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간’ 향해 계몽을 계몽하자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⑥ 페터 슬로터다이크
김석수 교수(경북대ㆍ철학과)

2007년 10월 13일 대학신문 
 
   
 
현대 인문학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산 생명을 복제하는 유전공학이 출현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하면서 새롭게 구축되는 이 제국의 시대에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다. 이런 현실의 도래는 이미 전통적 인문학이 표방해온 휴머니즘에 위기를 안겨다 줬으며,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돌파구를 찾도록 다그치고 있다. 바로 이런 시대적 흐름의 중심부에, 기존의 휴머니즘의 종언을 고하고, 견유주의(犬儒主義)와 유전공학의 결합으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도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주창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1999년 7월 16일 바이에른 엘마우 성에서 개최된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가해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유럽 지성계에 충격을 안겨줬다. 그는 그 동안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해 온 기존의 휴머니즘적 인간관이 인간의 야생성을 길들이면서 은폐하고 있음을, 게다가 자기행복에 매몰되거나 냉소주의에 몰입하는 현대 사회의 폭력의 공범자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성과 문자에 기초해 인간성을 동물성과 구분해왔던 기존의 시도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없으며, 공산주의, 민족주의, 아메리카니즘도 모두 이런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인은 ‘사유하는 동물’이 ‘사유하는 인간’으로 전환됨으로써 인간 그 스스로가 문화라는 우리에 갇혀 가축화되고, 그래서 식물처럼 생각하지만 육식동물처럼 살고, 착한 목자처럼 되기를 원하지만 나쁜 가축 떼처럼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문화에 저항하지 못하는 ‘낡은 인간’에 얽매여 ‘작은 사육자’로 살아가는 차원을 넘어, 이것을 깨뜨리고 위대한 정치, 위대한 예술, 위대한 사상을 감행해 ‘새로운 인간(위버멘쉬)’을 향해 나아가는 ‘큰 사육자’로 거듭나야 한다. 그의 이 ‘큰 사육자’의 길은, 하버마스를 비롯한 독일 좌파 지식인들이 비판했듯이, 단순히 인간개종을 위해 ‘차라투스트라 기획’을 감행하는 신종 나치스트의 길이 아니다. 그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의 근접성을 주장한 저 고대의 견유주의와 오늘날 유전공학의 조화를 통해 인간의 권리와 동물의 권리가 서로 보호되는 길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가 이와 같은 길을 택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권력지향적인 인간을, 자연이라는 실험장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거쳐 온 진화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관념적으로만 접근하는 기존의 휴머니즘적 접근에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위장된 휴머니스트들처럼 유전공학의 도래로 새롭게 시작된 삶의 놀이를 냉소적으로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의 해방이 어떻게 하면 가능할 것인가라는 대원칙 아래서, 그에 대해 진정성 있는 태도로 바라봐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괴물이 되고 잡종의 형태가 될 위험은 유전공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유아적인 사유방식에 있다.

사실 90년대 후반에 온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의 이 주장은 당시에 싹튼 것이 아니라, 그의 핵심 저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냉소적 이성 비판』(1983)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냉소주의를 분석하면서, 이 냉소주의 역시 계몽에 지친 무력한 인간의 모습임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현대의 기술문명이 우리의 환경을 망가뜨린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이 문명에 계속 동참하고 있듯이, 계몽 속에서 더불어 자라난 냉소주의는 우리를 끝없이 더 많은 압박과 고통에 더 잘 순응하도록 이끈다. 계몽은 이 허위의식을 제거하기보다는 이를 대중적 현상으로 일반화시키며, 마침내 스스로를 배반하고 비합리성으로 추락한다. 그는 이런 추락 현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육체와 영혼, 주체와 객체, 문화와 자연, 주관이성과 객관이성을 가르는 기존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이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공존하는 ‘혼성적 실재’를 추구하며, 인간-동물-식물-기계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존재론적 구성’을 통해 포스트휴머니즘을 추구한다. 그의 포스트휴머니즘은 『유럽의 도가주의』(1989)에서도 주장되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입장은 여러 다양한 글들에서, 후쿠야마가 언급한 역사시대의 거대한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와 아메리카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있다. 그는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몸의 지혜’로 거대한 지배체제와 수정궁으로 상징되는 ‘역사시대’를 종식하고, ‘지역’들이 존중받으면서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진정한 다원주의를 꿈꾸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마지막 인간’을 넘어, 역사 이후의 ‘새로운 인간(post-human)’을 유전공학과 견유주의의 연대를 통해 재창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에는 여전히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 양자의 연대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지식인들도 이제 그가 제시한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전망을 고뇌하지 않고 더 이상 미래의 인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관광 아프리카 뜀틀 될 경기장 증축 비지땀
검은 대륙 희망 찾기 ⑨ 월드컵으로 뛴다-남아공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0 10 권혁철 기자 김태형 기자

»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시내의 사커시티 경기장을 개·보수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은 2010년 월드컵 주경기장으로 쓰일 예정이다. 요하네스버그/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7개국 단일비자 추진으로 통합 기폭제 기대
치안 불안·교통난에 백인들 무관심이 걸림돌


지난 8월초 찾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경기장은 증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2010년 월드컵 개막전과 결승전이 열리는 이곳은 7만명 규모 관중석을 9만4천여석으로 확장하고, 비와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지붕을 새로 올리고 있었다.

공사 현장을 둘러보니 곳곳에서 인부들이 터를 파고 철근을 새로 박고 있었다. 타워크레인이 10개나 서 있고 흙을 실은 트럭이 바쁘게 드나들었다. 말이 증축이지 신축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취재진을 안내하던 공사 현장 실무자는 “월드컵 조직위 지침이니까 개·보수를 하지만 다 밀어버리고 새로 짓는 게 비용이 더 적게 들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타보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은 아프리카민족회의(ANC) 홈페이지에 ‘월드컵 개최 준비를 차질 없이 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개최가 불투명하다는 오스트레일리아·영국 언론들의 보도가 잇따르자 대통령이 직접 반박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지난 5월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남아공 월드컵 준비가 지연돼 2010 월드컵 개최지가 변경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해 남아공이 발칵 뒤집어졌다.

