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제국’ 꿈꾼 중국의 위대한 30년
문명과 바다 3. 정화(鄭和)의 원정(1405-1433)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출처:<인터넷한겨레> 2007 10 12

 
» 중국 송나라 때 만든 등대.
 
 

최근 중국, 오토만 제국, 무굴 제국 등 아시아의 여러 제국(帝國)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이 나라들이 전적으로 자신의 영토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당한 정도의 해상 팽창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극적인 사례로 드는 것이 중국의 명나라 초기에 있었던 정화의 대원정이다. 무슬림 가문 출신의 환관 정화는 황제의 명령을 받아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인도양 세계를 탐험했는데, 연인원 2만7000명을 통솔하여 18만5000km의 거리를 항해한 이 원정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해상 사업이었다.

명나라 초기 황제의 명을 받은 환관 ‘정화’는 세계 최대 ‘보물선’을 포함한 160여척의 배를 이끌고 7차례에 걸쳐 인도양 대항해에 나선다. 원정 결과 이 지역은 세력재편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430년대초 중국은 해양을 포기하고 대륙으로 몰려감으로써 외부세계에 눈을 감게 되었다

» 위부터 정화의 보선 / 포르투갈 범선 / 아랍 다우선 / 중국 정크선
 
 

정화의 함대는 60여 척의 대형 함선과 100척 정도의 소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함대의 중심을 이루는 기함(旗艦)은 보선(寶船), 서양보선(西洋寶船), 혹은 서양취보선(西洋取寶船)이라고 불리는데, 각지의 지배자에게 전하는 황제의 하사물과 반대로 그들이 황제에게 헌상하는 예물, 곧 ‘보물을 운반하는 배’라는 뜻이다. 가장 큰 보선은 길이 150m, 폭이 60m로서 15세기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규모였을 뿐 아니라, 1800년대 이전 영국 해군의 가장 큰 배보다 3배 이상 큰 배였다. 말하자면 산업혁명 이전 시대에 세계 최대의 선박이었던 것이다.

정화의 원정에 대해서 늘 제기되는 문제는 중국 정부가 도대체 왜 그런 엄청난 규모의 해상 탐사를 시도했는가, 그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시대 중국사 연구의 대가인 조지프 니담은 정화 원정의 목적으로 다음 일곱 가지를 들었다. 첫째, 내전 중에 실종된 전 황제인 건문제의 행방을 확인한다(정화 당시 황제인 영락제는 전 황제를 무력으로 누르고 제위에 올랐는데 이때 전 황제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인도양의 여러 지역 지배자들에게 중국의 위엄을 과시한다. 셋째, 중국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게 만든다. 넷째, 중국의 해상 교역을 장려한다. 다섯째, 이상한 동물을 비롯하여 진기한 대상물을 찾아온다. 여섯째, 해도와 연안 방위 등의 사항을 조사한다. 일곱째, 이 지역 국가들의 세력을 조사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것들로 정화의 원정을 명쾌하게 설명하기는 힘들다. 예컨대 중국과 인도양 세계 사이에는 이미 상품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역 장려가 목적이라고 하기에는 무리이다. 흔히 박물학적 목적을 강조하지만, 과연 도자기를 갖다 주고 얼룩말이나 기린 같은 이국의 짐승을 가져오기 위해 그와 같은 대선단을 이끌고 동아프리카까지 갔었는지 의심스럽다. 정화 원정의 정확한 목적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중국 문명에 대해 호의적인 해석을 하려는 니담과 중국 역사가들은 중국의 해외 팽창의 평화적 성격을 강조하곤 한다. 다음 시대에 있었던 유럽인들의 해외 팽창에서 보이는 극도의 잔인성과 폭력성, 기독교 전도의 배타성과 대조적으로 중국의 팽창은 무력 지배와 수탈이 없었고 상대방 문화를 포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증거가 없지 않다. 정화가 실론의 갈레에 세운 비석이 대표적이다. 정화는 평온한 항해에 감사하는 뜻으로 불사(佛事)를 개최하고 기념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한문, 타밀어, 페르시아어로 새겨져 있는데, 한문 내용은 정화가 항해인들이 기원하던 사원에서 공양을 했다는 사실과 불교 행사에 바친 품목들을 적은 것이고, 타밀어 내용은 중국 황제가 테나바라이 나야나르 신을 찬양하는 것이며, 페르시아어 내용은 알라와 이슬람 성인의 영광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관련된 모든 종교의 신들에게 공평하게 예를 갖추고 있으니, 그야말로 종교적 관용과 실용적 정신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정화의 원정을 통해 아프리카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기린 그림 중국인들은 이 동물의 아프리카 이름과 그 생긴 모양이 전설 속 ‘기린’과 비슷하다고 여겨 기린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런 점들만 가지고 정화 선단이 전적으로 비폭력적·평화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유럽 대신 중국이 해상 지배권을 차지했다면 공자의 덕과 부처의 자비심으로 사해동포가 평화롭게 살았으리라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일이다. 사실 수만 명의 인원과 수백 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인도양을 순항한 국가적 대 모험 사업이 전적으로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만은 없었다. 실제로 2차 원정 때에는 해적선 10척을 격침시켰고, 그 수괴를 잡아서 북경으로 압송하여 참수하였으며, 현지에서는 수천 명을 살해하였다. 3차 원정 당시 실론에서 있었던 무력 갈등 사례는 더 특기할 만하다. 실론의 왕 알라가코나라(Alagakkonara)가 정화의 호위대를 유인해 놓고 금과 비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는 그동안 군대를 보내서 배를 불태워 침몰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정화는 무력 대응을 하여 왕과 조신들을 붙잡아 북경으로 압송해 갔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이들을 잘 대접한 후 고향으로 보내고 다만 중국 함대에 대들었던 왕 대신 친척 중 한 명에게 왕위를 양위하도록 했을 뿐이다. 니담은 특히 이 부분을 강조하여 중국의 평화적인 성격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차라리 다음 번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고 인도양 지역 내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고도의 외교술이지 순진한 평화주의의 결과라고 보기는 힘들다. 2천 명의 군인들이 왕궁으로 쳐들어가서 국왕과 조신들을 나포해 오는 과정을 보면 정화 선단은 분명 강력한 무장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화의 원정은 분명 어떤 실제적인 목적을 위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원정 결과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이 중국의 조공국이 되었고 이때까지 해상 강국이었던 자바 동부의 마자파히트(Majapahit) 제국은 지역 맹주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중국은 그 대신 말라카를 새로운 파트너로 삼았다. 말라카는 중국의 힘을 등에 업고 이 지역의 강자로 급부상하였고, 그 대신 명 해군은 이 나라의 항구 시설을 이용하게 되었다. 특정 국가를 후견하면서 세력관계를 재편함으로써 지역질서를 통제하는 방식은 강대국이 구사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따라서 일부 연구자들이 이 시대 중국을 두고 ‘해양 제국주의’를 거론하는 것도 일리가 없지 않다.

