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 Better Blues (모 베러 블루스)
Branford Marsalis 외 연주 / 소니뮤직(SonyMusic) / 2000년 1월
평점 :
품절


 

'블루스보다 좋을 순 없다'


Mo' Better Blues. 너무나도 익숙한 곡이자 지금 자신의 상태를 평가해줄 만한 곡이다. 아주 유쾌하게 흥얼대며 들을 수도 있고 음악 뒤에 숨어 있는 왠지 모를 서글픔과 우울함을 느낄 수도 있는, 듣는 이의 기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흑인 인권주의자 감독인 '스파이크 리'의 영화 『Mo' Better Blues』에 쓰인 동명의 곡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블루스보다 좋을 순 없다'쯤 될 것이다. 영화와 관련지어서 해석하면 많은 의미가 함축된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블루스 자체가 많은 의미가 들어 있는 음악장르이기도 하고...

블루스란 음악장르는 그 역사를 알지 못하면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힘든 음악장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블루스의 정의는 '미국의 노예제도에서 비롯된, 서아프리카의 해안 지역으로부터 백인들에게 포획되어 유입된 흑인들이 자신들의 처지와 애환을 노래한 노동요(Work Song)를 시초로 하고 있는, 12마디의 화음조성 구조를 가진 음악'(신현준, 『록 음악의 아홉가지 갈래들』, 문학과 지성사)이라고 한다. 하지만 블루스는 하나의 음악 장르 명칭에만 머물지는 않는데, 이른바 '블루지'한 상태란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지향점이자 인생관, 삶의 태도를 일컫는 의미로까지 확대되어 쓰이고 있다.

흔히들 재즈는 뉴올리언즈에서부터, 블루스는 미시시피에서부터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뉴올리언즈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흑인들의 드럼 사용이 선동용 기구라는 미명 아래 금지되었기 때문에 흑인 밀집지역 중 하나였던 미시시피에서는 주로 보컬과 현악기 위주였기에 벤조나 급조한 형태의 악기, 가령 워시보드, 하모니카 또는 휘파람 등이 사용되어 블루스가 발전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뉴올리언즈의 경우 어느 정도 드럼이나 관악기의 사용이 가능했기에 후에 퍼레이드 음악의 유행과 함께 재즈가 발전된 것이라 보고 있다.

「Mo' Better Blues」 자체는 완전한 블루스 음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뭐 어쨌건 장르 자체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같이 공감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음악이 어디 있으랴!

영화 『Mo' Better Blues』는 개봉되지 않았고 비디오로만 나와 있다. 이 영화에선 유명한 트럼펫 주자인 'Branford Marsalis'가 직접 연주한 음악들이 나오는데 「Mo' Better Blues」 역시 그가 직접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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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배따라기  (2004-07-11 22:17:31, Hit : 279, Vote : 6)
Subject  
   샤갈( Marc Chagall 1887∼1985 )의 색, 그리고 선의 유혹




The Painter to the Moon,1917, gouache and watercolor on paper, Marcus Diener collection, Basel




Cemetery Gates, 1917,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The Praying Jew, 1923, oil on canvas,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Green Violinist, 1923-24, oil on canvas,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The Falling Angel, 1923-47, oil on canvas, Kunstmuseum, Basel




The Watering Trough, 1925




The Three Acrobats, 1926,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Chrysanthemums, 1926, oil on canvas, Perls Galleries, New York




Lovers with Flowers, 1927, oil on canvas, The Israel Museum, Jerusalem




The Rooster, 1929, oil on canvas, Thyssen-Bornemisza Collection, Lugano




Lovers in the Lilacs, 1930, oil on canvas, Richard S. Zeisler Collection, New York




