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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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변방의 외부자 연암, 만주족 오랑캐가 통치하는 중화, 그리고 열하라는 낯선 공간. <열하일기>는 이 상이한 계열들이 접속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주름'이다."(75쪽)

우리 나라에서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치고 <열하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떠올리는 게 "연암이 중국의 열하를 여행하는 동안의 여행기" 정도일 것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열하일기>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명색 고전문학 연구가로 자처하는 지은이조차도 <열하일기>를 완독한 게 최근 2,3년 사이의 일이라고 한다. 전문 연구자가 이러할진대 보통 사람들에게 <열하일기>를 제대로 모른다고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어느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은이는 이것이 우리나라 '문사철'(문학,사학,철학)로 대변되는 인문학의 현주소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2003 푸른숲
고미숙의 책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그린비에서 내놓은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의 제1번이다. '고전을 다시 쓴다'는 명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흔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고전에 관한 주석서들, 본문을 인용하고 거기에 이런저런 해설을 덧붙인 책들과는 판이하다. 현재 3권의 '리-라이팅' 책들이 나와 있는데, 지금 여기의 사람들이 지금 여기의 코드로 고전이라는 텍스트에 새롭게 접근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기획물인 것이다.

지은이가 <열하일기>를 '다시 쓰는' 방식 역시 아주 독창적이다. 지은이는 연암의 <열하일기>를 해석하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철저하게 자신의 삶과 자신의 경험 속에서 <열하일기>를 읽고서 곧바로 텍스트를 해체시켜 버린다. 그리고는 자신의 사고틀 속에서 텍스트를 분석하고 복원하여 자기만의 '열하일기'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지은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글쓰기 방식과 연결되고 있다.

"<열하일기>는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이라는 장을 전혀 다른 배치로 바꾸고, 그 안에서 삶과 사유, 말과 행동이 종횡무진 흘러다니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흐름 속에서 글쓰기의 모든 경계들, 여행자와 이국적 풍경의 경계, 말과 사물의 경계는 여지없이 무너진다."(25쪽)

이 흐름 속에서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삶과 지식의 경계가 사라져, 삶이 글이 되고 글이 삶이 되는 '노마드'(nomad)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연암에 대한 지은이의 평가이자 지은이 자신에 대한 다짐이다.

"연암은 흔히 떠올리듯, 원대한 뜻을 품었으나 제도권으로부터 축출당한 '불운한 천재'가 아니라, 체제의 내부로 끌어들이려는 국가장치로부터 끊임없이 '클리나멘'을 그으며 미끄러져 간 '유쾌한 분열자'였던 것." (이러한-인용자) "지배적 코드로부터의 탈주는 한편으론 고독한 결단이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늘 새로운 연대와 접속으로 가는 유쾌한 질주이기도 하다. 과거를 포기하고 체제 외부에서 살기로 작정했지만, 연암에게 '고독한 솔로'의 음울한 실루엣은 전혀 없다.

그는 세속적 소음이 끊어진 산정의 고고함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 부과된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서 온갖 목소리들이 웅성거리는 시정 속으로 들어갔다. 젊은 날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저잣거리의 풍문을 찾아 헤맸던 것처럼."(47~49쪽)


이 대목을 읽고 있노라면 연암의 모습만이 아니라 지은이의 모습도 '오버랩' 된다. 지은이 스스로 자신이 살아온 이력을 간략하게 압축하는 소개글에서 느낄 수 있는 모습들이 연암을 묘사하는 이 인용문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이다. 유쾌한 분열자 연암 박지원! 유쾌한 노마드 고미숙!

아는 사람들은 이미 느끼고 있겠지만 확실히 고미숙의 글쓰기는 많이 변했다. 비평가로 데뷔할 무렵의 글들(예컨대 <비평기계>의 글들)과 최근1,2년 사이에 보여주는 그의 글쓰기 방식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몇 번의 '인생역전'을 경험한 자의 깨우침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런지.