»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그러나 중국의 때 이른 해양 ‘제국주의’는 곧 종말을 맞았다. 북방 내륙 지방에서 이민족들의 위협이 계속되고 농민 봉기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해상 원정을 할 여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중국은 곧 해양 방면을 포기하고 내륙으로 방향을 선회하였으며, 수도도 북경으로 옮겼다. 지금까지 해상 팽창을 주도했던 환관 세력은 유교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삼은 관료들 앞에서 몰락하였다. 그 결과는 사상 유례 없을 정도로 강력한 해금(海禁) 정책으로 나타났다. 보선은 뜯어서 연료로 쓰고, 선원들은 건축 노동자나 베트남 전투의 군인으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정화 원정의 기록마저 없애려고 하였는데, 이는 정화를 아예 중국의 역사에서 추방해 버리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외부 세계에 눈을 감고 고립주의를 고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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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양 ‘자유 뱃길’ 따라 아시아의 부 ‘넘실’
문명과 바다 2. 아시아의 해양세계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0 05

» 1585년 유럽에서 출판된 멘도사의 <중국사>에 나오는 지도.
 

19~20세기 이전에 세계의 ‘무게중심’은 분명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 있었다. 부와 인구 면에서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중국과 인도가 버티고 있는 아시아가 유럽을 압도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지난날의 인구나 생산규모(GDP)에 대한 통계 연구를 온전히 믿을 수야 없지만 세계사의 큰 그림을 파악하는 정도로 만족하고 이를 이용한다면 쓸모가 전혀 없지는 않을 터이다. 19세기 초만 해도 중국과 인도의 지디피(GDP) 총생산을 합치면 전 세계 총생산 가운데 거의 50%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 이후 경제 중심지가 유럽과 미국으로 옮겨가서 2001년 시점에서 세계총생산에서 차지하는 각 대륙의 비율을 보면 중국 12%, 인도 5%여서 두 지역의 합(17%)이 서유럽(20%) 혹은 미국 한 나라의 비중(22%)에도 못 미친다.

19세기 이전 중국과 인도는 전세계 총생산의 50%를 차지했다. 아프리카 동쪽에서 일본에 이르는 뱃길은 아랍·인도·동남아·중국 등 아시아 각지 사람들이 자유롭게 교역하는 ‘만국보편의 세계’로 아시아 부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15세기경 인도양 전체를 집어삼킬 위세로 해상진출에 나섰던 중국이 갑작스레 내륙으로 후퇴한 이유는 무엇일까

» 유럽 선박에 비해 커서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던 중국의 정크선.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현대에 들어와서 서구가 세계의 경제를 확실하게 장악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러한 서구의 경제적 지배가 생각보다 뒷시기의 일로서 19세기 이전에는 아시아가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중세 이래 유럽의 모험가, 상인들이 ‘부가 넘쳐나는’ 인도나 중국을 찾아나선 것은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은 일이었다.

인도양은 오랫동안 유라시아 대륙 해상 교역의 중심 무대였다. 인도와 중국, 동남아시아, 중동 지역, 아프리카가 모두 인도양을 통해 서로 소통하였고, 여기에 더해서 중동 지역의 낙타대상(caravan)을 통해 유럽도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근대 이후 누가 인도양을 차지하느냐가 세계사의 큰 흐름을 결정하는 핵심 사항이었다. 결국 유럽인들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와서 동남아시아 각 지역을 장악하고 인도를 식민지화한 다음 이를 기반으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지배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 세계사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어떠했을까?

