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몫에 충실할때 행복하다-
# 운명의 짜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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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 벳데르의 ‘별들을 거두어들이는 운명의 세 여신’(1887년 작).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장하는 운명의 세 여신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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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아침 햇살이 산뜻하다. 파란 하늘에 탐스러운 뭉게구름이 한가롭게 흐르고, 커피 한 잔의 향기와 함께 노래 한 곡이 흐른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박신 작사·최대석 작곡·‘만남’) 사람들은 ‘운명적인 만남’이라 말하곤 한다.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나 제각각 다른 삶의 길을 걸어오던 사람들이 어느 날 어떤 상황 속에서 서로 만난다. 그 만남을 계기로 각별한 관계가 이루어졌을 때 사람들은 단순한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날 그곳에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만난 것을 어떻게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만남은 운명으로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다. 설령 그때 우리가 그곳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도, 언제 어디에선가 반드시 만나도록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굳게 믿게 된다.
상대방과 깊은 관계로 같이 하고 싶은 경우엔 그 만남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길 열렬히 갈망한다. 이건 우연이 아니며 우연일 수 없다. 우린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헤어질 수 없게 돼 있다. 그렇게 이 만남이 누구도 풀어버릴 수 없는 운명이라면.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정희성·‘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인간은 지난 삶의 여정 가운데 남겨진 기억을 시간의 흐름 속에 하나의 날실로 꼬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사건들을 또 다른 씨실로 여기며 그것에 자신의 날실을 엮어 넣어 미래의 비단을 짤 수 있다. 그래서 지나온 모든 삶의 여정과 가야 할 미래에 대한 꿈을 앞뒤로 두리번거리며 그 운명적인 줄거리를 감탄하거나 탄식한다. 어떻게 이렇게 기막히게 살아왔을까, 다른 삶을 살 수는 없었을까. 이렇게 살아야만 했고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까? 마침내 죽는 그 순간 자신이 짜놓은 삶의 비단 전체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난 이렇게 살 수밖엔 없었다, 다른 길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것은 신기루였을 뿐 결국 난 이렇게 살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이 내 팔자며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이었다. 후회?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만남’) 사람의 마음 속에서 운명이란 이렇게 짜이는 것은 아닐까?
# 정해진 몫, 그것을 지켜라, 행복을 원한다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이라(moira)’ 또는 ‘모로스(moros)’라는 낱말로 운명을 표현하였다. 이 낱말의 쓰임새를 살펴보자면 예를 들어 여러 사람들이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눌 때 뽑힌 제비에 따라 한 사람에게 나누어진 몫을 ‘모이라’라고 한다. 이 낱말이 분배된 땅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아주 넓게는 한 사람에게 삶의 몫으로 정해진 생애 전체를 말한다. 어떤 사람이 70세에 죽었다면 그에겐 70년이라는 길이가 삶의 몫으로 주어진 모이라다. 그래서 모이라와 모로스는 죽음(thanatos)이라는 말과 함께 자주 등장한다. 죽음이란 주어진 삶의 몫의 마지막 매듭이기 때문이다(우리들이 죽음에 대해 말할 때 “운명하다” “운명을 다하다”라는 말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더 나아가 단순하게 삶의 길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길이를 채우며 행하고 겪는 각종 사건들과 사람들의 관계를 모두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번 몫으로 정해진 것을 제멋대로 바꿀 수는 없다. 각자는 자기에게 할당된 몫을 자기 것으로 여겨야 하며, 자기 것을 소홀히 하거나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해서는 안된다. 제 몫을 넘어가면 끝내 다른 사람의 몫을 건드릴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런 일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정의(正義·dikaiosyne)란 ‘각자에게 합당한 제 몫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定義·horos)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몫에 충실하거나, 제 몫으로 정해진 역할과 기능을 잘 수행하는 것을 아레테(arete), 곧 ‘훌륭함, 탁월함, 미덕’으로 정의하였다. 행복이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아레테를 잘 발휘할 때(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1100b7-10), 고쳐 말한다면 자기 모이라에 만족하며 충실할 때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 몫의 기능, 역할, 능력을 잘 알고 이를 넘어서지 않으려는 절제의 지혜를 소프로시네(s●phrosyn●)라 하여 뛰어난 정신능력의 하나로 존중하였다. 소프로시네란 “제 자신의 것을 하며(to ta heautou prattein)”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 절제를 뜻하며 절제하기 위해 제 자신의 능력과 한계, 역할과 본분을 제대로 아는 “제 자신을 아는 것(to gignoskein auton heauton)” 자기가 무엇을 모르며, 무엇을 알고 있는가를 아는 것을 뜻한다(플라톤·‘카르미데스’ 161b·165a·169e-170e).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지혜는 운명과 짝을 이루며, 윤리적인 지침으로 단단하게 선다.
반대로 ‘정해진 몫(moria, moros)을 넘어서는(hyper) 행위(hypermoron, hyper moiran)’란 ‘정의를 벗어나는(adikia)’ ‘불법(paranomia)”이며 제 기능과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못됨, 모자람(kakia)’이고, 자기 본분과 분수를 모르고 설쳐대는 ‘무례하고 거친 오만(hybris)’이다. 그 결과는 불행과 고통이다. 그래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제우스는 인간들의 세상을 바라보며 이렇게 탄식했다. “인간들은 신들을 탓하곤 한다. 그들은 재앙이 우리에게 비롯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 자신의 못된 짓으로 정해진 몫을 넘어선(hypermoron)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1·32-34) 고대 그리스인들은 운명에 충실하게 따르며, 사회 속에서 자기 본분을 다하고, 자기 자신을 알고 함부로 들이대지 않으며 절제할 때, 참된 행복에 이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 반대의 길을 갈 때는 불행이 온다고 믿었고 그렇게 믿도록 다짐하는 역사를 꾸려왔다.
