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사람] ② 자력갱생, 그 잔인한 40년

피 흘린 땅에 땀 흘리다


‘철원의 민통선 마을’과 다른 시골 마을을 구분짓는 가장 큰 시각적 차이는 마을 들머리에 있는 거대한 석조 구조물이다. 기념비들은 장엄한 영탄구를 동원해 주민들이 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지난 세월의 상처를 노래하고 있다.

“이곳을 찾은 모든 이여!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목숨 걸고 개척한 자랑스런 마현2리의 역사를 전합니다.”




민통선 대마리 사람들의 삶… 정부 믿고 지뢰밭에서 땅 개간했더니 원주인이 뺏어가

▣ 출처 : <한겨레21> 제678호 2007/09/20
▣ 대마리(철원)=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이른 가을. 마을 들머리 정자 앞에 모인 노인들이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와 그런 걸 캐물어 어쩌겠다는 것이여.” 노인들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자리를 돌려 앉았다. 낮선 이들과 말을 섞으려 하지 않는 노인들의 등은 완고하고 가팔라 보였다.

“그래서 궁금한 게 뭔데.” 안절부절못하는 취재진이 보기 민망했던지 노인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노인의 이름은 박자, 상자, 석자로, 올해 일흔여섯이라고 했다. 철원이 고향으로 대마리에 정착한 것은 1967년 3월이다. 그는 “어릴 때 시절이 어려워 학교 문턱을 넘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곳으로 오면 땅을 6천 평씩 준다기에 한평생 농사나 지으려 했지. 이제 그것도 다 지난 일이구만.”

마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68년이지만, 마을의 탄생 배경을 이해하려면 역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50년 6월25일 시작된 3년간의 피 말리는 전쟁 끝에 유엔군은 개성을 내준 대신 중부 철원과 동부 고성을 잇는 산악지대를 손에 넣게 됐다. 미군은 비무장지대 아래 5~15km 지역에 민간인들이 낮 시간 동안 들어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귀농선’(歸農線)을 설정했고, 이후 이 지역의 이름은 ‘민간인통제선’(민통선)으로 바뀌게 된다. 한국군이 민통선 북방 지역의 통제권을 이양받게 된 것은 1964년 5월15일에 이르러서다.

일주일치 식량과 가천막 네 개뿐

“그래서 김희덕 장군이 꾀를 낸 거야.” 누그러진 표정의 박 노인이 입맛을 다시며 사연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김희덕 장군은 6군단장으로 새로 자신의 관할 아래 들어온 지역을 순찰하던 중이었다. 그가 떠올린 아이디어는 빈 땅에 사람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면 ‘식량 증산’도 할 수 있고, 갑작스런 ‘북괴’의 도발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의 아이디어를 채택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정부는 민통선 북방 지역에 계획적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해 1978년에는 그 수가 파주 백연리 등 통일촌 2개, 철원 대마리 등 전략촌 9개를 포함한 11개로 늘어난다. 그 무렵 전략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1057가구에 5667명이었다(표 참조).




박 노인의 얘기를 듣던 김형군(71) 노인이 말을 거들며 나섰다. “그렇게 대마리도 탄생하게 된 거지. 그런데 어떻게 알고 왔어? 올해가 우리가 이주한 지 40년째 되는 해야.” 마을 노인회장을 지낸 이규철 노인(작고)이 1987년 3월11일 ‘천막동기일동(대마리)’이라는 제목 아래 기술한 A4용지 8장짜리 마을 연혁을 보면, “김희덕 장군께서 시찰 중 국가 식량 증산의 욕심(을) 갖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 진언한바 (중략) 전투 능력 왕성한 자 150명으로 조를 편성해 1967년 3월29일자 현 태양교 부근에 하차(했다)”고 쓰여 있다.

김 노인은 “그때 마을로 들어온 사람들은 철원에서 83명, 연천에서 67명을 합친 150명이었다”고 말했다. 한 조에 10명씩 모두 15개로 조를 짰다. 입주민들은 반공정신이 투철한 제대 장병 가운데 골라 뽑았다. 김 노인의 고향은 지금은 ‘김일성 고지’라는 별명이 붙은 철원군 북면 구암산 밑으로, 전쟁이 터진 뒤 지금의 서울 천호동 근처로 피난 갔다가 철원이 수복될 때 포천으로 이사했다. 박 노인은 6조, 김 노인과 그 옆에 앉은 심의호(76) 노인은 15조였다. 결혼을 했고 처자식을 먹여살려야 했지만, 마땅히 할 일이 없던 30대 초반의 젊음들이었다.

이 150명에게 주어진 것은 일주일치 식량과 가천막 네 개뿐이었다. “가천막을 4채 세우고, 반 판 우(위)에다 버드나무 갈고(깔고) 그날 밤 전투정신으로 무장, 명일을 맞어슴니다(맞았습니다).”(이규철 회고록) 3일 동안 육군 26사단 1개 대대 곽아무개 중령의 지휘 아래 전투대비, 지형숙달 따위의 군사훈련을 받은 뒤, 버드나무와 아카시아로 가득한 들판을 옥토로 바꾸는 고된 노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1년 동안 목숨을 건 삽질 끝에 사람들은 집과 논과 학교 터를 닦았고, 이듬해인 1968년 8월30일 흩어져 살고 있던 가족들을 불러 모아 입주식을 열 수 있었다. 입주식은 해마다 8월30일에 되풀이되고 있다. 9월5일, <한겨레21>이 찾은 마을에는 ‘마을 입주식 40주년을 축하한다’는 펼침막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 노인들의 피땀 위에서 마을은 남았다. 2007년 현재 대마 1,2리를 합친 인구는 820명이다. 마을에는 한 시간에 한 대씩 버스가 들어온다.