사실 바다를 특정 세력이 ‘지배’한다는 것부터가 공격적인 해외 팽창을 시도하던 근대 유럽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일반적인 인식은 육지와는 달리 바다는 통치의 대상이기보다는 누구나 왕래할 수 있는 공로(公路)라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동해안으로부터 일본에 이르는 광활한 아시아의 바다는 바로 그런 인식 그대로 누구나 왕래하며 교역을 수행하는 장소였다. 해적과 같은 방해 요소가 없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아시아의 바다는 자유로운 상업의 무대였다. 상업 활동 중심지인 항구 도시들은 대부분 이방인 상인들의 진입과 활동을 막지 않았다. 후일 유럽 상인들이 비교적 쉽게 아시아의 현지 교역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원래 이 지역에서 이방인 상인들을 환영하는 특성 때문이었다. 인도양의 다우(dhow), 동남아시아의 종(jong), 중국의 정크(junk) 선 등이 이 바다를 누비고 다니면서 직물, 후추, 도자기와 같은 대중 소비품으로부터 진주, 향, 바다제비집 같은 고급 사치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품들을 거래했다. 한 역사가는 이러한 인도양 세계를 두고 ‘만국보편의(ecumenical)’ 세계라고 칭했다.

15세기까지 아시아의 해상 교역의 특징은 서쪽의 홍해부터 동쪽의 일본에까지 교역망이 연이어져서 동서간으로 대단히 긴 활 모양의 해상루트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주요 간선도로 가운데에서도 최장 루트는 아덴(Aden)에서부터 남중국의 광동까지 연결된 항로였다. 이 뱃길을 타고 아랍 상인들이 중국에 대거 들어와서 중국의 츠통(刺桐) 같은 곳에는 수만 명의 외국인이 거주하는 특별지역이 형성되기도 했고, 반대 방향으로 중국 상인들이 ‘서양(西洋, 원래 의미는 중국에서 볼 때 말라카 너머 서쪽으로 가는 해로, 혹은 그 너머의 지역을 가리켰다)’으로 진출해 나갔다. 그 외에도 페르시아 상인, 혹은 인도의 클링(Kling), 체티(Chetti) 같은 여러 상인 집단들이 활발하게 무역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광범위한 영역 내의 요소요소에는 아덴, 캄베이, 캘리컷, 말라카 같은 중요한 연결점들이 발전했다. 상업 활동의 안전성, 은행시설, 시장 정보, 치안 등에서 아주 양호한 환경을 갖추고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런 항구들이 적절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어서 광대한 지역 전체가 활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말라카였다. 작은 어촌으로 시작된 이 도시는 곧 상업 활동을 유치하여 이익을 취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를 위해 정치적 중립을 표방했고, 그 결과 중국이나 시암과 같은 강대국 세력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정책이 성공을 거두어 말라카는 아시아의 거의 모든 상업 세력들이 찾는 국제 교역 중심지가 되었다. 후일 말라카를 방문하고 이곳에 관한 여행기를 쓴 포르투갈인 토메 피레스에 의하면 이 도시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은 “카이로, 메카, 아덴, 아비시니아, 킬와, 말린디, 오르무즈, 터키, 아르메니아, 구자라트, 말라바르, 실론, 벵골, 시암, 파타니, 캄보디아, 참파, 코친차이나, 중국, 티모르, 마두라, 자바, 순다, 몰디브...” 등등 아시아 전 지역 출신 사람들이었다. 아시아 해양 세계는 우리가 통상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이런 식으로 발전해 오던 인도양 세계에 15세기부터 큰 변화가 계속 일어났다. 이전의 초장거리 항해 루트가 권역별로 나뉘어져서, 아라비아해, 벵골만, 남중국해 등이 어느 정도 독립적인 세계가 되었다. 이런 구조적인 변화와 동시에 중국의 해외 활동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잘 알려진 바대로 명나라의 환관 정화(鄭和)는 사상 최대의 선단을 지휘하여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순항하여 인도양 세계 전체에 위세를 떨쳤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중국을 등에 업은 세력이 지역 패권을 잡는 변화가 일어났고, 중동 지역과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중국 황제의 권위를 사방에 떨친다는 목표는 확실하게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대로 갔다면 아시아 해상 세계는 확실하게 중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을 것이다.

 
»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그런데 중국이 힘을 앞세워 인도양 세계에 불쑥 나타난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그렇게 강대한 해상력을 보유했던 중국이 느닷없이 해상 진출을 포기하고 자신의 내륙 지방으로 후퇴하고는 문을 닫아걸었다는 점이다. 마치 불꽃이 맹렬하게 피어났다가 급작스럽게 스러지듯이 중국은 15세기 초에 전력을 다해 아시아 해양세계를 누비고 다니다가 불현듯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 미스터리에 대해서는 다시 살펴볼 일이지만, 우선 지적할 점은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무대를 외부 세력에 내어줌으로써 중국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아시아는 장기적으로 서구에 밀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해상후퇴’와 곧바로 이어진 유럽의 ‘해상팽창’은 세계사의 큰 흐름을 갈라놓은 중요한 분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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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항해, 네트워크 시대를 열다
문명과 바다 1. 바다와 역사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출처:<인터넷한겨레> 2007 09 28

» 인간의 항해, 네트워크 시대를 열다
 
 

따로 떨어져 살아가던 각 대륙 문명은 15세기 들어 바닷길로 연결된다. 전염병과 새로운 동식물·침략과 약탈 같은 ‘야먄’까지도 오갔다. 이렇게 형성된 근대세계는 제국주의로 귀결되었지만 처음부터 초역사적으로 결정돼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자, 바닷길을 떠나보자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 세계는 사실 바다를 통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세기 이전의 세계를 생각해 보자.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 뉴질랜드 등은 아시아나 유럽과는 소통이 끊어진 채 거의 별개의 세계로서 존재하였고, 아프리카는 일부 해안 지역에 외지인이 도착한 외에 내륙 지역은 오랫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였으며, 유럽인들에게 아시아는 실제적인 정보보다는 환상과 유언비어에 의해 막연하게 채색된 아득히 먼 곳이었다.