Solitude, 1933, oil on canvas, The Tel-Aviv Museum




Bouquet with Flying Lovers, 1934-47, oil on canvas, Tate Gallery, London




White Crucifixion, 1938, oil on canvas,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마르크 샤갈은 정의 내리기 힘든 사람이다. 그다지 정열적이지도 않았으며, 투철한 삶의 방식을 획득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자유로웠으며 어느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혈연으로 따지면 유태인이요, 태어난 곳으로 보면 러시아 사람,국적으로 따지면 프랑스 사람인 마르크 샤갈의 이력은 그자체가 이미 중간자로서의 그의 창조적 입장을 암시하는것 같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가 그렇듯이 마르크 샤갈은 한없이 먼 나라에서 온 나그네이다. 꽃과 통나무집과 파란 송아지와 일곱 가닥의 촛대와 센 강과 그리고 그 모든것 들이 성좌처럼 선회하는 아틀리에에서 익살스런 양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84살이 된 이 노화가는 [나는 마술사다]라고 한 마디로 잘라 말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사랑의 마술사라는 것을,그리고 이 사랑이 서구의 에로스보다 훨씬 먼 연원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이 되풀이해서 애인들, 약혼자들, 신랑 신부들의 열렬한 포옹을 그리면서 도취의 광경을 침실에 두지않고 옥외에다 둔 것, 축배를 들게하고, 길고 새하얀 신부 의상의 치마자락을 끌게 한 채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활짝 열린 대기 속으로 끌어낸다.

우리와 친근한 샤갈의 표상의 세계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샤갈에 있어서 먼 나라, 다른 차원의 세계란 것은 애인에게 안긴 상대편의 얼굴을 갑자기 초현실의 색채로 바꾸는 힘, 이 변용력이 잠재하는 영역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는 조화와 속박으로부터 해방의 방향으로 걸어갔던 것이다. 초현실적 색채의 현실성과 도치되고 게다가 화가의 내부에만 실재하는 질서 속에 집중된 사물의 구성적 균형에 의하여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무엇에도 비할길없는 강렬한 회화 언어,즉 기호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인간을 초월하는 세계와의 합체, 서정적, 시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화적 합체야말로 샤갈의 예술세계의 참된 의의이다.

그가 끈덕지게 그려 온 포옹하는 사람들의 손은 이 무한한 세계로부터의 희망을 움켜 쥐고 있다. 물론 전쟁과 혁명, 동포의 살육, 스페인의 내란과 서구 각지에서 벌어진 유태인 학살,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재화로 덮여 있던 현실의 균열을 그림으로 표현 하기도 하였다. 그림 속의 집들은 붕괴되고 병사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것같은 자세로 누워 있다.십자가도 쓰러지고 천사마저 추락한다.

동시에 형태의 윤곽을 이루는 묘선은 끝이 째어지고 굵은 악센트를 띠며 떨기 시작 한다. 드라크르와나 고야의 만년 작품에도 나타나 있는 선, 비극의 본질이 회화적 형태를 빌어 분출할 때의 그 절규다. 붕괴하는 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붕괴가 생성의 표현인 회화, 샤갈의 스틸 바로 그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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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미술 전시회들이 샤갈과 인상파들의 천국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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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의 빛으로](35)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힘

출처:인터넷경향신문/입력: 2007년 09월 14일 14:45:38

-제 몫에 충실할때 행복하다-

# 운명의 짜임새

엘리후 벳데르의 ‘별들을 거두어들이는 운명의 세 여신’(1887년 작).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장하는 운명의 세 여신을 그리고 있다.

모처럼 아침 햇살이 산뜻하다. 파란 하늘에 탐스러운 뭉게구름이 한가롭게 흐르고, 커피 한 잔의 향기와 함께 노래 한 곡이 흐른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박신 작사·최대석 작곡·‘만남’) 사람들은 ‘운명적인 만남’이라 말하곤 한다.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나 제각각 다른 삶의 길을 걸어오던 사람들이 어느 날 어떤 상황 속에서 서로 만난다. 그 만남을 계기로 각별한 관계가 이루어졌을 때 사람들은 단순한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날 그곳에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만난 것을 어떻게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만남은 운명으로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다. 설령 그때 우리가 그곳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도, 언제 어디에선가 반드시 만나도록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굳게 믿게 된다.

상대방과 깊은 관계로 같이 하고 싶은 경우엔 그 만남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길 열렬히 갈망한다. 이건 우연이 아니며 우연일 수 없다. 우린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헤어질 수 없게 돼 있다. 그렇게 이 만남이 누구도 풀어버릴 수 없는 운명이라면.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정희성·‘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인간은 지난 삶의 여정 가운데 남겨진 기억을 시간의 흐름 속에 하나의 날실로 꼬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사건들을 또 다른 씨실로 여기며 그것에 자신의 날실을 엮어 넣어 미래의 비단을 짤 수 있다. 그래서 지나온 모든 삶의 여정과 가야 할 미래에 대한 꿈을 앞뒤로 두리번거리며 그 운명적인 줄거리를 감탄하거나 탄식한다. 어떻게 이렇게 기막히게 살아왔을까, 다른 삶을 살 수는 없었을까. 이렇게 살아야만 했고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까? 마침내 죽는 그 순간 자신이 짜놓은 삶의 비단 전체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난 이렇게 살 수밖엔 없었다, 다른 길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것은 신기루였을 뿐 결국 난 이렇게 살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이 내 팔자며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이었다. 후회?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만남’) 사람의 마음 속에서 운명이란 이렇게 짜이는 것은 아닐까?

