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더티 댄싱’ 떠나는 ‘단관 극장’
서울 ‘드림시네마’ 고별 이벤트
 
 출처:<인터넷한겨레> 2007 10 28  글:김소민/구본준 기자 사진:김경호 기자
 

» 서울 마지막 단관극장 ‘드림시네마’가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 사진은 건물 안팎.
 

안 바뀌는 듯 조금씩 바뀌어가는 서울 서대문 네거리. 그 한 모퉁이에서 ‘화양극장’은 변치않은 풍경을 대표해 왔다. 지금 이름은 드림시네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화양극장으로 부르곤 한다. 그렇게 44년째. 화양극장은 대단한 극장은 결코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 버티다 보니 독특한 지위가 절로 생겼다. 다른 극장들이 헐리고, 멀티플렉스로 바뀌는 바람에 서울 시내 유일의 ‘단관 극장’이 된 것이다.

건물 재개발로 헐릴 극장 1억 들여 스크린·음향시설 교체
간판·푯값도 20년전 그대로…새달 23일부터 무기한 상영


최근 이 극장 김은주(35) 대표에게 뜻밖의 연락이 왔다. 극장 건물이 내년 재개발되기로 해 헐린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 날’이 오자 김 대표는 결심을 했다. 기왕 운명이 정해진 것, 어느날 갑자기 헐리면서 기억속에서 사라지는 극장은 되지 말자고. 그래서 그는 가장 사랑하는 영화로 작별을 고하기로 했다. 1980년대 최고의 청춘영화 〈더티 댄싱〉을 다음달 23일부터 헐리는 그날까지 무기한 상영하기로 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이 아이디어를 위해 그는 ‘미친 짓’을 감행했다. 얼마 뒤 헐릴 극장인데도 〈더티 댄싱〉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의 점프 순간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1억여원을 들여 스크린과 음향시설을 바꿨다. 극장 전체도 80년대로 되돌린다. 간판부터 옛날 그림간판으로 올린다. 화양극장 시절 최고 인기작인 〈영웅본색〉 등의 간판을 그렸던 김영준씨가 맡았다. 표값도 그때 그대로 3500원이다. 1980년대 홍콩영화의 추억이 담뿍 서려 있는 이 곳에서 패트릭 스웨이지와 제니퍼 그레이의 그시절 옛 춤 장면을 끝으로 서울의 극장 단관 시대도 막을 내린다.

〈더티 댄싱〉의 추억

88년 〈더티 댄싱〉이 중앙극장에서 개봉해 50만 관객을 부르던 그 때, 극장 앞에선 종종 실랑이가 벌어졌다. 18살 이상 관람가였던 이 영화를 보려고 10대들은 어색한 화장을 하고 잠입을 시도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은주 대표도 중앙극장에서만 세 번 쫓겨났다. 그는 재개봉관인 신촌 ‘크리스탈 극장’(현 그래드시네마)에서 거사를 벌인다. 화장도 하고 대학생 언니까지 동행해 밤 9시 시간을 골랐다. 치밀한 준비 덕에 거사는 성공했고, 주인공의 점프 장면은 영원히 그의 뇌리에 깊게 남았다. 이후 이 영화는 그에게 끝없이 되풀이해 보는 ‘내 인생의 영화’가 되었다. 학교 영어 선생님을 괴롭혀 가며 삽입곡 가사를 모조리 번역하고 외웠다. 지금도 그의 인터넷 아이디는 모두 ‘더티 댄싱’이다.

‘제 2의 스카라’는 되지 않을래

마지막 영화 〈더티 댄싱〉을 상영하기 위해 김 대표는 극장 설비까지 고쳤다. 자막은 그가 직접 번역했다. 극장 내부도 80년대 느낌으로 꾸민다. 이를 위해 옛날 턴테이블과 〈페임〉 〈백야〉 등의 영화음악 레코드판 50장을 청계천을 뒤져 샀다.