이 '깨우침'에 동참하는 일은 책의 제목처럼 '유쾌한' 경험이다. <열하일기>와 조우하게 되고 빠져들게 된 사연으로 시작해서 <열하일기>를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몸풀기 격인 연암의 생애와 문체반정을 다루는 글로 이어지는 지은이의 글은 우선 읽기 쉽고 유머러스하다. <열하일기>의 웃음과 역설을 자기 것으로 체화한 자의 여유!

본격적으로 <열하일기>를 '다시쓰고' 있는 제3장부터 제5장까지의 지은이의 문체는 날아갈 듯 가볍고 경쾌하다. 마치 모짜르트의 소리들이 천상에라도 오른듯 가벼움의 극치를 달리듯이. 그러나 이 가볍고 유쾌한 문체는 결코 경박하지도 진지함을 잃지도 않는다.

탈주, 주름, 노마드 등 책을 펼쳐들고 목차만 훑어봐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지은이는 들뢰즈/가타리의 사유와 개념을 동원해 박지원과 <열하일기>를 다시 쓰고 있다. 지은이는 이 과정에서 연암을 중세적 사유를 뛰어넘으려는 '노마드'로 규정하면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그의 사유를 일관된 방법으로 추적해나간다. <열하일기>의 들뢰즈/가타리화?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들뢰즈-가타리는 하나의 분석틀일 뿐, 오히려 <열하일기>를 통해 들뢰즈-가타리를 '해석'하고 있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이른바 '메타 텍스트'.
전혀 연결될 것 같지 않은 동/서양 두 지식인의 사상, 18세기 조선 실학자의 행적과 현대 프랑스 철학자의 사유를 가로지르는 이런 작업은 결국 지은이가 들뢰즈를 사유해나가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에 따라서는 이러한 작업방식에 비판적 입장을 취할 수도 있으리라. <열하일기>를 너무나 일면적이고 편협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등과 같이. 그러나 이러한 지은이의 작업방식의 좋고 나쁨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은 이 책의 의도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이러한 작업방식 자체가 수많은 <열하일기>를 다시 읽는 방식 가운데 하나를 제시해주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기에.

이는 책 말미에 보론으로 붙어 있는 "연암과 다산-중세 '외부'를 사유하는 두 가지 경로"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단순히 실학파의 거두 정도로 알고 있는 연암과 다산의 차이를 짚어가며,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연암/다산'의 사상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연암과 다산의 철학적 사유가 결코 실학파라는 '하나의 틀'로 묶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본다. 다산이 중세를 떠나 근대에 도달한 여행가였다면 연암은 중세에도 근대에도 머물지 않는, 시대와 공간을 떠도는 '노마드'(nomad)라는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 말이 의미하는 것에 동참하며 무릎을 칠만큼 명쾌한 '나눔'이다.

'그 무엇도 될 수 있었지만, 그 무엇도 아닌 존재', 연암 박지원. 지은이의 안내에 따라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너무나 즐거운 여행이다. 누구에게나 선뜻 동행을 권하고 싶을 만큼 즐거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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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미숙, 몸과 우주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을 만나다
    from 그린비출판사 2011-10-20 17:02 
    리라이팅 클래식 15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출간!!! 병처럼 낯설고 병처럼 친숙한 존재가 있을까. 병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수많은 병들을 앓았다. 봄가을로 찾아오는 심한 몸살, 알레르기 비염, 복숭아 알러지로 인한 토사곽란, 임파선 결핵 등등. 하지만 한번도 병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얼른 떠나보내기에만 급급해했을 뿐. 마치 어느 먼 곳에서 실수로 들이닥친 불...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 리라이팅 클래식 8
권용선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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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나'를 세계의 중심에 두고, 미지의 것을 개척함으로써 문명을 이루고, 타자를 배척하거나 동질화하는 방식으로 지배를 꿈꾸며, 역사를 만들고 시간을 조직하면서 자기 검열을 내면화하는 근대인이야말로 계몽 이성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다."(68쪽)