이렇게 서로 떨어져서 살아가던 각 대륙 문명이 드디어 15세기부터 바닷길을 통해 서로 연결된 것은 세계사의 흐름에서 결정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이때부터 세계 각 지역 사람들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독립적으로 발전해 온 각 지역의 개별 역사는 하나의 세계사의 흐름 속에 녹아들어갔다. 사람들은 이전과는 현저히 다른 세계 속으로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한번 그렇게 되자 더는 뒤로 물러날 수 없는 외길을 따라 앞으로만 나가게 되었다.

혹시 이런 반문을 제기할지 모른다. 세계의 흐름이 어떻든 간에 아마존 지역 내에 깊숙이 틀어박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삶의 방식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실상을 보면 오히려 이런 외지야말로 전지구적인 상호 영향이 생각보다 얼마나 더 큰지 잘 말해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은 아마존 지역의 화전 경작을 두고 근대 이전의 원시적 생활 방식이 살아남은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화전은 오히려 유럽인들과 만나고 난 다음에 발전해 나온 ‘근대적인’ 농경 방식이다. 화전 경작을 하기 위해서는 숲에 불을 질러서 나무들을 재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숲에 불을 지른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나무에 불을 붙이려면 우선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적어도 한 철 동안 방치해서 바짝 마르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돌도끼로 나무를 쓰러뜨리고자 하면 실로 엄청난 노력이 소요된다.

» 대항해 시대의 대표적인 범선. 본문 바탕 그림은 서배스천 캐벗의 세계지도(1544년)로 아마존 지역과 캘리포니아만이 자세히 소개된 최초의 지도로 알려져 있다.
 
 

가장 좋은 연구방법은 실제 실험을 해보는 것이다. 아마존 지역 주민들에게 전통적인 돌도끼를 주고 지름 1.2미터의 나무를 넘어뜨리는 실험을 해 본 결과 115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는 매일 8시간씩 3주의 노동에 해당하는 작업량이다! 그러므로 돌도끼로 1800평의 화전을 일구려면 하루 8시간씩 153일 동안 일해야 한다. 반면 쇠도끼를 사용하면 나무 한 그루를 쓰러뜨리는 데 3시간이면 되고, 1800평 화전을 일구는 데 8일이면 충분하다. 새로운 도구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 가고도 남지 않는가. 유럽인들이 들여온 철제 도구를 접한 인디언들이 그것을 그토록 탐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금을 찾은 만큼 아마존 주민들은 쇠를 찾았던 것이다. 아마존 주민들은 17세기에 유럽산 철제 도끼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화경을 하게 되었고 또 정착 생활을 했다. 그 이전에는 농경보다는 사냥과 채집을 위해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화전 경작이 오래된 생활양식이라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며, 이는 오히려 ‘현대의 침입’의 결과물이었다.

이 예에서 보듯이 15세기 이후 세계는 홀로 고립되어서 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세계 각 지역은 나머지 모든 지역과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한 네트워크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만들어진 구조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세계가 되었다.

이러한 ‘네트워크’와 ‘구조’는 누가 주도하여 만들어낸 것일까?

이 점과 관련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유럽중심주의’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학계에서 하도 많이 이야기해서 이제 진부하다는 느낌을 받지만, 그래도 여전히 깔끔하게 정리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더욱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두 가지 상반된 논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해양 팽창을 주도한 것이 유럽인들이었고, 그 결과 근대는 전체적으로 유럽인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19~20세기에 제국주의 시대가 되어 세계의 나머지 광대한 지역이 서구(즉 유럽과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콜럼버스와 마젤란 같은 인물들의 해외 탐험은 유럽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시작한 첫 출발점이 된다.

둘째, 유럽의 지배는 처음부터 결정적이지는 않았다는 설명이다. 유럽인들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문명권들이 모두 나름대로 팽창을 시도했으며, 사실 18세기 이전에는 유럽인들이 다른 대륙을 ‘지배’할 힘이 전혀 없었다. 처음 아시아에 들어온 유럽인들은 현지 세력을 지배하기는커녕 어떻게든 기존 상업 네트워크에 끼어들어 가서 생존을 확보하기에 급급했다. 19세기 초까지도 중국 일부 지역의 경제는 산업혁명이 한참 진행되던 영국과 유사한 수준이었다는 것이 최근의 학계에서 제기되는 중요한 주장이다.

»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이보다 더 과격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장구한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에서 서구가 지배력을 행사한 것은 19~20세기라는 비교적 단기간의 현상에 불과하며 21세기는 다시 중국과 인도가 세계의 무게중심을 차지하는 ‘정상성’을 되찾아가는 시대라고 말한다.

과연 어느 주장이 옳은 것일까? 진실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듯하다. 근대 세계사의 흐름은 결국은 제국주의라는 무자비한 지배와 약탈의 구조로 귀결되었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초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하여튼 세계의 여러 문명 간 만남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조화로운 세계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던 것일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 봄으로써 답을 구할 일이다.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보기 위해 이제 먼 바닷길을 떠나도록 하자.