그가 이렇게 열성적으로 화양극장-드림시네마의 고별 무대를 준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05년 그가 1년 동안 운영했던 스카라극장은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헐려버렸다. 문화유산 등록예고를 통보 받은 건물주가 등록 전날 건물을 철거해 버린 것이다. 도둑 철거 직전 건물주의 부탁을 받고 그는 밤 11시에 짐을 챙겨 새벽 5시에 스카라극장을 나왔다. 지금 스카라극장 터는 주차장이다. 김 대표는 “너무 속이 상했다”며 “마지막 남은 단관마저 그렇게 없어지는 걸 볼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몰래 〈더티 댄싱〉을 봤던 사람들도 이번엔 떳떳하게 제대로 갖춘 음향과 화면으로 추억을 되살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극장의 모습도 많이 찍어 기록으로 남겨줬으면 좋겠어요.”

서부지역 청춘들의 아지트 화양극장

64년 1월 1일 개관 당시 화양극장에는 가로 세로 10여미터짜리 무대가 있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하춘화쇼, 송창식쇼도 했다. 당시 서울에 개봉관은 열 곳뿐. 대한극장이 2천여석으로 가장 컸다. 700석 규모의 화양극장은 중간 크기의 재개봉관이었다. 개봉관에서 틀고 난 영화를 배급사가 사서 재개봉관에 나눠줬다. 좋은 영화를 받으려면 영업부장의 수완이 좋아야 했다. 근처 극장이 트는 영화는 다른 극장에선 못 틀었다. 안목도 중요했다. 개봉관에서 망한 영화도 재개봉에서 입소문을 타고 터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청량리에 있던 재개봉관 대왕극장은 장사가 잘되는 극장으로 꼽혀 좋은 영화들을 몰아가곤 했다.

86년, 화양극장은 개봉관으로 ‘승격’했다. 미아리 ‘대지극장’과 영등포 ‘명화극장’도 화양극장과 주인이 같았다. 홍콩영화 전문 수입사인 세진영화사와의 친분 덕분에 이 세 극장이 각각 자기 지역에서 홍콩영화를 독점으로 틀며 인기를 끌었다. 84년 〈예스마담〉, 87년 〈천녀유혼〉과 〈영웅본색〉, 88년 〈영웅본색2〉 등 굵직한 화제작이 세 극장에서 관객과 만났다. 하루 3천명을 넘으면 만원 사례로 치는데 〈영웅본색 2〉는 심야까지 7회가 모두 매진됐다. 기다려도 표를 못산 이들이 항의해 새벽 2시에 한번 더 심야 상영을 했다. 30여만명이 화양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천녀유혼〉 개봉 때는 장궈룽(장국영)과 왕쭈셴(왕조현)의 팬사인회가 열렸는데 영화관을 몇 바퀴 뺑뺑 돌아가며 긴 줄이 늘어섰다.

시사회 전용극장으로 변신-드림시네마 시기

드림시네마 앞에는 아직도 하베스트 전용관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홍콩 영화제작사 골든하베스트와는 상관 없는 것으로 이 영화관의 회원권 이름이다. 90년대 이후 홍콩영화가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이들 세 극장들도 기운다. 90년대 후반부터는 멀티플렉스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명화가 먼저 문을 닫았고 대지는 멀티플렉스로 바뀌었다.

98년, 화양극장은 이름을 드림시네마로 바꾸고 시사회 극장으로 탈바꿈했다. 낮에는 재개봉을 하고 밤에는 시사회를 했다. 시사회는 좌석의 80% 이상이 찼을 정도였다. 〈말아톤〉 〈왕의 남자〉 〈러브 액추얼리〉 시사회 때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이 한참 동안 영화관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내오랜꿈 ------------------------------------------------------------------

극장이란 공간에서의 원체험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기억으로 존재할 테지만, 30대 아니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원체험의 공통분모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재개봉관의 추억 아닐까? 화려한 외관에 빵빵한 음향시스템과는 애시당초 거리가 멀었지만 '야자'를 빼먹고 눈치보며 기어들어가던 추억들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극장이란 공간의 원체험을 이야기하라면 단연코 "코아아트홀"이었다. 94년부터 99년까지 5년 동안 코아아트홀에서 개봉한 영화는 거의 빠짐없이 보았던 것 같다. 연인들의 아니면 여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코아아트홀"의 상징인 붉은색 의자에 혼자 앉아 30대의 전반기를 보냈다.

