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디자이너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지상현의 Homo designans·7] 좋은 디자인이 나오려면...

지상현/한성대 교수
출처:<프레시안>(www.pressian.com) 2007-07-26



  20여 년 전 필자가 모 기업의 디자이너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 부서 직원들은 복도에서 서로 마주치면 장난으로 군인처럼 경례를 하며 '모방'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런 자조적인 구호를 외친 데는 까닭이 있다.
  
  당시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결재를 받기 위한 디자인 시안(試案)을 손으로 엉성하게 만들었다. 그릴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사진이나 글자는 잘라 풀로 붙이는 식이었다. 이렇게 만든 시안을 결재권자에게 보여주며 제작을 하겠다고 설득을 하곤 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결재권자들은 디자이너가 아니다. 엉성한 시안을 보고 실제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고, 결과를 상상할 수가 없으니 결재를 주저하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 결재권자는 막연하게 "몇 개 더 만들어 보지"하며 결재를 미룬다.
  
  이런 이유로 보름이면 끝날 일을 몇 달씩 질질 끌고 다니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업무가 누적되고 직원들의 사기는 말이 아니게 된다. 해결 방법은 하나였다. 외국의 디자인을 모방한 시안과 외국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함께 들고 가 "이런 식으로 만들면 이런 디자인이 나오게 된다"고 결재권자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제서야 결재권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잘 해봐"하며 결재를 해주곤 했다. 아직 저작권이 별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이라 이런 방식으로 큰 문제없이 업무를 추진할 수가 있었다. '모방'이라는 자조적 구호가 생겨난 사연이다.
  
  요즘은 컴퓨터 그래픽 덕에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재료의 질감 등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 탓에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디자인은 한 기업의 거의 모든 역량이 동원되는 작업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국내 디자인계의 모방문제를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디자인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디자인에 대한 잘못된 신념 하나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디자인은 디자이너 혼자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디자인 행위 자체는 디자이너가 한다. 그러나 디자인 행위 이전에 미래의 시장과 소비자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파악돼야 하고 마켓 리더십을 확보하기 쉬운 맥락이 결정돼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이 정확하게 디자이너에게 전달돼 디자인에 반영돼야 한다. 디자인 행위가 이뤄진 다음에는 여러 개의 디자인 안(案) 가운데 가장 적절한 것을 낙점하는 최종 결재권자의 결정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디자인이 시장에 나온다. 진정한 디자인 프로세스는 이 모든 과정을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어느 하나만 부족해도 성공한 디자인은 나오기 어렵다. 그러므로 디자인은 한 기업의 거의 모든 역량이 동원돼야 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이너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다른 역량이 부족하면 좋은 디자인은 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앞서 말한 결재용 시안 이야기가 바로 그러한 사례다. 결재권자 스스로 디자인적 상상력을 키우거나 중요도에 따라 디자인 결정권을 디자이너에게 일임했어야 했다.
  
  우리 기업의 경영자들은 말로는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스스로는 디자인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경향이 있다. 또 디자인 공부는 경영자뿐만 아니라 일반 직원들도 필요하다. 디자인은 현대 경영의 핵심 요소 중의 하나가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다니던 기업의 연수프로그램은 '사장학(社長學)'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직종, 직급을 불문하고 참가해야 했고 생산에서부터 재무, 인사까지 전 업무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과 기법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자인관련 프로그램은 없었다. 지금까지도 대다수 기업의 연수프로그램에 디자인에 관련된 프로그램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기업 내 모두가 디자인에 대한 지식ㆍ정보 공유해야
  
  경영자나 일반직원의 디자인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아지면 디자인 부서와 관련부서, 예컨대 마케팅, 영업, 기획, 생산부서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진다.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야 영업현장에서 획득한 소비자와 경쟁사에 대한 정보, 마케팅 전략, 경영자의 철학 등을 디자이너를 포함한 전 직원이 공유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디자인이란 색채와 형태 등을 통한 기업과 소비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리고 기업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색채와 형태의 언어로 옮기는 일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다만 이때 기업 내부에서 디자인에 대한 지식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면 이 일은 조금은 더 쉬워질 것이다.
  
  세계적 유통기업 P&G에서는 최고 경영자부터 말단 직원까지 기업 내의 모든 업무에 관해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를 개발해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P&G만의 화폐단위까지 만들어 전 세계의 일일 판매현황을 이 단위로 환산해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정도다. P&G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디자인에 관한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내용까지 최고 경영자와 일선 디자이너가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니 마케팅 전략이 디자인에 정확하게 반영된다. 일류 기업이 그냥 일류가 된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언어를 개발하는 것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니 아무 기업이나 쉽게 나서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연수프로그램 등을 통해 디자인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전 직원이 갖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커뮤니케이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비용 대비 효과가 매우 크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공통의 지식기반이 마련되면 디자인 부서와의 업무협조 방식도 세련되게 된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업무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업에서 디자인 부서는 섬처럼 고립된 경우가 흔히 있다. 비 디자인 부서에서는 "예술하는 사람들과 일하기 힘들다"고 불평하고 디자인 부서에서는 "디자인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답답해한다. 그러나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며 디자인의 특수성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다른 부서에서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업무 특징인 경우가 많다. 앞서 말했듯 주된 원인은 공통의 지식기반이 부족해 생기는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에 있는 것이다.
  