» 2010 월드컵 로고 바탕에는 가운데 아프리카 대륙 모양이 있고, 월드컵을 개최하는 남아공 국기의 무지개빛 색깔들이 줄무늬처럼 이를 감싸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을 배경으로 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시저스킥’(일명 오버헤드킥)을 하고 있다. 로고는 아프리카의 탄력과 역동성을 강조한 것이다.
 
‘남아공 월드컵 회의론’을 털어내기 위해 남아공 정부는 올 상반기에 모든 월드컵 경기장의 공사를 시작했다. 주경기장인 사커시티 등 5곳은 증축하고 5개 경기장은 신축하며, 경기장 근처 교통시설을 개선하는 데 23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사커시티 공사 현장 책임자인 맥스웰 비도는 “2월1일 공사를 시작해 순조롭게 공사를 하고 있으며 2009년 4월23일까지 공사를 마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경기장 개·보수 공사는 남아공 건축기준으로 27개월이면 충분하므로, 2010년 6월11일 월드컵 개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피파 규정을 보면, 월드컵 개최 5개월 전인 2010년 1월까지 경기장 건설을 완료해야 한다.

‘남아공 월드컵 회의론’의 배경에는 경기장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2010 월드컵은 △치안 불안 △인프라(대중교통·숙박) 부족 △자국 국민(특히 백인)의 낮은 관심이라는 ‘삼각 파도’에 시달리고 있다.

월드컵 대회가 열리면 35만명의 축구팬들과 관광객이 남아공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남아공 정부로선 이들을 노린 각종 범죄가 가장 큰 걱정거리다.

유명한 여행안내서인 〈론리 플래닛〉이 “요하네스버그의 밤 거리를 걷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단언할 만큼 남아공의 치안은 악명이 높다. 지난해 살인 사건으로 1만9천명이 숨졌다. 하루 52명꼴이다. 강도는 21만건, 무기를 들고 떼로 저지르는 특수강도는 12만6천건이 터졌다. 특히 아시아인들이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아 한국인과 중국인은 주요 표적이다.

게다가 남아공에는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이 거의 없다. 출퇴근 때 백인들은 대부분 자가용 차량을 몰고 나오고, 흑인들은 행선지별로 7~9인승 승합차에 합승한다. 대기업들은 직원 1인당 매월 약 70만원을 차량 유지비로 지급한다. 차량이 고장나면 출퇴근이 불가능해 차량을 수리하도록 이틀 가량 휴가를 주는게 남아공의 관행이다. 요하네스버그 출퇴근 시간 교통난은 서울을 능가한다. 아침 7시가 넘으면 외곽에서 도심까지 20㎞ 안팎 거리를 가는 데 2시간이 넘게 걸린다.

남아공 정부는 월드컵 교통 대책으로 요하네스버그공항과 요하네스버그,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를 잇는 고속철도인 하우트레인을 2010년 완공될 계획인데 공사 진척이 더디다. 숙박 문제에선, 피파 기준에 맞는 5만5천개 객실을 확보해야 하는데 현재 2만6천개 승인에 그치고 있다. 부족한 숙소는 민박·야영 등으로 해결해야 한다.

남아공 국민들의 관심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것은 더 큰 걱정거리다. 남아공에서 축구는 흑인 운동이다. 백인은 럭비와 크리켓을 한다. 이런 사정으로 백인들의 관심이 상당히 낮다. 지난 4월 한 여론조사를 보면, 남아공 대표팀이 월드컵 8강에 진출할 것이라는 대답이 60%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백인 응답자의 58%는 8강 진출에 실패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럼에도 아프리카에서 처음 열리는 2010 월드컵은 남아공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남아공 정부는 ‘자랑스러운 남아공’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오랜 인종차별정책으로 악화된 국가 이미지를 개선할 기회로 삼고 있다.

남아공은 월드컵 준비에 530억달러를 쓸 예정이다. 이 가운데 50% 가량이 전력·운송·통신 등 사회기반시설 정비에 들어간다. 월드컵 관련 투자를 통해 2014년까지 일자리 16만개가 새로 생기면, 26%에 이르는 실업률을 반으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남부 아프리카 나라들은 월드컵을 관광 산업의 도약대로 삼는다는 계획이다. 월드컵 기간 남부 아프리카 단일 비자도 추진되고 있다. 월드컵 관광객들에게 짐바브웨·나미비아·스와질랜드·보츠와나 등 7개 나라를 자유롭게 관광할 수 있게 하는 비자를 내주는 것이다. 월드컵이 제국주의 분할 지배가 찢어놓은 남부 아프리카의 통합의 촉매 구실을 하고 있다. <끝>

요하네스버그/글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축구 노예상’에 팔려가는 청소년들

푼돈으로 유럽클럽 종신계약…불법 체류

» 요하네스버그 럭비클럽 운동장에서 동네 꼬마들이 공을 차고 있다. 요하네스버그/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지난 8월 초 콩고민주공화국 수도 킨샤사의 동물원 옆. 10대 초반 어린이 12명이 편을 나눠 공을 차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여느 곳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운동화 두 짝을 모두 신은 아이는 1명이었다.

아이들은 3년 뒤 남아공에서 월드컵이 열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국적은 프랑스지만, 콩고에서 나서 자란 클로드 마켈레레(첼시) 같은 유럽 빅리그 선수들의 이름을 아이들은 줄줄 뀄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첼시의 마이클 에시엔(가나)과 디디에 드로그바(코드디부아르), 아스날의 에마뉘엘 아데바요르(토고) 등. 유럽에서 활약하는 대표적인 아프리카 선수들이다. 아이들의 장래 꿈은 유럽에서 축구 선수로 뛰면서 돈과 명예를 움켜쥐는 것이다.

