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민주 국가, 사회 국가를 향하여
[좌파, 국가를 디자인하다] 사회 국가③ - ‘밥 먹여 주는’ 민주주의
 
출처:<레디앙> 2007년 12월 27일 진보정치연구소 redian@redian.org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가 이번에 펴낸 책, 『사회 국가: 한국사회 재설계도』(후마니타스)는 한국 사회가 재설계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면서 ‘사회 국가’를 그 열쇠말로 제시한다.

<레디앙>은 진보정치연구소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책 내용 가운데 서론과 결론 부분을 발췌해 몇 차례에 걸쳐 나눠서 싣는다. 이 책의 서문은 조승수 연구소 소장이 썼으며 내용은 장석준, 성은미, 조진한, 이상호, 정택상, 강병익 연구위원들이 맡아서 썼다. <편집자 주>

3절 ‘강한’ 민주 국가, 사회 국가를 향하여

비정규직 증가, 청년 실업, 영세 자영업 부도, 농업 붕괴, 부동산 대란 …. ‘양극화’라는 말 뒤에 자리한 지금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이다. 이들 문제에 대한 개별적인 대응 방안도 날이면 날마다 신문 지상을 장식한다. 하지만 응급 처방이나 개별 대응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본 국가, 시장 국가가 버티고 있는 한.

위에서 우리는 ‘약한’ 민주화의 틈을 비집고 나온 것이 자본 국가라고 진단했다. 그럼 자본 국가에 맞서려면 어떤 원칙에서 출발해야 하겠는가? ‘약한’ 민주 국가, 즉 민주주의의 허약성을 극복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는 말했다, “민주주의가 문제를 갖고 있다면 그에 대한 처방은 바로 더 큰 민주주의”라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난 20년 간의 민주화의 맹점과 한계에 도전하는 ‘강한’ 민주주의다.

‘약한’ 민주주의는 대통령 직선제를 민주화와 등치시킨다. 보수 정당끼리 정권을 교체하고 명문고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걸 바라보는 게 민주화라고 한다. 그러나 ‘강한’ 민주주의는 노동 현장과 거리의 사람들이 직접 권력을 쥐지 않는 한 민주화는 완성된 게 아니라고 본다. 모든 결정 과정에서 대중이 주도권을 쥐어야만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고 못 받는다.

‘약한’ 민주주의는 청와대나 국회 같은 좁은 의미의 정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다. 재벌 회장실이나 공장 담벼락 앞에서는 발걸음을 멈춘다. 그 때문에 자본 국가가 들어설 여지를 항상 열어둔다. 하지만 ‘강한’ 민주주의는 가진 자의 권력에 손을 대지 않고서 그게 무슨 민주주의냐고 단언한다. 독재자라면 총칼의 독재자뿐만 아니라 황금의 독재자도 용납할 수 없다.

‘약한’ 민주주의는 자본 주도의 세계화에 속수무책이고 되레 그것에 편승한다. 자본의 이권 확대에 함께 하는 반면 대중의 살림살이를 챙기는 데는 무능하다. 그래서 ‘약한’ 민주주의 아래서 서민들의 입에서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는 볼멘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허나 ‘강한’ 민주주의는 무엇보다도 민중의 생존권 더 나아가 행복할 권리를 가장 우선한다. ‘강한’ 민주주의는 다름 아니라 ‘밥 먹여 주는’ 민주주의다.

‘강한’ 민주 국가의 다른 이름, 사회 국가

이제부터 우리는 ‘제2의 민주화’의 대장정에 나서야 한다. ‘강한’ 민주 국가를 세워야 한다. 1980년 광주의 아픔을 딛고 7년 만에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을 물리치며 민주화를 시작했던 것처럼, 사회 양극화의 폐허 위에서 우리 세대의 모든 열망과 역량을 모아 ‘강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쌓아야 한다.

‘약한’ 민주 국가가 자본 국가, 시장 국가를 불러들인 것과는 달리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강한’ 민주 국가는 자본 국가, 시장 국가에 정면으로 맞선다. 자본 국가와는 정반대되는 그 지향을 우리는 ‘사회 국가’라 부른다. 즉, ‘강한’ 민주 국가의 또 다른 이름은 ‘사회 국가’다.

   
▲ ‘사회주의 국가’를 외치는 베네수엘라 인민들 (사진=로이터/뉴시스)
 
사회 국가는 민중의 생존권 및 행복추구권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권리들을 소유권이나 경영권 같은 다른 권리보다 위에 둔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에 따라 모든 정치 경제 사회 체제를 구축한다.

자본 국가에서 소수의 자본 소유자들이 대다수 다른 시민보다 더 많은 권력을 누리는 것과는 달리 사회 국가에서는 사회 전체의 정의의 실현을 위해 자본 소유자들의 권한을 제어한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의 기득권 자체를 해체해 사회 전체의 자산으로 되돌린다.

‘사회 국가’는 본래 독일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2차 대전 이후 제정된 독일 각 주의 헌법은 ‘사회 국가’나 그 비슷한 말을 즐겨 사용한다. 바이에른 주 헌법 제3조는 바이에른 주가 ‘사회 국가(Sozial staat)’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헌법 제43조는 ‘사회적 인민국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독일 전체의 헌법인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의 제20조 1항은 “독일연방공화국은 민주적, 사회적 연방국가”라고 규정한다.