이런 나에게 화양극장은 그저 버스 타고 지나가면서 보는, 커다랗게 걸려 있던 그림간판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하지만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유일무이한 존재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나에겐 그저 스쳐지나는 극장이었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저 화양극장은 '나의 코아아트홀'이었으리라.

아, 그러고보니 "코아아트홀"도 문을 내린 지 꽤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역시,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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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팬 2021-05-17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2021년에 이 글을 보네요. 저도 재개봉관 마니 다녔는데. 성룡 영화보러 명화극장도 가보고. 좋은 글입니다
 

‘재즈’의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다
세상을 바꾼 노래 ④ 루이 암스트롱의 〈웨스트 엔드 블루스〉(1928년)


박은석/음악평론가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0 25


» 루이 암스트롱의 〈웨스트 엔드 블루스〉(1928년)
1999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사진)은 20세기를 결산하며 “금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을 선정했다. 비슷한 시기 <라이프>도 새 천년을 앞두고 “밀레니엄을 만들어온 100인”의 리스트를 공개했다. 비틀스를 위시한 몇몇 대중음악가의 이름이 명단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서 언급된 인물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루이 암스트롱. 그에 대해 <타임>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파블로) 피카소, (제임스) 조이스와 나란히 언급될 수 있는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했고, <라이프>는 “그의 즉흥연주 능력과 기교적 탁월함이 재즈를 규정했다”고 평했다.

루이 암스트롱(1901~1971)은 재즈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솔로이스트였다. 그 말은 곧, 그가 재즈를 ‘재즈답게’ 만든 최초의 혁신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재즈는 악기와 악곡을 통제하는 냉철한 이성과 그것을 정서적으로 치환해내는 뜨거운 감성 사이의 균형감각을 전제로 하는 고도의 창조행위다. 그 표준을 제시한 인물이 암스트롱이었다. 그래서 <타임>은 “아폴로와 디오니소스가 뉴올리언스 출신 천재의 격렬한 내적 세계에서 만났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웨스트 엔드 블루스〉가 바로 그 전범이다.

스승이었던 킹 올리버의 곡을 연주한, 암스트롱의 1928년 버전 〈웨스트 엔드 블루스〉는 많은 비평가들이 “본격적인 재즈 역사의 시발점”으로 꼽는 작품이다. 카덴차 스타일의 짧은 독주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가 신기원이었다. 얼 하인스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에 이어지는 암스트롱의 마지막 리드 파트는 재즈 솔로의 형식과 구조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명연이었다. 잔잔하게 넘실대는 스윙 리듬, 치밀하게 축조된 솔로 연주, 노래하기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스캣 창법에 이르기까지, 3분을 겨우 넘는 단출한 연주 시간 동안 암스트롱은 재즈의 우주에 창세기적 질서를 부여하는 거대한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웨스트 엔드 블루스〉를 통해 루이 암스트롱이 제시한 음악적 비전의 영향력은 재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가 악기를 통해 인간을 드러낸 방식은 이후 20세기의 대중음악 전체에 영감을 주었다. ‘스미소니언 연구소’의 대중문화 책임자였던 빌리 마틴은 “루이 암스트롱이 20세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했을 정도다. 실제로 암스트롱은 베시 스미스의 〈세인트루이스 블루스〉와 지미 로저스의 〈블루 요들 넘버 나인〉에서, 그리고 빙 크로스비와의 협연작들을 통해 줄곧 블루스와 컨트리와 팝을 아우르는 ‘20세기 대중음악의 허브’로 기능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이 〈웨스트 엔드 블루스〉를 “로큰롤 역사를 만들어온 노래” 가운데 하나로 꼽은 것은 그에 대한 상징적인 헌사나 다름없다.