“사고 나도 책임 안 묻는다”는 각서

그때는 노인들도 어렸고, 농사에 대한 똑 부러진 경험도 없었다. 김 노인은 “농사에 익숙지 않아 시행착오가 많았다”고 말했다. 처음 몇 해에는 기대만큼 소출이 많지 않아 집집마다 조금씩 빚이 쌓였다. 철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소설가 임동헌이 <민통선 사람들>에서 썼듯 군 부대 통제를 받는 탓에 출입도 자유롭지 않았고, 밤마다 “뛰면 5분, 걸으면 10분. 어서 와 수령님의 품에 안기라”는 ‘북괴’의 대남방송도 지긋지긋했다.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려면 하얀 윗옷에 노란색 아니면 빨간색 모자를 써야 했고(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색깔이 바뀌었다), 등화관제가 있을 때는 불을 끄고 담요로 창문을 가려야 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태어나자 빚은 더 크게 늘었다.

그것뿐이었으면 노인들의 대마리 생활도 견딜 만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뜻하지 않은 사고가 터지기 시작했다. 지뢰 때문이었다.

첫 사고는 1967년 4월10일에 터졌다. ‘2조’에 속해 있던 유철훈씨가 학교 터를 개간하다 K-14 대인지뢰에 오른쪽 무릎이 잘렸다. 심 노인은 “사람이 죽고, 다리가 잘려도 어디 가서 제대로 하소연 한 번 못했다”고 말했다.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하는 행동이라 보기엔 치졸하기 이를 데 없지만, 군인들이 여러 번 몰려와 “사고가 나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갔기 때문이다. 다친 사람들은 일을 할 수 없어 논두렁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2005년까지 지뢰를 밟아 죽은 사람이 대마리에서만 10명, 다친 사람은 13명에 이른다. 그 1세대 150명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45명, 그중에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이제 38명밖에 없다.

전쟁 같은 개척을 통해 땅은 옥토로 변해갔지만, 소출은 오로지 노인들의 것이 되지 못했다. 사라졌던 땅 주인이 돌아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정부 시책에 의해 입주했고, 황무지를 옥답으로 개간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호소가 등기 서류를 이길 순 없는 법이다. 노인들은 법정 투쟁을 벌였지만 번번이 패소했다.


△ 매년 8월30일에 대마리 묘장초등학교에서 입주 기념식이 열린다. 슬레이트로 만들어진 70년대 학교 지붕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란 구호가 적혀 있다.



사람들을 지뢰밭으로 몰아넣어 땅을 개척하게 만든 정부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겨레21>은 국가기록원을 통해 당시 정부의 고민을 보여주는 몇 가지 문서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1978년 5월26일 행정조정실장이 국방부 장관과 지방재정국장에게 보낸 공문 ‘민통선 북방 지역의 영농 및 주거상의 문제점 검토’(문서번호 국행이 100-147)를 보면, 정부가 민통선 내 토지를 놓고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74년 9월이었다. 청와대 사정담당특별보좌관이 민통선 지역 지주들과 개척민들 사이에 벌어진 토지 분쟁의 전말을 담은 ‘전방지역 토지방쟁 정리방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박 대통령에게 제출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문서 속에는 땅을 둘러싼 땅 주인과 대마리 주민들의 갈등 양상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땅의 원소유자 지윤전씨가 1976년 2월 “함부로 농사를 짓고 있는 땅 9천 평을 돌려달라”고 주민들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결과는 땅 주인의 승소였다. 지씨는 이를 알리기 위해 자신의 땅 위에다 경고판을 설치했지만, 흥분한 주민들은 이를 부서뜨리고 만다.

정부의 방침 “너희끼리 알아서 하라”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주먹구구 행정이었다는 비난이 가능하겠지만, 정부는 이같은 토지 분쟁이 터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민통선 북방 유휴지 개발’ ‘지역 안보’ ‘대북괴 심리전 효과 증진’이라는 정책 목표를 앞세운 탓에 그 지역에 땅 주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황한 정부는 부랴부랴 ‘민통선 북방토지 분쟁해결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어 문제를 풀려고 해보지만, 곧바로 제동이 걸린다. “사인 간의 소유권 분쟁에 섣불리 나서지 말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 노인은 “땅을 개척하면 1인당 6천 평씩 주겠다는 약속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잊혀져갔다”고 말했다. 자료 안에 첨부된 ‘사정협의회 제안 자료’를 보면, 정부가 정한 입장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드러난다. “정부 시책에 의하여 설립된 전략촌이기는 하나 토지 소유자와 경작자 간의 분쟁은 근본적으로 사인 간의 사법상 문제이고, 법정 사태까지 발전하는 단계에 있어 행정기관이 분쟁 당사자들에게 합의를 강요하고, 이를 강제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지 아니하다.” 쉬운 말로 바꾸자면,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니, 너희끼리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김정배(42) 대마2리 이장은 “결국 주민들은 돈을 주고 땅을 사거나, 소작료를 내는 소작인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어르신들이 젊을 때 피땀을 흘려 일군 땅이지만, 제 땅을 가지 사람은 전체의 40% 정도밖에 안 됩니다.”