# 정해진 몫, 그것을 지켜라, 행복을 원한다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이라(moira)’ 또는 ‘모로스(moros)’라는 낱말로 운명을 표현하였다. 이 낱말의 쓰임새를 살펴보자면 예를 들어 여러 사람들이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눌 때 뽑힌 제비에 따라 한 사람에게 나누어진 몫을 ‘모이라’라고 한다. 이 낱말이 분배된 땅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아주 넓게는 한 사람에게 삶의 몫으로 정해진 생애 전체를 말한다. 어떤 사람이 70세에 죽었다면 그에겐 70년이라는 길이가 삶의 몫으로 주어진 모이라다. 그래서 모이라와 모로스는 죽음(thanatos)이라는 말과 함께 자주 등장한다. 죽음이란 주어진 삶의 몫의 마지막 매듭이기 때문이다(우리들이 죽음에 대해 말할 때 “운명하다” “운명을 다하다”라는 말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더 나아가 단순하게 삶의 길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길이를 채우며 행하고 겪는 각종 사건들과 사람들의 관계를 모두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번 몫으로 정해진 것을 제멋대로 바꿀 수는 없다. 각자는 자기에게 할당된 몫을 자기 것으로 여겨야 하며, 자기 것을 소홀히 하거나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해서는 안된다. 제 몫을 넘어가면 끝내 다른 사람의 몫을 건드릴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런 일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정의(正義·dikaiosyne)란 ‘각자에게 합당한 제 몫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定義·horos)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몫에 충실하거나, 제 몫으로 정해진 역할과 기능을 잘 수행하는 것을 아레테(arete), 곧 ‘훌륭함, 탁월함, 미덕’으로 정의하였다. 행복이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아레테를 잘 발휘할 때(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1100b7-10), 고쳐 말한다면 자기 모이라에 만족하며 충실할 때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 몫의 기능, 역할, 능력을 잘 알고 이를 넘어서지 않으려는 절제의 지혜를 소프로시네(s●phrosyn●)라 하여 뛰어난 정신능력의 하나로 존중하였다. 소프로시네란 “제 자신의 것을 하며(to ta heautou prattein)”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 절제를 뜻하며 절제하기 위해 제 자신의 능력과 한계, 역할과 본분을 제대로 아는 “제 자신을 아는 것(to gignoskein auton heauton)” 자기가 무엇을 모르며, 무엇을 알고 있는가를 아는 것을 뜻한다(플라톤·‘카르미데스’ 161b·165a·169e-170e).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지혜는 운명과 짝을 이루며, 윤리적인 지침으로 단단하게 선다.

반대로 ‘정해진 몫(moria, moros)을 넘어서는(hyper) 행위(hypermoron, hyper moiran)’란 ‘정의를 벗어나는(adikia)’ ‘불법(paranomia)”이며 제 기능과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못됨, 모자람(kakia)’이고, 자기 본분과 분수를 모르고 설쳐대는 ‘무례하고 거친 오만(hybris)’이다. 그 결과는 불행과 고통이다. 그래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제우스는 인간들의 세상을 바라보며 이렇게 탄식했다. “인간들은 신들을 탓하곤 한다. 그들은 재앙이 우리에게 비롯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 자신의 못된 짓으로 정해진 몫을 넘어선(hypermoron)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1·32-34) 고대 그리스인들은 운명에 충실하게 따르며, 사회 속에서 자기 본분을 다하고, 자기 자신을 알고 함부로 들이대지 않으며 절제할 때, 참된 행복에 이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 반대의 길을 갈 때는 불행이 온다고 믿었고 그렇게 믿도록 다짐하는 역사를 꾸려왔다.