유럽 리그에서 아프리카 선수들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들의 국가대표팀 차출을 놓고 아프리카 대표팀과 유럽 클럽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 2년마다 열리는 ‘2008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이 단적인 예다. 클럽들은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에 따라, 대회 시작 2주 전까지 선수들을 아프리카 각국 대표팀에 보내야 한다. 하지만 리그 중간에 핵심 선수를 한 달 넘게 보내야 하는 클럽들이 이를 거부해 다툼이 되풀이된다.

영국 언론들은 이런 갈등을 ‘짊어져야 할 빚’이라고 표현한다. 유럽 빅리그 구단들이 싼 값에 아프리카 선수를 데려와서 활용한 대가를 2년마다 치르는 셈이란 것이다.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나와 유명해지면 몸값이 비싸지기 때문에 에이전트들은 아프리카 각지를 돌아다니며 축구를 잘하는 10대 청소년을 ‘입도선매’한다. 아프리카 축구 유망주들을 발굴해 유럽 클럽에 파는 에이전트들은 ‘21세기 축구 노예상’이라 불린다. 이들은 선수들한테 몸값으로 적은 돈을 주고, 거의 종신계약을 맺기 때문이다.

해마다 아프리카 청소년 몇 천명이 에이전트 소개로 유럽 축구 클럽의 입단 테스트를 받는다. 테스트를 통과하는 청소년은 극소수다. 에이전트들은 테스트에 떨어진 청소년들을 팽개치고, 돌아갈 비행기 삯도 없는 이들은 불법체류자가 돼 유럽의 뒷골목을 떠돈다. 가난과 절망의 탈출구인 아프리카 축구의 또다른 그늘이다.

요하네스버그/글 권혁철 기자, 사진 김태형 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제3세계 동지’ 신뢰…주요 인프라 ‘중국제’

검은 대륙 희망 찾기 ⑦중국, 적인가 동지인가

출처:<인터넷한겨레> 2007 09 27
권혁철 기자 / 서수민 기자


» 수단의 수도 하르툼의 한 건설 현장에서 함께 일하던 중국 노동자와 현지인들이 취재 협조를 구하자 웃음을 지었다. 하르툼/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아프리카의 관문 구실을 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오아르(OR) 탐보공항. 보안검색 요원이나 항공사 승무원들은 눈길이 마주치는 동양인들에게 “니하오”(안녕) “쎄쎄”(감사) 등의 중국말 인사를 건네기 일쑤다. 느닷없는 중국인 취급에 한국인이나 일본인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이 얼마나 활발한지를 잘 보여준다.

<한겨레> 취재진이 아프리카 시골 마을에 가면 난생 처음 동양인을 보는 어린이들이 몰려들어 “시나”(중국인)라고 외치곤 했다. 60·70년대 일본이 부상할 때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이 동양인을 보면 으레 일본 사람인지를 묻던 것처럼, 요즘 아프리카에서는 ‘동양인=중국인’이라는 등식이 굳어져 있다.

70년대부터 무상원조 공세…전지역서 ‘차이나 바람’
자원 놓고 미와 패권다툼…현지 노동력 안써 불만도


» 아프리카 원유 하루 생산량 / 중국-아프리카 국가별 무역 규모
아프리카 나라들의 주요 산업 기반은 대부분 ‘중국제’다. 대표적 사례가 수단이다. 수단은 산유국이면서도 정유시설이 변변찮아 오랫동안 정유된 석유를 수입해왔다. 수단을 본격적인 석유 수출국으로 부상하게 만든 1등 공신이 하르툼 정유공장이다. 이 정유공장은 해마다 10% 대에 이르는 고도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남아공과 이집트 사이에 있는 유일한 정유공장인 이 공장은 중국국영석유회사(CNPC)와 수단 광업에너지부가 합작해 2000년에 완공했다. 정유 규모가 연간 250만톤이며, 항공기용 제트 에이(A)유, 중유, 엘피지도 생산한다. 이 공장 가동에 필요한 기술은 모두 중국이 제공한 것이며, 기술자들도 대부분 중국인이다. 수단의 수도 하르툼은 온 시내가 중국판이다. 하르툼에서 만난 한 수단인은 “서구와 달리 중국은 정치에 간섭하지 않고, 비즈니스를 안다”고 말했다.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은 1950∼60년대부터 시작됐다. 제3세계 외교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다. 중국은 아프리카의 전통적 우방으로 70년대부터 꾸준히 무상 원조 공세를 폈다. 아프리카 전역에서 중국이 건설한 관공서 건물, 체육관, 병원, 도로, 주택, 학교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쌓은 신뢰가 중국의 본격적 해외 진출에 윤활유로 작용한다. 아프리카 진출에서 중국은 서방 국가들보다 휠씬 유리하다. 아프리카인들은 과거 식민지배의 기억으로 유럽이나 미국의 백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 반면, 중국에 대해서는 50·60년대 비동맹 운동을 함께 했고, 독립 투쟁을 도와준 우호국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무비아이 응카샤마 콩고 대통령 에너지·광업 담당수석비서관은 “유럽 사람들은 아프리카를 속여왔다”고 말했다.

중국이 금융·기획·설계·감리 등을 한번에 해결해주는‘턴키’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중국을 선호하는 이유다. 특히 중국은 인권 개선, 민주주의와 같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지 않는다. 중국은 내정불간섭의 원칙에서 독재, 인권 탄압, 부패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 이른바 ‘베이징 컨센서스’란 전략을 펴고 있다. 중국은 내전이나 인권 탄압으로 악명이 높은 나라들에도 무기를 팔고 경제 지원책을 펴고 있다.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에 맞서기 위해 ‘동쪽을 보자’(Look East)는 구호를 내세우며 친중국 정책을 들고 나왔다.