‘현경 교수의 이슬람 순례’에 이어 주경철 서울대 교수의 ‘문명과 바다’가 연재됩니다. 주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16세기 유럽 무역사 연구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테이레시아스의 역사> <네덜란드>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역서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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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5월은 천연색 산수화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05 10  

 
»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 소치 허련이 머물렀던 운림산방. 4월 중순 무렵부터 가장 예쁘다
 
소치선생 머물던 운림산방
수양버들 연둣빛 싹 움트고
넓은 보리밭 봄바람에 일렁
한반도 제일 ‘세방 낙조’에
꼬마 섬들이 붉게 탄다


5월은 진도가 가장 예쁠 때. 향동재 넘어가는 굽이굽이 고갯길에는 아지랑이가 어지럽고 들녘에는 노란 무장다리꽃이 환하게 핀다. 드넓게 펼쳐진 보리밭은 봄바람에 일렁이고 운림산방 연못가 수양버들에는 연둣빛 새싹이 돋는다.

진도는 국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서해안과 남해안이 이어지는 물목, 진도대교에 올라서면 다리 밑으로 하루에 네 차례씩 시속 11노트로 흘러내리는 거센 물살을 볼 수 있다. 소용돌이치는 울돌목의 물소리는 마치 커다란 황소 떼의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그만큼 물살이 세다. 1597년 이순신이 군선 12척으로 133척의 왜선을 맞아 싸워 33척을 수장시킨 명량대첩의 현장이다.

» 진도대교를 건너자마자 펼쳐지는 보리밭, 복사뼈를 덮을 만큼 자란 보리의 푸르름이 추상화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진도대교를 지나 진도에 발을 디디는 순간, 눈은 진도가 선사하는 갖가지 색으로 즐겁다. 복사뼈를 덮을 만큼 자란 보리는 푸를 대로 푸르고 배추밭에는 어른 손바닥만한 이파리를 단 배추가 쑥쑥 커가고 있다. 진초록 대파밭과 나란히 놓인 노란 무장다리밭은 한폭의 추상화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진도 여행에서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은 의신면 사천리에 있는 운림산방이다. 운림산방은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머물렀던 곳. 초의선사 밑에서 공제 윤두서의 화첩을 통해 그림을 익히기 시작한 소치는 추사 김정희에게 서화수업을 받았다. 추사는 소치를 두고 ‘압록강 이남에는 따를 자가 없다’고 극찬했다. 시서화로 당대를 휘어잡은 소치였지만, 1856년 스승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운림산방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소치의 화맥은 아들 미산 허형과 손자 남농 허건, 증손자 임전 허문까지 4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 소치 허련이 머물렀던 운림산방.
 

운림산방은 4월 중순 무렵부터가 가장 예쁘다. 수양버들에는 아기손톱만한 싹이 돋고 운림산방 뒤에 자리 잡은 첨찰산도 봄빛을 띠기 시작한다. 여린 봄 햇살을 쬐는 연둣빛 새싹들. 운림산방에서 보낸 소치의 말년은 더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운림산방을 나와 향동재로 간다. 진도 동쪽 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고갯마루에 진도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발아래 금호도, 모도, 두력도, 무저도, 대삼도 등이 바둑알처럼 떠 있다. 해무에 지워졌다가 불쑥 나타나는 수많은 섬들의 모습이 신비롭다. 향동재는 진도 주민들 사이에 일출 조망지로 알려진 곳. 날씨가 맑은 날에는 제주도 한라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 세방낙조
 

향동재 넘어 만나는 의신면 모도리는 ‘신비의 바닷길’로 유명하다.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의 약 2.8㎞가 조수간만의 차이로 1년에 3~4차례 갈라진다. 진도 사람들은 이것을 ‘영등살’이라고 부른다. 1975년 랑디 주한 프랑스 대사가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고 프랑스 신문에 기고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물길이 완전히 갈라지는 때는 봄(4·5월)과 가을(10·11월)에 각 3일 정도씩. 가을에는 새벽에 갈라지기 때문에 제대로 보기 힘들고 봄에 열리는 물길이 가장 좋다.

바닷길이 열리는 모습은 신비 그 자체다. 바다는 모도에서부터 갈라지기 시작하는데 마치 초승달처럼 휘어진 물그림자가 생기면서 서서히 갈라진다. 해변 끝에서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해 바다 한가운데서 길이 마주친다. 폭은 넓은 곳이 1, 좁은 곳은 10m도 채 되지 않는다. 물길이 열리는 시간은 2시간이다. 물길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은 뽕할머니 동상 뒤편 산자락에 있는 전망대. 이곳에서 바다가 갈라지고 합쳐지는 모습이 한눈에 다 보인다.

» 남도석성
 

영등제의 역사는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회동리 사람들은 호랑이를 피해 모도로 피신했다. 하지만 급하게 가느라 뽕할머니가 혼자 남겨졌고 뽕할머니는 가족들이 보고 싶어 용왕에게 기도를 올렸다. 감동한 용왕은 바다를 열어 가족들을 만나게 해주었고 뽕할머니는 ‘너희들을 만났으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후 사람들은 뽕할머니를 기리는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바로 영등제다.