# 정해진 몫, 그것을 넘을 수는 없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윤리적 요청은 그들의 상상력에 의해 신화로 형상화되었다. 제우스는 테티스 여신과 결혼하여 운명의 여신들, 즉 세 명의 모이라 여신을 낳는다. 이들은 제우스에게 특권을 부여받아 인간들의 행복과 불행을 관장하며, 운명을 쥐락펴락한다.(헤시오도스·‘신들의 계보’ 904-906, 아폴로도로스·‘도서관(bibliotheke)’ 3·1) 클로토는 인간 운명의 실을 잣고, 라케시스는 운명의 실을 감고, 아트로포스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운명의 실을 잘라버린다. 이들의 움직임은 신들조차 막을 수 없고, 간섭할 수 없다. 오히려 신들은 이들이 정해준 운명대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정해진 몫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인간 세상에 끼어든다.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진 존재인 신을 인간의 운명의 집행자로서 그려내어, 인간이 신을 초월하거나 이겨낼 수 없듯이 신이 집행하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신화를 일구어낸 것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이와 같은 신화적인 짜임새를 잘 보여준다. 친구인 파트로클로스가 적의 우두머리인 헥토르에게 죽자 아킬레우스는 격렬한 분노에 휩싸여 전투에 참가한다. 그는 아이네이아스와 격돌한 이후(20·75) 23명의 트로이아 전사를 거침없이 처치하고, 12명의 전사를 파트로클로스의 피값으로 생포한다(21·26-28). 강의 신인 스카만드로스가 개입하자(21·210-384), 올림포스의 신들이 모두 뛰어들어 트로이아 전장에는 엄청난 혼전이 벌어진다(21·385-520). 그런데 신들의 거대한 혼전은 아킬레우스가 “운명을 넘어(hypermoron) 성벽을 허물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는(20·30)” 제우스의 허락에 따라 벌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제우스가 신들이 인간의 전쟁에 개입하도록 허용하게 된 동기다. 그는 아킬레우스가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을 넘어서지 못하게 하려고 신들의 참전을 허용한 것이다. 이렇게 “운명을 넘어”라는 낱말은 신들이 인간사에 개입하는 중요한 계기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2권에서 아가멤논이 그리스 군사들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군사들이 기뻐하며 우르르 몰려가 귀향 준비를 하자 헤라와 아테나 여신은 그리스 군사들이 “운명을 넘어서는 귀향(hypermora nostos·2·155)”을 감행할까봐 이를 막기 위해 인간들 사이에 끼어든다. 아킬레우스가 전투에 참가하여 헥토르를 죽이던 날, 다나오스인들이 “운명을 넘어(hypermoron·21·517)” 트로이아를 점령할까봐 아폴론도 인간들 사이로 끼어들어간다. 아이네이아스가 아킬레우스와 맞서 죽음의 고비를 맞이할 때 포세이돈은 그에게 다가가 “운명을 넘어(hyper moiran)” 하데스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싸우지 말고 물러서라고 조언을 해준다. 파트로클로스의 참전으로 그리스인들이 “운명을 넘어(hyper aisan·16·780)” 우세해지자 아폴론이 개입하여 파트로클로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다.

이와 같이 호메로스의 신들은 인간들이 자기 몫으로 주어진 운명을 뛰어넘지 못하게 하는 제어 장치로 움직이고 있다. 인간들에게 정해져 있는 운명을 제 몫대로 살아가도록 하려는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인간사에 개입한다. 신들조차도 자기멋대로 인간 개개인에게 정해진 운명을 뒤바꿀 수 없다. 만약 어떤 신이 그런 일을 하려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다른 신들의 제지를 받는다. 예를 들어 사르페돈이 파트로클로스에게 죽게 될 순간에 다른 신들에게 그를 구해주면 어떻겠냐고 물었으며(22·175-6),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게 쫓기는 모습을 보자 제우스는 가슴 아파하며 같은 제안을 한다(16·431-461). 그러나 그의 제안은 헤라와 아테나에 의해 묵살된다. 신들은 인간의 운명의 수호자, 집행자인 셈이다. 인간은 누구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으며, 벗어나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신화는 인간들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작동했던 것이다.