△ 마을을 개척한 1세대 노인들이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김정배 대마2리 이장은 “언제 사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노인들의 희생 위에서, 그래도 마을은 남았다. 열심히 일해 땅을 사 모은 사람들은 이제 ‘철원 오대쌀’을 생산하는 부농이 됐다. 2001년에는 강원도 새농어촌건설운동 최우수마을로 뽑혔고, 가구당 농사 면적이 큰 덕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산다. 1968년 개교한 묘장초등학교는 올 2월 39번째 졸업생을 배출했다. 초등학교가 키워낸 아이들은 모두 719명이다.

박 노인은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노인 중 일부는 땅을 잃은 채 마을을 떠났고, 일부는 소작인으로 남았다. 그나마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불어닥친 외지인들의 땅 투기로 철원 땅 값이 몇 배로 올라 이젠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다. 마을의 리훈(里訓)은 ‘자력갱생’이다. 노인들이 ‘자력갱생’하는 동안 국가는 멀었고, 총검을 든 군인과 지뢰와 백마고지 너머 ‘북괴’의 대남 방송은 가까웠다.

 

체제 경쟁을 위한 경연장

 

민통선 마을은 언제부터 왜 만들어지기 시작했나

‘민통선 마을’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민간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선 안에 들어선 민간인 마을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민통선 안의 가장 첫 마을은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조산리 ‘대성동 마을’이다.

대성동은 한국 정부가 인공적으로 조성한 마을이 아닌 애초부터 존재했던 자연 부락이다. 마을이 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절묘한 위치 때문이다. 대성동은 판문점 남쪽 지역의 비무장지대에, 북한의 기정동은 그 북쪽 비무장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남과 북의 불필요한 충돌을 막을 수 있는 완충장치 구실을 해왔다. 대성동은 비무장지대에 자리한 탓에 유엔사의 관할 아래 있으며, 지금도 한국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한다.

맹렬한 체제 경쟁을 벌이던 시절 두 마을은 남북한의 체제 경쟁을 위한 경연장이 되고 만다. <한겨레21>이 국가기록원에서 찾은 ‘비무장지대 거주민간인 원호에 관한 건’(1958)을 보면,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한국 정부의 초조함이 날것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 “동부락 전면 약 2km 지점인 괴뢰 측 비무장지대에서는 1939명의 북한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어 적극적인 제반 원호를 실시하고 있지만 (중략) 대성동 부락에 거주하는 아방 측 민간인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하등의 원호대책이 강구되어 있지 않아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서 긍지를 상실케 될 우려가 있다고 사료됨.” 대성동의 태극기 깃대는 100m고, 기정동의 인공기 깃대는 160m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본격적인 민통선 마을 개척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부터다. 한국 정부는 1968년부터 ‘민통선 북방 유휴지 개발’과 ‘대북괴 심리전 효과 증진’을 위해 제대 장병을 중심으로 한 영세민들을 민통선 마을에 집단 이주시켰다. 서쪽의 파주 백연리에서 시작해 양구 만대리에 이르는 긴 지역에 1978년까지 11개 마을 5667명이 이주해왔고, 1980년 관전리에 32세대가 추가 입주했다. 그 밖에 고성군 명파리처럼 민통선 북방 지역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자립안정촌’도 90여 개에 이른다.

가장 최근에 조성된 ‘민통선 마을’은 2001년 11월, 임진강 이북 장단군 진동면 실향민들이 파주시청의 도움을 받아 만든 해마루촌이다. 마을은 더 이상 체제 선전을 위한 선전물이 아니다.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생태와 안보 관광을 겸한 관광객이다. 대안학교가 주최하는 생태학교도 이따금 열린다.




 

 

“국유화한 땅 싸게 팔라”

이석균 양구군 해안면 국유농지매각관련 추진위원장


△ 이석균 추진위원장



땅 주인과 개척민 사이의 토지 분쟁은 반도의 서쪽 끝 파주에서 동쪽 끝 고성까지 펼쳐진 민통선 마을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고민거리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의 사정도 비슷하다. 이석균 해안면 국유농지매각관련 추진위원회 위원장은 “땅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겪어온 개척민들을 위해 정부에서 땅을 저렴하게 불하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해안면을 둘러싼 토지 분쟁을 설명하면.

=전쟁이 끝난 뒤 버려진 이곳 땅을 개간하기 위해 육군 6사단은 1956년 강원도 홍천 등지에서 농사를 짓던 화전민 160가구 600여 명을 이곳 해안면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4년 뒤, 3군단 민사참모 고아무개 소령이 주관해 농민들에게 농지를 분배했다. 농민들은 잦은 지뢰 사고에 목숨을 잃어가며 버려진 600만 평을 옥답으로 만들었다.

1982년 12월, 전쟁 이후 수복한 38선 이북 땅의 등기를 복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복지역 내 소유자 미복구토지의 복구등록과 보존등기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하 특조법)이 만들어져 시행됐다. 특조법은 땅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국유화한다고 못박고 있다. 이 지역 땅은 등기 서류가 사라져 누구 땅인지 확인할 수 없고, 스스로 땅 주인임을 주장하고 나선 사람도 없었다. 결국 땅 255만 평이 1996년 재경부와 농림부 명의로 국유화됐고, 남은 293만 평도 언제 국유화될지 모르는 상태다.

요구 사항은.

=해안면의 사정은 토지 분쟁을 겪고 있는 철원 등 다른 지역과 다르다. 원소유자가 나타나 문제가 복잡해진 철원과 달리 해안면 땅은 원소유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현행 국유재산법은 국가가 땅을 취득한 뒤 10년 안에는 불하할 수 없다고 돼 있는데, 제한 기간인 10년이 지나 이제 불하가 가능해졌다. 우리 주장은 땅을 개척민에게 싸게 팔라는 것이다. 애초 누구 땅인지 모른다는 소린데,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나.