이웃 나라 프랑스도 헌법에 비슷한 개념을 담고 있다. 1946년 제정된 프랑스 제4공화국 헌법은 제1조에 ‘사회적 공화국’이라는 표현을 담았다. 이 제1조의 정신은 현재의 제5공화국 헌법에도 계승되었다.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1조의 첫 머리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는 분리 불가능한 세속적, 민주적, 사회적인 공화국이다.”

독일, 프랑스, 베네수엘라의 ‘사회 국가’

21세기 벽두부터 급진적 사회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서도 ‘사회 국가’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1999년 새로 제정된 베네수엘라 헌법 제2조는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법과 정의에 기초한 민주적 사회 국가(a Democratic and Social State)로서 생명, 자유, 정의, 평등, 연대, 민주주의, 사회적 책임 그리고 인권과 윤리, 정치적 다원주의의 보편적 실현을 법질서와 집행의 최고 가치로 삼는다.”

독일식의 ‘사회 국가’ 개념은 우리가 흔히 쓰는 ‘복지 국가’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즉, 복지 국가의 법률적, 법학적 표현이 사회 국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사례를 보면, 이 이름을 굳이 서유럽 복지 국가에만 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을 주창하는 이 나라도 신자유주의의 첨병이 돼 있는 다른 나라들과 구별하는 명칭으로 ‘사회 국가’를 채택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제시하는 ‘사회 국가’도 이러한 폭넓은 스펙트럼을 전제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일정하게 조절하면서 사회권을 보장하려고 노력하는 북유럽 복지 국가들도 사회 국가의 한 유형이라 생각하며,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사회 체제를 구축해서 사회권을 실현하려는 베네수엘라 같은 사례도 사회 국가의 또 다른 유형이라고 본다.

어쨌든 이 두 유형 모두 자본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 한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사회 전체를 자본의 독재 아래 헌납하려는 신자유주의의 공세와는 적대 관계에 있다.

국내에서는 조희연(성공회대 교수, 사회학)이 우리와 같은 시각에서 ‘사회 국가’의 비전을 제시한다. 조희연은 박정희의 국가자본주의 축적 모델과 신자유주의 양극화 축적 모델을 동시에 극복할 급진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대안적 사회국가 모델’이라고 이름 붙인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대안적 사회국가 모델을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나는 박정희와 싸웠던 민주세력들이 주도하는 민주정부가 비록 정치적으로는 박정희와 대척점에 서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박정희 모델의 변형된 재생산정부라고 판단한다.

이를 넘어서지 않는 한 진정으로 박정희 시대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포스트 박정희 시대를 대안을 가지고 열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양극화 축적 모델은 단순히 서민이나 하층대중만이 아니라 중간층 중산층마저 몰락시키는 총체적인 양극화 모델로 작동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사회국가는 바로 이러한 총체적 재구성의 모델이 될 수밖에 없다.”
- 조희연, 「진보논쟁에 이어, '진보적 희망의 언어'를 위하여」, 진보 싱크탱크 연합토론회 발제문, 2007. 3. 22.

우리가 제시하는 ‘사회 국가’도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우리는 이 책 전체를 통해 현재의 자본 국가, 시장 국가에 맞서는 대안의 밑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을 포괄하는 이름이 곧 ‘사회 국가’다.

사회 국가에는 역사적으로 여러 유형이 존재한다. 서유럽형 복지 국가도 있고, 다양한 사회주의적 시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서로 다른 유형들을 꿰뚫는 공통의 특성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다양한 사회적 권리들의 최대한의 실현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자본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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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유일당화가 눈앞에 닥쳐오고 있다"
[제2창당운동을 시작하자③] 미래의 전망과 관련된 문제들

장석준 / 진보정치연구소
출처 : <레디앙> 2007-12-28


C. 미래의 전망과 관련된 문제들

이것으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평가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평가 항목이 남아 있다. 그것은 미래의 전망 속에서 민주노동당의 가능성을 묻고 혹은 더 심각한 위기의 요소들을 따지는 일이다.

⑪ 민주노동당 내 세력 구도의 전망: 정파연합당의 질서를 뛰어넘는 종북유일당화가 눈앞에 닥쳐오고 있다

지난 4년간 당내 선거 때마다 형식적 다수의 지위를 유지해온 종북파가 이제는 당의 모든 질서를 자신들의 뜻에 맞게 뜯어고치는 작업에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다. 그 동안은 반대파가 소수 세력으로 당 안에 공존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면, 이제는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는 종북유일당을 향해 나아가려 하는 것이다.

   
▲ 북한 애국열사릉을 찾은 민주노동당 방북단 (사진=판갈이)
 
비례대표 후보 선출 방식을 바꾸자는 당원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명과 강령 개정 일정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이것은 전 세계 진보정당 역사상 최초로, 창당 정신에 이질적인 분자들이 입당 전술을 통해 당 전체를 장악하고 당의 성격까지 바꾸는 데 성공한 사례가 될 것이다.

