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으로 시대와 싸웠던 ‘마지막 조선의용군’
 
 
 
한겨레 한승동 기자
 
» 〈김학철 평전〉
 
〈김학철 평전〉
김호웅 김해양 엮어지음/실천문학사·1만5000원


<항전별곡>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태항산록> <최후의 분대장>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20세기의 신화>…. 1980년대 후반 이태의 <남부군> 열풍이 불었던 민주화 질풍노도시대 무렵 시작해 1990년대 냉전붕괴 이후 본격적으로 이땅에 소개된 재중 동포작가 김학철의 작품들은 그때까지 ‘좌익금기’에 속박당했던 한국의 문학지형을 흔들고 현대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평론가 김윤식 교수는 “조선의용군의 일단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이유로 중국공산당의 집결지 태항산까지 넘어가게 되었는가를 증언하는 기록은 김학철의 것이 유일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학철은 그 자체가 역사요, 기구한 한·중·일 현대사의 광대한 미발굴 지층 탐사의 한 이정표다.

도대체 조선의용군이란 존재 자체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 항일전쟁 시기 나라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빛나는 ‘국제 전우’들이었던 그들은 남북한 역사 모두에서 배반당했다. 중국마저 한때 그들 다수를 우파반동으로 몰아 모질게 박해했다. 김학철은 거기에 초지일관 저항했고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아 당당하게 그 시대를 증언했다. 2001년 9월 50여년 외다리로 버텨온 몸이 더는 가망이 없다는 걸 확인한 85살의 노작가는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연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는 유서를 써놓고 21일간 단식 끝에 세상을 떴다. 시종 꼿꼿했다. 말년의 김학철과 가깝게 지냈던 연변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김호웅(54) 소장이 연변공회간부학교 교장 등을 지낸 김학철의 외아들 김해양(59)씨와 함께 쓴 <김학철 평전>(실천문학사)은 그런 김학철의 생애와 그의 시대를 종합적으로 재구성하고 의미를 되새긴다.

팔로군 조선의용대로 일제와 싸우고
남·북·중 모두 비판한 마르크스주의자
타협을 모르던 인생과 작품 되돌아봐


신실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 김학철은 4년간의 나가사키 형무소 복역 뒤 1945년 광복과 함께 출소해 서울에서 정치활동과 작가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민족의 태양’이니 ‘위대한 은인’ 따위 치졸한 수식어들과 함께 개인숭배로 치닫던 박헌영과 스탈린, 김일성 세력에 절망하고 그들과 불화했다.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1946년 북으로 탈출한 그는 <노동신문> 기자가 됐으나 ‘누가 건설을 파괴하는가’라는 비판적 기사를 썼다가 밀려나 외금강휴양소 소장, 인민군 전신인 민족군대 신문 주필로 돌다가 전쟁이 터지고 미군이 북진하자 중국으로 가 눌러앉는다. 북에 남았던 김두봉 한빈 정률성 왕련 등 항일전장 동료 선후배들과 어머니, 누이 가족은 모두 숙청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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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중화전국문학공작자협회 연구원을 거쳐 1952년 연변자치주 문학예술계연합회주비위원회 주임직을 맡아 연길로 간 김학철은 곧 전업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57년 ‘제왕’이 된 마오쩌둥의 정풍운동·반우파투쟁에 휘말려 우파분자로 숙청당했고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 때 개인숭배와 극좌교조주의를 비판한 <20세기의 신화>가 반동죄에 걸려 징역 10년형을 받는 등 당적(1940년에 중국공산당 입당)을 박탈당하고 무려 24년간 유배당했다. 1980년 복권(당적 복귀는 1989년)한 뒤 이듬해 65살 때부터 창작활동을 재개해 잃은 시간을 벌충하듯 20년간 일로매진했다.

권력과 불의에 맞서 사투를 벌인 이런 후반생 못지않게 침략자에 대들었던 1945년까지의 전반생도 극적이다.

서울 보성고에 다니던 시절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폭탄거사에 충격받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감동받아 총으로 나라를 되찾겠다며 1935년 19살 나이에 중국으로 탈출했고, 의열단과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황포군관학교, 국민당군 소속 조선의용대를 거쳐 팔로군 아래로 들어가 조선의용군 허베이지대 제2대 분대장이 됐다. 1941년 호가장 전투에서 일본군 총탄에 왼쪽다리를 맞고 붙잡혀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돼 전향서 쓰기를 거부하다 3년 6개월 동안 다리 치료 못받아 결국 잘라냈다.