대중적인 스타일에 치우쳤던 루이 암스트롱의 후기 활동은 오늘날에도 평가가 엇갈린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암스트롱이 견뎌야 했던 혹독한 차별의 세월과 그 속에서 창조해낸 음악적 유산을 외면할 수는 없다. 〈왓 어 원더풀 월드〉의 낙관적 메시지는 지난한 여정을 마친 자의 여유를 통해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 앞에서 대중영합적이라는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세상을 바꾼 거장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내오랜꿈 =============================================================================

사실 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먹물들 대부분이 한번쯤은 읽었다는 <노르웨이의 숲>(왜 한국에선 이 책이 <상실의 시대>로 번역되었어야 했을까?)은 책을 펴들고 질질 끌다가 몇 주만에 읽었던 것 같다. 그 뒤로 <국경의 남쪽>인가를 한번 더 접했는데, 역시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키의 '재즈에세이'에 관한 두 권의 책은 나에게 재즈뮤지션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과 흥미를 불러 일으키게 해준 책이었다. 한 뮤지션에 대해 한 페이지 남짓한 글에 삽화 한 페이지 달랑 있는 책에서 뭐 그리 대단한 지식을 얻었을까만 다른 책들을 읽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만으로도 나에겐 고마운 책들이다.

아래에 인용하는 글은 하루키의 <재즈에세이>에 나와 있는 루이 암스트롱에 관한 내용이다.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곡이 "West End Blues"이다. 다른 곡들은 플레이를 클릭하면 들을 수 있다.)


루이 암스트롱은 열세 살 때 사소한 장난질 때문에 경찰에 붙잡혀, 뉴올리언즈에 있는 '소년원'에 수용되었다. 소년원 생활은 엄격하고 힘들었지만 악기와의 만남이 그의 고독을 구원해 주었다. 그 이후 루이에게 음악이란 마치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것이 되었다.

루이가 소년원 밴드에 들어가 맨 처음 손에 든 악기는 탬버린이었다. 그리고 탬버린은 마침내 드럼으로 바뀌었고 그 다음에는 나팔이 되었다. 기상, 식사, 소등을 알리는 나팔을 부는 소년이 사정이 있어 소년원을 나가게 된 덕분에 루이가 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엉겁결에 나팔부는 방법을 배우고, 대역을 훌륭하게 치러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생활 속에 신기한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이가 매일 아침 나팔을 불면서부터 모두들 즐거운 기분으로 눈을 뜨고, 또 아주 편안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째서일가? 그 까닭은 루이가 부는 나팔 소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고 매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일화 - 스탯 터클이 《자이언츠 오브 재즈》(Giants of Jazz)란 책 속에서 소개한 - 를 아주 좋아한다. 왜냐하면 이 에피소드 하나가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즐거움, 편안함, 자연스러움, 매끄러움 -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놓고 마는 기적적인 '매직 터치'

우리들은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을 들으면서 늘 변함없이 '이 남자는 정말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 느낌은 놀랄만큼 강한 전염성을 갖고 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을 존경하면서도 무대에서 백인 청중을 향하여 이를 드러내고 싱긋싱긋 웃는 그의 연예인 근성을 가차없이 비판하였다. 하지만 나는 루이는 정말로 즐겁고 신이 나서 웃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자기가 이렇게 살아서 음악을 연주하면, 사람들이 귀기울인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더할 나위없이 행복하여, 체면이니 염치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싱긋싱긋 이를 드러내고 웃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루이 암스트롱은 뉴올리언즈 마칭 밴드와 함께 성장한 거의 마지막 뮤지션이었다. 그것은 장지로 향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한, 그리고 장지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마음에 생의 한없는 환희를 복돋우기 위한 실용적인 음악이었다. 루이의 음악의 목적은 오직 하나, 사람들의 귀와 마음에 음악이 가닿는 것이었다.