# 정해진 몫, 그것을 넘을 수는 없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윤리적 요청은 그들의 상상력에 의해 신화로 형상화되었다. 제우스는 테티스 여신과 결혼하여 운명의 여신들, 즉 세 명의 모이라 여신을 낳는다. 이들은 제우스에게 특권을 부여받아 인간들의 행복과 불행을 관장하며, 운명을 쥐락펴락한다.(헤시오도스·‘신들의 계보’ 904-906, 아폴로도로스·‘도서관(bibliotheke)’ 3·1) 클로토는 인간 운명의 실을 잣고, 라케시스는 운명의 실을 감고, 아트로포스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운명의 실을 잘라버린다. 이들의 움직임은 신들조차 막을 수 없고, 간섭할 수 없다. 오히려 신들은 이들이 정해준 운명대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정해진 몫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인간 세상에 끼어든다.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진 존재인 신을 인간의 운명의 집행자로서 그려내어, 인간이 신을 초월하거나 이겨낼 수 없듯이 신이 집행하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신화를 일구어낸 것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이와 같은 신화적인 짜임새를 잘 보여준다. 친구인 파트로클로스가 적의 우두머리인 헥토르에게 죽자 아킬레우스는 격렬한 분노에 휩싸여 전투에 참가한다. 그는 아이네이아스와 격돌한 이후(20·75) 23명의 트로이아 전사를 거침없이 처치하고, 12명의 전사를 파트로클로스의 피값으로 생포한다(21·26-28). 강의 신인 스카만드로스가 개입하자(21·210-384), 올림포스의 신들이 모두 뛰어들어 트로이아 전장에는 엄청난 혼전이 벌어진다(21·385-520). 그런데 신들의 거대한 혼전은 아킬레우스가 “운명을 넘어(hypermoron) 성벽을 허물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는(20·30)” 제우스의 허락에 따라 벌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제우스가 신들이 인간의 전쟁에 개입하도록 허용하게 된 동기다. 그는 아킬레우스가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을 넘어서지 못하게 하려고 신들의 참전을 허용한 것이다. 이렇게 “운명을 넘어”라는 낱말은 신들이 인간사에 개입하는 중요한 계기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2권에서 아가멤논이 그리스 군사들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군사들이 기뻐하며 우르르 몰려가 귀향 준비를 하자 헤라와 아테나 여신은 그리스 군사들이 “운명을 넘어서는 귀향(hypermora nostos·2·155)”을 감행할까봐 이를 막기 위해 인간들 사이에 끼어든다. 아킬레우스가 전투에 참가하여 헥토르를 죽이던 날, 다나오스인들이 “운명을 넘어(hypermoron·21·517)” 트로이아를 점령할까봐 아폴론도 인간들 사이로 끼어들어간다. 아이네이아스가 아킬레우스와 맞서 죽음의 고비를 맞이할 때 포세이돈은 그에게 다가가 “운명을 넘어(hyper moiran)” 하데스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싸우지 말고 물러서라고 조언을 해준다. 파트로클로스의 참전으로 그리스인들이 “운명을 넘어(hyper aisan·16·780)” 우세해지자 아폴론이 개입하여 파트로클로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다.
이와 같이 호메로스의 신들은 인간들이 자기 몫으로 주어진 운명을 뛰어넘지 못하게 하는 제어 장치로 움직이고 있다. 인간들에게 정해져 있는 운명을 제 몫대로 살아가도록 하려는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인간사에 개입한다. 신들조차도 자기멋대로 인간 개개인에게 정해진 운명을 뒤바꿀 수 없다. 만약 어떤 신이 그런 일을 하려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다른 신들의 제지를 받는다. 예를 들어 사르페돈이 파트로클로스에게 죽게 될 순간에 다른 신들에게 그를 구해주면 어떻겠냐고 물었으며(22·175-6),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게 쫓기는 모습을 보자 제우스는 가슴 아파하며 같은 제안을 한다(16·431-461). 그러나 그의 제안은 헤라와 아테나에 의해 묵살된다. 신들은 인간의 운명의 수호자, 집행자인 셈이다. 인간은 누구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으며, 벗어나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신화는 인간들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작동했던 것이다.
더욱 강력하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이 인간 정신세계 속에 주인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 인간의 삶은 그 절대적인 힘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믿음이 생겨난다. 그 믿음은 절대자의 뜻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을 피워낸다. 서구의 역사 속에 탄생한 신화와 종교는 그렇게 인간을 규제해 왔다. 그리고 그 믿음을 조장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믿음을 관리하던 사람들은 스스로 그 믿음에 충실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도구로만 이를 사용했을까? 중세 기독교의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려 했던 서구 근대의 종교개혁 신학자들, 신의 죽음을 외치며 새로운 도덕과 가치관을 모색하는 현대 철학자들, 그들의 노력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제 값을 따질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내가 이렇게 운명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내 운명의 한 가닥인가?
〈김헌|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