드문 반골기질이다. 루쉰을 사표로 삼아 자신을 엄격히 규율한 그는 자유와 정의를 위한 길에서 한치도 타협하지 않았다. 왕후이 칭화대 교수는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에 어떻게 유효하게 저항하고 그것들을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아시아 근대의 역사적 과제를 풀고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하는 데 김학철 문학이 긴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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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행복과 우리의 미래

'어린 시절은 어른 시절을 위한 준비기일 뿐이다'라는 생각은 철저하게 어른들의 관점이다. 어른은 아이를 보호하고 돕는 사람이지 그들을 구속하고 그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김규항
출처 : <웹진 인권(www.humanrights.go.kr)> 2007 11*12 (통권 47호)


박정희 씨가 독재를 한 건 인민을 괴롭히기 위해서였을까? 천만에, 가난한 인민이 잘살고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가 노래와 영화와 문학을 검열하고 금지했던 건 인민의 문화적 권리를 빼앗기 위해서였을까? 천만에, 순진한 인민을 해로운 문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인간이란 기계가 아니라서 위하는 마음이 구속되고, 보호하려는 행동이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런 섬세한 맥락을 잊을 때 우리는 인권을 포기하게 되고 파시즘에 문을 열어주게 된다.

오늘 부모들이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은 영락없이 박정희와 닮았다. 그들은 아이들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이를 감옥의 수인처럼 키우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순수하고 밝은 것이 아닌 모든 것을 금지한다. 박정희를 매우 싫어할 뿐 아니라 박정희와 그 후계자들과 싸운 제 청년 시절에 굉장한 자부를 가지는 그들이 제 아이에게 박정희와 똑같이 행동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현실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다고 한다.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절차로 보는가, 분배나 계층 같은 좀더 구조적인 차원으로 보는가에 따라 의견이 좀 다르긴 하지만, 적어도 개인의 자유가 몰라보게 진전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어디를 가든 무슨 말을 하든 함부로 제한받거나 구속받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엔 개인의 자유가 옛 군사독재 시절보다 오히려 더 퇴보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아이들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아이들에게만은 자유가 있었다. 마음껏 뛰어놀고 어른들의 강제가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느리고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아 보이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정서와 인간적 면모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을 보라. 그들은 감옥에서 지내는 수인과 다를 바 없다. 평균적으로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이른바 교육열이 높은 지역에선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아이들은 경쟁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지내게 된다.

과거식 어린이 탄압, 즉 폭력이나 권위주의적 방법을 통해 아이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일은 이제 적어졌고 누구나 비판적이다. 이를테면 아이들을 심한 매로 다스리는 교사가 발붙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이른바 ‘교육’ 그리고 ‘아이의 미래’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훨씬 더 강도 높은 어린이 탄압은 전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 좌우도 없고 상하도 없다. 세계 어디에도 모든 아이들의 자유가 모든 어른의 합의에 의해 이 정도로 구속되는 예는 없다. 이것은 매우 가공할 인권탄압이다.

우리 사회가 IMF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무한경쟁 체제로 본격 진입하면서 아이들은 경쟁의 감옥으로 내몰렸다. 경쟁의 감옥에서 중요한 건 인간적 면모가 아니라 오로지 경쟁력이다. 말하자면 아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상품으로 길러지는 것이다. 옛날엔 아무리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부모라 하더라도 아이들에겐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너 하나만 잘났다고 되는 게 아니다.”, “너보다 약하고 불쌍한 동무를 보살펴야 한다.” 그러나 이젠 진보적인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못한다. 가르친다고 해도 초등학교 고학년쯤이면 끝이다. 동무는 곧 경쟁자이며 경쟁자를 존중하라는 말은 패배를 준비하라는 말과 같다.