=수십 년 동안 마을 사람들이 같은 땅을 경작해왔다. 주민들 사이에는 이미 교통정리가 끝났다. 분란이 일어날 소지는 없다.

정부에게 바라는 점은.

=주민들이 고민하는 것은 두 가지 문제다. 하나는 현행 국유재산관리계획이 한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의 면적을 최대 1만㎡로 제한해놨다는 점이다. 해안면 주민들이 자신이 일군 땅을 살 때는 그 기준을 좀 완화해줬으면 한다. 둘째, 땅이 지금의 가치를 갖는 것은 우리가 그 땅을 개간했기 때문이다. 땅 값에서 개간비를 빼고, 남는 돈은 주민들이 장기 분할 납부할 수 있는 길을 터줬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땅은 돈 많은 외지 사람들에게 넘어갈 수 있다.


 

 

〈DMZ 248km 보고서〉제2부-사람

▶[제2부-사람] 이 험한 곳까지 오셨네, 땅 투기
▶[제2부-사람] ‘평화관광’ 같이 가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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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생태] ② 지상에서 가장 이상한 숲이 있습니다

▣ 출처 : <한겨레21> 제678호 2007/09/20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승리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비무장지대 안으로 경원선 철로의 흔적과 굽이치는 남대천이 보인다. 멀리 북쪽으로 43번 국도의 연장이 황톳길 그대로 보인다. 잦은 산불로 큰 숲이 없이 수풀이 펼쳐져 있다.





<인간이라는 생명의 비릿한 살기>


△ 중부전선의 우리 군 초소 앞은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강이 남쪽으로 흘러온다. 강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원시 하천의 모양으로 폭에 비해 수심이 얕은 듯 백로들이 강 한가운데 서서 먹이를 잡고 있다.




△ 철책 위에 쳐져 있는 날카롭게 날이 선 철조망.




△ 강원도 고성 건봉산의 건봉사에 한국전쟁 당시 그 지역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인간이 아닌 생명들의 평화>


△ 중부전선 비무장지대 안쪽의 사미천가에 물 먹으러 내려온 고라니. 철책 안쪽이라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 도망도 가지 않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 한가롭게 물 위를 거니는 백로.




△ 건봉산 민통선 안쪽 지역은 멧돼지를 쉽게 볼 수 있다. 겨울에는 산양들도 먹이를 찾아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곳으로 내려온다. 사람이 나타나자 멧돼지 한 마리가 급하게 도망가고 있다.



〈DMZ 248km 보고서〉제1부-생태

▶[제1부-생태] 이 역동적인 온대림을 보았는가
▶[제1부-생태] DMZ 생태지도- 서부 습지지역
▶[제1부-생태] DMZ 생태지도- 중부 내륙지역
▶[제1부-생태] DMZ 생태지도- 중·동부 산악지역
▶[제1부-생태] DMZ 생태지도- 동해안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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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세상에서 평화를 꿈꾸다

군국주의적인 세계 현실에 마냥 압도되지 않았던 개화기 조선 유교적 지성들의 조용한 저항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개화기의 한국 지식인들이 처음 해외로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 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이 무엇이었을까? 일본이나 미국 등지의 웅장한 건물이나 ‘화륜선’(기선), 철도 등 기술 혁명의 성과물들이 압도감을 주었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일본과 서구 열강들의 무비(武備·군사시설), 그리고 ‘개명한 신세계’에서 전쟁과 같은 무자비한 국가적 폭력의 엄청난 역할이었다.


△ 중국을 가르는 열강들의 모습을 풍자한 프랑스 그림. 근대 유럽 열강의 호전적 세상은 전통적 동아시아 출신들에게 끔찍한 야수의 세상으로 비쳐졌다.(격동의 구한말 역사현장)

“우리도 힘을 키우자”는 논리의 문제점

안정적인 조공 외교로 인해서 국가간 무장 갈등들이 비교적으로 드물었던 전통적 동아시아의 출신들에게, 무장 경쟁으로 쉴 새 없는 준(準)전시인 근대적 유럽 열강의 호전적 세상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야수의 세상이었다. 17세기 전반 이후로 큰 전쟁이 없었던 조선의 지식인에게는 전쟁이 바로 국가의 주업이 된 ‘문명의 신세계’가 하도 생소하기에, 전설적이다 싶은 먼 과거와의 비유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예컨대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온 젊은 온건 개화파 어윤중(魚允中·1848~96)이 고종에게 유럽식 세계질서에 대해 복명(復命·귀국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종: (요즘 시대는) 오로지 부강만을 도모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와 동일하더냐.

어윤중: 진실로 그러합니다. 춘추전국(春秋戰國)은 바로 소전국(小戰國)이며 오늘날은 바로 대전국(大戰國)이라 모든 나라가 다만 지력(智力)으로 경쟁할 뿐입니다. …현재 형세를 돌아볼 때 부강함이 아니면 국가를 지키지 못하므로 상하가 한뜻으로 노력할 것이 바로 이 한 가지 일일 뿐입니다.”(어윤중, <종정년표>(從政年表))

선혈이 낭자한 연속적인 싸움 속에서 호랑이와 같은 진나라가 점차 그 힘을 키워 주변의 약소 국가들을 잠식해버리는 전국시대는, 식민지를 부단히 넓혀가는 ‘열강’들의 작태를 지켜보던 조선 말기의 지식인들로서 가장 적합해 보이는 역사적 선례였던 셈이다. 그러면 ‘강약만이 중요해’ 침략자를 ‘인의로 책망할 수 없는’(박정양의 표현), 도덕이 없는 야수의 세상에서 약소국이 살아남을 수 있는 도리는 무엇일까?