진도 서쪽 바다는 일몰이 아름답다. 특히 지산면 세방리는 중앙기상대가 꼽은 한반도 제일의 낙조 명소. 도로변에 낙조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낙조 전망대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올망졸망 모여있는 다도해의 섬 사이로 붉게 떨어지는 햇덩이를 목격할 수 있다. 양덕도, 주자도, 혈도, 광대도 등 섬들이 낙조 속으로 붉게 타들어가는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 진도 들녘
 

세방리를 빠져 다시 남쪽으로 가면 임회면 남도리. 삼별초의 지도자 배웅손 장군이 여몽연합군에 쫓겨 최후를 마친 남도석성이 있다.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진 남도석성은 둘레 610m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성벽의 높이는 5~6m 정도다. 남도석성은 성내에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성내에는 20여 가구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남도석성에서 만난 한 노인의 말에 따르면 일제 때만 해도 120여 가구가 넘게 살았지만 지금은 대처로 나가고 없다. 게다가 성의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동문과 서문, 남문은 농기계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좁다.

석성을 둘러싼 개울에 놓여있는 2기의 예쁜 다리도 놓치지 말고 볼 것. 동쪽에 있는 것이 단홍교, 서쪽에 있는 것이 쌍홍교다. 우리 옛 ‘무지개 다리’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글·사진 최갑수/여행작가·시인

 

여행 수첩

 
 
» 진도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나들목으로 나와 영산호하굿둑과 영암방조제를 지나면 77번 국도. 우수영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진도대교를 넘으면 진도다. 18번 국도는 진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른 후 동쪽 해안을 타고 일주한다. 남도석성은 18번 국도를 타고 팽목까지 가야 한다. 팽목에서 임회면으로 나와 지산면으로 가는 16번 군도를 타면 세방낙조 전망대. 운림산방은 진도읍에서 쌍계사 방면 표지판을 보고 가면 된다. 진도군청 관광과 (061)540-3219, 운림산방 관리사무소 (061)543-0088, 어른 20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800원.

▶잠잘 곳

진도읍과 진도대교 주변에 여관과 모텔이 많다. 태평모텔(061-542-7000), 프린스모텔 (061-542-2251), 남강모텔(061-544-1414) 등이 있다.

▶먹을 곳

검정쌀과 진도홍주, 돌미역 등이 진도 특산품이다. 진도읍 철마광장에 있는 옥천횟집(061-543-5664)이 이름난 한정식집. 젓갈과 해산물이 많이 나온다.

세방리 낙조전망대 아래에 있는 다도해관광회센터(061-543-7227)는 전망이 좋다. 해산물과 싱싱한 회를 맛볼 수 있다.

▶기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진도향토문화회관(061-540-3543) 대공연장에서 ‘토요민속공연’을 볼 수 있다. 강강술래, 씻김굿, 진도북놀이, 진도만가 등 다양한 소리를 공연한다.

5월 16~17일 양일간 고군면 회동리~의신면 모도리 해변 및 바닷길 일원에서 ‘진도 신비의 바닷길 5월 축제’가 열린다. 사물놀이 공연, 진도 아리랑 배우기 등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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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밑바닥을 차오른 영혼의 노래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0 26
김일주 기자 
 


 
» 〈밥 말리〉
 
〈밥 말리〉스티븐 데이비스 지음·이경하 옮김/여름언덕·1만5000원

당김음이 담뿍 들어가 평화롭게 비틀거리는 듯한 리듬에 진중한 메시지를 실어내는 레게는 고통과 저항의 음악이다. 전설적인 레게 뮤지션 밥 말리의 평전이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의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고통은 창조적이어야만 한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어떤 것을 탄생시켜야만 한다.”

서아프리카에서 자메이카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팔려온 노예들은 투쟁 끝에 1838년 해방을 맞았다. 이들은 세인트앤에 ‘자유의 마을’을 세웠고, 이곳에서 밥은 어린시절을 보냈다. 밥은 1945년 쉰 살에 가까운 영국계 육군 대위와 ‘아름답고 대담한’ 열여덟 흑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밥의 외할아버지는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을 다룰 줄 알았고, 외삼촌은 자메이카 토속 음악인 쿼드릴 밴드에서 바이올린과 기타, 밴조를 연주하는 전문가 수준의 음악가였으며, 외할머니의 노래는 들판을 가로질러 뙤약볕 노동에 지친 이들을 어루만졌다고 하니 자메이카 토속 음악에 흠뻑 젖은 유년기를 보낸 셈이다.

일자리를 찾아 나선 어머니를 따라 열두 살이 되던 해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 서부의 빈민가 트렌치타운에 정착한 그는 그곳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날카로운 눈빛에 세상을 경멸하는 듯한 입술을 지닌 밝은 피부의 비쩍 마른 십대 소년”은 옆집 아이와 어울려 전기선에서 뽑아낸 구리선 기타줄에 통조림 깡통을 덧댄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 연습에 열중했다. 열다섯 살, 다른 자메이카 소년들처럼 학교를 그만둔 밥은 생계를 위해 용접 공장 수습공으로 취직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노래 연습을 했다. 쇳조각이 왼쪽 눈에 튄 사고 뒤에는 공장도 그만두고 노래에 전념했다. 그렇게 노래에 열중하던 소년들은 한둘이 아니었는데, 지은이는 “그들의 통곡과 울부짖음이 지난 세기의 가장 놀랍고 주목할 만한 문화 현상인 라스타파리(자메이카 토속신앙) 운동과 레게를 낳은 (밥 말리의) 반란의 영혼에 불을 지폈다”고 적었다.