중국이 환영만 받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 값싼 중국산 제품을 들여와 아프리카 산업 기반을 약화시키고 자원을 약탈하는 제국주의란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콩고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은쿠무 프레이 룽굴라 박사(인류학)는 “중국인들이 도·소매상 등 소규모 유통을 장악해 돈벌이에만 신경 쓰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국이 현지 노동력을 전혀 쓰지 않는 것도 불만을 사고 있다. 중국은 공사 계약을 하면 현장의 허드렛일 인부들까지 중국인을 데려와 합숙하며 일을 한다. 이렇게 아프리카에서 일하는 중국 노동자가 7만∼8만명 가량인 것으로 추정된다.

잠비아 수도 루사카에서 북쪽으로 300㎞ 떨어진 참비시는 중국이 8억달러를 투자해 경제무역 특구로 키우는 곳이다. 지난 2월 잠비아를 방문한 중국 후진타오 국가 주석이 이곳을 방문하려다 불상사를 걱정해 포기했다. 참비시가 아프리카에서 반중국 감정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 콩고 킨샤사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콩고 사람들이 중국행 비자를 받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킨샤사/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2002년 참비시의 구리 광산을 인수한 중국 경영진은 노조탄압을 일삼고 작업장 안전은 팽개쳤다. 지난해 7월 잠비아 광부들이 임금 체불 항의 시위를 하자, 중국인 감독관이 총을 쏴서 46명이 숨졌다. 격분한 잠비아인들이 곳곳에서 중국인 상점들이 습격하는 등 반중 감정이 거세졌다. 지난해 가을 대통령 선거 때 야당 후보인 마이클 사타가 당선에 실패했지만, “중국인들을 몰아내자”며 반중감정에 호소하는 선거운동으로 28%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올 상반기에 나이지리아 유전지대에서 무장세력이 중국인 25명을 납치했고 9명을 죽였다. 유전 습격 현장을 본 사람들은 무장세력이 중국인들한테 집중 사격을 했다고 증언했다. 중국이 지역 특성이 강한 아프리카 실정를 고려하지 않고 중앙 정권과 유착해 석유 이권을 챙기다 현지인들의 반발을 사는 것이다.

중국은 자국 원유 공급의 30%를 아프리카에서 조달하고 있다. 중국의 아프리카 전략 초점은 석유와 광물 등 자원 확보다. 특히 아프리카 석유 자원를 놓고 미국과 벌이는 주도권 다툼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전철을 밟는 ‘아프리카 패권 경쟁’이란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게 됐다.

킨샤사·하르툼/권혁철 서수민 기자 nura@hani.co.kr

 

베이징 컨센서스는 정밀한 이념이라기보다는 미국 주도의 워싱턴 컨센서스에 도전하는 개념이다.

1990년대 미국은 남미 국가의 경제위기 해법으로 세제개혁, 무역·투자 자유화, 탈규제화 등 10가지 정책을 내놨다. 미국의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이 명명한 워싱턴 컨센서스는 미국 주도 신자유주의의 대명사가 돼, 세계화 바람을 타고 힘을 얻었다. 90년대 후반 한국 경제 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 개혁 요구도 워싱턴 컨센서스의 하나다.

2004년 골드만 삭스의 고문이며 중국 칭화대 라모 교수가 처음 제기한 베이징 컨센서스는 정치적 자유화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시장경제적 요소를 최대한 도입하는 중국식 발전국가 모델을 뜻한다. 중국 경제 발전 경험을 정리한 베이징 컨센서스는 구체성이나 실천성 면에서 워싱턴 컨센서스에 비해 뒤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워싱턴 컨센서스와 달리 베이징 컨센서스는 내정 불간섭의 원칙 아래 권위주의체제를 인정하면서 발전전략을 제시한다. 서방이나 국제기구의 개혁 요구에 거부감이 있는 수단, 짐바브웨 같은 아프리카 국가에게는 호소력이 있다.



“중국경계론 펴기 앞서 기여도 살펴야”
우쩌우시앤 주콩고 중국대사 인터뷰


출처:<인터넷한겨레> 2007 09 27
권혁철 기자 / 김태형 기자

» 우쩌우시앤 주콩고 중국대사
 
7월 말 콩고민주공화국 수도 킨샤사의 중국대사관 앞. 콩고인들이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담장을 따라 줄을 길게 서 있었다. 중국 비자를 신청하려는 사람들이다. 한국인들이 비자 인터뷰를 기다리며 서울의 미 대사관 주변에 늘어선 풍경을 상기시켰다.

“중국 비자를 받으려는 콩고 사람들이 많더라”는 인삿말에 우쩌우시앤(吳澤獻) 콩고 주재 중국 대사는 “중국에서 사업 기회를 잡으려는 콩고인들이 많다”고 대답했다. 그는 콩고와 중국 관계가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의 공세적 아프리카 진출에 대해 서방 언론을 중심으로 ‘식민지 침탈’ ‘아프리카 패권 추구’ 등의 비판이 제기되는 것과 관련해, 우 대사는 “예전부터 우리는 아프리카의 친구였다”며 강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중국은 50년대 아프리카에선 처음으로 이집트와 외교 관계를 맺은 뒤 줄곧 아프리카 나라들의 독립투쟁을 지지하고 경제원조를 하는 등 친선 관계를 맺어왔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지금 아프리카가 영어권과 불어권으로 양분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프리카에서 정말 오래된 외국인은 유럽인”이라며, 아프리카 식민 지배와 패권 추구의 장본인이었던 서방국가들이 ‘원죄 없는’ 중국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다고 항변했다.