전통의 완전한 고수를 주장하던 소수의 극단적인 위정척사파를 제외하고 대다수 논객들이 제시한 것은 여러 가지 내용의 ‘자강책’ ‘부국강병책’이었다. “무역을 확대하고 국부를 늘리고 군대를 강화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자”(유길준, <언사소>(言事疏))는 현실론은, 신학문을 어느 정도 인식했던 당시 지식인의 ‘주류’ 목소리였다.


△ 1900년대 초 현재의 세종로 큰 거리를 차례로 행진하는 러시아 군대와 프랑스 군대. 미국 해병대.(격동의 구한말 역사현장)


그러나 “우리도 힘을 키우자”라는, 1880년대 초부터 인기를 모은 논리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이미 불평등 조약의 올가미에 걸려 관세 장벽도 세우지 못하고, 왕조 말기의 극심한 부패와 민심 이반을 극복하지 못하던 조선이 과연 힘을 키울 수 있는가라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현실적 차원 못지않게 지식인들에게 중요하게 생각된 것은 이념이었다. 미국에 건너가 철저한 서구 중심주의적 ‘문명 의식’을 얻어 유교를 ‘썩은 동양 문명’으로 여기게 된 윤치호나 서재필 등 몇명의 친미파를 제외하고는, 개화파에게도 유교는 아직 궁극적인 진리로 인식됐다. 그런데 유교적인 원론 원칙의 입장에서 무기는 ‘흉물’이며 전쟁을 즐겨 벌이는 군주는 ‘주걸(紂桀)과 같은 폭군’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당위적 평화주의 신념은 시국이 시급한 만큼 일시적으로 ‘자강론’에 밀릴 수도 있었지만 유교라는 조선 사회의 가치관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이 도덕론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성순보>의 논설, 미래를 예견하다

‘근대 충격’이 빚은 현실론과 이상론의 충돌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유교적 신념이 강한 많은 온건 개화파나 개신 유림들은 당장은 부국강병, 차후에는 세계가 평화와 인의예지로 돌아와야 한다는 현실과 이상의 절충 논리를 폈다. 단순히 전쟁과 경쟁만을 주장하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의 초기 사례를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알려진 <한성순보>(1883~84년 발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위대한 시인이자 온건 개화파였던 강위(姜瑋·1820~84)와 나중에 큰 서예가가 된 오세창(吳世昌·1864~1953) 등의 여러 지식인이 만든 이 신문의 주된 관심사는 열강의 재정과 징병제, 산업 등 ‘부국강병의 비결’이었지만, 가끔씩 유교적 이상론의 입장에서 세계의 현실을 비판하고 전쟁 없는 세상을 모색하는 논설도 실렸다. 예컨대 제6호(1883년 12월20일)의 ‘소병론’(銷兵論·병기를 녹이자는 이야기)이라는 탁월한 논설의 서두를 보자.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무도하고 가장 비참하고 가장 해독스러운 것은 병란이고, 꼭 없애야 하면서도 늘 없애지 못하는 게 병란이다. …두 나라의 혈전에서 예봉들이 휘날려지고 총탄들이 날라나는데 한순간에 서로 죽이는 데에 있어서 어찌 전후의 순서가 있는가? 아버지가 아이를 잃고 아이가 고아가 되고 부인이 과부가 되고… 하늘의 도리를 벗어나고 인륜을 무너뜨리는 일이 아닌가? 한 장군이 운이 좋아 전승을 얻어 개선한 뒤 기고만장하여 상을 얻었다 해도… 처참하게 죽은 사람의 주검들이 평야를 가득 채우고… 늙어서 혼자 남은 늙은이와 고아와 과부들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애통하게 운다. 그런데 진나라나 한나라, 수나라나 당나라 등이 백전백승하여… 수백만의 군대로 천하를 호령해도… 결국 하루아침에 민심이 이반하여 무너지고 만다.”

전쟁 참화를 여실히 서술하는 이 논설은 이라크 파병을 하기로 한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보다 훨씬 어렵고 위험한 처지에 처했던 100여년 전 선각자들이 군국주의적인 세계 현실에 압도되지 않고 비판할 줄 알았다는 사실을 알면 선조에 대한 부끄러움이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강성한 국가들이 앞을 다투어 더 큰 군함들을 만들고 한 열강이 육지를 잠식하면 또 다른 열강이 질세라 바다 섬을 잡아먹는” “위정자들이 인애(仁愛)의 마음을 뒤로 하고 오로지 전쟁과 살육만 일삼는” 병든 세상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 이 논설의 익명의 필자는, 오주(五洲)의 크고 작은 모든 국가들이 세계적인 ‘의원’(議院·협의 입법기관)을 설립하여 국가간의 모든 문제들을 이 ‘의원’을 통해 국제법에 의거해 결정·해결하고, 나아가서는 이 ‘의원’ 밑에 국제적인 ‘세계 공공의 군대’를 두어서 ‘천하의 난폭한 자’들을 토벌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이 ‘세계평화안’은 놀랍도록 유엔과 유엔의 평화유지군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 협력 기관들을 예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조건 항복’한 것은 아니었으니…

