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세상] 무서운 쓰레기, 두려운 새벽 거리

출처 : <월간 인권 9*10> (국가인권위원회:http://www.humanrights.go.kr)


총도 무섭고 차도 무섭지만 제일 무서운 건 쓰레기다.
쓰레기로 넘쳐나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지독한 악몽이다.
그들은 썩은 냄새를 제 옷에 담고 묵묵히 쓰레기를 치운다.
세상은 그렇게 누군가의 희생으로 오늘도 밝다.


오후 6시, 저녁식사를 마친 윤유복(60) 씨가 대구광역시 북구 동천동 집을 나섰다. 일찍 퇴근길에 나선 인파와 뒤섞여 버스를 탄 그가 내린 곳은 팔달시장 앞. 서구 비산5동 동사무소를 향해 걷던 윤씨가 자신의 이름에 얽힌 사연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사실 난 아버지 얼굴을 몰라. 유복자로 태어났거든.”

2남 1녀 중 유복자로 태어나 이름도 그렇게 지었다는 그와 동사무소에 도착해서였다. 겨우 눈비를 피할 정도인 귀퉁이 쉼터에서 옷을 갈아입는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서 입고 나온 평상복을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순간 갑자기 그의 체구가 한 뼘쯤 작아져버린 것이다. 어딘가 모르게 슬픔이 밴 작업복에 야광조끼를 걸친 윤씨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담배를 피울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먼. 정년퇴임하면 끊기로 아내와 약속했거든.”

정년퇴임을 반 년 앞둔 윤유복 씨에게 하루 한 홉의 소주와 한 갑의 담배는 피로회복제나 다름없다. 일이 꼬이거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일 때 술▪담배는 정다운 동무와 같다. ‘기럭지’가 길어서 한 개비를 두 번에 나눠 피운다는 장미 담배를 예찬하던 그가 마침내 리어카 손잡이를 붙들었다. 손목시계의 바늘은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 8시, 리어카를 앞세운 그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리어카를 앞세워 거리로 나오자 귀가하는 사람들 사이로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벌써 사흘째 대구 기온은 열병을 앓고 있었다. 어제 부산에서는 폭염으로 3명이 사망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윤씨의 리어카가 분지의 폭염을 뚫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더위를 식힐 겸 골목에 나와 있던 마을노인들이 윤씨를 보고 알은 체했다. 백발이 성성한 한 노파는 객지에 나간 맏아들을 맞이하는 듯한 목소리로 오늘도 고생 많다며 윤씨를 격려하고 나섰다.

“많이 더우시죠?”

“말도 마. 방이고 부엌이고 찜통이야!”


엄살이 아니었다. 생활쓰레기를 수거하기 위해 원터5길 골목으로 접어들자 숨이 턱턱 막혔다. 방금 지나온 소방도로와 달리 골목은 바람 한 점 없었다. 리어카 한 대가 간신히 들어가는 막다른 실골목으로 접어들었을 적엔 온몸이 금세 땀범벅이 되었다. 그제야 나는 여름보다 겨울이 일하기 낫다고 한 윤씨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름에 골목을 치우고 나면 찜질방에서 나오는 기분이야. 옷이 금방 축축해져.”

숨막히는 찜통더위 속에서 윤씨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지그재그로 서너 골목쯤 돌았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빈 리어카가 가득 찼다.

새벽 2시경 구청 운반차량이 수거해 간다는 장소에다 방금 골목에서 나온 쓰레기를 부릴 때였다. 가로등이 하나 서 있는 그곳에 제법 큼직한 글씨로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쓰레기 불법 투기 또는 비규격봉투 사용 시에는 최고 100만원까지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자화상이나 다름없는 경고문은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발견되었다. 고구랑7길에는 불법 투기 신고포상금제를 실시한다는 안내문이, 참아름3길에는 커다란 양심의 거울이 걸려 있기도 했다.

“종량제를 실시한 뒤로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비닐봉투에 담아 버리는 사람들이 많아.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제 고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

그러면서도 그는 골목과 소방도로에 몰래 내다버린 비규격봉투를 방치하지 않았다. 겨울이면 모를까 여름에 저걸 불법이라고 두었다가는 마을 전체가 악취로 뒤끓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운반차량이 수거해 갈 장소를 말끔히 정리정돈한 윤씨가 다시 리어카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고만고만한 면적에 지붕이 낮은 집들, 가로등마저 없는 컴컴한 골목. 유달리 그 골목은 연탄재를 내놓은 곳이 많았다. 골목은 물론 이웃들의 살림살이까지 훤히 꿰고 있는 윤씨의 말에 따르면 이 골목은 환자가 많고, 나이 든 노인들이 절반 넘게 모여 사는 곳이라고 했다. 할 얘기가 더 남았는지 골목을 치우다 말고 윤씨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분리수거와 종량제를 하기 전에는 땡그랑땡그랑 요령을 쳤잖아. 그때는 주민들하고 싸움 많이 했구먼. 나는 통금이 풀리면 곧 일을 시작했는데 너무 일찍 쓰레기를 걷어간다며 야단들이었지.”



그런 시절이 있긴 있었다. 자다 말고 일어나 청소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그러나 아는 사람의 소개로 1978년 환경미화원으로 발을 내디뎠다는 윤유복 씨는 그 무렵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가장 힘들었노라고 했다. 하루만 일을 안 나가도 봉급에서 삭감되는 일당직을 계속해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쉬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또 한창 건설경기가 좋아 청소 일을 하던 동료들이 줄줄이 이직할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명절이라고 해야 고작 하루 쉬는, 휴가비는 물론 보너스 한 푼 나오지 않는 청소부 일을 천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까지 해서 여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그로서는 보다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라톤 선수처럼 앞만 보고 달렸지 뭐. 이 봉급 가지고 한눈 팔다가는 여섯 식구 거덜나기 십상이었거든. 그때 깨달은 것이 하나 있는데, 내 눈은 앞만 보라고 생겼다는 거야.”

그런 그가 이번에는 오거리1길과 동아리3길 수거작업을 마친 뒤 고구랑7길로 들어섰다. 시간은 벌써 오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골목을 치우는 동안에도 윤씨는 자신보다는 고구랑7길 주민들의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저 집은 마늘 까서 살아가는 집이고, 저 집은 밤 까서 살아가는 집이고, 또 저 집은 나이 든 환자가 둘이나 되고….”

총도 무섭고 차도 무섭지만, 나는…

6차선 도로로 나오자 그의 리어카가 위태로워 보였다. 크고 작은 차량들이 쏘아대는 불빛으로 인해 그의 야광조끼마저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드문드문 인도를 오가는 시민들의 시선 또한 고울 리 없었다. 이십대 초반의 한 여성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윤씨와 마주치자 코부터 틀어막았고, 술을 마신 젊은이 몇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을 이해 못할 건 없었다. 윤씨는 분명 코를 틀어쥐게 만드는 악취 속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악취를 풍긴 건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라는.

횡단보도를 건넌 윤씨가 질주하는 차들이 짓밟아버려 옆구리가 터진 봉지의 쓰레기를 손으로 쓸어모았다. 마치 그 모습이 아스팔트 위에 한 그루 나무를 심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생활쓰레기를 내놓은 곳이면 이렇듯 승합차들이 주차해서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그는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차와 차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쓰러진 봉투는 반듯하게 일으켜 세우고, 터진 봉투에서 쏟아져 나온 퀴퀴한 쓰레기는 한곳으로 쓸어모을 뿐이었다. 그 일을 다 마친 윤씨가 비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총도 무섭고 차도 무섭지만 나는 쓰레기가 더 무섭다고 생각해. 넉넉잡아 닷새만 저 쓰레기를 방치한다고 생각해봐. 아마 세상은 금방 악취 천지로 변할 거야.”

듣고 보니 끔찍했다. 아니 그런 일이 머잖아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윤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밤 우리가 버린 3톤의 생활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노동의 대가에 비해, 그리고 환경미화원 30년에 견줘보면 윤씨의 월급이 많다고는 볼 수 없었다. 기본급 70여만원에 수당을 합하면 200만원이 조금 넘을 뿐이다.

시간이 또 얼마쯤 흘렀을까. 골목에 내놓은 생활쓰레기를 다 끄집어내자 새벽 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리어카를 동사무소에 넣고 찾아간 곳은 윤씨가 단골로 드나든다는 막창집. 허기진 배도 채울 겸 라면과 막창, 맥주를 주문한 나는 그동안의 거리를 어림잡아 계산해보았다. 족히 시오 리는 걸어온 듯했다.

“천천히 걸어가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구먼.”