  외형적인 디자인 진흥책이나 지원, 기업의 집중적인 투자가 있어도 이런 속사정이 개선되지 않으면 디자인 발전은 이뤄지기 어렵다. 같은 논리를 기업이 아닌 전 사회로 확대해보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디자인에 대한 안목이 한국의 디자인 환경을 결정한다는 말이 된다.
  
  언젠가 이 시리즈에서 다룬 적이 있는 간판 등 거리의 환경 문제도 이런 까닭에 당장 개선될 수 있는 여지가 그리 크지는 않다. 아무리 관(官)이 나선다고 해도 말이다. 디자인이란 한 사회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고 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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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살문의 유혹, 성혈사(聖穴寺) 그리고 사과따기 체험



아침 8시 30분. 부석사를 나와 아침을 챙겨 먹었는데도 시간은 마냥 여유롭다. 새벽에 출발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몸이 나른한 느낌이다. 그래서 소수서원에 들렀지만 들어가기를 포기하고 주차장에서 2시간 남짓 눈을 붙였더니 심신이 개운해진 느낌이다. 한 시간여 거리의 모처에서 일박한 지인들이 여유를 부리는지 출발이 늦어지는 것 같다. 시간도 죽일 겸 순흥쪽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성혈사를 둘러보기로 했다.

소백산 국망봉 자락에 위치한 성혈사(聖穴寺)는 아스팔트를 벗어나 사과밭 사이로 한참을 올랐는데도 과수원이 끝나는 곳으로부터 30도 경사는 되어보이는 산길을 또다시 올라야 한다.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협소한 길이다 보니 내려오는 차라도 만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선다.
 
딱히 주차장이라고 할 것도 없는 공터에 차를 세우니, 길 오른편 산자락에 모과나무에 노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손이 모자라는 건지 나무 밑에는 모과가 떨어져 뒹굴고 있고,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독경 소리만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술 담그기에 관심이 넘치는 남편이 '따 갈까?'라고 묻기에 '일부러 시주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고 싶냐'고 타박하며 말려야 했다.

경내는 기울어가는 절 상태를 반영하는지 어수선하고 정리가 안 된 느낌이다. 중창과 보수를 위해 서까래 삼십만원에서부터 기둥 삼백만원까지 등급별로 금액을 적어 불사를 모집중인 플랭카드가 요사채로 여겨지는 건물의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불편한 마음은 잠시 접고 경내를 둘러보지만 이렇게 인적이 드물어서야 어디 제대로 모금이 될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2, 3년 전으로 기억되는데, 집 근처의 경기도 박물관에서 '꽃살문 전시회'를 했을 때 성혈사란 이름이 각인되었는지, 전문적으로 답사를 다니는 친구의 입을 통해 각인된 익숙함인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정작 와 보기는 처음이다. 부석사와 마찬가지로 의상대사의 창건물인 아담한 '나한전'. 단청이 칠해지지 않아 더 맛이 깊은 꽃문살을 눈으로 어루만지며 망중한을 즐기기에 알맞은 곳이다. 인근의 부석사와 소수서원이 더없이 매력적인 곳이긴 하지만 관광지화된 지 오래라 번잡하고 사람으로 넘쳐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혹여라도 그 곳에서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시달림을 겪었다면 이 곳에 들려 마음을 위로받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 나한전에는 석조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친근한 인상의 16 나한이 모셔져 있는데, 찾아 온 예를 드리고 급하게 찍은 것이라 사진이 많이 흔들렸다. 빛바랜 단청의 천정 조각에서도 수백년 세월이 느껴짐.


▲ 정면3칸 중, 소담스럽게 피어오른 모란꽃의 오른쪽 문살과 빗꽃살이 규칙적으로 새겨진 왼쪽 문살.


▲ 좌,우 문살의 단정함에 자연 돋보이는 가운데 문살. 양문에는 연꽃과 연잎 사이에 물고기, 개구리, 게, 동자 등이 아로새겨져 그야말로 여름날 한가로운 물속 세상이다.