더욱 고약한 진실은 종북유일당화가 가능하게 된 밑바탕에는 바로 위에서 지적한 민주노동당의 근본 문제와 위기 양상들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이 위의 문제들로 말미암아 더욱더 추락하고 침체할수록 종북유일당화의 실현 가능성은 더욱더 높아진다.

그것은 종북유일당화를 위해서 당의 위기를 오히려 반기는 세력이 당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노동당의 미래와 관련해서 이것보다 더 처참한 진실이 어디에 있는가!

만약 민주노동당이 정말로 종북유일당화한다면 한국 사회에는 진보정치세력이 사실상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진보’정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스탈린주의와 민족지상주의라는 과거의 악령에 사로잡힌 당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진보 세력은 그 정당 안에서 인질로 남거나 아니면 광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될 것이다.

⑫ 신보수주의 정권의 등장과 관련한 전망

이제 새로운 보수주의 정권이 들어선다. 보수 정권 아래서 초기에는 진보 세력이 상당한 시련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차기 정권의 시장지상주의 공세 속에서 상당 기간을 방어 투쟁으로 보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어떠한 진보정당이 필요한가? 지금의 민주노동당은 과연 그 태세를 갖추고 있는가?

한편 집권 후반기부터는 대중의 좌우 양극화 상황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신자유주의 양극화 상황에서 지구 위의 그 어떠한 우파 정권도 위기의 봉합 이상의 통치 성과를 남긴 적이 없다.

차기 정권 역시 이 냉정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차기 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오로지 ‘고도’ 성장에 대한 환상적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차기 정권에 대한 지지 철회 역시 극적인 양상을 띠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럼 대중이 다시 좌우 양극화하는 상황에서 그 왼쪽 지형을 누가 대변할 것인가? 87년 이후 20여 년 동안 줄곧 그랬던 것처럼 자유주의 세력이 다시 차지할 것인가? 아니면 진보 세력이 드디어 그 공간을 차지할 것인가? 후자의 전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어떠한 진보정당이 필요한가? 다시 묻건대, 지금의 민주노동당으로 그게 가능할 것인가?

지금의 민주노동당보다는 훨씬 더 분명한 프로그램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대중조직의 지원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자체의 이념적 응집성으로 시련의 세월을 견뎌내야 한다. 또한 지금의 민주노동당보다 훨씬 더 기민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정치적 균열과 격변의 시기가 도래하면 기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⑬ 18대 국회와 관련한 전망

대선을 앞두고 진보대연합에 대해 갖가지 공상적인 전망들이 난무했었다. 하지만 대선 전보다는 오히려 대선과 총선 사이의 시기가 어지러운 합종 연횡의 절정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야말로 진정한 진보대연합의 기회다.

진보대연합의 첫 번째 과제는 진보정당이 대변할 진보 세력의 스펙트럼을 재설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또 다른 과제는 진보의 새로운 스펙트럼 안에서 그 중심을 새롭게 잡는 것이다.

그래서 18대 국회에서는 진보정당이, 지금보다 그 중심은 더욱 명확하면서 그 스펙트럼은 더욱 넓은 진보 블록을 대변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2008년부터 2012년 사이 한국 사회의 요청에 부응할 진보정치세력으로서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과연 지금의 민주노동당이라는 울타리는 마땅히 우리의 진지여야 할 영역을 정확하게 구획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과감히 그 낡은 울타리를 걷어내야 한다.

⑭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세와 관련한 전망

최근 많은 경제학자들이 2010년을 전후해서 세계 경제의 침체와 재조정 국면이 닥칠 것이라 전망한다. 그 진원지는 미국일 수도 있고 중국일 수도 있으며, 혹은 이 두 나라의 경제적 상호 관계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아무튼 1997년 동아시아, 러시아, 중남미 경제 위기 이후 다시 한 번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전환점이 닥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중국 경제와 더욱더 긴밀히 결박된 한국 경제로서는 과거보다 더욱 격렬하게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격랑에 휩쓸릴 것이다.

체제의 위기 혹은 재조정의 시기는 곧 체제에 대한 근본적 대안이 대중적 호소력을 갖는 시기이기도 하다. 1997년 외환 위기 때처럼 이번에도 한국의 진보 세력이 시장지상주의의 이념 공세 앞에 허망하게 무너질 수는 없다. 그때와는 달리 오히려 진보 세력이 대항 헤게모니의 지반을 확보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지금의 민주노동당은 과연 그러한 기대와 요구에 합당한가? 반자본주의-탈자본주의의 기조를 분명히 하고 있는가? 신자유주의 양극화의 최대 희생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가? 근본적 대안을 가장 구체적인 쟁점들과 연결시킬 능력을 구비하고 있는가?

‘88만원 세대’가 거리로 나설 때 그들의 깃발이 될 태세는 되어 있는가? 좁은 일국적 시야에 머물지 않고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변화를 조망할 수 있는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지금부터 하루빨리 이러한 능력들을 갖춰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의 형성과 축적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척결해야 한다.

⑮ 북한의 변화와 관련한 전망

   
▲ 북한 외화상점. 북한의 변화는 기정사실이다.
 