중학생쯤 되는 아이가 있는 집에 가보면 아이들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윗사람을 무조건 공경하는 봉건적인 덕목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은 타자에 대한 예의나 배려가 없고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짜증을 내고 종종 공격적이다. 지나치다 싶어도 부모들은 별 도리가 없다. 오늘 한국의 아이와 부모는 엘리트 체육에서 선수와 코치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선수의 성적을 유일한 가치로 여기는 코치들은 선수의 인간적 면모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설사 문제가 보인다 하더라도 이미 과도한 훈련에 심신이 지친 어린 선수에게 그런 부분까지 요구한다는 건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그렇게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가 잘못 자라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도리 없이 경쟁에만 열중한다.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들은 단지 이 무한경쟁의 바다에서 제 아이가 도태될까 노심초사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비난하진 않더라도 아이들을 이렇게 키울 때 우리의 미래가 어떨지 함께 생각해봐야 한다. 이렇게 키운 아이들이 자라 불과 10년 후, 늦어도 20년 후 우리 사회가 이기적이고 돈과 소비적 가치관으로 뭉친 인간들로 가득 차는 장면을 상상해야 한다.

교육과 관련하여 우리에겐 두 가지 잘못된 생각이 있다. 첫째는 인생의 한 시기가 다른 소중한 시기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 말하자면, 어린 시절은 어른 시절을 위한 준비기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어른들의 관점이다. 누구에게나 지금이 중요하니 어른들은 지금에 미친 영향만을 기준으로 어린 시절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어른도 자기의 어린 시절을 찬찬히 생각해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인생은 중요한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가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시기가 다 소중하고 중요하다. 둘째는 내 가치관을 기준으로 아이의 인생을 구성하려 하는 것이다. 어른은 아이를 보호하고 돕는 사람이지 자기 가치관을 기준으로 그들을 구속해가면서 그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람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아이의 미래를 근심하는 부모들을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두가 제 아이의 미래만 생각하며 분열한다면, 이 가공할 인권탄압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가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부모와 성인들이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결정짓는, 우리 사회의 어떤 문제보다 중요하며 심각한 문제라는 걸 깊이 되새겨야 한다. 우리 사회의 모든 성인들이 동병상련의 정으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아이들이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다면 우리의 미래도 행복하지 않다.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행하는 <웹진 인권> 2007 11*12 호에 실린 글입니다. 아직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에 올려지지 않은 글이기에 업데이트 될 때까지 스크랩이나 인용을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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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2> 부르크하르트와 르네상스 ③

강철구 / 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년 11월 29일


  4. 인간의 존엄성과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
  
  인간의 존엄성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이 강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문주의를 인간중심적인 철학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을 찬미하는 태도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미 예술의 창조자로서의 인간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정신을 육체적 세계와, 순수한 형태의 초월적 세계의 중간에 놓았다. 이런 생각은 나중의 신플라톤주의자나 많은 중세 사상가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헬레니즘적 시대의 초기 스토아 학파도 우주를 신과 인간의 공동체로 보았으며 이런 생각은 로마 시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다른 피조물에 대해 인간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구약성서의 창세기 등 여러 곳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초기 기독교 사상에서도 분명히 말하지는 않으나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중세 기독교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받아들여진 것은 인간이 신의 이미지를 본 따서 만들어졌으며 또 구원될 수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지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이 가치를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주장은 지속적으로 보다 체계적으로 나타난다. 페트라르카(F. Petrarca)나 브루니(L. Bruni), 알베르티(L. Alberti), 마네티(G. Manetti) 같은 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그 존엄성에 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인간이 현세에서 이룬 뛰어난 업적들을 그 존엄성의 증거로 내세웠다. 철학적 깊이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 브루니 (Leonardo Bruni, 1370~1444)

  반면 피치노(M. Ficino), 피코(G. Pico)의 두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우주에 대한 철학적 체계 속에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피치노는 15세기에 플라톤의 모든 책들을 번역한 피렌체 사람이다. 그는 플라톤의 생각을 받아들여 이 우주의 가장 높은 곳에는 순수한 정신적인 존재인 신이 위치해 있고, 그 밑에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물질적인 것까지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다.
  
▲ 피치노 (Marsilio Ficino, 1433~1499)

  인간은 정신과 육체를 다 갖고 있으므로 이 계층 질서에서 정신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를 연결하는 접점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두 세계 모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쪽에도 다다를 수가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질서 안에서의 인간의 이런 중심성과 보편성이 바로 인간 존엄성의 주된 근거가 된다고 믿었다.
  
  피코는 1496년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연설>이라는 글에서 피치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신이 완전한 우주를 만들기 위해 모든 정신적, 물질적 존재를 창조했으나 인간은 맨 마지막에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은 이미 완성된 질서 안에 어떤 정해진 자리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 피코 델라 미란돌라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3~1494)

  따라서 인간은 다른 어떤 피조물의 성질도 가질 수 있는 자유를 가졌으므로 그가 무엇을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식물, 동물, 천체, 천사, 나아가 신과도 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정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본능을 추구하여 짐승 같은 존재가 되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른다는 것이다.
  