막창집 벽시계가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매일 이 시각에 라면 한 그릇과 소주 한 잔으로 골목치기 피로를 털어낸다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창집을 나와 20여 분 걸었을까. 어느 호프집 앞에 도착할 무렵 운반차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윤씨의 두 번째 작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코를 틀어쥐었다. 운반차량에서 풍기는 악취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낯선 길은 아니었다. 어제 오후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윤유복 씨의 리어카가 들락거린 거리였다. 운반차량은 윤씨가 무려 다섯 시간 동안 골목을 치운 쓰레기를 모아둔 곳으로 족집게처럼 이동하고 있었다. 느슨한 골목치기와 달리 쓰레기를 차에 싣는 일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40여 분 만에 생활쓰레기를 가득 채운 운반차량은 성서 소각장으로 향했다. 소각장 입구에는 미리 도착한 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소각장 문(평일에는 5시, 주말▪주일은 4시에 열린다)이 열리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차들이었다. 다른 구에서 온 환경미화원들은 아예 인도에 돗자리를 깔고 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공복 담배를 피워 문 개인용역 환경미화원들과 말을 섞어보았다.

“구청 미화원들이 부럽지 뭐. 봉급도 우리하고 엄청 차이가 나거든. 현재 환경미화원이 구청 반 개인용역 반으로 돌아가는데 이 일자리도 하늘의 별 따기가 돼버렸어. 어디 그뿐인 줄 알아. 청소부라도 해서 살아보려고 했다가 마누라가 도망간 바람에 인생 망친 미화원이 한둘 아니야. 이해는 돼. 요즘 같은 세상에 어느 골빈 여자가 쥐꼬리만한 봉급에 썩은 냄새 풍기는 남자하고 살겠나. 안 그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반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잘릴 염려만 없다면 어떤 이야기라도 다 들려주고 싶다던 쉰 초반의 미화원이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났다. 소각장으로 들어가는 차에 오르다 말고 그가 이 한마디를 툭 뱉었다.

“미안해. 남은 마누라라도 잘 지켜내려면 한 차라도 빨리, 더 싣고 와야 하거든. 우리들의 밤과 새벽이 이래. 마누라고 자식이고 안전한 게 아무것도 없어. 이 나이에 버림받지 않으려면 쓰레기와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니까.”

아침이 밝아오는 거리는 세수를 마친 듯 정갈했다

이튿날 새벽에는 중리 사거리로 나가보았다. 간밤 돌풍이 몰아친 8차선 차도와 인도는 난장판이었다. 차도 한가운데는 팔다리가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널브러져 있고, 인도에는 가로수 잎들이 망명지폐처럼 나뒹굴었다. 인적이 뜸한 거리에서 비질을 하고 있던 윤금순(58) 씨가 좌우를 살피더니 중앙선으로 뛰어들었다. 곧 날이 밝으면 흉하게 드러날 나뭇가지를 줍기 위해서였다. 내년이면 정년퇴임을 하는 윤금순 씨는 19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비질을 하고 있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간밤에 하늘이 난리를 안 쳤는교. 자다가 몇 번을 깼는지 모르니더. 은행나무는 잘 안 떨어지는데 이놈의 뽀쁠라는 매가리가 없어서 그런지….”

그래도 오늘은 양반이라고 했다. 비를 동반한 태풍이 들이닥치는 날에는 일할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아스팔트에 떨어진 낙엽이 비에 젖으면 비질하기가 배로 힘든 까닭이다.



○구청에 적을 둔 여성 환경미화원은 현재 3명. 그중 윤금순 씨는 남다른 사연을 갖고 있다. 19년 전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던 남편이 거리청소를 하던 중 승합차에 치인 것. 남편의 뒤를 이어 첫 출근을 하던 날이었다. 막상 새벽거리로 나와 보니 남편의 목숨을 앗아간 차들이 무서웠다. 차도에 나뒹구는 쓰레기를 보고도 치울 엄두를 못냈다.

“새벽에는 신호등이고 뭐고 없는기라. 빨간 불이고 파란 불이고 막 달리는데 안 무서울 사람이 어딨노.”

윤씨가 무서워하는 건 그뿐 아니다. 도로에서 청소하고 있다가 돌진하듯 갑자기 차가 유턴을 하면 그는 사지가 떨린다고 했다. 그런 일이 벌써 한두 번 아니었던 것일까.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던 윤씨가 다시 비질을 시작했다.

윤금순 씨가 맡은 중리 사거리에서 갑을 사거리까지의 왕복 3km. 새벽과 오후, 하루 두 차례 이곳을 쓴다는 그가 잠시 허리를 편 건 주유소 앞에서였다. 자신도 날을 꼬박 새웠다는 주유원이 윤금순 씨에게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내밀자 그제야 윤씨의 얼굴이 윤곽을 드러냈다. 간밤 몰아친 돌풍 덕에 오늘은 제법 날씨가 선선한데도 그의 이마에는 포도송이만한 땅방울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새벽 3시에 집을 나선 윤씨가 청소를 다 마친 건 오전 8시 반경이었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바뀐 차도와 인도는 방금 세수를 마친 듯 정갈했다. 한 뼘쯤 더 넓어진 그 길 위로 네 바퀴 달린 차와 두 발 달린 사람들이 출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씨의 일과는 계속되었다. 잰걸음으로 귀가한 그가 밥숟갈을 뜨는 둥 마는 둥 달려간 곳은 인근 동사무소. 출근 도장부터 찍은 윤씨는 일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자신이 맡은 새벽거리 청소를 마치고 나면 9시 반부터 점심 때까지 진행되는 골목청소 일을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보면 청소라는 게 끝없는 되풀이였다. 누군가 버리면 쓸어 담고, 말끔히 청소한 뒤 가보면 또 어지러져 있고….

기쁘고 아름다운 곳보다는 아픈 곳에 먼저 손이 간다고 했던가. 자신의 손으로 팔을 주무르던 윤씨가 두 번째 일터로 향하다 말고 아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병원하고 한의원을 번갈아 다니는데 팔이 낫질 않아.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은 잠자리까지 통증이 찾아와서 애를 먹여.”

새벽 3시에 일어나 거리와 골목을 쓸고 나면 오후 4시가 되고 그제야 집으로 돌아가는 윤금순 씨. 19년간 비질을 해서 세 아들을 대학공부시켰다는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이었다. 쓸어도 쓸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낭만의 계절 가을이 가장 싫다는 윤씨의 한마디가 못처럼 박혀왔다.


★ 박영희 님은 대구에 살고 있는 시인으로 얼마 전 르포집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시집 <즐거운 세탁>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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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노동유연성 높이는 건 망국의 지름길"
[일과 희망①]"FTA가 가져올 국익에는 조건이 있다"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출처:프레시안(www.pressian.com) 2007-04-05

오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일을 하고 있거나 혹은 일하기를 원합니다. 삶과 노동이 떼어 놓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매일 '노동'을 통해 삶을 이어가는 우리는 또 '노동'에 대해 무관심하기도 합니다. 

전국 각지의 크고 작은 회사 내에서 벌어지는 노사분규는 세상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단지 '그들'만의 일로 묻혀 버리기 일쑤이고, 각종 노동관련 법의 개정 논의도 교육과정을 통해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우리에게는 너무 멀기만 한 말들입니다. "노동자라고 하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 줄 알았다"는 한 고등학생의 얘기는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의 대다수가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어려운 말로 분류되는 보험 설계사는 우리 어머니들의 직업이고, KTX 여승무원들로 잘 알려진 '외주화 용역 노동자'는 매일 아침 마주치는, 회사 건물을 청소해주는 아주머니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노동의 문제가 왜 우리에게는 '멀기만 한 얘기'로 느껴질까요? 주간 시리즈 <일과 희망>은 이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입니다. 매주 목요일 6명의 전문가가 돌아가면서 집필하는 <일과 희망>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노동 문제들을 차분하게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그들이 풀어놓는 얘기가 2007년 대한민국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이 어떤 씨줄과 날줄로 엮였는지를 규명해주고, 나아가 우리 일의 희망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를 열어보여주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6명의 필자는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본부장, 이승욱 이화여대 교수, 정이환 서울산업대학교 교수, 안주엽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주경미 부산발전연구원 여성정책연구센터장(글 싣는 순서)입니다.