시대와 '불화했던'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 대가로 1990년대의 시작을 '특별한 공간'에서 갇혀 지내야했던 그는, 그 동안 자신의 삶이 주는 무게 때문에 미처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읽어나가게 된다. 그 와중에 읽게 된 <변증법적 상상력>(돌베개)이란 책을 통해 각인된 <계몽의 변증법>은 두고두고 그의 뇌리에 남아 있게 된다. 하버마스가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이라고 표현했다는 류의 언급 때문이 아니라 어떤 정해진 길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새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의 사고방식에 커다란 의문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서른이라는 나이를 거치면서 영화와 음악 등 소위 문화라는 아우라로 포괄되는 시대적 유행을 겪으면서 다시 한번 <계몽의 변증법>과 마주치게 된다. 이미 맑스, 레닌만을 고집하지 않고 니체, 프로이트, 푸코, 들뢰즈 등 세상을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인식하고자 한 철학자들과의 조우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은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여전히 <계몽의 변증법>은 그에게 숙제로 남겨져 있던 책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새로운 세기의 시작 즈음에는 그 '숙제'를 어느 정도는 해결했다고 생각했기에 다시 그 고통스런 책과 마주칠 기회를 잡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이런 생각을 조소라도 하는 양 <계몽의 변증법>이 제기하는 문제들 곧 계몽의 신화, 이성의 신화를 다시금 그의 사유 속으로 불러 들인다.

ⓒ2003 그린비
권용선의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몸서리치며 사유한 기록인 <계몽의 변증법>을 현재적 시선에서 다시 사유하기를 제안하는 책이다. 왜냐하면 '홀로코스트의 비극'은 아우슈비츠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아우슈비츠 이전 서부 개척의 역사에서도 지금 이 순간에는 바그다드에서도 역시 홀로코스트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기에….

지은이가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쓰는' 과정은 1인칭 자전적 서술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를 소개하는 1장의 전기 부분을 제외하면 철저하게 원저자들의 목차를 따라가면서 서술한다. 따라서 계몽의 개념을 설명하는 2장부터 파시즘의 일상화를 설명하는 6장까지의 서술들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생각일 수도 있고 지은이의 생각일 수도 있고 혹은 둘 다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둘을 구분해보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계몽이라는 말이 '어둠을 밝히고 빛을 비춘다'는 의미라고 했을 때 빛은 '이성'의 빛에 다름 아니다. 신이 지배하던 중세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을 세계인식의 기초원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 이러한 인식의 전환 속에서 계몽은 발아하게 된다. (제2장)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계몽은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는 인류의 희망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 인간은 자연이 주는 공포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신화'에 의지하게 된다. 이 '만들어진' 신화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되고 이를 통해 자연에 대한 공포를 서서히 극복하게 되고, 계몽이 진행됨에 따라 과학과 지성의 힘으로 마침내는 자연을 지배하게 된다. 인류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된 신화의 역사 속에서도 계몽은 발견된다는 이야기다. (제3장)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처럼 계몽이 진행됨에 따라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기 보다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에 빠져든다고 한다. 저자들은 이를 사드의 소설 <줄리엣의 역사>를 빌어 철저하게 계산된 이성, 완전히 계몽된 이성이 갖는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지은이는 이 과정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가상대화 형식이라는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치있게 설명하고 있다. (제4장)

▲ 바바라 크루거, <무제>, 1989
훈육되고 길들여진 신체는 이미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자동인형처럼 일상과 노동의 치열한 전투를 하루하루 살아낸다. 주어진 신체 안에서, 체계에 적합한 인간형으로 단련되는 것은 그러나 신체만이 아니라 정신 또한 균질화되어 간다. 개인이 감지하는 개성은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틀 안에서만 안전하게 작동한다.(81쪽)
이 과정을 통해 지은이는 자연이 주는 공포로부터 벗어나 인간을 이 세계의 주인으로 세우고자 했던 계몽과, 이성과 문명의 이름으로 자연을 지배하고 식민지를 개척하고 또 다른 인간을 억압하는 근대 이후의 계몽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본다. 우생학적이고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시작된 홀로코스트의 비극과 서부 개척의 신화를 위해 잔인하게 희생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수난은 똑같이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계산된' 계몽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첨단 과학기술로 무장한 현대사회를, 근대 철학의 산물인 계몽이라는 말로 혼접하여 야만의 시대니 어떠니 하는 것에 동의하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야만이라고 하면 아프리카 오지의 원시 미개 종족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현대인처럼 세련된 취향과 매너를 지닌 야만인이란 생각하기 힘든 존재일테니까.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첨단 과학기술로 무장한, 세련된 문화적 취향을 지닌 이성적 존재들이기에 그 야만성은 원시 미개 식인종보다 더 파괴력이 큰 야만이 아니겠는가. '정의'라는 이름을 앞세워 열화 우라늄탄을 개발하고 악의 축 징벌을 위해 문명의 발상지 '천년고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야만!