▲ 나오는 길에, 호수가 예뻐서 차를 세우고 잠시 단풍놀이를 즐기다가 제대로 엎어져 피를 보았다. 구경을 끝내고 차 쪽으로 몸을 돌리려다 뒤의 벤취를 미처 못 본 탓이다.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예시라도 했는지 몇 일 전, 웬지 밴드 한 상자를 차에 비치하고 싶더라니.. 끙~

▲ 전원주택에 관심이 많은 고로, 아름다운 호수를 낀 언덕에 전원주택인지 별장인지는 모르지만 '한스빌'이라는 문패를 달고 작은 촌락을 형성하고 있기에, 잠시 올라가서 구경을.

11시 가까이 되어서야 남편의 대학 써클 후배들로 구성된 지인들 일행이 부석사쪽으로 출발했다는 연락이 왔다. 이들과는 지난 여름의 일본여행 동반을 비롯하여 계절에 한번 이상은 주기적으로 모임 형성이 잘 되는 편인데 '가을에 부석사 사과 따러 가자'는 제안은 이미 지난 여름휴가 중에 나온 말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소백산 산행을 포함하여 겸사겸사 오게 되었는데, 다른 팀들은 아직은 애들이 어린 까닭에 우리 부부처럼 마음 놓고 산행을 즐기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경북 구미가 주소지였을 당시, 중앙고속도로는 풍기까지만 개통했고 제천과 풍기 구간의 죽령터널은 아직 뚫리기 전이었다. 춘천여행을 다녀오며, 굽이굽이 죽령고개를 넘은 직후에 풍기의 도로변에서 구입한 사과의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조직은 단단하고 신맛과 단맛의 환상적인 조합은 물론, 쪽을 갈랐을 때 노란 꿀선이 선명하게 빛을 발했다. 이후 명절날 선물 들어온 최상품이라는 사과조차 그때 먹었던 풍기사과 만큼 맛나지는 않았다. 강수량은 적고, 풍부한 일조량 그리고 해발고도가 높아 온도차가 큰 천혜의 자연조건이 맛 좋은 사과를 재배 가능케 하는 것이란다.

대구나 경북이 사과의 최대 주산지로 알려졌지만 최근엔 지구 온난화 현상의 영향을 받아 강원도 최전방에서도 재배된다는 소식이 들리는 상황이다. 그런 까닭에 남편과 나는 그때의 사과 맛이 날까, 궁금해 하며 사과따기 체험이 예약된 '뜬바우골' 농장으로 달려갔다.

친환경 농법으로 사과를 재배하는 '뜬바우골 작목반'에서 나온 인솔자의 안내에 따라, 사과를 먹어가면서 재배법이나 종류, 맛있는 사과 따는 요령 등의 강의를 듣고, 사과 따기에 돌입했다. 나눠 준 봉지에 사과를 따고, 무게 만큼 가격이(\5,000/1kg) 책정되는데, 환경을 살리는 자연 농법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그닥 비싼 가격은 아닐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일인당 오천원을 받고 적당량 만큼 따가는 식의 체험이었는데, 채산이 안 맞았는지 올해부터는 방법이 바뀌었단다. 사과를 따면서 과수원 내에서 먹는 것은 무제한 공짜라서, 힘 닿는 한 양껏 먹을 욕심을 부려보지만 대부분 2개 정도만 먹으면 배가 불러온다. 나중에 지갑이 대책없이 가벼워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아이들에게 막무가내로 따지 말라는 약간의 교육이 필요할 것 같다.


▲ 두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강의 듣는 일행들.


▲ 초록잎 사이로 주먹만한 사과가 올망졸망 달려, 붉은 빛을 발하며 유혹한다.


▲ 쓱쓱 문질러서 두쪽 가르기가 힘겨울 만큼 단단한 조직을 자랑하는데, 변함없는 천연 꿀맛에 감동.


▲ '맛있다'를 연발하며, 사과에서 입을 떼지 않는 아이들.


▲ 우리 부부는 적당히 무게를 가늠하며 땄지만 아이들이 있는 집은 대중없이 따다보니 가격이 만만찮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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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11-16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글이구나! 나중에 산 사과가 가격은 쌌지만 맛은 역시 뜬바우골 사과와 비교가 안되더군요. 일단 맛난 사과부터 열심히 먹어치우고 있는 중입니다. 근데 넘어져 다친데는 다 나았나요? 제법 많이 긁혔던데 말입니다.
소백산 산행은 그립다. 국망봉 하니까 갑자기 추억이 확 떠오르는데... 한 10년전에 소백산꼭대기에서 국망봉을 한 100번쯤은 외쳤던 기억이... 왜냐고요? 뭐 얘기하자면 기니까 다음에 재밌는 얘기 하나도 없어지면 하죠뭐... ^^

내오랜꿈 2007-11-16 19:40   좋아요 0 | URL
확실히 맛의 차이가 존재하더만!
내가 술 안 먹고 나가서 봤더라면, 보기만 봐도 다른 걸 알 수 있겠더만...