하종강 소장이 그 첫 번째 글을 보내왔습니다. 이 연재가 독자 여러분의 일과 희망에 작은 울림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DJT에 관한 기억

▲ 노동자들이 정리해고·구조조정·노동유연화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사진은 지난 2002년 흥국생명 이범준 노조 위원장이 회사의 정리해고를 규탄하며 회사 외벽에 매달려 시위를 벌이는 모습.ⓒ연합뉴스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려 보자. DJT라는 단어를 기억하는가? 우리 정치사에 일찍이 그런 코미디 같은 시기가 있었다. 김대중, 김종필, 박태준 씨가 한 배를 탔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 박태준 총재는 31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오찬회동, 정리해고의 조기 전면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3인 회동에서는 부도기업과 부실기업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기업을 살리려면 외국기업의 국내기업 인수 외에 방법이 없으며 이에 따라 정리해고도 불가피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한 일간지가 1998년 1월 1일자로 "DJT, 정리해고 불가피"라는 제목 아래 보도한 기사 내용이다. 김대중 당선자는 대통령으로 취임하기도 전에 TV의 <국민과의 대화> 프로그램에 출연해 "전체 근로자 30%를 구조조정해야 나머지 70%의 근로자가 우리 경제를 열심히 살려서 100%가 살아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고, '국민의 정부' 내내 상시적 기업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오랜 세월 동안 '빨갱이'라고 지탄 받으며 '색깔논쟁'에 시달렸고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받아야 했을 만큼 진보적이었던 재야인사가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의 저서 <대중경제론>에서 주장했던 '중소기업 입국론' 따위는 집권 기간 내내 'IMF 외환위기'라는 면죄부 아래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무렵, 우리 연구소의 연구실장 일을 하고 있는 후배에게 넌지시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제도에 대해 반대해야 하는 이유를 한번 설명해봐."

평소에도 성질이 팔팔하기로 소문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활동가 출신의 열혈 여성인 연구실장은 어이없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내뱉었다.

"정리해고는 노동자들의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것인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요? 원칙적으로, 운명적으로, 본능적으로 반대해야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해요?"

나는 그 답을 듣고 또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말하면 국민들이 노동자 편이 될까? 노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면 국민들이 설득 당할까? 사람들은 지금 '노동자들이 목에 칼을 맞는 희생을 감수해 줘야 우리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를 반대하는 이유가 그것뿐이라면, 자신들의 이기적 유익 - 생존권을 위해 결사항전으로 저항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사람들은 '국익'과 '국가경쟁력'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노동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정리해고·구조조정·노동유연화에 반대하는 이유가 단지 그것뿐일까?

노동유연성이 국가경쟁력을 높인다?

갈수록 짧아지는 산업주기 속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고용 계약 형태가 다양해져야 한다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면 경쟁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고 기업뿐만 아니라 노동자 역시 경쟁을 통해 노동력 품질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말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노동시장 유연화' 주장 역시 솔깃하다. 업무에 적합한 지식이나 기능을 가진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기능 유연성'과 인원을 필요한 만큼만 적당하게 투입할 수 있어야 하는 '수량 유연성', 다양한 임금체계에 맞춰 사람을 차등적으로 고용할 수 있어야 하는 '임금 유연성'은 마치 기업을 살릴 수 있는 금과옥조처럼 들린다.

백보 양보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규직들을 모두 비정규직화해야 한다. 선진국들은 대부분의 지식 노동자들이 연봉계약 직이 된 지 오래다. 노동자들도 치열한 경쟁을 통해 업무 수행 능력을 높여야 한다. 그것이 '글로벌 스탠더드'다"라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일단 가정하자. 경쟁을 통해 노동력 품질이 향상되는 '휴먼 캐피털'은 노동유연성의 중요한 화두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노동유연화 정책이 그 나라의 경제를 구원한다는 것이 실례로 증명됐다는 게 시장경제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사회복지 지출을 대폭 축소하고,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노동조합 단체행동권을 제약한 영국의 '대처리즘'과 사회복지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기업 규제를 완화하고, 공격적으로 노동조합을 파괴한 미국의 '레이거노믹스'가 바로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거론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선진국 노동시장 유연화는 다르다

효율을 높이거나 품질을 향상시키는 방법으로 '경쟁'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신념이다. "경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한미 FTA를 반대한다"거나 "더 많이 개방하지 못해 아쉽다"는 고위층의 발언은 그런 뜻이다.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기업이 노동자를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그 나라의 경제 성장에 기여하고 국가경쟁력을 높인다"는 교훈을 배운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이런 의문을 제기해 보자. 선진국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이 지금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그것과 같은 것일까? 두 정리해고 제도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선진국에서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와 우리나라에서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는 그 처한 상황이 달랐던 것은 아닐까?

미국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국내의 어느 중앙 일간지가 전면 특집으로 보도했을 때, 커다란 특호 활자로 뽑은 그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해고 쉽지만, 재취업 더 쉽다."

▲ 기업이 노동자를 해고하는 유연성이 높아지려면 동시에 해고된 노동자가 기업을 선택하는 유연성이 같이 높아져야 한다. 그래야 노동유연성이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지 않는다. ⓒ프레시안

미국 정보통신산업의 중심지인 실리콘밸리에서 유행했던 말이 있다. 네 단어로 구성된 '같은 주차장, 다른 사무실'이다. 노동자는 늘 같은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데 어제까지 주차장 앞에 있는 회사로 출근하던 사람이 오늘부터는 주차장 뒤에 있는 회사로 출근하더라, 이 사람이 언제 주차장 왼쪽에 있는 회사로 옮길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렇다. 최소한 이렇게 돼야 한다. 기업이 노동자를 해고하는 유연성이 높아지려면 동시에 해고된 노동자가 기업을 선택하는 유연성이 같이 높아져야 한다. 여러 가지 조치도 필요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일이며, 노동자의 정서와 문화의 변화도 필요한 일이지만, 고위직에서 해고된 노동자가 다른 기업의 하위직으로 서슴없이 갈 수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노동유연화 정책이 오히려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지 않고 그 나라 경제에 실제로 기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노동유연화 정책은 오직 기업이 노동자를 해고하는 유연성만 높아지고 있다. 이런 경우의 노동유연화 정책은 '국익'에 해롭고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가 경쟁력을 갖춰 쉽게 재취업할 수 있도록 해야만 노동자의 구매력도 유지되고 건전한 내수도 창출된다. 그렇게 해야 불황이나 강력한 경쟁 상대를 만나도 견뎌낼 수 있다. 특별히 진보적인 경제학이 아니라 시장경제주의의 시각으로 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최소한 영화 <대단한 유혹>만큼은 돼야 한다

▲ 최소한 영화 <대단한 유혹>만큼은 돼야 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기업과 노동자를 치열한 경쟁에 내모는 것으로 우리 사회를 선진화하겠다는 야무진 꿈은 그 다음의 일이다. ⓒ연합뉴스
<대단한 유혹>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캐나다 외딴 작은 섬에서 120명쯤 되는 주민이 모두 실직자가 된 뒤, 2주에 한번 나오는 복지수표를 받으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마을 사람들은 이 외딴 작은 섬에 공장을 유치해, 떳떳한 노동자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공장을 유치하려면 그 마을에 반드시 의사가 상주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 나라의 법이다. 그래야 노동자들의 건강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 섬에서 한 달 동안 봉사활동을 한 뒤, 섬을 떠나려고 하는 의사에게 그 마을의 '이장'쯤 되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8년 동안 복지수표나 바라며 줄을 서 왔어. 자네는 한번이라도 복지수표를 받기 위해 줄 서 본 적이 있나? 자네는 돈도 벌어야겠지만 부끄러움도 벌어봐야 돼. '의사가 없으면 마을도 아니다.' 그게 진실이야. 우리가 의사 한 사람 구해보자고 이러는 게 아니네. 마을 사람 120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이러는 거라구."

더 이상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욕 먹을 일이겠고,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캐나다 작은 섬의 주민 120명이 어떻게 8년 동안이나 아무 직업도 없이, 아무도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겠느냐는 거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동네 가까운 곳에서 한 엄마가 아이들 셋을 아파트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자신도 함께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나이가 다섯 살쯤이나 됐던 큰 딸아이는 소란을 듣고 아파트 계단으로 나온 동네 아주머니에게 "엄마가 우리를 죽이려고 해요.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열이 펄펄 끓는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갈 돈 3000원을 더 이상 이웃으로부터 빌릴 수가 없어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엄마가 세 아이를 데리고 남의 동네 고층 아파트까지 찾아가는 동안 마음이 오죽했을까?

영화 <대단한 유혹>에 나오는 사회에서는, 돈을 내지 못해 전기가 끊긴 집에서 촛불을 켠 채 잠들었던 할머니가 불에 타 죽지도 않았고, 돌봐줄 어른이 없는 가난한 어린 아이가 개한테 물려 죽지도 않았고, '긴급생계급여 대상 빈곤층'에 해당하는 가정의 장롱 안에서 네 살배기 아이가 굶주려 숨지고 두 살짜리 동생은 영양실조로 목숨이 위험한 상태로 발견되지도 않았고, 맞벌이 부부가 직장을 구하러 나가면서 밖에서 문을 잠그고 나갔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아이들 셋이 타 죽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실직한 사람들이 다시 당당하게 노동자가 될 때까지 기업 금고와 부자들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8년 동안 먹고 살 수 있었다.