레게 음악가 ‘밥 말리’ 인생 궤적 살펴
떠돌이 생활 등 거친 삶이 ‘저항’잉태
음악가 이상의 영향력…시대 상징으로


열여덟이 된 그는 어머니가 일자리를 찾아 미국에 간 사이 여기저기 얹혀 살다가 “거리의 떠돌이, 트렌치타운의 떠돌이, 킹스턴 서부 지역의 떠돌이”가 됐다. 남의 집 주방 귀퉁이에서 잠을 잤고, 다른 쪽 귀퉁이에서 잠을 자던 청년과 함께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 꼬르륵 소리를 잠재우려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의 대표적인 노래 <노 워먼 노 크라이>의 가사에는 ‘모닥불을 피워주는 조지’가 나오는데, 조지는 당시의 가장 친한 친구 가운데 하나였다.

1962년 자메이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그 다음해 밥은 함께 노래하던 친구들과 3인조 보컬 그룹 ‘웨일링 웨일러스’를 결성했다. 그들은 “외국의 일자리에 부모님을 빼앗긴 자메이카의 젊은이들, 사랑의 감정을 표현할 여유조차 가지지 못하는” 그들에게 노래로 말을 건넸다. 영국에서는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가 그들의 새로운 세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 〈밥 말리〉
 
‘플랜테이션 농장주의 아들’ 크리스 블랙웰이 이끄는 아일랜드 레코드와 계약을 맺으면서 밥은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78년에는 극단적으로 대립하던 자메이카 수상과 야당 당수를 무대로 불러내 화해를 주선하는 등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1981년 36세의 나이에 암으로 요절해 전설로 남기까지, 그는 경쾌하고 단순한 리듬에 전세계 흑인들의 단결과 투쟁의 메시지를 담아냈다.

<밥 말리-노래로 태어나 신으로 죽다>는 밥 말리와 그 주변 인물들의 방대한 인터뷰, 자메이카의 현대사와 당시 세계 청년문화 흐름까지 끌어들여 한 인물의 삶을 빈틈없이 구성한다. 다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점은 아쉽다.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사진 여름언덕 제공


내오랜꿈 ---------------------------------------------------------------

중년의 백인 아버지와 10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메이카 트렌치타운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밥 말리는 플래티넘을 기록한 뮤지션 그리고 레게의 최고스타가 되었다. 또한 그의 음악을 더욱 빛나게 했던 평화, 정의, 자유, 형제애를 부르짖은 저항정신으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았다.

밥 말리는 Bunny Livingston, Peter McIntosh(후에 각각 Bunny Wailer, Peter Tosh로 알려짐)와 함께 16세에 가수로서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Drifters, Impressions, Sam Cooke, 컨트리싱어 Jim Reeves와 당시 자메이카의 토속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62년에 그는 Wailing Rudeboys로 알려진 Teenagers와 함께 첫번째 음반인 "Judge Not"을 발표했다. 이후, 팀명으로 Wailers를 채택하고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평범하지 않은 곡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어 자메이카에 서서히 퍼지고 있던 'SKA'비트의 음악을 시도했고, 그래서 "rude boy music"으로 불리기도 했다.

1966년에 밥 말리는 Rita Anderson과 결혼하여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 그러나 자메이카에서 Rastafarian신앙 (자메이카의 흑인들이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신앙화된 일종의 종교로써 현재 아프리카의 많은 이들이 믿고 있기도 하다.)의 급속한 성장이 그로 하여금 다시 자메이카로 돌아오게 하였다.

SKA, rude boy music과 더욱 발전한 형태인 "rock steady"로 그의 곡들은 더욱 갈고 다듬어졌다. 그러나 1973년 이전까지는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가 Island Record에서 그의 첫 음반을 만들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 결과, "Stir It Up"과 Peter Tosh의 "Stop That Train"이 포함된 "Catch a Fire"를 발표하여 전세계인들에게 처음으로 레게를 소개하게 되었다. 이 음반을 통하여 rock팬들에게 춤을 출 수 있는 새로움을 제공함과 동시에 열정을 자각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음악적 메시지를 담았다.

자신의 Rastafarian신앙과 자메이카 공동체에 대한 중독에 자극받음으로써 밥 말리는 레게를 전파하는 대사가 되었고, 전세계인들은 그의 노래에서 그의 결심, 저항 그리고 정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그의 신념을 담아 Wailers의 첫 미국투어에서 젊은 미국인들에게 그의 이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4년 Peter Tosh, Bunny Wailer와 결별하고 I-Threes(그의 아내 Rita가 포함된 여성보컬트리오)를 조직한 후, 발표되자마자 레게의 클래식이 되버린 "No Woman, No Cry"와 "Lively Up Youeself"가 수록된 아주 뛰어난 명반, "Natty Dread"를 발표했다. 1974년 당시 밥 말리 곡 중의 하나인 "I Shot the Sheriff"는 Eric Clapton이 리메이크했으며 그 곡은 팝 single 1위을 차지하기도 했다. 70년대 말, 밥 말리는 "Rastaman Vibrations"와 "Exodus"가 미국시장에서 약진하고 있을 때 또한 "Exodus", "Waiting in Vain", "Jamming" 그리고 "Is This Love"등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트랙을 갖게 되었다.