전쟁으로 가득 찬 제국주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길을 현실적으로 모색하면서도 동시에 제국주의·군사주의를 어떻게 지양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은 1880년대 이후에도 많은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현실인식의 골간이었다. 유명한 유림이자 계몽주의자 해학 이기(海鶴 李沂·1848~1909)처럼 묵자(墨子)의 박애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고, 최초의 도미 유학생으로도 알려진 유길준처럼 열강의 힘이 국제법을 유린하는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법과 도덕이 지배하는 국제 현실을 열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세계적 야수들이 어떤 국제기구나 국제법에 의해 순치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입장에서 끝없이 나이브(naive)하게 보이기도 한다. 제국주의에 대한 세계적 규모의 부정이 없다면 살육과 약탈이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걸 20세기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적 세계로부터 경쟁과 살육을 인정하라는 압력을 받았던 100년 전 지식인들이 현실론의 차원에서 제국주의적 ‘룰’과 타협하면서도 이상론의 차원에서 저항을 펼친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제국주의 침략의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한국의 개신 유교적 지성은 결코 야수들에게 ‘무조건 항복’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대전 등의 제국주의 살육의 ‘진수’를 아직 보지 못했던 그들마저도 제국주의적 현실의 극복 방안을 모색했다는 걸 보면, 20세기의 모든 역사적 비극들을 익히 아는 우리들은 제국주의의 현대판인 신자유주의의 광포(狂暴)를 좌시(坐視)할 수 있는가.

[ 참고 사이트 ]
1) 오세창에 대한 인물 정보:

http://www.kcaf.or.kr/inmul/200108/right.htm
2) 신문박물관(구한말 일부 신문 논설의 한글 번역판을 읽을 수 있음):
http://www.presseum.org/
3) <한성순보>에 대한 간단한 정보:
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376-1-hansungsunbo.htm
4) 제국주의의 차별주의적 논리에 크게 영향받은 유길준의 글 ‘개화등급’:
http://www.seelotus.com/gojeon/hyeon-dae/su-pil/gae-hwa-deung-geub.htm
5) 어윤중에 대한 소개:
http://unsuk.kyunghee.ac.kr/old_history/history44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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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나무꾼 공동체 극빈층 새삶 ‘출구’로

검은 대륙 희망 찾기⑤ 억압의 사슬을 끊고-에티오피아

 
 
한겨레 2007/09/21

서수민 기자

 


 

» 나무꾼으로 일하던 여성들이 스카프나 공예품을 생산·판매하는 공동체인 ‘에티오피아 여성나무꾼 출신들의 모임’ 공장에서 한 여성이 아이를 업은 채 열심히 일하고 있다. 아디스아바바/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안개가 자욱한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새벽, 구비구비 이어진 산길로 여성 나무꾼들이 줄을 지어 내려왔다. 커다라 나무 등짐으로 허리가 굽은 그들의 모습은 ‘물음표(?)’를 닮아 보였다.

하루 10시간 산을 오르내리며 나뭇짐을 실어나른 뒤 이들이 손에 쥐는 돈은 고작 4비르(약 415원)다. 2천m가 넘는 고원지대인 아디스아바바의 주민 대부분은 나무를 때 추위를 녹인다. 그렇지만, 땔감 수집은 불법이다. 발각되면 산림감시원에게서 처벌과 구타, 심할 땐 성폭력을 당한다.


하루 10시간노동 단돈 415원
성매매 내몰리기 다반사


 

»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에서 땔감을 구해오는 것은 물을 긷거나 밥을 하는 것처럼 주로 여성들의 일이다. 이 도시에서만 1만5천여명이 나무꾼으로 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어린 소녀들도 많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최근 보고서에서 “10~15살 나무꾼의 평균 몸무게가 38㎏, 이들이 지는 나뭇짐의 무게는 35㎏”라며 “이들은 여성인권이 세계 최악 수준인 에티오피아에서도 가장 비참하게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시골 출신으로, 아이들을 평균 4~5명 이상의 키우는 이들 여성은 하나같이 자식들이 공무원이나 의사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들의 공통된 또다른 소망은 ‘에티오피아 여성나무꾼 출신들의 모임’의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모임은 불법인 땔감 수집에만 기대고 있는 에티오피아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1988년 여성 나무꾼 200명이 모여 만든 단체다. 현재 여성들에게 먹고 살 기술을 가르치고, 안정된 소득을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이 단체는 현재 아디스아바바 시내 4곳에 공장을 두고 스카프와 나무 공예품을 생산해 직영 가게를 통해 판매한다. 모임 회장인 에테네시 아옐레(38) 또한 땔감을 나르던 나무꾼 출신이다. 그는 “땔감을 나른다는 게 부끄러워 이웃의 눈을 피해 새벽에 나무를 하러 가곤 했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단체 설립의 결정적 계기는 여성 나무꾼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온 에티오피아 학자 페케르테 하일레의 보고서였다.