최소한 이렇게 돼야 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기업과 노동자를 치열한 경쟁에 내모는 것으로 우리 사회를 선진화하겠다는 야무진 꿈은 그 다음의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국익'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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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주문한 CD가 도착했다. <허클베리핀> 4집과 <소규모 아카시아밴드> 1집 등등. <소규모 아카시아밴드>는 2집을 먼저 들었는데, 차 안에서 틀고 다니니 아내도 들어보고는 아주 좋아하는 눈치다. 그만큼 대중적이고 서정적인 면을 갖춘 '인디밴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내가 기대했던 건 <허클베리핀> 4집이다.

1집 "18일의 수요일"이 나왔던 때가 1998년이니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간다. 내가 그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아마도 수많은 홍대앞 인디밴드들 가운데, 현재 한국의 상황이나 인민들의 현실에 대해 눈감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면서도 음악성(? 창작능력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또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준 높은 음악성을 인정 받으면서도 우리 안에 내재된 끝 모를 분노와 절망감, 상실감을 일관되게 표출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뮤지션이 아닌가 싶다.

조용히 뒤돌아 앉아서 곰곰히 벽을 맞대고 / 허공에 고갤 묻으면 입속엔 가득 흙먼지
오래전 읽던 책들은 모두가 남의 이야기 / 차라리 거릴 걸으며 내 안의 말을 찾는다
참 한참을 나혼자 바래 왔던 것 있었지, 바람이 / 똑 같은 걸 나만이 바래 왔던건 아니야, 부는 것
오래전 읽던 책들은 답답한 말만 내뱉고 / 허공에 고갤 묻으면 입속엔 가득 흙먼지

-- "첫번째곡" --

저 우물가 그 곁으로 갈 수 없는 목마른 절름발이들
그 위에 포개지는 무력한 우리 얼굴들
말라버린 잉크 위에 그려내려 애쓰는 우리 얼굴들
그 위에 포개지는 모마를 절름발이들
Hey yeah yeah
불을 지르는 아이 불을 지르는 아이

-- "불을 지르는 아이" --


1집 이후 몇 년이 흘러, 나의 기억에서 잊혀져 갈 무렵 듣게 된 2집 <나를 닮은 사내>. 이때부터 난 이들이 단순히 분노를 내뱉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뱉음 속에 뭔가 그들 나름의 목표를 가진 밴드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그 기대감은 3집 이후 몇 년 만에 접하는 4집에서 현실로 확인하게 된다. 이번 4집에서는 1, 2집의 단순한 시대의 분노, 상실감의 표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좀더 나아가고자 한다. 친구를 모으며, 동지를 모으며 함께 나아가자고 한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 시대가 바뀌고 / 나는 너의 노예가 아니므로
너는 나의 주인도 아니구나 / 이제 우리 서로 결별한다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 이곳을 파괴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 지하에서 / 온 대기의 친구들 모여라

뭐라고 해줘

내달리는 사람들

-- "내달리는 사람들" --

눈이 내린 지붕 위 / 술렁이는 영혼들 말하네
언젠가는 그들이 / 다시 돌아온다고 말하네

춤을 춰 모여서 아가미 / 참을 수 없다면아가미

한 시대가 끝나고 / 술렁이는 영혼들 말하네
언젠가는 그들이 / 다시 돌아온다고 말하네

-- "그들이 온다" --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그냥 듣고만 있으면, 그저 마음을 열어놓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이들의 음악을 들어보면 음악평론가 박준흠씨가 왜 "허클베리핀"의 이기용을 가르켜 “신중현, 한대수로부터 시작한 한국 싱어 송 라이터 계보의 현주소”라고 극찬하는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래 인용한 글은 <한겨레 신문>의 앨범 소개글과 <웹진 가슴>에 실린 이지환의 허클베리핀 4집에 대한 평론글이다.

2007 10 16



허클베리 핀 - 낯선 두 형제


인디밴드 1세대 ‘극과 극’
나란히 새음반 낸 허클베리핀·노브레인
 
 
한겨레2007 10 14  
 
 
» 허클베리핀
 
최근 거의 같은 시기에 새 앨범을 낸 밴드 허클베리핀과 노브레인은 인디 음악이 진화할 수 있는 두 갈래 길을 보여준다. 대중성이냐 작품성이냐. 1996년에 결성한 노브레인이 폭넓은 대중성으로 스타 밴드가 되었다면, 1997년에 결성한 허클베리핀은 높은 작품성으로 열광적인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다. 인디 음악 1세대의 대표 주자인 두 밴드의 새 앨범을 통해 인디음악계의 현재를 돌아본다.

‘작품성’으로 압도하거나 ‘대중성’으로 다가가거나

■ 허클베리핀 4집 <환상…나의 환멸>?

허클베리핀의 리더이자 작곡가인 이기용(33)은 평단과 음반 관계자들로부터 최고의 작곡·작사가로 평가받는다. 평론가 박준흠씨는 “신중현, 한대수로부터 시작한 한국 싱어 송 라이터 계보의 현주소”라고 극찬한다.

이번에 발표한 4집 <환상...나의 환멸>은 이미 데뷔 앨범을 능가하는 역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서정성으로 기울었던 2, 3집과 달리 록그룹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했다. 현악기를 배제하고 기타와 신디사이저, 드럼과 베이스를 중심으로 짰다. 거의 전곡에 걸쳐 나타나는 기타 리프(짧은 구절이 반복되는 멜로디)는 어려울 것만 같은 허클베리핀의 음악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입문서’ 같은 구실을 한다. 듣다보면 절로 흥얼거리게 된다.

음울하면서도 폭발적인 가창력의 보컬 이소영(30)은 한층 성숙해졌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듯 모를듯한 중성적인 목소리는 타협을 거부하는 허클베리핀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함축적이며 은유적인 노랫말은 여전하다. 국내 밴드로는 드물게 지식인 팬을 몰고다니는 데는 시적인 가사가 큰 몫을 한다. ‘내달리는 사람들’은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밤이 걸어간다’는 홍대 앞의 밤 풍경을 노래한다. “중동지역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억압적인 행위에 분노가 치밀어”(이기용) 만들었다는 ‘낯선 두형제’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뜻하고, ‘휘파람’은 북녘의 동포들에게 전하는 안부 인사다.

이기용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기타를 처음 들었다. “세광출판사에서 나온 노래책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다. 영문학을 전공했고, 25살에야 밴드를 시작했다. 이기용은 “늦게 시작해서 그런지, 오히려 더 쉽게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인디로 살기 위한 ‘물적 토대’를 만들려고 홍대 앞에 ‘빠샤’라는 술집을 냈다.

 
» 노브레인
 
■ 노브레인 5집 <그것이 젊음>

노브레인의 노래는 귀에 쏙쏙 들어온다. 노랫말은 쉽고 단순하다. 5집 <그것이 젊음>에서는 이런 성격이 더 강해졌다. 영화 <라디오스타>의 ‘넌 내게 반했어’처럼 쉽고 따라부르기 좋은 노래들이 즐비하다. 타이틀곡인 ‘그것이 젊음’이 대표적이다.

“때론 부딪혀봐, 때론 울어도봐 그것이 젊음, 거침없이 제껴봐/때론 부딪혀봐, 때론 울어도봐 그것이 젊음이기에”

박력있는 리듬과 사운드에 맞춰,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를 따라 하다보면 청중은 행복감에 젖는다. 노브레인이 대형 라이브 공연의 단골 출연자로 인기를 끄는 이유다. 노브레인의 대중성은 이렇게 획득된다. ‘메이크 잇 빅’ ‘컴 온! 컴 온! 마산 스트리트여!’ ‘한밤의 뮤직’ ‘탈옥’ ‘내일로 내일로’ ‘고마워 친구’ 등도 쉽게 친해지는 노래다.

노브레인의 대중성을 ‘변절’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2집까지 함께 활동하며 음악적 리더 구실을 했던 기타리스트 차승우가 탈퇴한 이후, 모든 기성 질서에 저항하는 펑크 밴드의 지향을 잃었다는 비판이다.

밴드 리더 이성우(31)는 당당하다. “그런 얘기 들어도 상관없어요. 펑크 정신이란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요. 어릴 때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는데, 커서 먹으면 그 맛을 못느끼는 경우가 있잖아요.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계속 바뀌는데, 자신을 속이고 싶지는 않았어요. 기대치에 부응하려고 연기하는 게 싫었죠. 오히려 뒤통수를 치고 싶었어요.”