트럼펫 주자는 자기 악기를 흔히 '챠퍼'(Chopper)라고 한다. 이는 고기를 자르는 부엌칼을 말한다. 1928년에 녹음된 <웨스트 엔드 블루스>(West End Blues)의 단호하고 굵직한 연주에 귀기울여 보라. 그가 얼마나 강인한 챠퍼를 쥐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음악으로 하여 그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도.




Louis Armstrong - West End Blues



Louis Armstrong - What a wonderful world



Ella Fitzgerald & Louis Armstrong - Cheek To Cheek



Ella Fitzgerald & Louis Armstrong - They can't take that away from



Louis Armstrong - Kiss Of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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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야산다 2010-05-1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통영, '연화도'로의 낚시여행


길고 지루했던 여름의 끝자락이 보이던 9월초. 갑자기 폭주한 일을 마무리 하느라 정신도 못 차린 채 비몽사몽 간에 따라 나선 곳이 통영 앞바다의 '연화도'였다. 연속으로 몇 날을 밤샘한 뒤끝이었기에 무리하게 움직일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미리 계획된 선배님 가족과의 약속을 깨기가 싫어서 억지로 시간을 만들었다. 또한 제철 맞은 고등어나 갈치 등을 낚을 꿈에 부풀어 있는 남편의 바램도 외면하기 어려운 탓에, 일행들이 낚시할 동안 나는 만사를 제끼고 잠이나 푸지게 자겠다는 계산으로 연화도행 첫배에 몸을 실었다.
 
미리 예약해 둔 민박집에 짐을 풀자마자 선배님과 남편, W가 주인 할머니의 소개로 배를 빌려 낚시하러 나갔다. 나는 남해안 적조가 막 시작되는 시기여서 잡혀줄 고기가 있을런지 의문스러워하는 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르르 꿈나라로...
 
얼마나 지났을까. 달디 달게 자고 일어났더니, 어느새 쿨러에 가득 생선을 채워가지고 일행들이 의기양양하게 귀가했다. 그동안 철 따라 부푼 꿈을 안고 떠난 몇 차례의 바다낚시 여행 가운데 작년의 매물도 이후 가장 큰 소득이다.
 

▲ 전갱이와 고등어로 가득 채운 쿨러. 능성어 두 마리와 우럭, 놀래미도 있었다. 전갱이는 매물도에서 보다 씨알이 굵었지만 너무 많이 잡아왔다고 타박했다.
 

▲ 회를 치고, 구이를 하고 남은 전갱이와 고등어는 손질해서 얼음을 채워 집에 가지고 간다는 소리에 생선 매니아는 못 얻어먹을까봐 잔소리를 그쳤다. 그리고 민박집 주인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통발로 잡은 우럭을 두어마리 얻는 행운까지....
 

▲ 짜쟌~ 도와준 건 하나 없지만 할아버지께서 주신 우럭까지 포함하여 남자들의 솜씨로 조촐하게 상이 차려졌다. 등 푸른 생선인 전갱이와 고등어는 살이 고소하고 기름지기에 다른 회의 맛을 잡아먹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 갓 잡아올린 싱싱한 것으로 승부하니, 뭔들 안 맛있겠냐만 여기서 굳이 등급을 매기자면 구이는 조금 살이 퍽퍽한 고등어 보다 전갱이가 훨씬 고소하고 연하다.
 
새벽 2시부터 시작한 탓에 하루가 유달리 길었지만 먹자마자 병든 닭처럼 나는 또 잠에 빠졌기에, 일행들이 한밤에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 이튿날, 연화산을 오르며 저어기~ 양식장 주변이 낚시질 장소였다고....
 