북한의 변화는 이제 기정사실이다. 다만 변화의 방향만이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변화의 방향도 다음 두 가지 갈림길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하나는 북한 체제의 안정성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에 문호를 개방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 체제 자체가 격변에 휩쓸리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남한의 진보 세력으로서는 북한 체제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게 첫 번째 과제이자 제 1 전제 조건이다. 북한이 점점 더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그에 맞는 비판이 필요하고, 북한 체제가 위기를 맞으면 또 그에 맞는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

두 경우 모두 다 전제 조건은 남한의 진보파가 북한 체제의 과거에 결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결박 아래에서는 북한의 변화 양상에 맞추어 남한 진보파의 올바른 입장을 제시할 수 없다.

따라서 진보정당운동은 북한 국가 사회주의에 대해 독립적이면서 비판적인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한다. 하물며 종북주의에 발목을 잡혀서는 어떠한 희망적 전망도 있을 수 없다. 자칫하면 남한 진보운동 전체의 생존까지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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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창당이 원칙적이고 현실적"
[인터뷰-홍세화] "자주파 장악 민주노동당 진보정당 아니다"

이광호
출처 : <레디앙> 2007-12-28


예상치 못한 대선 참패를 겪은 민주노동당이 지금 ‘예상대로’ 크나큰 내부 진통을 겪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국민들에게 낙제 점수를 받았으며, 지지자들로부터도 외면을 받았다. 외면과 지지 철회, 이를 통해 유권자들이 민주노동당을 향해 던진 메시지는 무엇일까.

민주노동당 평당원 홍세화는 현재의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역사적 결별의 필요성도 얘기한다. 그는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데 따르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해 민주노동당의 참기 어려운 내부 모순도 분명한 ‘현실’이라고 말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좁디좁은 편집국의 구석 자리에 책상을 놓고 앉아 있었던 홍세화 기획위원은 이제 한겨레 건물 8층에 작지만 독립된 방을 하나 가졌다. 그의 글쓰기 산실에서 대선 이후 당의 진로 등에 대해 그의 말을 들어봤다.

* * *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번 대선 결과에 대한 평가와 분석이 있었다. 어떻게 보고 있나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다 아는 것처럼 이번 대선 결과는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지지보다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강했다.

노 정권은 서민과 노동자들의 변화와 개혁에 대한 요구를 받아 안고 출범했지만 이내 배반했다. 참여정부가 아니라 배반의 정부다. 배반에 대한 심판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우선 참여정부가 패러다임의 개혁을 내걸었지만 경제주의, 성장주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사회와 경제부문의 균형, 복지와 사회구성원 간의 연대, 사회안전망을 중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지만 현 정권은 신자유주의에 포획된 채 성장 위주 정책으로 몰고 갔다.


이런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은 시도도 못해보고 박정희 시대부터 내려오고 있는 경제주의 논리가 유지되고 관철됐다. 이른바 87년 체제가 정치적 민주주의에 국한됐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노무현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권력이 이동한 것이 민중의 처지에서 보면 어떤 차이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대통령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자리, 즉 좋은 일자리 3만개의 주인이 바뀌는 것 말고 뭔 차이가 있을까.

다음으로 투표한 세 명 가운데 두 명이 이명박이나 이회창 후보를 찍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는 노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유사성과는 다른 면에서 우리 사회의 전망을 어둡게 만들어주는 요인이다.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가 퇴영적이라는 걸 의미한다. 이와 관련돼서 진보정당이 마땅히 치고 나가야할 부분을 놓쳤다는 점은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해야 된다.

-투표를 하지 않은 40% 가까운 사람들의 의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너무 인색하다는 시각도 있다.

=대세가 이미 기운 것처럼 보이고, 개혁으로 포장된 세력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고, 결국 표를 줄 데가 없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지표다. 그리고 이는 민주노동당이 제 역할을 못했다는 사실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문국현 후보의 경우 포장된 개혁세력에 실망한 표를 받았는데, 6% 득표에 그쳤다.

뭔가 흡인력과 친화력을 줄 수 있었음에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진보정당의 책임이 막중하다. 흔히 말하는 대로 사표 부담이 없었음에도 허망하고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데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민주노동당의 참패 원인은 어디 있다고 보나.

=1차적으로 후보에게 있다. 식상하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 어렵다는 한계를 스스로 짊어진 채 후보가 됐다.

그 다음에는 내부 혼선이다.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 ‘엄마. 민주노동당이 필요해’, ‘코리아연방공화국’ 같은 것들은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일반 서민들에게 다가가지 못할 내용들이다.

그 동안 당내 정치에 매몰되어 대중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대중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부동산과 교육 문제에서 진보정당으로서 차별성을 보이는 데 완전 실패했다. 대중적인 친화력과 흡인력이 작동되지 못한 것이다. 좋은 기회였는데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이다.

   
  ▲홍세화 기획위원은 민주노동당 당권파인 자주파를 광신자 집단에 비유하기도 했다.
 

-홍 위원께서는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왜 그런가.