우 대사는 “서방 언론은 ‘중국경계론’을 펴기 전에 아프리카에서 중국이 무엇을 했는지 살펴봐야 한다”며, 70년대 탄자니아와 잠비아를 잇는 1800㎞ 길이 타자라 철도 건설을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타자라 철도는 아프리카 철도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이 만든 철도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과 정반대로 중국은 식민주의의 종식과 아프리카의 독립을 위해 싸운 ‘동지’였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한국인·인도인·일본인 등 많은 아시아인들이 아프리카에 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의 개발과 발전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점”이라며, 콩고의 국회의사당, 8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킨샤사의 아프리카 최대 규모 종합운동장, 킨샤사의 현대식 병원과 도로 등이 모두 중국 노동자들의 땀방울로 지어졌다고 강조했다. 드라마 <대장금>의 팬이라고 밝힌 우 대사는 “중국은 아프리카의 오랜 동지였고 지금은 좋은 이웃”이라는 ‘모법답안’을 여러차례 되풀이했다.

킨샤사/글 권혁철, 사진 김태형 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죽음의 매연’ 유전지대…삶터 되살리기 ‘시동’
검은 대륙 희망 찾기 ⑧ 축복과 저주의 두 얼굴-나이지리아


출처:<인터넷한겨레> 2007 10 09
서수민 기자

» 나이지리아 최대 유전지대인 니제르델타 지역의 한 유정공장에서 24시간 내내 천연가스를 태우고 있다. 니제르델타/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석유매장지 니제르 델타
생존위기에 학살까지
청년들 환경·인권운동 활발


 
» 나이지리아
 
 
“석유가 나면 우리도 부자가 되는구나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순진했죠.”

세실리아스 조르그(50)는 날마다 10시간씩 얌(마와 비슷한 덩굴성 식물)을 캐는 품을 판다. 얼굴에는 깊은 골이 패여 있고, 깡마른 몸은 막대기처럼 단단하다. 하루 벌이는 한국 돈으로 1000원도 되지 않는다.

조르그를 비롯한 이곳 주민들은 나이지리아 뿐아니라 아프리카를 통틀어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은 거대한 ‘돈방석’ 위에 앉아 있다. 그가 사는 우무에쳄 마을은 세계 최대 석유 매장지의 하나인 니제르 델타 유전지역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보니라이트’ 원유는 황 함유량이 낮아 정제할 필요조차 거의 없는 최고급 원유로 꼽힌다.

이들을 가난하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석유다. 마을 사람들은 1958년 석유가 발견된 뒤 더욱 살기 어려워졌다고 입을 모은다. 조르그는 “송유관에서 석유가 새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됐어요. 개울에 기름이 돌며 물고기가 사라졌고요”라고 말했다. 마을 하늘 한쪽은 유정에서 태우는 천연가스의 불길로 1년 내내 타오른다. 불길이 내뿜는 열기와 매연으로 마을을 에워싼 숲도 서서히 사라졌다.

우무에쳄 사람들은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했다. 중앙정부가 석유 산업에서 나온 수익을 독점하고, 땅 주인에 대한 보상이나 배상을 거의 하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놓은 토지법 때문이다.

1990년 11월, 가난과 오염에 지친 우무에쳄 사람들은 다국적기업 쉘과 나이지리아 정부가 함께 운영하는 유정 앞에서 생계 보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평화롭게 시작했지만, 정부군이 주민들에게 총을 쏘며 전쟁으로 변했다.

 
» 나이지리아 석유생산과 소비현황
 
 
“그들은 여자나 어린이한테도 총을 겨눴어요. 우리 남편도 그때 죽었고요.” 조르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학살 뒤 나온 정부 조사단의 공식 보고서조차 “주민들의 삶이 유전으로 심각히 파괴됐다”고 지적하며 시위의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현지말로 ‘평화의 마을’을 뜻하는 이곳의 학살로 모두 80명이 목숨을 잃었고 집 500여채가 잿더미로 변했다.

17년이 지난 2007년, 우무에쳄은 여전한 가난에 시달린다. 원유값은 그새 갑절 이상 올랐지만, 마을 사람들은 전기는커녕 깨끗한 마실 물조차 없다. 1만명이 사는 마을과 주변 지역에는 제대로 된 병원이나 중·고등학교 한 곳도 없다. 일자리가 없어 똑똑한 청년들도 무장 반군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우무에쳄은 세계 8대 산유국인 나이지리아의 모순을 집약해 보여주고 있다. 변호사 페스투스 케야무는 북부 하우자족이 정권을 장악해, 석유가 나는 남부의 이조족들을 자원에서 소외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조족인 그는 “기독교 신자가 대부분인 이조족과 무슬림인 하우자족 등 독립 이전 한 나라로 살아본 적이 없는 250개 부족을 억지로 묶은 게 나이지리아”라고 주장했다.

정치 평론가 요가마 엔주마는 “나이지리아는 자원 부국이어서 민주주의가 더욱 꽃피우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현금화가 쉬운 석유라는 막대한 부 때문에 소수 엘리트들이 국민들에게 권력을 나눠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나이지리아의 경제는 석유에 대한 높은 의존도와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다른 산업의 성장이 억제돼 왔다. 석유가 ‘검은 저주’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 나이지리아 최대 유전지대인 니제르 델타 지역 시민단체의 포스터. 흘러든 기름 때문에 바다가 어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게 오염돼 있다. 우무에쳄/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 라고스의 나이지리아 국립대학에서 학생들이 모여 음악 연습을 하고 있다. 이들은 전설적인 음악가 펠라 쿠티를 음악적 스승으로 생각한다. 라고스/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하지만 2007년 나이지리아에서는 유례없는 실험이 진행 중이다. 지난 7월 출범한 우마루 야라두아 정부가 사상 최초로 이조족 출신 조나산 굿럭을 부통령으로 임명하고, 무장 반군 사령관 도쿠보 아사리를 석방하는 등 니제르 델타 지역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야라두아 대통령은 또 세금·선거제도 정비와 부패 척결을 선포하며 나름의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학살 뒤 10년 넘게 침묵을 지켜온 우무에쳄 주민들도 조금씩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고향에 돌아온 젊은이들과 외국 시민단체들의 연대로 환경·인권운동이 활성화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총기를 들고 분리 독립을 주장하거나, 외국인들을 납치해 돈을 버는 무장단체들의 힘이 더 세지만, 무장단체들의 활동에 미래가 없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우무에쳄 환경인권개발센터(CEHRD)의 간사인 전직 탐사보도 기자 패트릭 나그반톤은 민주화 운동으로 실형을 산 뒤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이 가운데 한명이다. 그의 단체는 △석유로 인한 환경오염과 소형총기 실태조사 △에이즈 퇴치 운동 △유권자 교육운동 등을 벌여왔다. 나그반톤은 “니제르 델타에는 여전히 비폭력보다는 폭력, 이성보다 신을 믿는 이들이 더 많다”며 “하지만 국민들의 자긍심과 역량 향상만이 석유의 저주를 석유의 축복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무에쳄·포트하코트(나이지리아)/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펠라 쿠티의 멈추지 않는 노래