 

흑인노예의 읊조림, 위대한 유산으로
[세상을 바꾼 노래] ⑥ 로버트 존슨의 ‘크로스 로드 블루스’(1936년)

박은석/음악평론가
출처:인터넷한겨레 2007 11 08


» 로버트 존슨의 ‘크로스 로드 블루스’(1936년)
로버트 존슨(1911~1938)은 대중음악사상 가장 큰 미스터리라고 할 인물이다. ‘델타 블루스(혹은 컨트리 블루스)의 제왕’으로 불리는 명성과 달리 그 생애에 관해 알려진 내용은 극히 제한적이고, 그나마도 오싹한 전설과 끔찍한 구설 사이에 놓인 것이 대부분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대가로 불가사의한 음악적 재능을 얻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다. 따지고 보면 영혼매매 전설의 원조는 로버트 존슨이 아니다. 코엔 형제가 영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2000년)에서도 다루었다시피, 토미 존슨이라는 동시대 블루스 뮤지션의 자술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존슨이 그 주술적 신화의 음침한 거래당사자로 끊임없이 소환되는 이유는 베일에 싸인 짧은 생애와 시대를 앞서간 음악 때문이다.

악마를 소재로 한 곡들을 즐겨 불렀다는 점도 로버트 존슨의 전설을 부추긴 요인이다.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는 그것이, 블루스의 탄생 배경이기도 한, 미국현대사의 어두운 면과 맞닿아 있는 메타포라고 분석했다. 존슨의 노래들이 “여타 미국 예술가들은 표현한 전례가 거의 없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크로스 로드 블루스>는 바로 그 어두운 감정의 체화라는 측면에서 로버트 존슨을 상징하는 곡이다.

<크로스 로드 블루스>는 1936년 11월23일부터 사흘간 진행된 로버트 존슨 최초의 녹음 세션에서 탄생했다. 어스름 무렵의 교차로에서 악마와 조우한다는 이 곡의 내용은 부두교의 무속신앙과 기독교의 ‘파우스트’적 모티프가 혼재한 것이다. 블루스가 흑백인종 간의 문화적 교차로에서 탄생한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존슨이 들려준 격렬한 팔세토 보컬과 (문자 그대로) 신들린 기타연주는 대중음악사의 혁명적 전환점이기도 했다. 델타 블루스가 시카고 블루스로 이양하는 양상-어쿠스틱에서 일렉트릭으로, 남부 시골에서 북부 도시로 확장된 과정이 그 속에 생생한 흔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비참한 흑인노예의 읊조림에서 위대한 음악가의 유물로 승화한, 블루스의 음악사적 의미가 교차한 지점이었다.

로버트 존슨은 평생 단 두 번의 녹음세션을 통해 불과 29곡을 남겼을 뿐이다. 게다가 그 곡들 전부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사후 30년도 지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머디 워터스와 키스 리처즈(롤링 스톤즈), 에릭 클랩튼과 지미 페이지(레드 제플린)가 이구동성으로 그를 “가장 위대한 블루스 연주자”라 칭송했다. 실제로 머디 워터스는 로버트 존슨을 카피하는 것으로 경력을 시작했고, 에릭 클랩튼은 온전히 존슨의 곡들로만 채워진 헌정앨범 <미 앤 미스터 존슨>(2004)을 발표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히트했던 영화 <스트리츠 오브 파이어>의 감독 월터 힐은 젊은 기타 연주자가 로버트 존슨의 미발표곡을 찾아 나선다는 줄거리의 <크로스로즈>(1986)를 연출한 바 있다. 악마에게 영혼을 걸고 연주대결을 펼치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예술을 가장한 사기와 음악을 변명한 상품이 판치는 물질적 세상에 대한 우화처럼 보인다. 로버트 존슨이 남긴 또 다른 유산이다.





내오랜꿈 --------------------------------------------------------------



» [랄프 마치오의 십자로(Crossroads)] 포스터
"줄리어드? 그게 학교야? 블루스의 학교는 델타뿐이야!"
"미시시피에 한 번도 안 가봤다고? 그러고도 블루스맨이라고 자칭할 수 있나?"
"자네가 아무리 까불어봤자 로버트 존슨 엉덩이의 여드름도 안돼. 그 차이가 뭔지 아나? 체험이야"

영화에서 윌리 브라운이 내뱉는 대사 가운데 일부분이다.

음악 감독, 라이 쿠더(Ry Cooder). 사운드 트랙의 기타 연주, 라이 쿠더. 기타리스트 역의 조연을 맡은 인물, 스티브 바이(Steve Vai). 영화의 모티브는 로버트 존슨의 미발표곡. 음악에 관한 한 이보다 더 화려한 라인업이 있을까? 바로 <크로스로즈(Crossroads)>(우리 말 비디오 출시 제목은 <랄프 마치오의 십자로>)다. 여기서 '크로스로즈'는 물론 로버트 존슨의 고전 <크로스로즈(CROSSROADS)>를 가르킨다. 한국 비디오 출시 제목에 랄프마치오가 붙은 것은 역시 당시 청춘스타였던 그의 상업성에 기댄 것이리라.