=민주노동당의 당권파인 자주파 또는 주체파는 한국적 분단현실의 산물이긴 하나, 그들이 당권을 잡고 있는 한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다. 그들은 책임 주체도, 토론 주체도, 진보의 주체도 아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토론은 이뤄지지 않고, 공부와 학습도 하지 않는 종북 주체일 뿐이다. 자신들끼리 폐쇄회로를 이루고 있으며 수적으로 우세한 당내 헤게모니 장악에만 관심이 있다. 당은 통일전선 전술의 시각에서 보고 있으며 진보는 포장이지 내실이 아니다.

자주파 또는 주체파가 장악한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다. 토론과 학습이 없는 진보정당의 예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번 대선 결과에 대해서도 자주파 중 누구도 자기비판이든 술회든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사람이 없다. <참여정부 평가포럼>의 안희정 씨는 ‘폐족’ 발언이라도 하고 있지 않나?


-향후 진로를 놓고 민주노동당은 격론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이번 논의는 서로 갈라서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까지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당 안팎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는 새 정당 창당과 내부 혁신이라는 큰 가닥의 논의가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나.

=정치는 현실이고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다. 4월9일 총선까지 시기적으로 너무 안 좋다. 현실적인 어려움과 고민이 많은 것을 사실이다. 그럼에도 어려울 때일수록 원칙에 충실하고, 원칙에서 출발해야 한다.

당권을 잡고 있는 주체파의 환골탈태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 토론이 가능해야 기대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는 광신자 집단이나 사교(邪敎) 집단의 그것에 가깝다.


광신자들은 사람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가르고 믿지 않는 자는 대화의 대상으로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사교집단은 교주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리고 열성적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광신자 집단이나 사교 집단과 비슷하다. 우리는 물론 그들의 열성적인 점은 배워야 한다.

그들은 이미 말한 것처럼 통일전선론에 입각한 진보정당으로 포장한 채 내부 헤게모니 장악에만 관심이 있다. 그 결과가 이번 대선으로 나타났다. 정치적으로 파탄 났고, 재정적으로도 파탄 났다. 당 재정 적자 규모가 30억 원이라고 하지만 그 정도에 머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총선이 100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도 현실이지만 이런 점들도 현실이다. 이들을 허덕이면서 안고 가는 것은 마이너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차라리 제로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정당 창당이 더 낫다.

   
  ▲이광호 <레디앙> 편집국장
 
-당원은 물론 대중들에게 분당으로 비쳐질 창당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대중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들, 예컨대 노회찬, 단병호, 심상정 의원은 나름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다. 정치인들이 진솔한 자기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한데 민주노동당에서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진 정치인들이 관성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용기가 부족한 것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이 당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했을 때 심상정 의원이 비대위원장을 맡는 경우 봉합하는 수준으로 가면 안 된다. 특히 종북적인 것을 털고 가야 된다는 게 전제 조건이 돼야 한다. 어느 선에서 털어낼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런 것이 전제됐을 때 새로운 정당 창당이 아닌 민주노동당의 재창당 수준의 쇄신 문제를 고민해볼 수 있다. 지금까지 있어왔던 일심회 사건, 독도와 북핵 관련 발언, 회계 문제 등에 대한 확실한 선을 그을 수 있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이 분당으로 가지 않을 수 있는 최후의 마지노선이 될 수 있다.

-대중들을 설득하거나 그들에게 설명하려면 더 많은 것이 필요할 거 같은데.

=대중들이 볼 때 자기들끼리 싸우고 갈라서는 것으로 보일 거다. 하지만 우리가 당 안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너무 많을 울타리를 치면서 시야를 좁히고 있을 수도 있다.

분당과 새로운 당 창당 문제에 대해 너무 위축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민주노동당에 대해 염증을 느끼거나 식상해서 떠나고 벗어난 사람들이 많다. 당원 번호와 실제 당원 수의 차이가 이를 말해주는 대표적 지표 가운데 하나다. 이들이 왜 빠져나갔는지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지금껏 당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 온 장이었다.

새로운 정당 창당 과정에서 사회당, 초록당과 노동운동의 좌파 조직 등과 함께 진정한 진보정당을 한다면 대중들도 납득할 수 있다고 본다. 현재의 상황에서 보기 때문에 좁은 영역만 보일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당에서 멀어져간 지식인 그룹들도 다시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체성이 탄탄한 진보정당의 모습을 보여주면 마이너스가 아니라 제로에서 출발할 수가 있다.

-민주노동당을 기준점으로 가정하고 좌우의 스펙트럼까지 포괄하는 신당 창당 주체를 상정했을 때 무엇이 공통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비정규직 노동자 해법, 한미FTA에 비판적인 세력이면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황당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당내 야당이라는 ‘평등파’가 북한을 모델로 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당내에서 ‘쪽수’에 밀려서인지 토론도 제대로 제기하지 못하면서 북유럽을 모델로 하는 세력을 우습게 보는 것에 대해 나는 상당히 비판적이다.