역설적으로 얘기하면, 기대에 역행하려고 하는 노브레인의 이런 반응이 오히려 더 펑크에 가까운 듯하다. 아무튼 노브레인은 “인디 음악에 대한 대중 일반의 이해를 확장시키는데 공헌한 바가 크다”며 제4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가수상’을 탔다. 그들의 노래에 깊이가 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디 음악계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음악적 지향이나 장르는 다르지만, 허클베리핀과 노브레인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홍대 앞’이라는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이 활동했던 지난 10여년 동안 인디 음반의 발매량은 10배 가까이 늘었다. 한해 250장 가량의 인디레이블 음반이 쏟아져 나온다. 양이 곧 질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다양해졌다는 지표로 읽힌다.

예나 지금이나 인디의 숙제는 홍보와 유통이다. 1년씩 땀을 흘려 음반을 내놓아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음반업계가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계’ 문제가 인디에서는 발생한다. 무슨 뾰족한 수가 따로 있으랴. 미디어의 공정한 관심과 귀밝은 청중을 기다릴 수밖에.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 [환상... 나의 환멸] (2007/Sha Label)

이지환
출처 : <웹진 가슴> 2007/09/27


90년대 이후, 문화가 새로운 것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고 그저 옛것에 대한 주석들에 지나지 않게 된 초라하고도 빈곤한 시대, 그와는 정 반대의 길을 가며 오직 자신에 대한 믿음 한 조각 위에 자기 존재를 완전히 새롭게 세우려는 진지하고 고집 센 한 예술가, 96년 겨울, 자신의 조그만 방안에서 무언가를 파괴하고 창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쓴다. 이미 했던 것이나 반복하며 하품만 나오게 하는 도식적 표현들과 단호히 결별하며, 시간이 조금 지나면 비틀거리던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손바닥만 한 자신의 작은 땅위에 새로운 꿈의 건축물을 지으려는 멋진 청년. 그에게 분노는 한없이 하찮아진 세상에서 자신의 열정을 되찾게 해 주는 강력한(동시에 치명적인) 환상이자 든든한 감정의 방패였다. 밑도 끝도 없이 열광하는 창백한 무리들에서 벗어나 홀로 침잠하길 택한 그, 처음 가졌던 파괴의 분노를 끝까지 잊지 않고 자신을 육성하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기를 벌써 10년. 이제 청년의 시절은 지나가고, 그 옛날 작은 공간에서부터 꿈꾸었던 아름다운 비전들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다짐한 2007년 늦여름, 자신의 밴드 허클베리핀의 네 번째 음반을 발표한다.

*

2001년 겨울, 허클베리핀 2집은 (세간의 평가완 달리)나에겐 하나의 충격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이 음반을 통해 난 이기용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표면에 불과한 절망의 정서가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도 여전히 간직하게 되는, 그 선명한 무엇의 표현을 향한 치열한 응시임을 알게 되었다. 난 그에게서 저 멀리 위대한 거인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소통하고 있는 거대한 표현의 희망을 보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음악의 윤곽들은 몇 번을 다시 들어도 대부분 뚜렷이 기억나질 않는다는 사실을 난 깨달았다. 얼마 후 ‘웹진 가슴’에 기고한 이기용 본인의 글을 우연찮게 보게 되었고(아마 이즈음부터 ‘가슴’과 나의 인연은 시작 되었던 것 같다) 그가 자신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언급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의 윤곽. 그것을 채우고 있는 무늬들, 희미하고 엷은 무늬들”이란 말을 곱씹었다. 이는 신기하게도 글을 읽던 당시, 내가 홀로 구상하던 어떤 것과 맞닿아 있는 말이었기에 더욱 큰 울림을 가졌는데, 허클베리핀에 대해 가지고 있던 그 어떤 풀리지 않는 매듭은 이 때 비로소 풀리게 된다.

베일과 분칠을 벗겨버린 그 알맹이만을 가지고 과연 어떻게, 어디까지 자신을 전개시켜 나갈 수 있을지, 난 그가 예술가로서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는 그 의연함과 대범함이 무척이나 멋지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과연 이것이 제대로 된 비평적 풍토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영원한 오해로 남기 십상인 이곳에서 얼마나 자신을 실현시킬지, 매우 궁금했다. 간드러지는 가사 하나 없고 유행하는 스타일의 차용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 하나만으로 부단한 음악적 담금질을 하던 허클베리핀은, 종종 또렷하고 선명한 그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뭉개진 회색 선을 그려 넣곤 했다. 이기용은 ‘선명’하게 모든 것을 ‘흐릿’하게 만들려고 작정하는 듯 했고, 이 모순된 방식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묵직하고, 거칠고, 생생하게 살아남으며 자기만의 자율적인 진행 원리와 정서적 효과를 찾아 나가는 허클베리핀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난 이기용 음악의 자기 전개과정에 진심으로 공감했다. 진검승부는 언제나 승패에 관계없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는 음악의 스타일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려는 야심찬 음악가이다. 오직 내적인 힘만으로 지탱되어 외양이 자연스레 자취를 감추게 되는 음악. 그 어떤 가이드라인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음악. 그래서 그는 구태여 에두르지 않는 정공법을 택한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가락과 리듬을 가지고, 자신이 겨냥하는 심리적 진실, 그 정중앙을 단숨에 잡아내려 한다. 결국 ‘멀리서 선명히 보이는 그림의 윤곽’이란 말은 가슴으로 음악을 하기위한 이기용의 음악적 방법론이자 자신을 긴장시키는 그만의 독특한 알레고리의 표현이지 않았나 싶다. 그는 가슴이 아닌 머리로 음악을 하게 되는 순간, 음악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 당당히 밝히기도 하는데, 이것은 이제 청자들에게도 거꾸로 적용되는 말이 된다. 평자들은 그동안 고리타분한 스타일 분석 비평을 통해 허클베리핀 표면의 허울 정도야 붙잡을 수 있었겠지만, 이제 4집은 그 부스러기조차도 붙잡을 것이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허클베리핀 음악에 가슴으로 적극 동참할 수 없다면, 이들의 음악적 매력을 조금이나마 감득하는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

허클베리핀 4집엔 따뜻한 태양빛을 쬐고 있는 문학적인 도마뱀 같은, 성숙한 종합을 이룬 한 예술가의 인간적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들은 밤에만 해왔던 지상에의 요구를 낮의 모습 앞에서도 당당히 드러내기도 한다. 비틀즈의 [Abbey Road]음반을 연상케 하는 복고적 사운드 편성도 눈에 띄며, 전체적으론 정통 록에 기반을 둔 간결하고 직선적이면서도 다층적인 악곡 구조를 지닌다. 4집은 허클베리핀 작품 중에서 가장 밝은 태양 빛에 의해 건조된,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작품이다. 그 안에서 이기용은 불이 붙을 듯 바싹 마른 톤으로 내면에 응축된 에너지를 뽑아내는 멋진 기타 연주를 들려주기도 하며, 사운드의 공간을 폭넓게 활용하는 음악 장인다운 노련함을 통해, 자신의 자아마저 훌쩍 뛰어넘는 경이로운 순간을 온전히 담아내기도 한다.

강약의 리듬을 탄력적으로 교환하며, 시원스레 내뻗는 기타와 보컬의 정서적 교감, 그것이 빚어내는 묘한 긴장을 멀리 공명시키는 <밤이 걸어간다><오나비야><죽은 자의 밤>, 아름다운 멜로디와 서늘한 서정이 끝 모르며 굴곡을 이루는 <60‘s><환상환멸><휘파람>, 재치 있는 편곡과 담백한 사운드가 드넓은 멜랑콜리의 바다를 암시하는 <푸른 수평선><알바트로스>,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활성화 시키며 들끓는 아나키의 세포들을 마구 두들겨 깨우는 <그들이 온다><내달리는 사람들><낯선 두 형제>. 이렇게 이기용은 자신의 꿈과 도취의 환희, 열정, 그리고 서늘한 환멸의 기억들을 하나도 버릴 것 없는 11곡 안에 빼곡히 채운다.

그는 이제 자신의 개인적이고도 직접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 동안 정면으로 마주하길 꺼려 저 멀리 지나가 버린 듯 했던 청년 시절의 진한 절망의 기억과, 그 속에서 건진 아름다웠던 비전들을 다시금 불러내, 현재 자신의 거울 속 이미지들과 냉정히 비추어본다<환상환멸>. 그 속에서, 자기 그림자들의 배후를 보기 시작하며 또 하나의 새로운 현실과 마주친다. 비틀즈 다큐멘터리를 본 후 영감을 받아 만든 <60'>에서, 젊은 날 그 거인들과 함께 꿈꾸었던 영원한 비전들은 따뜻한 온기를 얻는다. 끝 모를 듯 막연했던 감정들은 빛나는 서광을 받아 하나의 특색 있는 작품으로 거듭난다.