더욱 강력하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이 인간 정신세계 속에 주인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 인간의 삶은 그 절대적인 힘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믿음이 생겨난다. 그 믿음은 절대자의 뜻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을 피워낸다. 서구의 역사 속에 탄생한 신화와 종교는 그렇게 인간을 규제해 왔다. 그리고 그 믿음을 조장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믿음을 관리하던 사람들은 스스로 그 믿음에 충실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도구로만 이를 사용했을까? 중세 기독교의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려 했던 서구 근대의 종교개혁 신학자들, 신의 죽음을 외치며 새로운 도덕과 가치관을 모색하는 현대 철학자들, 그들의 노력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제 값을 따질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내가 이렇게 운명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내 운명의 한 가닥인가?

〈김헌|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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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문화유산 기행]화채그릇 닮았다고 ‘펀치볼’

출처:인터넷경향신문 / 입력: 2007년 09월 14일 14:45:57

‘김일성고지’ ‘모택동 고지’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제인러셀 고지’….

전방을 다니다 보면 처절한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살리는 이름들이 남아 있다. 바로 각양 각색의 고지 이름이다. 그 가운데는 투쟁심을 고취시키거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음을 알리는 진저리나는 이름도 있지만, 개중에는 전쟁의 시름을 잊으려는 듯 여배우의 가슴을 딴 재미 있는 것도 있다.

화채그릇을 닮았다해서 붙은 이름인 펀치볼. 을지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김일성고지(924고지)와 모택동고지(1026고지)가 보인다. 국군해병 1연대가 철옹성 같은 1026고지와 924고지를 반드시 탈취하겠다는 뜻으로 김일성과 모택동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적개심을 고취시켰다. 해안분지를 둘러싼 도솔산, 가칠봉, 대우산 등은 한국전쟁 때 대표적인 쟁탈의 요소였다.

양구(방산면)에서 또 하나의 유명한 고지는 ‘피의 능선(Bloody Ridge)’이다. 종군기자들은 피로 얼룩진 능선이라 해서 938고지를 이렇게 붙였다. 이 전투는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후반부를 장식하기도 했다. 북한군(일명 깃발부대)과 국군의 격전장이었던 것이다.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고지군은 ‘단장(Heartbreak)의 능선’이라 한다.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지 종군기자들이 “심장이 찢어질 듯한 참상”이라 해서 이렇게 이름 붙였다. 유엔군 사령관을 지낸 클라크 대장의 외아들이 이 고지전에서 중상을 입고 후송됐다.

양구는 아니지만 오성산과 김화 사이 험한 산비탈과 깊은 골짜기를 두고 격전을 벌인 곳을 저격능선(Sniper Ridge)이라 했다. 적진과의 거리가 가까워 저격 당하기 십상이었다 한다. 오성산(1062고지)은 김일성이 “육사 군번 세 도라꾸와도 바꾸지 않는다”고 할 만큼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저격능선 서쪽에 있는 두 개의 봉우리는 ‘제인러셀고지’라 했다. 미국의 육체파 여배우 제인 러셀의 가슴을 연상시킨다 해서 미군들이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이 제인러셀 고지는 북한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더듬어왔듯 비무장지대 일원에는 수많은 과거의 유산들이 남아 있다. 이런 문화유산들에 대한 보전대책을 세우는 것은 물론 시급한 과제이다. 하지만 그런 과거의 문화유산과 함께 아픈 현대사의 상징인 전쟁·분단 유적들도 보전해야 할 시점에 왔다. 다시는 이런 전쟁과 분단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측면에서도….

〈이우형|현강문화연구소장〉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28) 양구 펀치볼(下)

출처:인터넷경향신문 / 입력: 2007년 09월 14일 14:46:43

-수천년 터전… 무릉도원의 꿈… 그러나 갈등의 땅-


최전방 을지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양구 펀치볼(해안분지). 잔뜩 찌푸린 구름마저 펀치볼을 피했다. 구름 사이로 화사한 햇빛이 신묘한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양구 해안면/박재찬기자>


“야. 정말 대단하네.”

그야말로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사가 터졌다. 하늘을 뒤덮었던 짙은 구름 사이로 환한 햇빛이 펀치볼(해안분지)을 비추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왜 구름은 저토록 초록의 분지만을 피했을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 아니면 환한 조명 아래 야간경기를 벌이는 축구장을 관중석 맨 꼭대기에서 바라본 느낌이랄까.