민중 삶 대변한 ‘음악 대통령’
만독재·반자본주의로 대중적 사랑


» 펠라 쿠티
 
“그들은 모두 기자의 친구, 위원장의 친구, 비서의 친구, 장관의 친구, 대통령의 친구라네. 절도에 부패, 물가인상과 혼란, 억압이 그들의 일. 마치 오바산조와 아비올라처럼. 그들은 국제적인 도둑, 도둑이라네.” (펠라 쿠티, ‘인터내셔널 시프 시프’(International Thief Thief))

제국주의와 독재, 부패에 시달려온 나이지리아는 이런 아픔을 예술로 승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왔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윌레 소잉카부터 오고니족 투쟁으로 유명한 시인 켄 사로위와, 탈식민지 문학의 거장인 치누와 아체베는 모두 나이지리아 출신이다.

그러나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예술가는 펠라 쿠티다. ‘아프로비트’의 창시자로도 유명한 펠라 쿠티의 삶은 군부독재에 맞선 나이지리아 민중의 처절한 투쟁과 그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38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펠라는 유학을 떠난 1950년대 후반 영국에서 밴드를 결성했다. 60년대 영국과 나이지리아, 미국을 오가며 활동한 그는 ‘검은팬더당’ 등 흑인 민권운동에 눈을 뜨며 더욱 급진화된다. 사회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의 지지자였던 그의 노래는 국민들을 헐벗게 만드는 독재와 자본주의 비판에 거침이 없었다. 그는 자택 겸 스튜디오를 ‘칼라쿠타 공화국’이라고 선포하며 자유롭게 마약을 하고, 삶을 즐겼다. 그의 콘서트마다 수만명이 몰려들었다.

그의 거침없음과 대중적 영향력은 펠라를 정권의 최대 눈엣가시로 만들었다. 77년 군부를 겨냥한 앨범 <좀비>가 대성공을 거둔 뒤 찾아온 군인들은 그의 어머니를 발코니 밖으로 던져 살해했고, 칼라쿠타 공화국을 불태웠다. 가까스레 살아남은 펠라는 어머니의 관을 라고스 군부대 앞으로 보내며 이들을 비판하는 노래 두 곡을 작곡했다.

펠라는 무엇보다 위대한 음악가로 기억된다. 그는 재즈와 아프리카 전통 비트를 결합한 ‘아프로비트’라는 새 음악 장르를 창시했다. 아프리카 전역에서 노래가 이해되도록, 문법에는 맞지 않지만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피진 영어’를 쓴 펠라의 음악은 수많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이 됐다.

펠라가 97년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뜬 지도 10년이 지났지만, 팬들의 사랑은 여전히 뜨겁다. 사람들은 펠라의 음악이 단순히 음악을 넘어 아프리카 사회 전체의 미래를 내다봤다며 그를 ‘예언자’라고 추앙하고 있다.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비비시>(BBC) 게시판에 한 미국인 팬은 “선구자이며 음악 천재였던 그의 음악은 오늘날도 전세계 모든 흑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는 댓글을 남겨놨다.

라고스/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담론비평(2007. 5. 10) / "손만 대면 황금이 되는 자의 괴로움"
[기획연재 : 김훈을 읽는 열가지 코드] (1) 숭고와 비장

출처:<학술저널 담비>(www.dambee.net) 강성민



   
 
김훈을 읽을 때마다 받는 느낌이 있다. 다들 그랬겠지만 처음은 강렬했다. 하지만 자꾸 읽다보니 형식이 보였고 사유의 문법이 보였다. 그러자 점점 질리게 되었다. 그런데도 스타일에 기대는 자의 한계로 가볍게 치부할 건 아니다 싶었다. 그건 김훈의 개성이기보다는 우리의 감각적 깊이가 닿지 못한 보편적인 것에 대한, 김훈이기 때문에 가능한 말걸기로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숭고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미학용어 숭고(崇高, sublime)와는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고, 대충 말하자면 김훈이 거대한 것에 압도당할 때가 많다는 것, 접근의 한계, 견딤의 한계, 관계맺음의 한계 등 한계가 많다는 것, 사물을 공들여 분석해놓고 그 결과물로부터 시적인 초월을 해버린다는 것, 사람들이 허무주의라고 말하는 그런 태도를 보면서 갖게 된 생각이다.