이러한 야만은 현대 사회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문화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신체와 의식을 검열하는 파시즘이라는 형태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의 부록에 해당하는 문화산업과 유대인 문제에 관한 글에서 계몽이라는 옷을 입은 문화(산업)에 대해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와 결합된 파시즘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전파하면서 대다수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획일화시키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사실 아도르노 만큼 디즈니 만화를 혐오한 사람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다를까?

70년대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금지곡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군사독재 시절이니까 가능한 이야기 아니냐' 하면서도 지금 여기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에서 작동하고 있는 똑같은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애써 무지하다.

지은이가 문화산업을 다루는 5장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는 마음대로 불러도 되지만 DJ DOC의 <포졸이>는 왜 금지곡이 되어야 할까? <포졸이>의 가사가 저질스럽고 음란해서?

▲ 백남준, < TV 부처>, 1986
텔레비젼은 이제 우리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정보전달의 매체이자 문화상품의 전달자가 되었다. 그것이 갖는 일상에서의 위력은 때때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원하지 않거나 불필요한 정보까지도 일방적으로 공급하면서 생활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215쪽)
촌스럽고 저질스러운 것 그 자체에 대해서 금지라는 족쇄를 채우지는 않는다. 촌스러운 것으로 치자면야 <허리케인 박>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을까? 문제는 촌스럽고 저질스러운 것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누구를 겨냥하느냐가 문제일 뿐! 이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라는 고상한 취미 역시 철저하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견고하게 하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언론매체에서 예민한 정치 관련 기사가 올라오면 '경상도/전라도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사람들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다. 경상도 출신인 필자가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글이라도 하나 올리면 당장 "너, DJ 광신도지?"라는 욕설이 난무한다. "전라도/경상도라는 지역주의는 지배집단의, 파시즘의 산물이다" 등등의 비판적 사고들은 이 광란의 장에 들어설 틈이 없다. 온 국민의 지역주의화!

동성애나 이주 노동자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동성애나 이주 노동자 문제를 다룬 기사들에 딸린 댓글들의 수준을 보라. 인간 이성의 동물수준화! 스스로의 합리성을 믿어의심치 않는 '합리적 다수'가 패거리 문화에 기대어 일류/삼류 대학을 구분하고, 특정 지역 출신을 소외시키고, 동성애자를 조롱하고, 외국인 이주 노동자를 학대하는 현실은 야만의 극치를 달리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러한 것들이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는다.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자명한 것으로 알고 지나갈 뿐이다. 익숙한 것들에 대한 맹목적 신뢰! 금지된 것들에 대한 자발적 자기 검열과 반성하지 않는 이성 속에서 파시즘의 신화는 새롭게 부활한다. 일상적이고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파시즘!