영화는 로버트 존슨이 어느 황량한 십자로에 서있는 모습으로 시작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블루스 음악이 흐른다. 로버트 존슨의 모습에서 시작해서 그의 노래와 그의 동료였던 윌리 브라운(Willie Brown)이 중요한 역할(영화에서의 배역은 존 세네카)을 맡고 있는 진짜 블루스 영화인 것. 따라서 <크로스로즈>는 2004년에 기획돠고 만들어진 마틴 스코시즈(외 7인) 감독의 블루스 시리즈보다 거의 20년이나 앞선 진정한 블루스 영화인 셈이다.

영화 속 대사들은 1930년대 블루스 음악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무슨 의미로 존재했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또한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잉위 맘스틴(yngwie malmsteen)과 쌍벽을 이루는 기교파 헤비메틀 기타리스트라 할 수 있는 스티브 바이(Steve Vai)의 모습까지도 만날 수 있다(위의 동영상에서 붉은 기타를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스티브 바이다).

랄프 마치오는 줄리어드에서 클래식 기타를 전공하고 있으며 학교 최고의 실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어디까지나 블루스 음악의 대가가 되는 것. 그런 그가 블루스 책들을 뒤지다 로버트 존슨의 미발표곡이 하나 있다는 정보를 얻고는 이걸 찾아내 연주하여 유명해질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로버트 존슨의 음악 동료였던 윌리 브라운이 어느 요양원에 살아있다는 걸 알고 찾아가지만, 윌리는 클래식을 전공하고 미시시피엔 가본 적도 없는 중산층 가정의 이 백인 소년을 어처구니 없이 여긴다. 그러나 제법 실력을 보이는 소년의 끈질긴 구애에, 결국 윌리는 "나를 이곳에서 탈출시켜 미시시피까지 데려다준다면 존슨의 미발표곡을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한다.

이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블루스가 영화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상업영화로서도 충분히 아기자기한 재미를 가지고 있지만, 특히 블루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시종일관 윌리가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설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유명하게 만든 건 역시 클라이맥스 부분의 '기타 배틀' 장면. 초창기 블루스 뮤지션들이 맥주 한 병이나 위스키 한 병에 목숨 걸고 실력을 겨뤘을 법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상대방을 응시하는 스티브 바이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로버트 존슨을 떠나서라도 블루스 팬이라면 한번쯤은 꼭 봐야 할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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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그리움, 부석사


사람의 발길이란 '익숙함'을 찾게 마련이다. 늘상 새로운 일상을 꿈꾸며 여행을 떠나곤 하지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발길은 어느새 좋았던 내 기억 속의 어느 곳으로 닿아 있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익숙한 그리움'이라 표현한다. 나에게 '익숙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절집 세 곳을 꼽으라면 화순 운주사, 청도 운문사 그리고 영주 부석사다.

그 세 곳에 대한 그리움의 기억은 물론 제각각일 터인데 결혼한 이후 아내와 함께 한 기억이 묻어 있는 곳이 바로 부석사다. 수원과 구미에 따로 떨어져 살며 주말부부로 지낸 2년 동안 틈만 나면 돌아다닌 곳이 경북 북부 일대다. 아마도 구미에서 당일로 다녀올 수 있으면서 여러 가지 볼거리를 간직한 곳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당연히 안동, 영주 일대가 선택된 것이리라.

나의 그리움과는 별도로 아내는 또 그 나름대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라 우리 부부에게 부석사는 여건만 허락한다면 언제든 달려가고 싶은 곳이다. 지난 여름 휴가를 함께 보낸 모임에서 다음에는 부석사에 사과 따러 가서 보자며 작별인사를 대신했는데, 벌써 그게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다가선다.

그러나 가을의 주말이 항상 여유롭지만은 않다. 집안 행사, 결혼식, 다른 모임 등으로 언제나 분주한 게 봄, 가을의 주말 풍경이다. 지난 주말 역시 아내의 조카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진주에서도 오는데 서울 근처에 살면서 안 가볼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아내와 의논한 끝에 토요일 일정은 포기하고 일요일 새벽에 떠나서 부석사를 둘러보고 월요일에 소백산 산행을 하기로 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이미 길을 떠난 부산팀들이 "병산서원"이라며 전화를 해서 지금이라도 출발하라고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아, 이 무렵의 "병산서원"은 또 얼마나 익숙하고 아름다운 그리움인가!