우여곡절 끝에 해안(亥安)에 들어온 선사인들도 이곳(을지전망대)에 올랐겠지. 신이 내린 듯한 저 찬란한 땅을 바라보고 경외감을 느꼈겠지. 그리곤 마음의 본향으로 삼았겠지. 해안분지, 즉 펀치볼은 그야말로 자연현상이 빚은 경이로운 땅이다. 해발 1000m 고봉준령이 병풍처럼 둘러쌌다. 서쪽은 가칠봉(1242m)·대우산(1179m)·도솔산(1148m)·대암산(1304m) 준령이 막았다. 동쪽엔 달산령(807.4m)·먼멧재(730m)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북쪽엔 휴전선 너머 저편에 보이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 자연현상의 조화

분지의 남북 방향은 11.95㎞, 동서 길이는 6.6㎞이다. 분지의 단면은 U자형인데, 맨 밑바닥의 고도가 400~500m이니, 주변 산지보다 400~800m 낮은 셈이다. 대체 무슨 조화인가. 왜 이 첩첩산중에 이런 엄청난 분지가 생겼을까. 어떤 이들은 거대한 운석이 떨어져 지금과 같은 거대한 분지가 조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요즘엔 이른바 ‘차별침식’이라는 전문용어로 설명하는 게 대세다. 즉, 분지 중심부는 중생대 쥐라기(1억8000년~1억3500년 전)에 지각을 뚫고 올라온 화강암이다. 분지 바깥쪽은 선캠브리아기(5억4000만년 전까지)의 변성퇴적암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분지 중심부의 화강암은 고온습윤한 기후 때문에 주변 산지의 변성퇴적암보다 훨씬 빠르게 침식됐다. 원래 지표 깊숙한 곳에서 만들어지는 화강암은 일단 지표상에 노출되면 심한 풍화작용을 일으킨다.

그러니까 중심부의 화강암은 빗물과 바람 같은 환경에 쉽게 깎여 주변의 퇴적암 지대보다 낮은 지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해안분지,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이곳, 천혜의 터전에서 구석기·신석기·청동기·초기 철기인들이 살았던 것이다.

무릉도원 주민들이 했다는 말이 이랬던가. “우리 조상들은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이곳에 온 이후 한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밖은) 어떤 세상입니까?”(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북한강 계곡, 심산유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온 선사인들 앞에 별안간 나타난 확 트인 세상. 그들은 이곳에 짐을 풀고 터전을 잡고 부족을 이루면서 오순도순 살았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도 골백번 바뀌었을 지금. 하지만 해안분지로 가는 길은 유비쿼터스 사회에 접어들었다는 지금도 만만치는 않은 것 같다.

# 무릉도원의 꿈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군대얘기’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이야기. 일행은 바로 그 인제·원통을 거쳐 해안분지로 들어갔다. 민간인은 드물었고, 최전방 군인들의 모습만이 눈에 띄는 여정. 간간이 마주치는 헌헌장부 사병들의 군기 바짝 든 새까만 모습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기자가 가는 이 길은 선사인들이 그들만의 ‘무릉도원’을 찾아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해안분지의 서쪽 높은 산지에서 발원한 물은 비교적 낮은 동쪽의 당물골로 합류하는데, 합류한 물은 해안분지를 빠져나와 인제 방면으로 흐른다. 그러나 이 길은 20세기 들어 무릉도원이 아닌, 분단·냉전의 한많은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되었다. 1956년 4월25일. 수천년 전 선사인들이 둥지를 틀었던 그 ‘별천지’에 150가구 965명의 ‘개척민’이 이주했다. 해방 이후 북한땅이었던 이 해안분지는 한국전쟁 후 ‘수복’되었다. 1954년 유엔군 사령부는 이른바 ‘수복지구’의 행정권을 한국정부에 넘겼다. 정부는 북한의 선전촌에 대응하고, 국토의 효과적인 이용을 위해 민북지역에 대한 정책이주를 추진했다. 바로 해안면에 도착한 개척민들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닿은 해안면은 면 전체가 민통선 이북지역에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이 특수한 곳에 온 사람들 역시 그 옛날 선사인들처럼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리곤 ‘피와 땀으로 얼룩진 괭이와 호미’로 불발탄과 지뢰가 지천에 깔린 땅을 일구었을 것이다.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 해안분지엔 510가구 1426명이 살고 있다. 주로 감자, 무, 배추 등 고랭지 농사를 주업으로 삼고 있다. 해방 이전에 살았던 원주민의 수는 5% 선이며, 주민 가운데 70%가 정책이주해 왔던 사람들이다. 휴전선 바로 밑 마을엔 200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주민들의 농사를 돕고 있다는 것도 이채로운 풍경이다. 이들 역시 이역만리 먼 곳에서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이곳을 찾았을 테지.