 

»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외곽 산길에서 한 여성이 커다란 나뭇짐을 진 채 내려오고 있다. 아디스아바바에서만 1만5천명으로 추산되는 여성들이 구타와 성폭행 등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루 10여 시간씩 산길을 헤매며 땔감을 구한다. 아디스아바바/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처음부터 모임에 참여했던 나지아 아드시(40)는 “하루 한두개의 목도리를 짜며, 7비르 가량을 번다”며 “힘들게 목도리를 짜는 법을 익혔다”고 말했다. 에티오피아 전통 문양의 목도리는 디자인이 뛰어나고 품질도 좋아 관광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아드시는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존중한다는 것”이라며 “이전에는 나한테 단돈 1비르도 믿고 빌려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제 나는 어엿한 가장”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아이를 들쳐업은 채 일을 했으며, 나중에는 집에 베틀을 가져가서까지 꾸준히 돈을 벌어 아이들을 대학에 진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비참한 가난 수렁 벗어나자’
1988년 ‘자활’ 공장·가게 첫발
목도리·공예품 생산판매 쏠쏠


이 단체의 운영이 궤도에 오르기까지 위기도 적지 않았다. 1990년대 외부의 지원이 끊긴 뒤 찾아온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이 대표적 사례다. 이들은 품질 개선 노력, 시민단체 등과의 연대를 통한 판로 개척으로 간신히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현재 함께 일하는 여성은 300명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함께 일하고 싶다’며 모임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은 여성들이 5천명을 넘는다. 이 모임이 에티오피아 빈곤 여성들의 대안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 에티오피아 여성 나무꾼 실태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 평균 30㎞를 걷는 나무꾼 일은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다. 그래서 10년 이상 하는 사례는 드물다. 상당수 여성 나무꾼들은 성매매로 흘러들어간다. 도시 북쪽 판자촌에서 만난 15살 소녀 아마렛치는 “한달 내내 나뭇일을 해도 음식값은커녕 집세를 댈 수도 없었다. 몸을 파는 일이 너무 싫다. 중동으로 건너가 가정부로 일하고 싶다”며 눈물을 훔쳤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독자적 말과 글, 달력을 쓰는 유일한 나라로, 국민들의 자부심이 높다. 하지만 이 나라의 각종 여성 인권지수는 꼴찌권을 맴돈다. 메다니트 에트웰레 에티오피아 여성 변호사협회 대변인은 “외부의 적들과 싸우며 견고해진 자부심은 도리어 우리 내부의 적들을 돌아보지 못하게 해왔다”며 “나무꾼 출신 모임같은 단체들이 빈곤층 여성들의 가장 큰 희망”이라고 말했다.

아디스아바바/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여성 성기 절제’ 악습 줄고는 있지만…

10명중 7명꼴 음핵 잘라…5~10% 수술

 

» ’여성성기절제’

 

아이는 비명을 지르고,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는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매정한 면도날은 아이의 아랫도리를 향한다.

에티오피아 국립 박물관에는 ‘여성성기절제’(사진)라는 그림이 걸려 있다. 여성의 성기를 절제하는 행위(Female genital mutilation·FGM)는 남쪽 탄자니아부터 북쪽 이집트에서까지 아프리카 전역에서 자행된다. 그 가운데서도 에티오피아가 자리잡은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 가장 심하다.

음핵의 일부 혹은 전부를 제거하는 FGM은 대부분 여아가 4~8살 때 실시된다. 소독약이나 마취제를 쓰지 않은 상태로 수술이 진행되며, 이를 업으로 삼는 마을 여성이 ‘집도’한다. 치사율은 5~10%로 추산된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더라도 여성은 성적 쾌감을 잃고, 성인이 된 뒤 출산 과정에서 아기를 잃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음핵 제거가 정숙함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를 거부하기란 극도로 어렵다.

1990년 90%로 집계된 에티오피아의 FGM 비율은 2005년 74%까지로 내려갔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사면위원회 등이 에티오피아 지역사회에서 캠페인을 꾸준히 벌여온 결과다. 이들은 지역 주민들이 FGM을 전통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계몽보다는 주민들 스스로 토론을 통해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했다. 이런 방법은 도시지역에서 특히 효과적이었다. 중국 정부가 전족을 금지한 것처럼, 여성성기절제 역시 강력히 단속해야 근절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실제 처벌은 쉽지 않았다. 대학생 키다니 물게타(20)는 “FGM을 하지 않은 여성은 결혼 지참금을 받지 못하는 등 여성 구실을 못한다고 보기에, 어머니들이 앞장서 딸들을 시골로 보내 수술을 받게 한다”고 말했다.

아디스아바바/서수민 기자

기획연재 : 검은대륙 희망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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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연 함께 살리는 ‘윤리 여행’

검은 대륙 희망 찾기 ④ 지속 가능한 관광-탄자니아·케냐

 
 
2007/09/20

서수민 기자 김경호 기자

 


 

» 약 200만년 전에 형성된 세계에서 가장 큰 분화구인 탄자니아 응고롱고로에 물소들이 모여 있다. 응고롱고로/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탄자니아 북부 아루샤에서 100㎞ 남짓 떨어진 마을 ‘음토와음보’는 스와힐리말로 ‘모기가 사는 강’이라는 뜻이다. 마을에서 서쪽으로 한참을 달리면 세계 최대 야생동물 서식지인 세렝게티 평원이 펼쳐지고, 동쪽에는 사계절 설경을 자랑하는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가 우뚝 서 있다. [바로가기]

 

» 탄자니아, 케냐

 

남한 면적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세렝게티는 계절에 따라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초식동물들로 유명하다. 해마다 전세계에서 수백만명이 사자·코끼리·들소·얼룩말·기린 등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친환경적이고 윤리적인 ‘지속 가능한 관광’을 취재하러 왔지만, 야생동물과 조우할 기대감에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 사는 초식동물만 200만마리라니!