진보정당의 외피를 쓰고 헤게모니를 관철시킨 당내 주체파에 대해서는 제대로 발언하지 못하면서 소수 사민주의 세력을 가볍게, 경멸하는 듯한 태도는 정말로 황당하다.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바깥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민주노총 국민파가 중앙파와의 헤게모니 투쟁 때문에 자주파와 손잡는 일을 납득할 수 없는데, 마찬가지로 당내 평등파의 행태도 이해하기 어렵다. 적대적 공존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 알량한 권력 분점을 위해서라는 얘긴가. (홍세화 기획위원은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황당하다’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한국인들의 의식 지형을 보면 북유럽 모델도, 심하게 표현하면 ‘극좌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세금폭탄론이 통하는 사회에서 북유럽 모델을 가소롭게 보니 가소로운 것이다. 북유럽 나라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그 같은 사회를 만들어냈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우습게 알고 있다. 민주주의 성숙의 역사에는 월반(越班)이 없으며 간혹 월반을 했다 해도 결국은 되돌아온다.

   
  ▲홍위원은 노회찬, 심상정 같은 대중정치인이 신당의 비례 후보에 전면 배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 위원은 새로운 당을 만드는 쪽으로 입장이 기울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에 이런 흐름이 가시화된다면,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일정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 상황도 올 수 있을 텐데.

=나야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할 것이다.

정서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 지금까지처럼 경계지점에서 척탄병 노릇을 할 것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치를 하지 않는다 해도 정치는 하는 것이다.

현실 정치적으로 역량이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 맞게 배치가 되고, 나 같은 경우는 그 장소에는 직접 뛰어들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그걸 짊어지고 가는 게 맞다. 당면한 필요성에 의해 움직이기보다 긴 안목으로 보고 싶다.

-신당을 지금 만들어서 총선을 돌파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이는데.

=심상정과 노회찬 의원 같은 사람을 신당의 비례후보로 전면적으로 배치해야 된다. 그들이 내가 말한 현실 정치적 역량이 있는 사람들이다. 또 정태인 씨처럼 검증된 사람을 전진 배치하면서 돌파해야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새로운 진보정당이 정체성이 드러나게 될 텐데 합리적 진보세력은 폭넓은 소구력을 가지고 있다.

약간 다른 문제일 수도 있겠는데, 나는 당과 당원 사이의 친화력을 표현하는 방식이 당비 1만원 내는 것만으로 대표돼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다. 다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며 시작해야 될 때라고 본다.

또한 당원들은 당비만 내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안에 대한 학습과 토론이 이뤄지는 기본 과정이 있어야 되며, 당 간부가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단계를 거치도록 당이 운영돼야 한다.

-권영길 후보의 거취에 대해서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정계를 떠나라고 얘기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백의종군 수준이 아니라 성찰적인 자기 술회가 필요하다고 본다.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권영길 의원과 같은 대중 정치인의 손실은 당의 손실이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 (오렌지색,붉은색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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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문학, "삶은 놀이다"
『팔방놀이 (Rayuela)』, 게으름과 엉뚱함의 찬미

안태환 / 부산외대 이베로아메리카 연구소 연구원
출처 : <레디앙> 2007-12-28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남미의 대표적 현대소설로 콜롬비아 작가인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이 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남미의 대표적인 작가로 인정받는 사람이 아르헨티나의 훌리오 꼬르따사르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팔방놀이 (Rayuela)』가 있다. 팔방놀이는 우리가 어렸을 적에 골목길에서 놀던 사방치기를 의미한다.

1963년에 쓰여진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독자에게 기존의 관습적, 수동적 태도를 버릴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철저한 비주류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숫자가 적힌 장(chapter)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첫 페이지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이 책을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기존 관습대로라면 물론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인 56장에서 끝날 것이다.

그런데 다른 방식으로는 73-2-1-116-3-84장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장을 달리하는 순서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무슨 논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장난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방식으로 독자 마음대로 읽으라고도 한다. 실제로 각 장마다 에세이 같기도 하고 앞의 에피소드와 다른 것이 전개되어서 독립적으로 읽는 데 아무 부담이 없다.

주인공인 올리베이라가 하는 일도 정상이 아니다. 그는 빈둥거리면서 끈과 색실을 가지고 놀면서 불에 태운다거나 또는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놓는 일을 하는 등 쓸데없는 일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만족해 한다.

또 다른 주인공인 트레블러는 불면증 환자다. 밤에 일어나 책을 보거나 서성댄다. 우리는 낮에 일을 한다. 그러나 이들 등장인물들은 낮에 잠을 잔다. 그리고 달을 해로 착각하기도 하고 늘 마테차를 마신다. 이런 유형의 인간들은 극우 파시즘 사회에서는 쓰레기로 취급되어 극도로 탄압받거나 경멸받을 것이다.

책 읽는 순서는 마음대로!

더 특이한 것은 이 소설에는 수많은 비주류적 지식인들이 언급되어 나온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이들의 텍스트와 서로 연관을 맺으면서 독자에게 같이 여행할 것을 권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 소피스트를 비롯하여 비 주류적 재즈 음악가와 평론가, 스페인의 시인 가르시아 로르까,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대표적인 시들이 아무 언급이 없이 직접 인용되고 있다.

기존의 문학이 가지는 권위 있는 틀과 규범을 벗어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담론 형식이 획일적인 틀을 벗어나 있다는 이야기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숙이 빠져 있는 사회의 특징은 '소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소비만능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돈을 주고 사게 만든다는 점에서 획일화의 효과를 지닌다. 다시 말해 다양성을 거부하고 체제에 순응하면서 안심하도록 만든다. 이런 사회에서는 예를 들어, 어느 유명한 가수가 값비싼 디너 콘서트 대신 대중을 위해 무료 콘서트를 기획한다고 해도 시장( 마켓 )과 언론이 이를 반기지 않는다.