<푸른 수평선>은 따뜻한 태양이 내리쬐는 유토피아를 열광적으로 쫒는 현재의 환상을 위트 있게 표현하면서도, 그의 내면은 여전히 서늘한 환멸의 바다라는 암시를 던져준다. 2:40초 부터 시작되는, 중력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충만한 힘과 긴장을 선사 하는, 지금까지 결코 들어본 적 없는 가락으로 순간적인 섬광처럼 번뜩이는 기타 연주. 그 어떤 음악적 도취의 상태에서 흘러나왔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상을 불허하는 진행. 이 지속적이고 강렬한 쾌락과 활력을 가져다주는 힘의 획득을 통해 그의 자아는 더 큰 다양성과 능동성을 드러내며 갑작스런 도약을 한다. 이렇듯 이기용은 음반 곳곳에 자신의 자아마저도 훌쩍 뛰어넘는 경이로운 성숙의 순간을 예리하게 잡아낸다. 그는 날고 있으면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기용이 음악을 통해 분출하고자 하는 두 가지 주된 열망, 선명한 시적 정적의 환희와 생생한 힘의 역동성은 <밤이 걸어온다><오나비야><죽은 자의 밤>에서 성숙한 종합을 이룬다. 강한 리듬 섹션을 중심으로 율동적인 생동감, 위풍당당한 단순함을 구현하는 이 순도 100%의 열정은 강력하면서도 유연한, 눈에 보이지 않는 음들의 연결고리에 심혈을 기울이며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해 듣는 이를 압도한다. 허클베리핀이 붙잡으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환희와 비애, 희망과 공포, 희열과 절망 사이를 쉴새없이 진동하는 동적인 고요이며, 그 속에 깃든, 굴복하길 거부하는 그 어떤 심리적 확실성이다.

<그들이 온다>의 속편격인 <내달리는 사람들>에서 이기용은, 온 대기를 부유하며 떠도는 역사 속 거인들의 영혼을 불러 모으는 흑마술사의 섬찟한 목소리로 새로운 세상의 조짐, 그 복음을 동지들에게 타전한다(<그들이 온다>의 2분12초 에서부터 시작되는, 노이즈 속에 숨겨진 나레이션에도 함께 귀 기울여 보라!). 그들이 돌아온 후, 사람들은 그 알 수 없는 노예의 고통이 자신들의 고통이었음을 깨닫고는 비로소, 시간의 얼음장을 깨고, 스스로 일어난다. 이제 그들과 함께하는 우리는 더 이상 도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린 새로이 실재하는 저만치의 세상을 향해, 함께 내달리는 사람들이다. 새로운 형상의 왕국은 이렇게 건설될 것이다.

*

이번 음반은 처음 들었을 때 그 어떤 시원한 청량감마저 느껴졌을 정도로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투명하고 직선적이었다. 감상하는 데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그저 마음을 열어놓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 뿐이지만, 음악을 분석적으로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미궁으로 남을 만한, 허클베리핀 제 2기를 세상에 알리는 걸작이다. 또한 음악적으로 약간은 혼재된 듯했던 이기용의 개인 프로젝트 스왈로우와의 음악적 영역 구분에 대한 정리도 끝나면서, 허클베리핀은 더욱 강한 집중력을 갖게 되었다.

이전 허클베리핀 작품들에선 특유의 절제된 표현과 탐미적 성향이 혼재되어 있었다. 난 그가 표현에 대한 강렬한 예술가적 열망이 그 어떤 심리적 리얼리티에의 완고한 집착 때문에 자신의 상상력을 제한하곤 했다고 느꼈는데, 이기용에겐 자신의 음악이 윤리적·실천적 함축을 지니지 못한 채 그저 낭만적인 취향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빠져드는 것에 대한 의식적·무의식적 경계가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난 탐미적 성향으로 음악적 중심을 마음 놓고 잡아본 스왈로우 1집을 내심 음반 전체의 완성도로 볼 때 이기용의 최고작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클베리핀 4집 음반을 통해 탐미와 리얼리티 양자 간의 성숙한 통합이 이루어 졌으며, 그들 음악은 새로운 항해의 길을 개척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기용은, 자신의 자유로운 탐미 성향을 스왈로우 활동을 통하여 더욱 자유로이 발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그가 황홀한 환상의 혼란, 그 인간의 근원적인 혼돈에 마음 놓고 뛰어들길 바란다. 그는 그곳에서 굉장한 어떤 것을 건져 올릴 수 있는 괴물 같은 예술가이다. 이제 그는 이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이기용은 환상과 환멸을 거듭하며 자신을 숙성시키는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을 음악 안에 정교히 아로새겨왔다. 그의 음악이 전개해 가는 과정은 정신의 자기전개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지칠 줄 모르는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 그 항해의 끝에 도달하게 될 새 세상이, 나는 점점 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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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휘파람 - Huckleberry Finn
    from 소년의 눈, 소녀의 귀 2008-09-21 22:37 
    눈부신 아침에 그대는 어디에 내 곁을 떠나서 영원으로 가는가 안개 속 헤치고 휘파람 바람불며 혼자 출렁이듯 가는데 굽어진 두 어깨 아리듯 높고 높아 영원으로 가는가 혼자인 이 시간 그대는 어디에 눈부신 아침에 너에게로 가볼까 안개 속 헤치고 휘파람 바람불며 혼자 출렁이듯 가는데 굽어진 두 어깨 아리듯 높고 높아 영원으로 가는가 언제쯤 멀리서 휘파람 들려올까 내 맘 아득해져 오는데 차가운 바람도 잦아든 눈의 나라 안녕한지 그대는 언제쯤 멀리서 휘파람...
 
 
 

‘게바라 40주기’ 게바라 패션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0 05 "AFP/연합"


» ‘게바라 40주기’ 게바라 패션

톱모델 지젤 번천과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스타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가운데) 등이 체 게바라의 얼굴이 찍힌 비키니를 입거나 문신을 새기고, 모자·스카프 등을 착용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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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체게바라 사망 40주기다. 1967년 10월, 볼리비아의 안데스 산맥에서 볼리비아 정규군에게 생포되고도 18시간만에 재판없이 사살된 체게바라. 이미 고유명사화 되어가는 게바라를 살려두기에는 미국(CIA)의 위험부담이 너무 컸으리라.

게바라는 90년대 중반, 특히나 그의 사망 30주기를 기점으로 단순히 혁명의 아이콘을 넘어, 춤추는 자본의 기획으로 포획되어 최신의 유행 '상품'으로 전화하기 시작한다. 그 최첨단 버젼을 이 <'게바라 40주기' 게바라 패션쇼>에서 확인한다. 이미 익숙해진 풍경이지만 씁쓸하기 그지없다. 사실, 나도 그의 얼굴이 그려진 양말을 갖고 있다.


아래는 약 5년 전에 쓰여진 장 코르미에의 <체게바라 평전>에 대한 리뷰다. <오마이뉴스>에 실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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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

장 코르미에 <체게바라 평전>

 

너희들이 이 편지를 읽게 될 즈음엔 나는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있지 못할 게다. 너희들은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고 어린 꼬마들은 이내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빠는 소신껏 행동했으며 내 자신의 이념에 충실했단다. 아빠는 너희들이 훌륭한 혁명가로 자라기를 바란다.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혁명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외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을 늘 기억하여 주기 바란다.(체게바라가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체게바라 평전>, 실천문학사)

 
 

흔히 쓰는 표현으로 질풍노도와 같았던 80년대적 꿈과 이상이 쓰러진 자리에는 아픈 회한과 눈물만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눈물과 회한조차 돈이 된다면, 춤추는 자본의 기획으로 포섭되어 최신 유행의 상품이 되기도 한다는 걸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 난무하던 지난 97년, 전세계적으로 가장 각광받았던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체게바라일 것이다. 그의 사망 30주기를 추모하는 물결로 시작한 흐름은 그의 피가 묻힌 안데스 산맥에서, 그의 시신이 누워 있는 쿠바에서, 그의 죽음을 사주했던 미국에서, 심지어 생전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이 90%는 넘을 대한민국에서조차도 하나의 '유행'이었다. 대학가에 휘날리는 짙은 수염의 체의 초상화, 체의 얼굴이 붉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거리낌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 그 티셔츠의 뒷면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Revolution Forever!"