# 분쟁의 땅으로?

21세기에 접어든 이때 이곳에 사는 주민들도 수천년 전 선사인들이 그랬듯 유토피아의 꿈을 일궜을까. 물론 주민들의 삶은 다른 지역 농가보다는 넉넉하다. 주민 이호균씨(해안면 오유2리)는 “다른 지역보다는 1.5배 정도 소득이 높은 편”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해안분지에 들어온 사람들이 그린 ‘삶의 궤적’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함광복 GTB DMZ연구소장은 “현대사의 흐름에서 보면 해안분지는 전쟁·분쟁의 땅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전쟁 때는 한 뙈기의 땅이라도 빼앗기 위해 남북간에 처절한 전투를 벌였잖아요. 그리고 그후에는 정책이주민과 토지 원소유주 간 치열한 토지분쟁이 펼쳐지기도 했죠. 지금도 다툼은 끝나지 않았어요. 정부를 상대로 국유지를 불하받기 위한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지요.”

특히 1980년대 일어난 해안면 토지분쟁은 민북지역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례였다고 한다. 1956년 정책이주 때의 정부방침은 “주인 없는 땅을 마음껏 개간해서 먹고 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을 피해 떠났던 땅주인들이 돌아오자 토지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대법원은 결국 토지 원소유주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피땀을 흘린 개척자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책이주자들이 일군 땅(1980만㎡)이 속속 국유화되기 시작했다. 개척자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정부는 국유화한 땅을 다시 경작자에게 불하하겠다는 방침이지만 1만㎡ 이상은 불허한다는 방침이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1만㎡(3000평)는 너무 작은 땅. 그러니 정부를 상대로 또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꿈꾸는 무릉도원을 만들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하기야 이곳에 둥지를 튼 선사인들도 맨손으로 이 땅을 개척했을 터. 노동, 갈등, 타협과 같은 지난한 과정 끝에 수 천 년의 터전을 꾸몄을 것이다.

〈이기환 선임기자|양구 펀치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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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국가폭력과 테러, 무엇이 다를까

출처:인터넷경향신문/입력: 2007년 09월 07일 15:44:33

▲성스러운 테러…테리 이글턴|생각의 나무


“소위 말하는 테러에 대한 전쟁에서 악이란 단어는 역사적 설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테러를 설명하고 분석하려는 시도는 그것에 대한 사면으로 간주되며, 상황에 대한 이성적 분석은 테러에 대한 변명으로 간주되고 만다.”

사흘 후면 9·11테러가 발생한 지 꼬박 6년이 된다. 적잖은 시간이 흘렀지만 미국내에서는 아직 당시 테러를 ‘제정신 아닌 사람의 이해못할 광기’로 치부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테러리즘에 대한 근원을 탐색하는 책은 이런 근본주의적 시선 같은 테러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한다.

저자 테리 이글턴은 20여년전 국내에 번역 출간된 이후 대학 문학개론 강의마다 단골 텍스트로 채택된 ‘문학이론 입문’으로 유명하다.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인 저자는 신화와 소설, 철학서적 등 방대한 텍스트를 넘나들며 테러의 심층을 파헤친다. 특유의 종횡무진하는 펜은 테러를 정신분석하고 문학비평을 구사하며 때로는 철학적 사유를 펼친다.

저자는 테러의 기원을 신화에서 찾는다. 저자에 따르면 최초의 테러리스트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다. 그가 펼치는 향연은 무질서를 부른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는 일탈과 파괴의 장본인으로 간주된다. 그리스 희곡에서 이런 디오니소스의 파괴행위를 제압하러 나서는 인물이 펜테우스인데 그는 폭력으로 무질서를 진압한다. 펜테우스는 그의 적과 흡사한 방식, 즉 테러로 테러에 맞선다. 저자는 펜테우스를 국가 폭력의 전형으로 지목한다. 펜테우스는 9·11 이후 대테러 전쟁에 나선 미국의 비유로 읽힌다.

