸 투르니에, 체르니셰프스키 등을 횡단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문학가로부터 지금 당대를 아우러는, 어떻게 보면 그렇게 큰 연속성이 없어보이는 이들의 작품을 가로지르며 그들의 삶을 살고 그들의 사유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은이들의 작업을 따라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새롭게 사유하는 방법을, 철학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글의 모두에서 인용한 것처럼 '문학 혹은 철학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