일요일, 새벽 4시. 집에서 나와 풍기IC까지 두 시간이 채 안 걸린다. 영주 외곽을 지나 소백산 자락 가운데 하나인 봉황산 중턱에 자리한 부석사로 찾아가는 길 양옆으로 사과밭이 즐비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빨간 사과에서 나는 달콤한 향기가 코 끝에 스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차에서 내리니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파고든다.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아마도 조금 늦어버린 방문인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옷깃을 곧추세우고 오르기 시작한 부석사 흙길.






매표소에서 일주문까지 500여 미터의 비탈길. 노란 은행잎이 깔려 걷기조차 아깝다. 무엇이든 가장 아름다울 때 찾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가지는 바램일 터이지만 잎을 떨구고 가지만 앙상한 은행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걷는 흙길. 늘씬한 당간지주가 있어 아쉬울 것도 없고 차근차근 음미하며 걷다 보면 지루할 틈도 없다.






경사를 최대한 이용하여 한꺼번에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 건물의 가람 배치. 천왕문에서부터 경내가 시작되는데, 사천왕이 지키고 있으니 이 안쪽이 도솔천인 셈. 범종루 아래에 서니 안양루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높낮이에 차별을 둔 석축도 음미하여야 할 볼거리다.




▲ 범종각에는 법고와 목어만 있고, 정작 범종은 서편 다른 건물에 있다.



▲ 범종각의 한 단 위에 방랑시인 김삿갓이 백발이 된 뒤에야 올랐다는 안양루가 살짝 비껴 있다. 제멋대로 생긴 자연석을 맞추고 쌓아서 조화로움을 보여주는 석축.



▲ 안양루 계단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비껴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한 답사객. 요리조리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를 자랑하는 석등의 미학에 폭 빠졌나 보다.




그렇게 오르고 올라 가파른 길 맨 위에 자리한 '무량수전' 앞에 섰다. 한 때는 현존하는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외워야 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외운 중학교 시절을 보냈는데, 고등학교 들어가니 봉정사 극락전이 더 오래되었다고 가르친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만 난 어느 건물이 더 오래된 것인가, 무슨 사건이 일어난 연도는 언제인가, 연대 순으로 잘못 나열된 것은 무엇인가, 같은 식으로 시험을 치르며 역사를 배운 세대다..-.-...

해뜨기 전, 무량수전 앞마당에 서서 지금까지 올라온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맛도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다. 시야가 탁 트인 삼층석탑에서 아래를 보면 겹겹이 펼쳐진 유연한 소백산 자락과 마주한 무량수전과 안양루를 양날개로 굽어볼 수 있다. 으레, 이곳에서는 소백산 너머로 떨어지는 일몰이 예쁘다는 이야기만 들었기에 이 시간의 부석사는 처음이다. 역시 같은 곳이라도 계절과 시간에 따라 나름의 멋이 존재한다.

아내가 동부도밭에 가자고 하여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섰지만, 한 단 아래로 잘못 왔는지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다. 다시 올라 가기도 그렇고, 새벽부터 움직인 대가인지 배도 고파오기에 서둘러 내려오고 말았다. 방바닥이 따끈하게 데워진 '종점식당'에서 새벽 한기에 으슬으슬해진 몸을 녹이며, 아침으로 청국장이 딸려나오는 산채정식을 시켜 먹는 것으로 부석사를 향한 '익숙한 그리움'을 접었다.



▲ 무량수전 앞에서, 범종각을 중심으로 바라 본 부속 건물들.


▲ 싸리비로 마당을 쓰는 한 불제자가 일으키는 흙먼지를 피해, 창건주인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애틋한 전설이 담긴 부석 앞에 섰는데, 이 뜬돌은 부석사(浮石寺)란 이름의 근간이기도 하다.


▲ 무량수전에서 조사당 가는 길목에 화사석을 잃은 석등과 삼층석탑이 있다.




▲ 시야가 탁 트인 삼층석탑에서 바라보는 풍광들. 겹겹이 펼쳐진 유연한 소백산 자락을 뒷배경으로 무량수전과 안양루를 양날개로 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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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11-14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 - 사람도 별로 없이 한적한 저 부석사 풍경! 저게 보고싶었다고요. 근데 사과 따고 나서 간 부석사는 돗대기 시장이더이다. ㅠ.ㅠ 이번 여행 글 올리려고 들어와 보니 형 글이 올라있네요. 제대로 못 본 부석사를 여기 사진으로 대신해서 아쉬움을 달랩니다. ^^

내오랜꿈 2007-11-15 10:27   좋아요 0 | URL
우리도 내려오면서 그런 말 했다. 조금만 지나면 사람들로 북적거릴 텐데, 정말 새벽에 오길 잘했다고...
 

