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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 Animation & Philosophy
이진경 외 지음 / 문경(문학과경계) / 2002년 3월
평점 :
품절
"우리는 더 이상 거대한 숲 속이나 한적한 농촌 길만이 철학의 장소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 장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문명의 변용을 이야기하지 않는 철학의 향수 어린 동경을 좋게 보지 않는 탓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철학은 영화관, 지하철, 빌딩 숲, 인터넷 등 보다 현대적이고 인위적인 것 속에 존재한다." (고병권, '책머리에',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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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문학과경계사 |
<은하철도 999>, <공각기동대>, <메모리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원령공주>, <신세기 에반게리온>, <평성 너구리전쟁 폼포코>, <추억은 방울방울>...
애니메이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이게 만들던 이름들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문화개방이라는 시대적 조류에 힘입어 상당수의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들이 '합법적으로' 개봉되거나 비디오로 출시되고 있지만 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이들 애니메이션들은 소수의 매니아층들에 의해 '불법'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소수라고 표현했지만 대학가 영화동아리나 PC통신 영화모임 등을 통해 볼 사람은 이미 다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법' 비디오 테잎은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었다.
필자 역시 90년대 초반부터 이러한 유통과정을 통해 이들 애니메이션을 접했었는데, 이때 본 <공각기동대>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건 영화가 아니다, 하나의 철학이다'라고...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필로시네마'란 주제로 진행된 세미나를 토대로 엮은 책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애니메이션을 소개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철학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일요일 아침을 손꼽아 기다렸던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는 인간과 기계 사이를 달리는 위태로운 '여행의 역설'을, 그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인간과 환경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는 인간의 정체성을 생성과 변이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찾아내는 방법으로. 이렇듯 이 책은 12편의 다양한 애니메이션에 숨겨진 진실을 필자 각각의 다른 시각으로 그러나 비슷한 방법으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은하철도 999>(부제:인간과 기계 사이를 달리는 위태로운 여행의 역설들)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분석을 맡은 이진경씨는 이 '대중적인 만화영화'에서 기계의 몸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목적으로 999호를 탄 철이의 모험을 통해 '여행의 역설'과 같은 철학적 주제를 끌어낸다.
"우리가 <은하철도 999>에서 보는 것은 '여행의 역설'이라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여행이란 처음부터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역설이 그것이다. (…) 여행은 시작하자마자 애초의 목적지에서 벗어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여행에 실패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행이란 변화하려는 꿈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변화된 것이 없이 원래 목적지에 도착했다면 그가 여행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p.18) 여기서 물론 목적지란 기차가 도착하는 물리적인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을 하는 것은 기차가 아니다. 여행자의 내적인 변화가 도달하는 곳이 바로 목적지이다."(p.18~19)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대중적인 애니메이션(영화)을 소수의 전문가들이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어 결코 대중적일 수만은 없는 전문적 비평서를 만들어냈다는 비판을 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이 철학적 질문들은 결코 어려운 문체로 쓰여져 있지 않다. 영화를 봤다면, ' 아, 그렇지' 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만큼. 다음을 보자.
<아바론>(부제:미래는 어떻게 현재가 되는가?)의 분석을 맡은 이종영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바론>은 오히려 클래스 A, 클래스 리얼, 현실, 이 모두가 하나의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바론>은 '이 많은 세계들 중 어떤 것이 현실인가'를 묻기보다, '이 세계들이 어떻게 각각의 현실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그 현실의 세계는 미래로부터 어떻게 현재로 옮겨졌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바론>은 그들 중 긍정해야 할 세계와 부정해야 할 세계는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현실과 가상을 혼동하지 마라. 여기가 바로 너의 필드다'라고 말이다."(p189)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려는 노력은 현재의 삶을 긍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삶은 다시 무덤에서 뛰쳐나와 건강하게 춤출 수 있어야 한다."(p.207) 또한 그것은 전쟁이다. "낡은 가치와 위계를 때려부수고 말끔히 청소한 후 창조한 새로운 것을 그 자리에 놓기 위한 처절한 싸움"인 것이다. (p.209)
이들의 '애니메이션으로 철학하기'는 이처럼 가볍고 경쾌하다. 가볍고 경쾌하지만 오늘의 우리 현실을 꿰뚫어보는 진지함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골치아프고 어려운 언어로 쓰여진 두터운 철학책의 무겁고 칙칙한 분위기는 이 책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종이 위에 쓰인 펜글씨보다 스크린 위에 주사된 빛의 글씨가 철학의 새로운 기호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12편의 애니메이션 분석을 통해 그 가능성을 열어보이고 있다.
글의 모두에서 인용한 것처럼 '거대한 숲 속이나 한적한 농촌 길만이 철학의 장소라고 주장하지 않고 영화관, 지하철, 빌딩 숲, 인터넷 등 다양한 우리네 일상의 공간들 속에서도 철학하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책은 그 길을 제시하는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이 새로운 '철학하기'는 다양한 공간, 다양한 가능성으로 우리 앞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마치 <공각기동대>의 마지막 장면에서 쿠사나기 소령이 하는 다음의 말처럼.
"자 어디로 갈까?..... 네트는 광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