이런 사회의 최고 덕목은 개인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엄숙한 근면과 성공에 있다. 일탈과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덕목이 특히 강조되는 영역은 기업이다. 이 소설에서는 이런 덕목의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하는 방랑자들이 나온다. 무엇인가 책임지는 것을 거부하고 생각만 하는 것을 아주 중요시한다.

주인공인 올리베이라의 생각을 한번 엿들어 보자.

“바지 호주머니에서 보푸라기, 시계, 신문 쪼가리, 가장자리가 해진 아스피린 등 무엇이든지 나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다가 끄트머리에 죽은 쥐가 나오는 것은 완전히 가능한 일이다.”

이 작품의 문학사적 흐름을 집어낸다면 1910~20년대 유럽에서 앙드레 브레통이 주도한 초현실주의와 맥락이 통한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기존의 가치관과 질서를 거부하는 아방가르드 미학운동이었다. 중남미에서도 모더니즘 시 운동과 현대 소설은 초현실주의적 형식 파괴의 흐름을 보여주며 기존의 전통적 가치관을 거부하는 아방가르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중남미 예술에서 전통적 가치관의 거부는 ‘유럽적’ 인 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원주민’ 문화가 강하게 뒤섞인 그들 스스로의 문화를 긍정하는 힘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중남미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오랜 고민은 중남미 현대소설의 작가들로 하여금 1960년대에 폭발적으로 ‘붐 소설’을 만들어 내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붐이란 중남미 현대 소설이 유럽에서 지식인들과 독자들에게 엄청난 붐을 불러온 것을 가리킨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삶은 놀이다’라며 합리적 계산과 기존 질서에의 순응을 거부하는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새삼 놀이의 가치관이 주목되는 이유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으로 서로 함께하는 연대의 정신과 진정성에 연결된다는 데 있다.

여기서 ‘놀이’는 단순한 놀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의 디딤돌을 의미한다. 우리가 팔방놀이를 할 때 돌을 발로 치면서 한 칸에서 다른 칸으로 도약을 한다. 놀이 속에서 무언가를 꿈꾸게 된다.

위 소설의 주인공인 올리베이라는 빵을 칼로 자르면서 빵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일상생활의 삶 안에서 너무나 당연시 하는 일에 대해 민감하게 회의하는 데서부터 소비주의적 문화를 거부함을 알 수 있다.

‘소비주의’ 문화가 끼치는 해악 중의 하나는 일상생활의 섬세한 삶의 기쁨과 슬픔을 개개인이 조용히 느끼는 것을 방해하는 데 있다고 본다. 우리 모두를 뭔가 붕 떠있게 만든다.

그리고 소비주의 문화는 대중으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소중하게 만든다. 그러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어떤 가치 있는 것, 소중한 것을 목청 높여 엄숙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위의 소설 『팔방놀이 (Rayuela)』의 장점이다.

에두아르도 라모스-이스끼에르도가 언급하였듯이 이 작품은 그냥 자연스럽게 마치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하늘 또는 중심으로의 영성적 길, 다리, 여행”이 되고 있다.

중남미 좌파의 에너지는 영성

필자는 최근 중남미에서의 좌파 부상이 보여주는 에너지의 밑바닥에는 이런 쉽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영성적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 사회의 좌파들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과 비전 제시의 절박함을 누구나 강조하고 있지만, 단순한 정책들의 나열에 그쳐서는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정치 지형의 상황에서 실현 불가능한 수사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본다.

독자들 중에서 혹자는 이런 이야기가 별로 탐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처절한 무한경쟁의 정글의 세계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서 어린아이 장난이니 영성이니 하늘이니 하는 이야기는 공허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글의 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강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해도 약자로서는 공허한 일이 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는 주어진 판 자체를 비웃고 전혀 다른 유토피아적 세계를 꿈꾸는 것이야말로 급진적인 가치관 또는 철학이 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콜롬비아 작가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에서도 여러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훌리오 꼬르타사르가 이야기한 ‘남성적 독자’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역사와 사회의 주어진 흐름 앞에 순응하지 말 것을 강조한 데서 주로 그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훌리오 꼬르타사르는 이런 ‘남성적 독자’의 반대지점에 ‘수동적이고 편안해 하고 관습에 물들은 독자’를 ‘여성적 독자’라고 불렀다. 여성적 독자는 “그래 이 소설의 끝에 가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나”만 관심 있어 한다. 마치 일반 소비 대중이 어느 물건의 가격이 결국 얼마냐 하는 태도와 일치한다.

이 소설이 만들어졌던 60년대는 세계적으로 대중이 기존 문화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비틀즈, 중남미 붐 소설, 히피들, 존 에프 케네디, 밥 딜런, 혁명에 대한 환상’ 등등. 그러나 80년대를 시작으로 이런 저항과 반란의 문화는 서서히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사라져 갔다.