초국적 자본 견제할 힘 저항적 ‘민족의식’에 있다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④ -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①

출처:인터넷한겨레 2007 11 09


» 초국적 자본 견제할 힘 저항적 ‘민족의식’에 있다
 
1. 유효하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원어인 영어 단어는 내셔널리즘(nationlism) 하나이다. 근대 민족국가가 형성되면서 이른바 민족 혹은 국가 관념이 태동되었다는 게 일반적 통념이다. 우리도 조선시대만 해도 ‘소중화’ 의식이 뚜렷했을 뿐이다. 중국인들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주자학을 섬긴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근대 이후 민족주의는 우리 사회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이념이었다. 일제하 독립운동이나 분단 이후 통일운동까지 이 모든 투쟁의 배후에는 ‘민족’이 있었다. 친일파와 반공 지배세력도 민족이라는 외피로 국가주의적 성향을 가렸다.

독재에 맞선 저항적 민족주의의 주요 명분은 분단모순 극복을 위한 통일운동이었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현재 상황은 많이 변했다. 국가와 기업가의 통일에 대한 열정이 기층 민중의 그것보다 더 못하다고 하기 어렵게 되었다. 급증하는 다문화 가족도 민족 관념의 정당성에 대해 되묻게 한다. 탈민족 담론이 거세지는 배경이다. 탈민족론자들은 민족이 함의하는 배타성은 민주적 개방성과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사회의 다른 갈등이 정당하게 자리잡지 못하도록 한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진보적 민족주의의 유효성을 지지하는 안병욱 교수는 이 글에서 공동체적 유대관계가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면서, 세계화 시대 민족주의적 가치관만이 무소불위 초국적 자본의 폭력을 견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각각 비판적 시각과 제3의 시각을 밝힐 계획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민족주의라는 용어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고 그 쓰임새도 다양하다. 따라서 민족주의 논쟁은 매번 접점을 찾지 못하고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말을 한국 사회처럼 친숙하게 사용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한국 사회를 논할 때 민족문제는 빠지지 않는다. 현실을 논하건, 역사를 설명하건 민족 내지 민족주의 문제는 중요하게 거론된다. 역사적으로 어느 때건 주어진 나름의 과제가 있었다. 이 과제들은 한반도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외면하기 어려운 공통적인 사항이었기 때문에 민족공동체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대처해 왔다. 곧 민족주의적인 인식인 것이다.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요인은 오랜 기간 역사공동체를 공유해 왔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천여 년 이상 하나의 국가로 운영되면서 불교·유교·기독교 등 다양한 문화를 공통적으로 향유해 왔다. 그 과정에서 원초적 공동체 의식을 공유해 온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유럽 근대사를 배경으로 형성된 민족주의 개념을 원론적으로 적용하여 한국 사회에서의 민족주의 문제를 비판하려는 것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닌 것이다.

한국 사회는 20세기 들어 식민주의의 지배를 겪으면서 민중의 자율적인 의지는 탄압받고 식민주의에 편승한 소수만이 민족과 분리된 채로 특권을 향유하였다. 이를 두고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제 치하에서 성장의 과실이 조선인에게도 돌아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많은 경우 종군 위안부들을 고통과 희생으로 내몬 원초적 요인들은 가정 내 가부장적 권력의 구타와 학대였다. 위안부의 비극은 민족이라는 잣대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성적, 사회적 차별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배의 후과는 극복되지 않았으며 외세는 기득권층을 숙주로 하여 여전히 중요한 변수로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방 이후 남북분단에 이어 남한 사회는 반공주의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다. 반공주의는 이념에 의한 분열과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공동체적인 유대관계를 파괴하고 민주적 발전을 차단하였다. 남북 분단은 외부 요인이 크게 작용했지만 안으로 지배층과 민중 사이의 민족주의적 인식차와 무관하지 않았다. 남북이 각기 외세를 내세워 분단을 초래하였고 급기야 전쟁으로까지 비화된 분열과 갈등을 초래한 것은 여전히 민족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민족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는 한국 사회의 진보와 개혁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으며 불온한 사상으로 탄압을 받았다. 또 반공주의 아래서 한반도는 일종의 게토가 되어 그 안에서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었다. 지난 20세기 후반 내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민주화운동은 이러한 게토를 파괴하고 밖으로 세계사와 소통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1960년 4월항쟁을 비롯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진 민주화 운동은 민중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적 유대 관계와 민족주의 이념에 기반하였다.