저자는 테러를 폭력으로 대항할 것이 아니라 공정한 심판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테러를 극복하는 최선의 길이자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한다. 펜테우스 같은 ‘과도한 이성의 오만함’에 뿌리를 둔 근본주의자 방식은 테러의 악순환을 불러올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칼끝은 다분히 종교적 근본주의자로 향해 있다. 그는 “탈레반 출신이건, 텍사스 출신이건 근본주의자들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는 또 영국 정치가 에드문드 버크의 말을 빌려 프랑스 혁명의 테러성을 들춰낸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을 “무서운 위험성을 지닌 기질, 결국 스스로를 오용과 남용으로 몰아가는 자유정신”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그는 혁명의 주동자 자코뱅당의 공포정치를 비판했는데 결국 그들도 ‘오만한 이성’의 포로가 돼 파국을 맞았다. 저자는 또 테러를 불러들이는 자본주의 일방통행을 경계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던 사람들은 이슬람 세계 민중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역사의 종언에 대한 선언이 결국 또다른 역사의 시작을 불러왔을 뿐이다”라는 지적은 울림이 있다. 서정은 옮김. 1만2000원

〈서영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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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9월만 되면 발간되는 이런 류의 책들이나 그 소개글들은 나에게 참 불편함을 준다. 모두 촛점을 9.11테러 그 자체에 맞추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어디에선가 9..11테러에 대한 짧은 글을 썼던 적이 있긴 하지만, '성스러운 테러'니 '거룩한 테러'니 하는 것 자체가 좀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최강국가 미국이 대상이 되었다는 것에서 연유되는 이 지겨운 반복!

솔직히 우리가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서 새겨야 할 것은 9.11테러 그 자체가 아니라 1922년 9월 11일 영국이 마음대로 강행했던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이 가져온 세계사의 비극에 대한 성찰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 있었던 쿠데타와 그 이후 벌어졌던 어마어마한 국가폭력의 실상 같은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인도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 (Arundhati Roy)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의 어떤 강연에서 긴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아래는 그 글 가운데 일부분이다.


"지금 우리는 9월 11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날짜는 작년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미국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세계의 어떤 지역 사람들에게도 바로 이 날짜는 오랫동안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과연 9월 11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기억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반추는 비난이나 선동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역사의 아픔을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짙은 안개를 조금 걷어보자는 거지요. 이것은 미국 시민들에게 가장 예의바르게,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세계로 나오시기를" 부탁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중략) 9월 11일은 중동에서도 비극적인 기억이 있는 날입니다. 1922년 9월 11일, 영국 정부는 아랍인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를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영제국이 1917년에 발표했던 '발포어 선언'의 후속조처였습니다. '발포어 선언'은 유럽의 유태 민족주의자들 ― 시오니스트 ― 에게 유태인의 국가를 건설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무런 조심성도 없이, 제국주의 권력은 세계의 오래된 문명을 갈갈이 찢어놓았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카시미르는 제국주의 국가 영국이 현대세계에 가져다준 저주의 선물입니다. 두 지역은 모두 오늘날 들끓는 국제적 갈등의 최전선에 있습니다.

(.....중략) 29년 전 칠레에서, 피노체트 장군은 1973년 9월 11일에 CIA의 지원 아래 감행된 쿠데타를 통해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켰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그 국민들이 무책임한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칠레가 맑스주의 국가가 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쿠데타가 끝난 뒤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궁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쿠데타에 이은 공포정치하에서 수천명이 죽었습니다. 그보다 훨씬더 많은 사람들은 '실종'되었습니다. 총살대가 공개처형을 행하였습니다. 집단수용소와 고문실이 나라 전역에 설치되었습니다. 사망한 사람들은 탄광의 갱도와 표지도 없는 무덤에 매장되었습니다. 17년 동안 칠레 사람들은, 한밤중의 노크소리, 일상화된 '실종', 갑작스런 체포와 고문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산티아고 공연장의 청중들이 보는 앞에서 음악가 빅토르 하라의 두 손이 어떻게 잘렸는지 칠레인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피노체트의 부하들은 그에게 총을 쏘기 전에, 기타를 던져주고는 연주를 해보라고 놀리기까지 했습니다. "
(.....중략)

 

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녹색평론>에 실린 전문자료)



El alma llena de banderas (영혼은 깃발들로 가득하다) - Victor J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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