여수의 짐을 싸면서 사 온 몇 종류의 생선을 바꿔가며 두고 두고 먹었는데, 그것이 떨어지고 나니 생선이 고팠다. 지난 4년간 여수를 오르내리면서 산지의 값싸고 살아 펄펄 뛰는 신선한 생선을 먹다보니, 마트엘 가도 냉동이 대부분인 생선 코너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장 보면서 아쉬운대로 생물 고등어를 몇 번 들었다 놨다하다가 결국 발길을 돌리게 된다.
 
그랬는데,,,, 연화도에서 낚은 고기 외에도 언니가 항구에서 갓 내린 갈치를 한 상자 사서 나눈 것까지 보태니, 갑자기 생선 풍년을 맞았다.  
 
▲ 밤새워 콘도형 상판낚시도 몇 번인가 했었지만 수확은 늘 횟감 한 접시 나올까 말까 정도로 빈약해서, 낚시보다는 그냥 여행 삼아 졸졸 따라다닌다.
 
 
▲ 고기가 안잡혀도 내가 좋아하는 횟집에서의 푸짐한 뒷풀이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불만은 없다.(written by Lee 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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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뒷계단> 김훈의 소설은 유령인가?

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출처:<한겨레신문> 2007-05-11


문학평론가라는 자가 왜 문학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질 때가 있다. 특히 요즘처럼 한국 소설의 침체가 심각하게 운위되는 때는 더욱 그러하다. 대중적인 차원에서 일본 소설 읽기가 선풍인 것처럼 말해질 때, 그 현상에는 동의하지만, 한국 소설도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출판평론가 한기호씨의 견해를 들어보면, 위기의 원인은 명료해 보인다.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비평의 신뢰성 상실이다. 그간의 한국 소설 비평이 작품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덕담과 주례사로 일관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발언을 신뢰했던 독자들이, 오히려 지금 한국 소설에 대한 불신을 노골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소설의 단편장르에의 집중현상도 위기의 한 요인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겨레>의 최재봉 문학전문기자나 문학평론가 남진우씨 등에 의해 제기된 바 있는데, 한국 문단과 문학상 제도가 단편소설에 편중됨으로써, 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장편소설의 미학적 혁신과 문학성이 취약해졌다는 견해로 요약될 수 있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연초에 몇 차례 페이퍼로 다룬 바 있다). 설득력이 있는 견해인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단편소설이 집중적으로 게재되고 있는 문예지 시장이 침체일로를 겪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소설 독자층의 변화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 견해도 존재한다. 문학평론가 천정환씨는 현재 한국의 소설 독자층은 대단히 협소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문학지망생 그룹과 20~30대의 여성 독자들은 여전히 한국 소설의 유력한 독자층이지만, 1970∼80년대의 소설시장의 활황을 가능하게 했던 30대 이상의 남성 독자들과 소설에서 ‘재미’ 이상의 것을 추구했던 계몽독자 또는 지식인 독자들이 대거 소설 시장에서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인 것이 소설보다는 역사 전기물과 인물평전류가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폭넓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나는 ‘재미’도 중요하고, ‘의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미와 의미가 정교하게 결합된 소설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베스트셀러 외국 소설들이 그간 보여주었던 문학시장의 사정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한때 폭발적 독서붐을 일으켰던 쿤데라와 베르베르의 소설들, 쥐스킨트와 하루키, 그리고 에코의 소설들은 재미와 결합된 소설적 의미의 파급력을 잘 보여주었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나는 유독 소설에 대해서는 깊은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는 성인남성 독자들을 견인할 수 있는 성숙한 고민을 담은 소설도 더 많이 출현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시장에서 독자들의 이 압도적인 성적 불균형이 얼마간이라도 시정되기 위해서는, 소설 읽기에서 이탈한 성인남성 독자들과 계몽독자들에게, 소설을 읽는 일이 단지 ‘시간 때우기’의 수단만이 아니고 성숙한 인간세계에 대한 심원한 고민의 산물일 수 있다는 기대를 충족시키는 소설의 출현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소설가 김훈의 작품들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독서열에 대해 치밀한 비평적 분석이 가해질 필요가 있다. 김훈의 소설들은 그가 써내려간 에세이들을 포함하여, 산다는 일의 치욕과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구조화된 권력의 냉혹한 질서에 대한 정교한 보고서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무력한 개인이 몰락할 것이 분명한 운명 앞에서조차, 그것과 치열하게 싸우고 또 패배를 끝없이 자기화하는 면모를 드라마틱하게 형성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훈 소설에 대한 비평가들의 무관심은 실로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김훈의 소설은 유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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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한 소도(蘇塗)에서 살아남기