그렇다면 이러한 야만의 극복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스스로를 완전히 자각하고 힘을 지니게 된 계몽만이 계몽의 한계를 분쇄할 수 있을 것"(<계몽의 변증법>, 280쪽, 문예출판사/1995)이라는 원저자들의 생각에 동의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지은이도 이에 대해서는 그 어떤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아마도 무리하게 '에필로그'를 삽입하는 것보다는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읽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는 수준에서 그친 듯한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어쨌거나 국문학 전공자인 지은이가 학위논문을 앞두고 난해한 철학책을 '리라이팅'한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기 그지 없는데, 그 스스로 어떤 형태로든 학위 논문에 반영할 생각이라니, 그의 학위논문이 새삼 기다려진다. 필자에게도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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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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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쪽이 넘는 두꺼운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선뜻 책소개가 망설여지는 건 단순히 그 부피가 주는 중압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베트남에 대해, 호치민에 대해 권위를 내세울 만한 1차 자료가 별로 없는 우리 현실에서 윌리엄 듀이커의 책 <호치민 평전>은 분명 그 없음을 보충해주는 훌륭한 사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지은이가 '30년에 걸쳐 '호치민이 한 식구로 느껴질 정도로' 그 인물과 베트남을 연구해온 동기 자체가 '객관적'이지는 않으며, 미국인의 입장을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자체도 의식하는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는 옮긴이의 말처럼 책의 군데군데 덧칠되어 있는 미국인의 시각을 만나는 일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1965년 통킹만 사건 이후의 대미항전의 시기에 대한 서술은 900여 쪽의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과 30쪽도 채 되지 않는다. 미국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게 두려웠던 것일까? 꺼내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입은 자존심의 발로? 이 '의도된' 통킹만 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고, 북베트남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을 퍼부었던 도발적 행위를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지은이의 의도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장점은 없는 것일까? 아니다. 미국인이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에서 오는 이런 시각의 왜곡을 읽어낼 수 있다면 이 책은 그 어떤 호치민에 관한 전기보다 풍부하고 방대한 자료를 제공한다. 20년에 걸친 방대한 자료수집이라는 지은이의 말에 진실이라는 힘을 실어줄 정도로 오랜 비밀 활동으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았던 1945년 이전 호치민의 삶을 정교하게 복원한 것만 해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호치민. 19세기의 막바지에 태어나 유학과 신학문을 고루 접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교적 교양을 쌓은 인문주의자이자 공산주의 혁명가이며, 베트남 독립을 설계하고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 대항한 투쟁에서 승리한 민족주의자.

듀이커는 이런 호치민의 이력의 이면에 있는 모습을 비교적 담담하게 그려낸다. 유교적 소양을 쌓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호치민은 스물한 살 때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활동으로 수배된다. 그는 할 수 없이 조국 인도차이나를 떠나 여객선의 요리사 보조 노릇을 하며 유럽,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을 떠돈다. 호치민의 혁명적 삶의 초석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호치민이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부각되는 과정, 쉰 번이나 이름을 바꿔가며 혁명을 배우고 선전하던 시절, 수감과 탈출, 베트남의 초대 주석에 올라 분열을 일삼던 동지들을 화해시키고 모습.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된 뒤에도 '아저씨'라 불릴 정도로 검소한 옷차림과 소박한 말투와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베트남 인민들의 '호 아저씨'.

이제 그가 죽은 지 30여 년이 지났고, 조국 베트남도 새로운 사회체제의 시험 속에 있지만 <호치민 평전>을 읽고 있노라면 그의 갸날픈 몸매와 긴 턱수염이 오늘의 세계정치 상황과 자꾸만 '오버랩'되는 것은 필자만의 감상일까?

'천년고도' 바그다드의 점령군으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맘껏 누리고 있는 미국의 현재의 모습은 혹 30년 전 인도차이나 반도의 한 모퉁이에서 상처받았던 지난날의 역사에 대한 보복은 아닐까?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는 다소 '진부한' 역사의 교훈을 무시한다면 말이다.

아마도 미국이나 미국인들에게 비친 호치민의 모습은 이 책의 지은이인 듀이커의 시선 만큼이나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 당혹스러움이 다음과 같은 그들의 헌사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1969년 9월 호치민이 죽었을 때 <타임>지가 '민족지도자 가운데 그만큼 오래 적의 총구 앞에서 버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쓴 것은 헌사일까 자기위안일까? 호치민에 관한 또다른 전기를 쓴 바 있는 미국인 찰스 펜 또한 리비우스가 영웅 한니발에게 바친 묘비명을 다시 호치민에게 바치고 있다. '그의 강철의지 앞에서는 높은 산도 몸을 낮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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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파일 - The Einstein File
프레드 제롬 지음, 강경신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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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를 꿰뚫는 큰 물줄기는 인간의 기본 권리를 성취하기 위해 수많은 투쟁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이 투쟁에서 최후의 승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이 투쟁에서 우리가 지쳐 쓰러지고 만다면, 이는 곧 사회의 파멸을 뜻하게 될 것입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452쪽)