헉! 내가 그걸 보고 들었던 첫 느낌의 표현이었다. 혁명을 찬양하는 그 문구가 놀라운 게 아니라 혁명조차 돈이 된다면 '상품'으로 팔아먹는, 영악한 자본의 속성이 새삼스러워서 그랬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포스트모던' 세태를 새삼 나무란들 무엇하랴. 이기와 물질에 찌든 현대인에게 어쩌면 그런 '변덕'조차 고마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혁명은 더 이상 시대의 유행은 아니겠으나, 그 혁명이 해결하려던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인간의 자유와 정의를 억압하는 그 모든 현실이 있는 한…. 그런 현실 앞에서 우리도 이젠 마냥 목놓아 괴로와하기보다는 적당히 영합할 줄 아는 '솔로몬의 지혜'를 터득해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못내 아쉬운 사람들은 어떤 경로로든, 그 꿈과 이상의 복원을 기원한다. 그 꿈, 체게바라가 안데스 산맥에서 고립돼 죽어가는 순간에도 결코 놓지 않았던 그 꿈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체가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게릴라 대원들에게 항상 강조했던 말이다. 불가능한 꿈. 물론 이건 결코 불가능한 꿈만은 아니었다. 이걸 그는 쿠바혁명을 통해, 소수 게릴라 대원들을 이끌고 농민들의 지원을 받아가며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려 그 꿈을 실현시켜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혁명후 그는 쿠바 국립은행 총재와 재무장관을 역임하면서 혁명후 쿠바사회 건설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했고, 뛰어난 언변을 활용해 외교관으로 나서서 전 아메리카 대륙에 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마침내, 그 자신이 역설한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혁명 실현을 위해 피델(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편지 한 장 남기고 볼리비아의 밀림 속으로 스며든다.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은 해방된 사회가 아니라 압제에 맞서 싸우는 볼리비아 민중들'이라는 말을 남기고...

이런 체게바라였기에 당시 미국정부는 그가 볼리비아의 안데스 산맥에서 게릴라군을 지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선 그의 제거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가 10월의 안데스 산맥에서 볼리비아 정규군에게 생포되고도 18시간만에 사살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판이니 뭐니 하는 과정을 거치다간 전세계적으로 일어날 구명운동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미 그의 이름은 하나의 '신화'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체게바라를 생각하면 난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루이 알뛰세와 레지 드브레. 현대 프랑스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사람의 이름이야 익히 들어 봤을 테고... 사제지간인 이 두 사람의 관계 속에도 체게바라는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스며든다.

전유럽을 강타했던 68년 5월 혁명의 진행 속에서 '멍청한' 각국의 사회당, 공산당 지도부는 노동자, 학생들이 주도하는 사회혁명의 열기를 승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혁명의 열기에 놀라 뒷걸음질 치다 혁명지도부로부터 배척당하는 웃기지 못할 사태로까지 이어진다(그리고 이것이 68년 5월 혁명이 미완의 혁명으로 남는 중대한 이유가 된다). 이 와중에서 노동자 학생운동의 지도부는 좌파 이론가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알뛰세의 말만은 경청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 알뛰세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레지 드브레. 알뛰세로부터 가장 총애를 받던 그는 체게바라가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의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서 있을 곳도 그곳이다'라는 듯 만류하는 알뛰세를 뒤로 하고선 체를 따라 볼리비아의 밀림 속으로 뛰어든다. '파리고등사범'의 촉망받는 철학자에서 게릴라 전사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알뛰세는 드브레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투쟁에 대한 긴급한 요구가 있지. 하지만 (...) 때로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결정적인 연구에 전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긴요한 것일세. (...) 투쟁에서 면제된 이 시간은 결국 투쟁 자체 속에서 시간을 절약하는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네."
(L. 알뛰세, 「레지 드브레에게 보내는 1967년 3월 1일자 편지」)

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황에 따라 이론연구에 전념하는 게 싸우는 시간을 앞당길 수도 있는 것이니까 '네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구를 해라'는 말이다.

그런데 난 이런 레지 드브레에게서 하나의 역사의 아이러니를 본다. 그렇게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까지 찾아가 무장투쟁에 가담했던 드브레는 생포되고 난 뒤 국제적인 청원운동으로 다시 프랑스에 살아 돌아와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그는 '이미지론'에 몰입하면서 현실운동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러다 지난 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인 좌파의 죠스팽 대신 우파의 시라크 지지선언을 해 그의 전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체게바라 전기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볼리비아의 산 속에서 체가 유일하게 신뢰하고 의지했던 레지 드브레, 마지막 10여 명이 남을 때까지 끝까지 저항하다 체와 함께 포로가 되었던 레지 드브레. 그는 과연 볼리비아의 안데스 산맥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이렇게 '체게바라' 라는 이름은 60년대 유럽 젊은 지성들의 이정표이자 마음 속에 진 빚으로 남아있는 이름이었다. 체 역시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선택받은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뛰어난 게릴라 전략전술가로서, 뛰어난 혁명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한 인텔리 출신이었기에... 그들이 머리 속으로만 그리고 있던 것을 체게바라는 몸으로 실천해 보인 것이다. 진정 60년대는 체게바라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지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손에 다시금 '체게바라 평전'이 펼쳐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2003/02/22 오전 6:56

ⓒ 2003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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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10-08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사놓고 왜 저 책이 선뜻 손에 안잡힐까요? 체게바라에 대한 단편적인 얘기들은 곳곳에 읽는 책마다 나오는데 말입니다. 요새 우리집 서방이 온갖 평전을 섭렵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둘이 얘기가 오고갔는데 그 와중에 내가 왜 평전을 잘 안읽을까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서방이 그러더군요. 니 맘속에 딱 이상화 시켜놓은 이미지가 있는데 그걸 깨기 싫어서 그러는거라고.... 뭐 어느정도는 맞는 말 같기도 해요.
솔직히 말하면 옛날에 형 <임꺽정>빌려다가 읽다가 진짜 신경질 나서 못읽겠더라구요. 왜냐하면 제가 머리속에 딱 그려놓은 임꺽정의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뭐 이런 나쁜 놈이 다 있어라는 생각이 드니까.... (그렇다고 그래서 이 책을 다른데 줘버린건 아니예요. 그냥 형이 안찾길래 필요없다 싶었고, 내가 갖고 있기는 싫고 뭐 그래서.... ㅠ.ㅠ) 그러고 보니까 임꺽정 빚은 아직 안갚았네.... ㅎㅎ 다음에 뭐 필요한 책 있으면 말하슈...ㅎㅎ

내오랜꿈 2007-10-15 22:23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이런 류의 책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함 읽어보시지?

요즘 노신평전, 존 리드 평전, 비틀즈 평전을 한꺼번에 읽었거나 읽고 있는데 단편적 방식으로 알고 있을 때 읽었던 것 하고는 좀 차이가 있는 것 같네요.

아사히 2007-10-12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배 어디 갔어요? piff에 가서 영화의 바다에 빠졌나.
요즘 새 글이 안올라오네요.

내오랜꿈 2007-10-15 22:22   좋아요 0 | URL
바다에 빠지지는 않고 구경은 잘하고 왔네요.
요즘 눈이 아파 될 수 있는대로 검퓨터를 멀리하고 있네요.
더 슬픈 건, 지난 주말에 만난 선배한테 이런저런 이유로 눈이 아프다고 하니까, 그 형 왈

그거 늙으면 당연히 그런 거라며, 자기도 그렇다면서 안과에 가서 처방받은 인공눈물을 주더군. 그러면서 나보고도 병원 가보란다...

쩝...
 
9월, 당신의 추천 도서는?

너무나 '유명한' 책이 제대로 번역되어 나왔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인가 뭣인가가 나와서 시끄러울 때가 벌써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나 싶을 정도로 아득한 옛날 같다. 그 즈음의 난 20대 말의 어수선함과 혼란스러움으로 인생의 방향을 놓고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였기에, 후쿠야마식의 이데올로기 종언, 역사의 종언이라는 '선언'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책이라는 사실만으로 시선을 끌었던 책이었다. 현실에서 현재진행형이던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내겐 전혀 실천적인 철학자로 보이지 않았던 데리다가 정면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유효성을 이야기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러했다.

하지만 그때 내게 데리다는 너무 어려웠다. 알뛰세, 푸코, 들뢰즈의 책들은 그 이해의 완전함은 떠나서라도 읽혀지는데 데리다 만큼은 이상하게도 읽혀지지가 않았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일차적으로는 나의 선입견, 현실의 실천에서 거리를 둔 철학이라는 나의 선입견이 원인이었을 게다.

또 하나는 데리다를 가장 처음 접했던 게 솔 출판사에서 나온 입장총서 시리즈의 하나로 데리다와의 대담을 엮은 <입장들>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의 호감으로 그후 몇몇 데리다 해설서를 읽게 되었는데, 그게 오히려 데리다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다. 김형효씨의 데리다 해설서는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는 말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고, <데리다와 푸꼬,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극단의 예언자들: 니체.하이데거.푸코.데리다> 등에서 다루는 데리다도 내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었다(그나마 <극단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데리다를 조금 이해할 수는 있었던 것 같다).