탄자니아인 가이드 조나단은 사파리 초보인 우리 일행에게 “치타나 사자는 의외로 순하니 무서워 말라”며 동물들의 습성을 자세히 설명했다. 오히려 위험한 동물은 150~200마리씩 무리지어 다니며 ‘조폭처럼’ 사람을 공격하는 개코원숭이다. 이곳은 워낙 지역이 넓어 한국의 에버랜드같이 동물들을 한꺼번에 보기란 불가능하다.

이웃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버스로 울퉁불퉁한 길을 8시간 이상 달려 겨우 도착한 ‘모기마을’은 특별히 아름답지도, 풍요롭지도 않았다. 개울 곳곳에는 마을 이름에 걸맞게 벌레가 날아다녔고, 주민들 대부분은 흙바닥에서 생활했다. 이 곳에서 오후 내내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체험 관광 일정이었다.

 

» 탄자니아 응고롱고로 고원지대 분화구에 구름이 걸려 쉬어가고 있다.

 

“쭉 들이켜요.” 촌로들이 바나나술을 강권했다. 수십번 사양한 끝에 마신 몇잔에 얼굴이 발그레해진 우리 일행은 여러 집을 다녔다. 까만 얼굴에 새하얀 이를 드러낸 어린이들은 ‘음중구’(스와힐리어로 ‘백인’, 아시아인도 백인으로 여긴 것임)를 외치며 따라다녔다. 외국인에게 구걸하지 않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이 지역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우간다 출신 에테시 할머니는 30가지 바나나잎을 엮어 알록달록한 나무 도시락을 만들고 있었다. “취미삼아 만들었는데, 여기 놀러와 이걸 본 미국 여학생이 ‘사파리에서 누구나 도시락을 먹으니 호텔에 납품해보시라’고 권유했다”고 말했다. 도시락이 인기를 끌자, 인근 호텔들은 사파리를 떠나는 손님에게 건네는 도시락을 일회용 종이 도시락에서 ‘할머니표’로 바꿨다.

 

» 탄자니아 북부 음토와음보 마을의 고아원에서 아이들이 전등 하나만을 의지한 채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명승지 관광에 익숙한 여행객들은 낯선 곳에 갈 때마다 ‘일상 체험’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이름 모를 마을의 작은 집을 볼 때면 안방은 어떻게 꾸몄는지, 밥은 뭘 먹는지 등이 항상 궁금하다. 지속가능한 관광이란 이름이 붙은 체험 관광은 이런 갈증을 충족시켜준다. 동시에 마을 주민들의 실질적 소득을 올려주는 효과도 낳는다.

세계 10대 최빈국 가운데 하나인 탄자니아는 온 국토가 관광지나 다름없다. 주로 돈이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사파리 관광에는 전문 가이드 겸 운전사, 요리사, 4륜구동 자동차 등이 필수이므로 1인당 평균 여행비용은 비행기 값을 빼고도 1천달러를 훨씬 넘는다. 문제는 그 수입의 대부분이 외국 여행사나 도시 사람들에게 빠져나가고, 현지 주민들은 혜택을 누리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 해결책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 지속가능한 관광이다. 모기마을에는 1998년 체험 관광이 시작된 이후 1만명 이상이 다녀갔다. 이 마을에선 함께 살고 있는 12개 부족의 다양한 문화가 ‘관광자원’이 됐다. 마을길을 안내한 마을 청년 음토이는 “우리도 여행객들이 사자나 치타 등 야생 동물을 보는 데만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7년 동안 번 돈 2억실링(약 1억4600만원)을 학교와 병원, 고아원 등 공동시설에 투자해 살기 좋은 마을이 됐다”고 자랑했다.

모기마을처럼 지역 주민들이 직접 관광을 기획하고, 마을 사람들이 그 수익을 나누는 사례는 아직 많지 않다. 그렇지만 가능성은 풍부하다. 동아프리카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수는 해마다 10% 이상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저녁 식사 때 가이드 조나단한테서 이곳 젊은이들의 삶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품격 있는 영어를 구사하는 그는 가난한 짐꾼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킬리만자로에서 관광객들의 짐을 나르며 영어를 배웠다. 10년 넘게 변변한 등산화조차 없이 산을 타다 최근에야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업가라는 자신의 꿈을 풀어놓는 동안 조나단의 눈빛은 새카만 하늘을 무수히 수놓은 별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일단은 아루샤에 있는 전문대에 갈 겁니다. 그 다음에 나처럼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유치원을 만들 겁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할테니 여행사 일도 열심히 할 겁니다. 당신 같은 여행객들이 소규모 지역 업체들을 얼마나 지원하느냐에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 ‘윤리적 여행자’ 되기 / 아프리카 ‘지속가능한 여행’ 관련 사이트
 

             

■ 지속가능한 관광

영어의 ‘sustainable tourism’을 직역한 말이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방문하는 지역의 문화와 정치를 알고 △현지 문화와 풍습을 존중하며 △문화간 이해와 관용에 기여하고 △지역 토박이 기업들과의 거래로 지역 문화를 보호하고 △지역에 기반을 둔 소상인들과 거래해 지역 경제를 도우며 △친환경적 기업을 이용해 환경 훼손을 최소화하는 여행 태도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위 개념으로는 자연에 중점을 두는‘생태관광’(eco tourism),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윤리적 관광’(ethical tourism)이 있다. 세계관광기구는 2005년 지속 가능한 관광으로 빈곤 퇴치를 지원한다는 취지에서 ‘지속 가능한 관광을 통한 빈곤퇴치 재단’(스텝재단)을 설립했다. 본부는 서울에 있다.



음토와음보·아루샤·응고롱고로

글 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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