조작된 아인슈타인의 이미지

ⓒ2003 이제이북스
아인슈타인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에 관한 전기물만 2백여 권이나 출간되어 있을 만큼 아인슈타인에 관한 모든 것들이 책으로 만들어져 있고, 세계 역사상 그 어떤 과학자에 대해서보다 많은 글들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아인슈타인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천재적인 과학자'의 모습이다. 상대성 이론, 칠판에 적힌 과학 이론들, 아이들과 함께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는 인자한 이웃집 할아버지 등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의 일반적인 이미지다. 이를 반영하듯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아인슈타인을 "세기의 인물"로 선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지성인 동시에 최고권위를 지닌 과학자로서, 성인처럼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 그는 세상사에 초탈한 듯한 온화한 모습을 지녔으며 자신의 이름을 천재와 동의어로 만들었다." (32쪽. 강조는 인용자)

프레드 제롬의 <아인슈타인 파일>은 이렇게 상대성이론으로 세상을 뒤흔든 20세기 최고의 천재이면서 한편으로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와 같은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아인슈타인의 모습이 아니라 반전, 평화, 사회운동가로서 그 어떤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는 인물로서의 아인슈타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반전 평화 사회운동가로서의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1933년 독일에서 나찌즘이 절정에 이를 무렵 미국으로 망명해 1955년 숨질 때까지 살았다.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이 '천재 과학자'는 미국의 좌파나 진보적 지식인들이 빨갱이 사냥에 내몰리는 가운데 숨죽여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도 "청문회에 소환된 증인들에게 증언을 거부하라"는 발언을 신문 지면에 발표하는 등 시민불복종 운동을 펴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53년 공산당을 색출하려고 열린 청문회에서 답변을 거부한 좌파 인사를 신문지면을 통해 지지하는 등 반전, 인종차별반대 단체 등 수십여 개 진보 단체의 핵심으로, 후원자로 일했다고 한다.

반핵론자로서 그는 "자국만이 원자폭탄을 보유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핵 정책을 위선적"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TV에 출연해 "수소폭탄의 개발은 인류에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며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을 비난하는 내용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아인슈타인 파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파시즘과 인종차별주의, 매카시즘의 광풍에 사로잡힌 미국의 지배 권력에 대항해 두려움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냈던, 사회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가리지 않고 양심을 지키려는 모든 사람들을 후원했던 사회운동가로서의 아인슈타인의 모습과, 실질적으로 미국을 움직인 권력자, 전 미연방수사국(FBI) 후버 국장이 주도했던 음모정치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FBI는 1937년부터 55년까지 아인슈타인의 공산당 관련성을 집요하게 조사·추적하면서 18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인 '아인슈타인 파일'을 남겼는데 이 책은 이를 토대로 쓰여졌다. '아인슈타인 파일'을 기록하는 동안 FBI는 '위험 인물' 아인슈타인을 미행하고 전화도청·우편 검열은 물론, 집에 침입해 쓰레기통까지 뒤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파일'은 1983년 그 일부가 공개되기까지 45년 동안 FBI 고위관리 조차 그 존재를 모를 만큼 비밀에 부쳐졌는데 이는 미국은 '파시즘을 피해 자유 미국의 품에 안긴, '미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과학자'가 "반미국적 활동을 벌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아인슈타인 사후 그의 정치활동은 철저하게 지워졌다. 미국 정부, 언론, 전기작가 등은 이 세계적인 과학자를 "소탈하고 온화한 과학의 성인"으로 추앙하는 방법을 통해 거세시켜버린 것이다.

따라서 <아인슈타인 파일>은, 하나의 '상징조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인슈타인의 이미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다가갈 수 있을 만큼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새롭고 광범위하다.