한가지 예를 들고 싶은 게 있다. 소비주의 문화가 왕성한 어느 나라의 민속공예품을 보면 정교한 반면 왠지 기계로 찍어댄 듯한 느낌으로 토속적인 느낌이 거의 없다. 반면에 가난한 남미의 공예품은 투박하고 거칠지만 손으로 일일이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들었다는 느낌에 친근감이 든다. 그리고 어떤 공예품은 소위 투입된 노동가치에 비해 터무니 없이 값이 싼 경우도 많다.

필자는 가끔, 70년대에 많이 나왔던 유럽의 실존주의적 흐름의 영화가 생각난다. 어느 대기업체의 간부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겉으로 보아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 갑자기 별 이유도 없이 가출을 한다. 그리고 이리저리 방랑의 길을 택한다. 그러면서 고통도 당하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던 이미지가 그립다.

무엇보다 획일적 삶의 방식을 깨트릴 수 있는 철학과 감수성과 전략이 중요하다. 우리보다 훨씬 진보적 사회 즉 인간적 사회를 만드는 데 성공한 유럽과, 유럽보다는 훨씬 가난하지만 또한 인간적 사회를 만들려는 비전과 정책을 실천하고 있는 남미를 바라볼 때, 중요한 것은 지식인과 대중이 속물됨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공한 기업가와 스타 연예인’을 부러워하지 않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성공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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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의원은 ‘친북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야"
[의견광고] 북핵 반성, 최기영 출당 없다면 ‘타협과 봉합의 비대위’

자율과 연대
출처 : <레디앙> 2007-12-28


심상정 의원의 조건부 수락을 조건부 지지한다

12월 26일 최고위원회는 총사퇴를 결정하고 심상정 의원을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이에 심상정 의원은 12월 27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비례대표 선출권을 포함한 전권을 요구하며 비대위원장에 대해 조건부 수락 의사를 표명했다.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연대(이하 자율과연대)는 제17대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얻은 3%는 민주노동당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라는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민주노동당을 근본적으로 혁신하지 않는다면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국민의 경고이자 지난 4년간 노선과 활동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고 판단한다.

그것은 당내 다수파였던 주체파의 비대중적인 노선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었다. 실제로 당내 다수파였던 주체파는 북핵 실험 당시에 사실상 북한 정권의 입장을 옹호하였으며, 일심회 사건 때에도 대국민적 사과를 방기하며 최기영 전 부총장을 두둔하는 등 국민들이 보기에 이해 못할 친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자율과 연대는 당 존망의 위기에 비대위원장을 맡기려면 전권을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상정 의원이 비대위원장 수락의 조건으로 제기한 비례대표 선출권은 혁신과제를 수행할 도구이자 필요조건일 뿐 혁신과제 그 자체는 아니다. 좀 더 본질적인 혁신과제가 존재한다.

심상정 의원이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혁신과제 두 가지

근본적인 당 혁신을 위해서는 최소 다음 문제를 분명하게 정리하고 관철시켜야 한다. 이것이 심상정 당원이 감히 당의 근본적인 혁신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를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첫째, 심상정 의원은 민주노동당 당직자 300여 명의 성향을 포함한 신상정보를 북한 당국에 넘긴 최기영 전 사무부총장의 행위가 대법원 최종 판결에 따라 당내 간첩행위이자 명백한 해당 행위임을 분명히 밝히고, 그를 영구 제명하여 출당시켜야 한다.

거듭 밝히거니와 자율과 연대는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보안법은 명백히 반대하지만 간첩의 자유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특히 당직자의 신상정보를 넘긴 해당행위에 대해서는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2006년 북핵 실험에 대해 주체파의 눈치를 보며 두루뭉실하게 유감을 표명한 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당론이었음을 확인하며 북핵 실험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당론으로 공식화해야 한다.

위와 같은 친북편향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심상정 의원 스스로가 말한 봉합과 타협의 비대위에서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북핵문제와 최기영 전 부총장 출당 없다면, 타협과 봉합의 비대위로 전락할 것

이미 많은 당원들은 심상정 의원이 비례대표 선출권만 요구하고, 친북 편향 문제는 회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심상정 의원은 자율과 연대와 전진, 그리고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 소장이 제기한 문제의 핵심이 민주노동당 내 주체파의 친북 편향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 국민들에게 민주노동당의 혁신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만약 심상정 의원이 비례대표 선출권만 요구하고, 친북 편향 문제를 정리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당원들의 분노에 찬 절박한 요구를 왜곡하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심상정 의원 스스로가 밝혔듯이 국민에 대한 기만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는 또 다시 타협과 봉합의 비대위로 전락하는 길이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진보적 가치를 올곧게 세우는 것만이 진정한 구당(救黨)이다

우리가 민주노동당에 대해 구당(救黨)의 마음으로 접근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민주노동당이라는 껍데기 그 자체가 아니라 민주노동당이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진보적 가치 그 자체일 것이다.

타협과 봉합의 껍데기 구당은 구당(救黨)이 아니다. 그것은 당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사당(死黨)의 길이다. 당의 진보적 가치를 올곧게 세우는 구당만이 진정한 구당(救黨)의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07년 12월 28일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 연대 (www.kdlpsd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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