그는 평소에 축구를 무척 즐겨 했는데 1977년 Marley and Wailers의 유럽투어 때 프랑스 기자들과 함께 축구시합을 했다. 경기중에 그는 발에 부상을 입었고,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그의 몸에 있던 암세포를 발견했다. 암치료를 거부한 밥말리는 건강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1978년에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비롯한 광범위한 지역을 투어 했다. 뉴욕에서의 공연을 기념하기 위하여 실황을 담은 "Babylon by Bus"를 발매했고, 뉴욕공연은 레게 역사상 가장 파워풀한 라이브공연으로 기록되었다. 같은 해 자메이카 Kingston에서 평화를 위한 콘서트와 Boston에서 흑인자유투사를 위한 자선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무리한 투어일정은 그의 건강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었다.

1979년 "Survival"을 통해서 이전과 달리 그의 정치적인 색채를 공격적으로 표현했다. 1980년 다시 투어에 나선 그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조깅하다가 쓰러졌다. 암은 그의 뇌와 폐 그리고 심장에까지 퍼져 있었고 8달 후 그는 사망했다.

Trenchtown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한 사나이는 그렇게 전세계의 음악 대사로서 인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고 떠나갔다.



위의 글은 밥 말리의 팬홈피(http://www.bobmarley.zc.bz)에서 인용한 것이다.

레게(reggae)란 무엇인가? 흔히들 정의되는 것에 따르면 미국 흑인들의 노예노동으로부터 블루스(Blues)가 생겨났고, 카리브해 자메이카 흑인들의 한과 설움에서 레게(Reggae)가 생겨났다고 한다. 곧 레게는 1950~60년대를 거치면서 자메이카에서 일기 시작한 음악 형태로, 원래는 1950년대말 자생적으로 발전한 멘토(mento), 스카(ska) 등의 자메이카 특유의 토속적인 리듬에 미국으로부터 전해진 흑인음악 리듬 앤 블루스가 혼합되어 록스테디(rock steady)로 변형되었고, 여기에 관악기 소리가 첨가되어 개발된 대중음악의 한 장르인 것이다.

그러나 이 레게음악은 단순히 하나의 음악 장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카리브해의 흑인들, 이른바 '아프로 캐러비안'들의 염원을 담고 있는 종교적, 정치적 지향과도 맞닿아 있다. 백인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 수백년간 억압과 착취에 시달려온 한과 설움을 딛고 '백인들의 지배를 벗어나 고향이자 약속의 땅인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과 연결되어 있는 것. 이 절실한 꿈, 그러나 결코 이루지 못한 아프로캐러비안들의 염원을 밥 말리, 지미 클리프 등 자메이카 출신의 레게 가수들이 음악 속에 담아낸 것이 레게 음악의 정치적 지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레게의 탄생과 발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신현준, <WORLD MUSIC 속으로>, PP127~152를 참조).

따라서 어떻게 보면 레게의 특징은 음악성 보다 저항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귀로 듣기에는 경쾌한 춤곡이지만 그 속에는 출발부터 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담고 있는 것. 이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밥 말리는 “음악으로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을 깨우치고 선동하고 미래에 대해 듣게 할 수는 있다"라며 레게가 억눌리고 차별받는 카리브해 흑인들의 저항음악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90년대 초,중반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에도 레게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한때 '국민가수'로 불렸던 김건모의 "핑계"가 뜨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나라에도 선풍적인 레게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 하지만 한국의 레게는 출발부터 저항성이 거세 당한 껍데기뿐인 레게였다 할 수 있다. 룰라, 투투가 레게 뮤지션으로 정리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나마 2000년대에 들어와 바비 킴(Bobby Kim)이라는 걸출한 뮤지션이 정통 레게를 소개하고 있는 정도라고나 할까? (최근에 쿤타&뉴올리언스, 윈디시티, 스토니스컹크 등 실력있는 레게뮤지션이 등장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긴 하다)

어쨌든 레게는 밥 말리를 떠나서는 절대 논의될 수 없는 음악이다. 이 밥 말리에 관한 꽤 괜찮은 책이 번역되어 나온 모양이다. 읽고 싶지만 한겨레신문 소개 기사의 마지막 문구가 나를 주저하게 만든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점은 아쉽다."

아래에 링크시킨 곡은 "No Woman, No Cry". 밥 말리 최고의 노래이면서 레게의 정점이라고 하는 노래다. 이 "No Woman, No Cry"는 여러 버젼이 있는데, <LEGEND> album virsion과 "Live" album virsion이 대표적이다. <LEGEND> album virsion은 원래 1974년에 발표한 오리지널 밸범인 <NATTY Dread>에 수록된 곡으로 심플한 느낌이다. 반면 "Live" Album Virsion은 뭔가 비장한 분위기가 흐르는, 슬로우 리듬의 애절함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모르고 들으면 전혀 다른 노래 같은 느낌을 줄 정도이다.



"No Woman,No Cry" - LIve Virsion


"No Woman,No Cry" - Album Vi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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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g 2007-11-1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최근이라뇨 ㅠ

가장존경하는 스컬형님은

대거즈 시절부터 리얼레게뮤직을 표방한 음악을 계속하셨구요

쿤타형님도 2002년부터 집시의 템버린으로 활동하시면서

꾸준히 레게음악 하셨는걸요

내오랜꿈 2007-11-17 10:55   좋아요 0 | URL
ㅎㅎ...
최근에 이들을 띄워주는 신문기사가 났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