복도훈ㆍ문학평론가
출처:<대학신문> 2007년 09월 28일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아즈마 히로키 지음 / 이은미 옮김 / 문학동네 / 8천8백원


소설가 김영하가 한 일간지에 막바지 연재 중인 장편소설『퀴즈쇼』에는 창(窓) 없는 고시원에서 컴퓨터 모니터라는 유일한 창으로 세계와 접속하고 있는 가난하고 고독한 주인공의 형상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라이프니츠의 ‘창 없는 단자’를 연상시키는 인터넷의 퀴즈동호회에서 가상의 아이디와 아바타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작중인물들은 자신들만의 취미공동체에서만큼은 활력과 생기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약속된 모임시간이 지나고 하나 둘씩 채팅방에서 빠져나가 마침내 주인공 한 명만이 남아서 커서만 깜빡이는 텅 빈 채팅방을 공허하게 응시하는 풍경에는 컴퓨터의 전원을 끄자마자 밀어닥치는 남루한 현실세계에서 삶에 대한 전망이라고는 좀처럼 열리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우울한 자화상과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선험적 절망의 생리마저 엿보인다.

IMF체제 이후,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놓은 소수독과점의 경제구조, 양극화 현상, 비정규직의 전면화 등 ‘삶의 자본화’ 또는 ‘삶의 생존전략화’라고 총칭할 수 있는 이 시대 젊음의 고단한 세상살이에 대한 김영하 식의 답변이자 그 자체로 뛰어난 반(反)성장소설인 『퀴즈쇼』의 젊은 주인공에게 삶의 모험이란 그 답의 정오(正誤)에 따라 생존의 당락(當落)마저 결정되는 퀴즈쇼로, 자기형성과정에 필수적인 교양(bildung)은 오직 퀴즈쇼를 위한 무질서하고도 단편적인 정보의 집적으로 코드화된다. 그리고 그동안 잘나고 편협한 기성세대는 한낱 일본문화에 대한 표피적이고도 몰이해적인 영향에 따라 자기폐쇄적인 세계에 틀어박혀 게임을 즐기는 이들 젊은이들을 경멸적인 어조를 담아 ‘오타쿠’라고 부르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1971~ )의『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얻은 최고의 수확은 무엇보다도 오타쿠에 대한 상투화된 이미지에서 멀찌감치 탈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현시점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묘사하는 일본서브컬처의 진화는 한국문화(또는 한국문학)의 한 단면에 대한 성찰적 교사의 역할에 부합하고도 남는다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문학의 장에서 시끄러웠던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의 문학(문화)을 상상하려면 이 비평가의 저작을 읽으면서 별도의 지형도를 그려보는 것도 괜찮겠다.