되살아나는 매카시즘의 망령

1983년 이래 줄곧 '아인슈타인 파일'의 존재를 추적해왔던 지은이는 미국 정부가 2000년 초 '아인슈타인 파일'을 완전 공개하자(일부 증언자의 신원은 아직까지 비공개되고 있다고 한다) 이를 꼼꼼히 분석한 끝에 지난해 이 책을 출간했다. 처음에는 '아인슈타인 파일' 그 자체의 내용만 쓸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리원허 간첩 사건'이나 'MIT의 포스톨 교수 사건' 등을 보면서(자세한 것은 이 책 449~451쪽 참조) 50년대 매카시즘의 망령이 국익과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우익을 선동하는 모습을 보고 이미 가편집 상태에 들어갔던 책을 새로이 가필했다고 한다. 9·11테러 이후 인권탄압을 애국심으로 포장하는 수법은 아인슈타인이 맞닥뜨렸던 전형적인 매카시즘 수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이 책에 아인슈타인이 갖는 강렬한 '현재성'을 추가한다. 온 세계가 비난을 해도 막무가내로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어떤 나라의 위협에 마주친 우리들 모두의 불행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지은이의 언급은 FBI가 전개한 아인슈타인 제거작전과 맞물리면서 이 책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곱씹어보게 만든다.

"지금 미국에서 (어쩌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구실로 위장하여) 매카시즘이 부활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만일 아인슈타인이 오늘의 세계 정세를 지켜본다면, 그 옛날 압제와 공포의 망령들이 되살아나 몰려들고 있음을 간파할 것이다. (…) 그가 평생토록 싸웠던 인종차별주의, 배타적 국수주의, 전쟁,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라는 이름의 악령 또한 여전히 이 나라에서 횡행하고 있다." (451쪽)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다면 (…) 끔찍한 테러(9·11)에 대한 복수심으로 저지르는 또다른 테러들을 지켜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 인권탄압 정책을 성조기로 포장하여 그것을 애국심이라고 부르짖는 행태는 아인슈타인이 1950년대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속임수다." (25~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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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지음 / 소명출판 / 2001년 8월
평점 :
품절


"사물을 바라보는 데는 천 개의 눈이 있으며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길에는 천개의 길이 있다."

ⓒ2003 차재업
한때 니체의 독해를 위해 제법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서 배운 그 엉터리 니체가 아니라 '삶'의 철학자, '차이'의 철학자 니체를 찾기 위해...

그러나 투자한 시간과 열정에 비해 그 열매는 언제나 나의 지적 능력을 의심할만큼 초라했다. '짜라투스트라'를 통해 '선악을 넘어서' '도덕의 계보학'을 통해 '권력에의 의지'로 가는 길은 늘 미로를 걷는 기분이고, 그 길의 안내를 자처하는 수많은 해설서들은 길안내가 아니라 길찾기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황제의 칙서와도 같았다.

그런데, 여기 한 권의 니체 해설서가 있다. 아니 해설서가 아니라 니체에게로 가는 천 개의 길, 천 개의 눈 가운데 하나를 제시하는 책,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내 지난 날의 수많은 시간과 열정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니체로 가는 길을 친철하고 쉽게 안내한다. 너무나 간단명료하고 명확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설명하기에 질투를 느낄 정도로 매력적인 책이다.

"먼저 니체를 충분히 좋아하라. 떠남은 그 뒤에 판단할 일이다."

숫자 '천'은 다양성과 차이를 가리킨다. 니체는 모든 사물이 지닌 '천 개의 주름'을 '천 개의 눈'으로 바라보고 '천 개의 길'을 거쳐 '천 개의 숨겨진 섬'에 이른다. 니체라는 '천 개의 주름'을 정확한 지도로 완성한 지은이의 사고력은 튼튼하고 치밀하다. 덕분에 우리는 미로를 헤매지 않아도 된다. 다음을 보자.

'철학이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새로운 가치의 탄생은 습속의 윤리의 압력에 굴복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새롭고 위험한 생각은 안된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p.51)

'누구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무게를 달아 볼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의 무게를 알 수 없다.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다.'(pp 25~26)

니체를 해석하는 일은 그를 재현하는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철저하게 자신만의 니체를 '창조'한다. 친절하고 겸손하게, 그러나 열렬하게 니체를 설명하고 옹호하면서, 그를 통해 진리와 도덕, 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명확하게 밝힌다. 이 책 어디에도 니체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평가하거나 비판하는 구절은 찾아보기 힘들다. 왜? '객관성이나 비판적 거리란 오히려 사랑 능력을 상실한 학자들의 불임증'이라 생각하기에...