‘민족공동체의식’ 역사적 공유한 한국
서구 ‘민족주의’ 곧장 적용해선 안돼
식민·분단·독재에 맞선 ‘저항적 담론’


20세기 한국 사회가 겪어야 했던 분단과 전쟁, 독재 등 파괴적 혼란은 그 가장 큰 원인이 외세와의 관련 속에 있었다. 오늘날 통일문제와 함께 민주화·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야기된 내적 갈등 문제들을 안고 있고 또 밖으로 세계화 조류에 조응하면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과제가 중첩되어 있다. 이런 역사를 성찰적으로 검토한 과정에서 민족주의는 자연히 가장 친화적이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족주의가 여전히 한국사회의 지배적 담론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 민족주의 담론에 비판적 문제 제기가 행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른바 탈민족을 내세우고 혹은 ‘민족주의는 반역’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주장에 분명 유용하고 긍정적인 내용이 많다. 그동안 민족주의 담론에 다소 관념적이고 맹목적인 표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탈민족주의를 위해 지적되고 있는 것들은 논쟁을 위해 억지로 제기된 측면이 강하다. 일부에서는 지배권력을 추수하면서 전개한 국수적이거나 파시즘적 사례를 끌어다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성에 붙여 함께 매도하고 있다. 곧 “민족주의 패러다임은 한국의 지적 삶을 너무나 깊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여타의 가능한 역사 해석 방식을 모두 어지럽히고 포섭하며 또는 실제로 말살시켰다”(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교수)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탈민족·탈근대 주장에는 구체적인 대안을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한국 사회운동의 구심점을 해체함으로써 허무와 공허함을 조장하려는 듯이 보인다. 민족주의는 현대 한국사회를 인식하기 위한 그리고 역사에 참여하기 위한 의식화의 매개체인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시장만능을 내세우며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하의 초국적 자본은 세계화 추세 속에서 지구촌 곳곳으로 무소불위의 팽창과 전일적 지배를 관철하고 있다. 국제 경쟁력이라는 명분아래 자본과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고려하고 있다. 한국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차별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자본은 국경을 거침없이 넘나들지만 농민·노동자들은 떠돌이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한 절박한 처지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예전 같은 국가와 국경의 장벽은 이제 더는 장애가 되지 않아 보인다.

신자유주의 대안은 민중 주체적 행동
노동 계급 성장 미흡한 현실에서
민족적 유대 ·가치관은 유효한 ‘무기’


하지만 한국사회의 오랜 공동체적 유대관계와 민족의식, 관습, 언어 등이 초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행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민족주의라는 이름에 포괄되고 있는 것들이다. 이와 더불어 한국의 강한 공동체적 유대가 오랜 동안의 민주화 운동 경험과 결합됨으로써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칸쿤·시애틀·홍콩 등의 반세계화 시위의 중심에 한국 민중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이런 맥락과 닿아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 중심의 사회이고 이를 위해서는 민중의 주체적인 행동과 능동적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탈민족주의는 불균등한 세계체제에 대한 대응논리와는 거리가 있으며 지배권력에 의한 통제와 순응을 지지한다. 자본에 의해 모든 인간이 줄을 서야 할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은 인간의 자율적 의지에 기반한 유대에서 찾아야 한다. 흔히 계급의식과 성정체성, 젠더문제를 거론 하지만 현재 한국사회는 계급·젠더 문제 이전에 국가 간의 이해 대립이 초래한 모순에 의해 더 좌우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사회의 가장 유용한 유대관계는 민족의식이며 이런 맥락을 설명해 주는 것이 민족주의이다.

진보는 상대적으로 약자 계급의 집합으로 추동된다. 이러한 진보운동을 담지할 노동계급의 성장이 한국 사회에서는 만족스럽게 진행되지 못했다. 한국에서 노동 부분의 지체는 분단과 전쟁에 따른 반공주의적 억압에 기인한다. 역설적이게도 노동계급이 제 위상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는 여전히 민족이 중심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 안병욱 국사학과 교수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줄곧 지배층의 인식을 대변하기 위해서 민족논리에 시비를 걸었다. 민중과 진보세력에게 혼란과 갈등을 야기한다고 탓하면서 진보적인 논의를 억제하였다. 무소불위 초국적 자본의 폭력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현재 민족주의적 가치관이 아니고서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실상 민족주의는 반역이라는 주장은 민족주의에 대한 대안 없는 반역에 지나지 않는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1948년생으로 조선후기 사회변동 문제와 민중운동·민주화운동에 관한 연구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동안 과거청산과 학술 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최근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를 엮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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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대한 비판은 뒤이어 연재될 글에서 박노자 교수가 하겠지만, 아래 두 문장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줄곧 지배층의 인식을 대변하기 위해서 민족논리에 시비를 걸었다. 민중과 진보세력에게 혼란과 갈등을 야기한다고 탓하면서 진보적인 논의를 억제하였다."

--->'일부에서 지배층의 인식을 대변하기 위해서 민족논리에 시비를 걸었다'? 그 반대 아닌가? 말은 진보적인 운동이라고 하면서 결국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일조한 것이 민족논리를 내세운 집단이 한 일 아닌가?

"역설적이게도 노동계급이 제 위상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는 여전히 민족이 중심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너무 단선적인 사고방식이다. 아직도 노동계급 자본계급이라는 양자대결 구도로 진보운동을 파악하고 계신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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