그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걸 알면서도 읽을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나중에 번역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지만). 그 이후 발리바르나, 들뢰즈를 통해 데리다의 긍정적 평가를 접하게 되면서 언젠가는 다시 데리다를 읽어야지 하면서도 지금까지 미뤄져오고 있는 것.

이번엔 미뤘던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제대로 한번 데리다를 읽어봐야겠다. 번역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로 신뢰를 받고 있는 책이기에.  아래 인용하는 두 글은 <한겨레>의 고명섭 기자와 <동아일보>의 권재현 기자가 쓴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서평인데 차례로 옮겨 놓는다.



‘유령’이란 틀로 위기의 마르크스 재해석
해체주의 철학 거두 데리다 후기 대표작
“마르크스주의 종언은 집단주술” 비판
체제모순 넘어서는 ‘메시아적 유령’ 역설
 
 
출처 : <인터넷한겨레>2007/10/05
 고명섭 기자 
 


» 마르크스의 유령들
<마르크스의 유령들>자크 데리다 지음·진태원 옮김/이제이북스·1만9천원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자크 데리다(1930~2004·사진)가 췌장암으로 사망하기 10여 년 전에 출간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데리다는 1960년대 이래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80권이 넘는 저서를 펴냈고, 수백 편의 논문을 썼다. 프랑스 철학자들 중에 데리다만큼 왕성한 필력을 자랑한 사람도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게 많은 글을 썼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밝히는 데는 극도로 인색했다. 침묵에 가까운 이런 정치적 태도 때문에 좌파 전통이 강한 프랑스 지식계에서 그의 사상은 줄곧 의심의 대상이 됐다. 1970년대 이래 미국에서 그의 ‘해체주의’가 유행하면서, 의심은 더욱 커졌다. 도대체 ‘해체’를 통해 뭘 하자는 건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말하자면, 이런 의심을 걷어내는 데 결정적 전기가 된 책이다. 이 책을 전후로 하여 죽는 순간까지, 그는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정치적·실천적 발언을 쏟아냈다. 이 시기를 데리다의 ‘후기’라고 한다면,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이 후기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그 대표성에는 화제성도 포함된다. 데리다의 저작 가운데 이 책만큼 널리 화제가 된 책도 없다. 프랑스에서 이 책의 내용을 각색해 연극으로 공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책은 10여 년 전에 한국어로 번역된 바 있으나, 데리다의 복잡한 논리와 어려운 용어들을 제대로 옮겨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에서 유학 중인 진태원(리옹 고등사범학교 박사 후 연구원)씨가 꼼꼼한 작업 끝에 이 책을 새롭게 번역했다. 풍부한 옮긴이 주석이 달린 이 번역본은 데리다의 어지러운 생각의 흐름을 비교적 선명하게 따라잡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책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령’에 관한 책이다. 좀더 부연하면,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주위를 떠도는 유령에 관한 책이다. 유령이라는 모호한 존재는 근대 철학을 포함한 근대 학문에서는 금기 혹은 축출의 대상이었다. 명료성을 추구해야 하는 과학의 영역에서 유령이 들어앉을 곳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철학서는 예외적인 책이다. 옮긴이의 감탄 섞인 표현은 이 예외성을 잘 보여준다. “데리다 이전에 과연 누가 유령을 주제로 하여 마르크스에 관한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 자크 데리다
이 책이 세간의 화제가 된 것은 출간 시기와도 관련이 있다. 1993년이면,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념을 따라 건설한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직후였다. 여기저기서 마르크스주의의 파산 선고가 잇따랐다. 데리다가 이 책에서 특별히 지목하고 있는 것이 미국의 역사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이다. 1992년 출간된 후쿠야마의 책은 철학적 저작치고는 전례없는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마르크스주의를 관에 집어넣어 뚜껑에 못을 박듯, 이 책은 자본주의 체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궁극적 승리를 선언했다. 역사가 이 시점에서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고 득의양양하게 단언했다.

이 책이 왜 그토록 열광적으로 팔려나갔을까? 데리다는 그 열광이 일종의 ‘푸닥거리’ 행위라고 이야기한다.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몰아내 영원히 매장해 버리려는 집단적 주술행위가 이 책에 쏟아진 열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그런 열광이야말로 이 현존 체제의 취약함·허술함을 역으로 증명하는 일일 뿐이다. 푸닥거리는 이 체제가 실업·빈곤·증오·전쟁을 안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체제임을 부인하려는 안간힘일 뿐이다. 그렇게 선언한다고 해서 유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데리다가 더 공들여 해부하는 것은 ‘마르크스 안에 있는 유령’이다. 마르크스에게 유령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 유령은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 첫 줄에서 불러들인 그 유령이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때의 유령은 유럽의 지배자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유령이며, 곧 도래해 현실이 될 유령이다.

다른 한 유령은 마르크스가 축출하려고 애썼던 유령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나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유령적 존재들을 언급하는데, 물신숭배의 대상이 된 화폐나 상품이 그런 존재들이다. 마르크스는 이 유령적 존재들을 몰아낼 때 참다운 자유의 세계가 열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이런 생각은 순진하다. 유령은 사라지지 않는다. 데리다는 〈공산당 선언〉에서 등장한 유령이야말로 유령다운 유령이라고 본다. 그런 유령은 체제의 모순 위에서 출몰하며 체제 너머를 환기시킨다. 유령은 일종의 메시아다.


자본주의가 군림하는 한 마르크스는 되돌아온다

◇ 마르크스의 유령들/자크 데리다 지음·진태원 옮김/400쪽·1만9000원·이제이북스
◇ 출처 : 동아일보 2007/10/06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2004년 타계한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저서 중 가장 화제가 되고 인용도 많이 된 책이다. 언어유희에 가까운 데리다의 난해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시간 제목 저자 내용 등 네 가지의 어긋남(out of joint)에서 발생한다.

이 책이 ‘햄릿’의 유명한 문구, ‘시간은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에 대한 심오한 독해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첫 번째 불일치는 그 반시대성에서 발생한다. 이 책은 1993년에 출간됐다. 공산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가 선언된 시점이다. 구체적으론 자본주의의 승리를 ‘역사의 종언’으로 찬미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이 출간된 지 1년 뒤다. 그런 시점에서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가 소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회귀할 것임을 주장했다.

두 번째는 저자와 주제의 불협화음이다. 데리다는 좌파 전통이 강한 프랑스 지식사회에 있기는 했지만 마르크스의 철학이나 저작을 다룬 적이 없었다. 그의 주된 활동 영역은 서구 형이상학의 해체와 재구성이란 ‘이론’에 있었지 ‘실천’에 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돌연 마르크스를 들고 나오며 ‘정의’와 ‘책임’의 문제를 제기했다.

세 번째는 유물론자인 마르크스와 유령, 그것도 복수의 유령을 병치한 제목의 충돌이다. 이 제목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1848년 공산당선언 첫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거기서 유령은 일종의 반어법으로 사용된 것이었고 그것도 ‘공산주의’라는 단 하나의 유령만 지칭했다.

네 번째는 그처럼 과학성을 강조해 온 마르크스주의를 역설적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 위를 넘나드는 유령적 실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독특한 ‘유령론(hantologie)’으로 해체 및 재구성해 낸 파격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도구로서, 억압과 착취와 차별에 맞서는 해방운동의 대명사로서 어디선가 불러 대는 목소리가 있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망령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올 것이란 논리가 그것이다. 그래서 헤겔이 마르크스를 낳았다는 주장보다 셰익스피어가 마르크스를 낳았다는 주장이 더 강조된다. 따라서 데리다의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이 아닌 ‘운동’이며 정교한 ‘과학’보다 메시아주의에 기초한 ‘종교’에 가깝다.

이 때문에 이 책은 가상과 환영, 유령과의 단절을 강조하며 과학적 이론을 표방해 온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나 이상인 그것을/더 이상 하나 아닌 그것을’로 끝나는 서장의 마지막 문장이야말로 그런 전통적 마르크시즘에 대한 전복을 함축한다.

이 책은 1996년 한 차례 번역됐으나 절판됐다. 국내에서 번역된 데리다 저술에 대한 비판을 펼치던 진태원 박사가 직접 나선 이 책의 미덕은 데리다 철학의 까다로운 개념과 용어를 세심하게 안내한 점이다. 이를 제대로 음미하는 방법으로 맨 뒤에 실린 옮긴이의 ‘용어해설’부터 일독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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