이렇게 말하니 갑자기 양념간장이 떠오른다. 우리가 깔끔하게 시 한편을 읽거나 대금 연주 같은 걸 듣는다면 조선간장의 깊고 그윽한 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 헌데 김훈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상처가 있고 그 상처를 너무 처연하게 바라봐서 진하디 진하지만 끝 맛에서 조미료를 쳤다는 의혹이 묻어난다. 하지만 그 조미료는 모두 천연재료로 즉석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맛도 좋고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그런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김훈의 숭고는 몰아의 경지는 아니다. 그는 이미 예전에 『풍경과 상처』(문학동네, 1994)에서 “나는 자연을 해독하거나 자연을 자아의 일부로 편입시키지 못한다. 나는 거기에 가담하지 못하고, 늘 그 바깥을 서성거린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훈은 솔직한 편이다. 앞에서 한 말은 “아득한 염전벌판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다시 아득한 갯벌이 펼쳐지고, 바다는 그 갯벌이 끝나는 곳까지 물러가 있다”라고 말할 때 사실임이 증명된다. 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여 연못처럼 가두지 못하고, 저 멀리 수평선까지 밀어낸다. 그 밀어낸 아득한 거리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말이다. 풍경은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그를 매혹시킨다. 그래서 전군가도(全群街道)의 벚꽃을 보며 그는 “여자 생각”에 쩔쩔 맸던 것이리라. 애초에 여자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가짜로 가진다고 한들 뭐가 변하겠는가 하는 자의식일 뿐이다.

김훈이 몰입을 못하거나 기피한다면 차라리 비장함을 떠올려야 옳을까. 비장함과 숭고는 둘 다 숨이 턱턱 막히는 감정이란 점에선 똑같지만, 메카니즘이 다르다. 세상과 자아의 불일치나 대립이 자아의 꺾어짐으로 귀결될 때 비장미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김훈은 꺾어지는가. 비장하게 전사해서 연민을 일으키는가. 그렇진 않다. 오히려 날렵하고 현란하게 말(言)에 올라타고 자아와 세계 사이의 그 넓은 공간을 달린다. 그 팽팽한 긴장이 풀어질 때 아마 문필가 김훈도 죽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니다.

김훈 고유의 숭고를 나는 김훈이 누군가를 위해 써준 추천글에서 확인한 적이 있다. 바로 곽의진이라는 소설가인데, 출판저널 기자시절 이 분이 펴낸 『향 따라 여백 찾아가는 길』의 인터뷰를 하러 진도에 내려간 일이 있다. 말이 인터뷰이지 사실은 진도에 한 이틀 가보고 싶어 일부러 그 책을 골랐다는 게 맞다. 진도가 고향인 작가가 서울로 상경해 소설가로 성공해서 애도 낳고 살다가, 소설과 가정을 통째로 버리고 홀로 귀향해서 살다가 고향의 언어와 눈으로 고향을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한땀 두땀 지어낸 책이다. 그는 인터뷰를 대충 마치고 먼 데 까지 온 손님들을 위해 진도 곳곳을 구경시켜 주고, 자기가 친하게 지내는 카페에 가서 커피도 사주고, 옆동네 잔칫집에 데려가 홍어회와 함께 술도 질펀하게 먹여주었다. 그러더니 차를 몰고 산속 깊숙이 지어놓은 자신의 거처로 우리를 데려간다. 산비탈이 간신히 평지를 이루고 있는 곳에 아슬아슬하게 지어놓은 나무집이었다. 마당 바로 앞이 낭떠러지였다. 그래도 바다는 고요하고 잔잔했으며, 달빛에 교교히 물결지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싶었다. 곽 선생의 말이 김훈은 자기와 친구처럼 지낸다고 한다. 그가 진도에 올 때마다 이곳에서 하룻밤은 머문다고 얘기를 전해준다. 김훈과 사진작가 허용무는 진도 돌김을 간장에 찍어 먹으며 홍주를 많이 마셨다고 했다.

김훈은 추천글에서 “이 글의 저자 곽의진이 고향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고향으로 유배당한 자의 삶과 같다. 곽의진은 고향을 유배지로 만들고 그 유배지에서 다시 고향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 후 그 집 마당을 온통 붉게 칠하는 일몰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나는 이 곳의 풍경을 견딜 수 없다. 그런 장엄한 소멸을 견디어낼 힘이 나에겐 없었다”라고 말이다. 매일매일 세상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전면적인 일몰 앞에서 김훈은 무너졌다. 그러고 보니 그는 너무 자주 장렬하게 전사하는 듯하다. 그러니 비장하기는 비장하다.

최근 펴낸 『남한산성』(학고재, 2007)을 보면 김훈의 숭고성이 전쟁이라는 공간, 그것도 성안에 갇힌 약소국의 예정된 죽음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한 구절을 보자.

“신하는 임금의 몸을 막아서서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 살아남은 백성들이 농장기를 들고 일어서서 아비는 아들을 죽인 적을 베고, 아들은 누이를 간음한 적을 찢어서 마침내 사직을 회복하리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하지만 적들은 이미 임진강을 건넜으므로 그 말의 크기와 높이는 보이지 않았다.”

 
적은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적을 표상하는 무수한 말도 보이지 않는다. 칸트가 보편적 이성을 정초하기 위해 일부러 물자체를 고안했듯이, 김훈 또한 실존의 명료함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듯하다. 남한산성은 어떤 곳인가. 그 산성은 병자호란 때 대피한 조선왕실이 10만 적군에 둘러싸여 있던 돌로 된 수갑이었다. 조선은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밖으로 나가 투항할 수도, 구원을 기다리고 앉아있을 수도 없는 상황, 그러나 칸에게 무릎 꿇는 일이 오로지 살 길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들의 내면을 그려놓은 소설이다. 투항은 곧 사는 길이었지만, 투항의 논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그 마음고통을 다시 겪어내는 것에 김훈의 작가정신이 깃들어 있다.

“청병에 대항하여 싸우자”, “아니다 항복함이 최선이다”라고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판서 최명길이 치열하게 대립하다가 결국 “사흘 뒤에 성을 나가”는 것으로 모든 것이 결판이 난 뒤 최명길은 말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청나라 측이 저항을 고집한 신하 2명의 목을 베어 올리라고 하자 2명의 젊은 당하관이 자청하고 나섰고, 그 이유를 캐묻다가 왕은 쓰러져 운다. 그 때 최명길은 다시 말한다. “군신이 함께 삼전도로 가더라도 전하의 길이 있고, 저 두 사람의 길이 따로 있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전하, 먼 후일에 그 두 길이 합쳐질 것이옵니다.”