지은이는 니체를 이해하는 길은 니체에 대한 주석이나 비판이 아니라 니체를 직접 여행하고 답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흔히들 문화유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라는 이름을 걸고 행하는 답사라는 형식을 생각해보자. 아무리 많은 자료를 가지고 학습과 정리를 한다 하더라도 직접 그곳에 가서 눈으로 익히고 몸으로 깨닫는 여행과 답사에는 미치지 못한다. 완성되고 고정화된 하나의 틀에 정형화되기 보다는 우리 자신이 직접 각자 하나의 길,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 게 훨씬 더 문화유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다.

"걱정해야 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

니체에 대한 이해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비판과 주석 이전에 직접 니체의 영토를 경험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장은 독립된 내용을 담고 있는 니체의 영토들이다. 각각의 영토들을 여행하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저자의 니체를 이해하게 되고, 그 영토들을 가로지르고 있는 어떤 일관성을 발견하게 된다. 각 장들은 모두 동일성과 결핍을 조장하는, '근대 이성의 고약한 산물'이라 할 수 있는, (부정의) 권력의지와 대결하고 있다.

그 (부정의) 권력의지는 차이를 은폐하고 그 생성을 가로막으며, 창조적 욕망에 결핍을 집어 넣어 아무런 생성 능력도 갖지 못한 대중들, 심지어는 자신의 억압과 예속마저 요구하는 대중들을 양산해오고 있기 때문이다(히틀러의 나찌즘에 열광했던 독일인들을 생각해보라. 이에 대해서는 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참조).

그런데 그 대결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지은이 자신이 곧바로 니체가 되어 니체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하나의 니체에서 그와 비슷한, 하지만 동일하다고 말하긴 힘든 다른 니체로 옮겨다니며 말한다. "그는 단 여섯 줄의 문장에도 천 개의 의미를 담아내는 사람이다. 그 천 개의 니체를 하나의 니체 아래 묶어두려는 사람들이 문제"(p.6)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은이는 자신의 입으로 니체를 말하면서 사실은 니체의 입으로 '자기'를 말하고 있다. 그 수많은 (천 개의) 니체 중 하나의 니체의 입을 빌어 자신이 사유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정의) 권력의지에 대한 이러한 대결방식을 통해 지은이는 차이와 다양성, 새로운 신체를 생산하는 '긍정의 권력의지'를 제시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천(千)'이라는 숫자는 동일성에 맞서 다양한 '차이'를, 결핍에 맞서 '과잉'과 '넘침'을 의미한다. 이렇게 니체의 영토를 답사하다 보면 지은이는 사물들을 바라보는 천 개의 눈,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천 개의 길, 사물들이 발생한 천 개의 기원, 세상이 도달할 천 개의 섬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떻게 보면 이 책에서 보여주는 니체는 스피노자의 니체일 수도 있고 맑스의 니체일 수도 있고 들뢰즈의 니체일 수도 있는, 그런 니체다.

이렇듯 이 책은 니체의 영토를 여행하는 여행객 각자의 니체를 만날 수 있게끔 유도한다.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될 수 없었던 기존의 니체 주석에 좌절을 맛보신 분들에게 이 책은 분명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는 니체의 단어를 빌어 "모든 책들이 '망치'가 되거나 '다이너마이트'로 사용되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 "저기 니체라는 화살통에 천 개의 화살이 들어있다! 저기 니체라는 이름의 다이너마이트들이 널려 있다!"(p.20)고 흥분하면서.

또한 지은이는 다음과 같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모든 책들은 동료를 구하는 몸짓이다"(p.9)라고. 아마도 그는 망치 또는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한 많은 동료들을 그의 곁으로 불러모으고 싶은 모양이다. 물론 그 수많은 화살, 수많은 다이너마이트들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순전히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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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5-10-22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싶었던책인데 리뷰를 읽으니 꼭 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