▲ 그래픽 : 차주영 기자

아즈마 히로키는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아사다 아키라(淺田彰), 오사와 마사치(大澤眞幸) 등의 계보를 잇는 신진 사상가로, 앞의 비평가들이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나 지금은 폐간된『비평공간』에 초기에는 자크 데리다와 프랑스 사상에 대한 글들을 주로 발표했으며, 현재는 일본애니메이션과 국내에도 유행하는 일본소설에 대한 비평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이미 여러 번 방한한 인연으로 한국에서 그는 애니메이션 비평가로 기우뚱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면모만큼이나 이 책에서처럼 오타쿠 문화에 대한 거시적인 분석과 그것을 감싸고 아우르는 저자의 지적 성찰이 주는 매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 책에서 단연코 빛나는 장들은 헤겔주의자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eve)의 ‘역사의 종언’ 이후 인간적 삶과 욕망의 형상을 오타쿠계 서브컬처의 진화 단계에 대응시켜 비평적으로 삼투시키는 부분이다. 코제브가 1950년대에 예언한 역사의 종언이라는 서사는 ‘세계의 미국화’와 ‘일본의 세계화’로 각각 그 단계가 나뉜다. 전자가 인간적 욕망이 다만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고착된 ‘동물화하는 삶’이라면, 후자는 할복자살처럼 무의미한 형식적 게임과 의례의 연속인 ‘일본식 스노비즘’이다. 오타구문화를 생성한 일본의 서브컬처의 초기 역사는 전후(戰後)의 고도 성장기를 통해 미국의 소비지향적 삶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패전에 대한 심리적 방어기제로 고도로 형식화된 에도문화와 같은 전근대적인 상상체계를 수용하는 이중의 모습을 보인다. 일본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거대한 로봇으로 합체되는 에도시대 성(城)이나 다연발 조총으로 무장한 닌자의 이미저리(imagery)는 그러한 예다.

미국화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미국화에 반발하는 오타쿠 문화에는 이처럼 동물화하는 삶과 스노비즘이 어떠한 충돌도 없이 기묘하게 동거하는 모습이 보인다. 따라서 혼란스럽게만 보이는 오타쿠 문화의 역사에서 의외로 특정한 패턴의 변화가 발견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흔히 오타쿠 문화를 큰 이야기의 종말과 작은 이야기들의 난립, 1차 창작(저자)의 소멸과 2차 창작(패러디, 인용)의 상승, 또는 오리지널의 후퇴와 시뮬라크르의 득세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것은 사태를 오도하기에 딱 알맞다. 오히려 오타쿠 문화는 데이터베이스라는 정보의 심층구조와 그로부터 상이하게 조합되는 시뮬라크르라는 표층구조의 무모순적 병존으로, 인터넷 또는 이진수의 기호체계로 성립된 웹, HTML이라는 기성의 논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현실적 삶의 층위에서 심층과 표층의 이러한 병렬은 즉각적으로 필요한 정보와 취향을 소비하는 데이터베이스의 동물화된 삶과 시뮬라크르의 형식화된 유희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스노비즘의 공존이다. 이 세계는 부모 없는 소년소녀들만의 취향공동체이며, 그 너머에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위협의 그림자, 종말의 이미지로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순환적인 문화형식이 궁극적으로 표상하는 사회현실은 어떠한 모습일까.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결국에는 관능적인 계모들과 소녀들로 가득 찬 왕국과 맞닥뜨리는 한 게임서사가 암시하는 것처럼, 오타쿠 문화는 상징적 현실의 결핍과 상관이 있다. 저자가 다른 책에서 한 말을 빌면, 국가나 공동체 등 상징계의 부재와 그것의 결락을 메우려는 보수적 공동체주의의 회귀는 젊은 오타쿠 문화와 엉뚱한 곳에서 접속한다. 현해탄 건너의 이야기지만, 아즈마 히로키의 책은 한국의 문화적 현실에 대한 구부러진 막대의 역할을 할 것이다. 김영하의『퀴즈쇼』에서 그러하듯, 창 없는 단자가 접속하는 데이터베이스는 즉각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영역이 아니라, 몸 둘 곳 없는 헐벗은 젊음이 자신을 맡기는 소도(蘇塗)에 더 가깝기도 하다. 이 포스트모던한 한국형 소도를 발굴하고 답사하는 일이 이 책의 독자에게 남겨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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