김훈은 최명길이 사직을 보호하기 위해 총대를 멨다는 것을 분명히 묘사하고자 한다. 최명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홀로 적진을 뚫고 최초로 교섭하러 갈 수 있었다. 항복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했지만 아무도 그 주장을 하지 않았기에 최명길이 입을 열었다고 보는 것이다.

김훈은 한국일보 기자시절 군사정권의 용비어천가를 썼다. “니가 글을 잘 쓰니 니가 써라”고 위에서 요구했고, “그래 내가 쓴다”라고 김훈은 썼다. 그가 쓴 정권찬양 기사는 데스크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활자화되었다. 그들의 책임까지 몽땅 김훈이 떠안았다. 하지만 총대를 메었다고 그게 무슨 영웅의 행위는 아닌 것. 언론인으로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고, 김훈은 그것이 치욕스럽다고 수시로 말해왔다. 하지만 그런 행위에 대해 사죄하기보다는 그냥 치욕을 끌어안고 살겠다고 또한 말해왔다.

그렇다면 남한산성의 최명길은 누구인가. 백관이 입을 모아 장렬히 싸우자고 머리를 땅에 박으며 합창을 할 때 오직 최명길 혼자 항복을 주장했다. 그렇다고 최명길이 강경일변도였던 예판 김상헌을 덜떨어진 인간으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최명길은 예판과 끈질긴 논리대결을 벌인 뒤에도 “일 리가 있는 말씀이다”라고 혼잣말을 했다. 다만 인간으로서, 왕을 모신 신하로서 그 상황에서 취할 최선의 행동원칙을 정하고 밀어붙였을 따름이다. 김훈은 자기 또한 그런 심정으로 곡필을 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소설 『남한산성』은 이러한 김훈의 자전적 에피소드 위에 특유의 비단결처럼 유장한 문체로 내려앉으면서 더욱 굳게 입을 다무는 듯하다.

이렇게 써놓고 나니 ‘남성적 숭고’라는 느낌도 살짝 든다. 루카치가 소설은 성숙한 남성의 문학양식이라 말했던 것은 소설가가 비극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김훈은 천상병 시인의 정치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추방된 자리에서, 자신을 쫓아내버린 세계와 대칭되는 존재의 삶을 영롱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천상병의 정치의식이다.” 이 대목을 김훈은 혹시 자신의 글쓰기가 생에 대한 과장된 제스처인지, 아니면 필연적인 정치의식의 소산인지를 떠올렸을까, 떠올리지 않았을까.

가령 『칼의 노래』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왕의 칼과 왜구의 칼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한 외로운 장군의 얘기다. 이순신은 교활한 선조의 칼을 받을 수는 없었다. 이순신은 “적의 적으로서 살거나 죽어야지 왕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함을 참을 수 없었”으며 “왕의 칼이 닿을 수 없는 곳에 나의 충이 세워지길 바란다”고 했다. 김훈은 ‘쾌도난담’ 사태로 자질 여론이 일자 시사저널에 사표를 던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내 30년 기자생활을 오욕으로 마무리하자.”자폐적인 태도로 비치기도 하지만, 그에겐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그는 이순신을 복원하면서 “내면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나와 이순신을 동일시했다.” 이미 10년 전부터 김훈은 “벗이여, 나는 3인칭으로 글을 쓸 수가 없네.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것이네”라고 해왔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되는 발언이다. 그렇다면 왕의 칼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김훈을 몰아세웠던 그 여론이 아니었을까. 그는 노회하고도 교활한 여론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칼을 꽂았고, 아무도 해내지 못한 그 일에 대한 나름의 만족감을 흘려왔다.

하지만 나는 김훈이 역사를 호출해서 자신을 변호한 정치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개인의 실존적 고뇌와 고통스러운 결단을 역사에 기대서 표현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니 『칼의 노래』는 역사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우의소설(寓意小說)이다. 이것은 『현의 노래』의 우륵에게로 거의 유사하게 이어졌는데 연대기적으로 정리하자면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사극들은 김훈 내면의 알레고리인 셈이다.

이런 그의 세계관이 늙은 여성으로 확장된 것이 「언니의 폐경」이고 사랑이라는 인간의 감정으로 형상화된 것이 「火葬」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을 통해 김훈은 다시 자기 이야기로 돌아온 셈이 됐지만, 그 이전에 이미 그는 타인들의 삶을 글로서 많이 어루만진 바 있다. 그래서 김훈을 미워할 수가 없다. 저 멀리 『내가 읽은 책과 세상』에 나오는 마성역장 박창하 씨, 토박이농부 정진호 씨, 금속장인 김인태 씨, 간이음식점 주인 심동순 씨 등과 같은 보통사람들, 『원형의 섬 진도』(이레, 2001)에 나오는 사라져가는 농꾼, 춤꾼, 소리꾼, 무인(巫人)들의 삶은 김훈에 의해 하나의 작품으로 빚어진다.

이처럼 그는 자기에게만큼 타인에게도 애정을 베푸는데 거기서 발생하는 장점이자 단점 중의 하나는 손만 대면 작품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데에 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독특하고 깊이 있는 북 리뷰로 필명을 떨치고 있는 ‘로쟈’라는 분은 김훈의 문체가 기본적으로 에세이스트의 것이고 소설가의 문체는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아름다워도 적당히 아름다워야지 너무 아름다우면 소설이 안 된다는 데 있었다. 평범한 것도 김훈이 묘사하면 평범함의 극단이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공감이 가는 지적이라 해두고 싶다.

이 글은 월간 '인물과사상' 6월호에 실릴 예정인 '탈아카데미 저자열전-김훈편' 총 6개 챕터 중 첫번째 챕터를 떼어 내어 확장한 것입니다. 담비에서는 앞으로 김훈을 10가지 코드로 읽어내는 글을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 편집자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