  피코의 이 주장은 신이 인간에게 무제한한 자유를 준 것으로, 따라서 신의 은총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적 원리를 부정하는 예로 자주 인용된다. 부르크하르트도 이 점에서 피코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피코는 결코 기독교적 원리를 부정한 적은 없다.
  
  이들은 다른 르네상스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이 우주에는 초월적 힘이 존재하고 천상계와 지상계의 존재 사이에는 신비한 감응관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점성술이나 다른 비학(秘學)을 믿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현대인들과 같이 인간을 그야말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또 피치노나 피코의 영향력은 별로 크지 않았다. 피치노의 영향은 그가 속한 좁은 집단에만 한한 것이었다. 피코의 글은 다른 사람들이 보았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러니 서양철학사에서 논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아 이들을 크게 부각시키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미술과 진보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문화적 성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미술인 것은 틀림없다. 이 시기에 수많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가 등장하여 풍요한 결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서는 미술을 다루지 않았으나 다른 많은 글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다루고 있으므로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다.
  
▲ 『미술가 열전』을 쓴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1511~1574)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미술이 뛰어나다는 주장을 처음 한 것은 16세기에 <미술가 열전>을 쓴 바사리이다.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 많은 미술가들의 전기인데 이 책에서 그는 미술에 있어서의 3단계 진보론을 주장했다. 그는 이전의 미술인 비잔틴 미술과 중세 고딕 미술을 비잔틴 양식, 게르만 양식이라는 말로 경멸했다. 또 르네상스 미술에서도 16세기에 비해 14, 15세기 미술은 낮추어 보았다. 미술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뒤의 사람들이 바사리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서양미술사에서도 진보라는 관점이 정착되었다. 이는 19세기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었는데 부르크하르트도 기본적으로 그런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이 진보는 르네상스 미술이 '과학적'이라고 보는 주장과 결부되어 있는데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이 발전되었고 그것이 기하학적 원리를 채용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명암법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곰브리치 등 많은 현대 서양 미술사가들은 원근법에 기초한 사실주의와, 세속주의 · 개인주의가 르네상스 미술을 중세와 단절시키고 근대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즉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이 사용되고 명암법이 널리 사용되어 3차원적인 묘사가 어느 정도 가능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근대적인 자연적 사실주의가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원근법을 처음으로 사용해서 그린 마사치오(Masaccio)의 삼위일체 (Trinity, 1428).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은 완벽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근대적이라는 할 수는 없다. 자연 사물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어느 시대에도 존재했고 그것이 미술을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르네상스인들은 상상력을 사용하는 종교화나 역사화에 비해 대상을 직접 모사하는데 의존하는 정물화, 풍경화, 초상화는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근대적이라는 주장은 근대인의 편견일 수도 있다.
  
  르네상스 미술가나 미술 이론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오르나토(ornato)와 릴리에보(rilievo)라는 두 가지 요소이다. 오르나토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아름답게 꾸며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미술가들은 이를 계속 강조했다.
  
  릴리에보는 그림의 주된 대상을 부조와 같이 도드라지게,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말한다. 선 원근법이나 대기 원근법, 명암법은 릴리에보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들이다. 앞에 있는 대상을 크고 뚜렷하게, 뒤에 멀리 있는 대상을 작고 흐릿하게 그림으로써 앞에 있는 대상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빛이나 색깔의 명암도 대상을 뚜렷하게 표현하는데 동원된다.
  
  그러니까 원근법이나 명암법은 그것이 주된 표현수단인 것이 아니라 오르나토와 릴리에보를 나타내는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불완전하게 사용되었다. 17세기 화가들이 공간 자체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태도가 다르다.
  
  세속주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세속적 주제를 가진 그림은 1420년대에는 전체 그림의 약 5%정도였으나 1520년대에 가면 20% 정도로 증가할 뿐이다. 따라서 후기에 가서 세속주의가 보다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 비율은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미술사가들은 르네상스의 예술작품이 중세와 달리 개인적 스타일에 따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 그림에 화가가 서명하기 시작했으므로 그것을 개인의 예술 작품으로 보려고 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중세 그림들에도 개인적 스타일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의 그림은 거의 권력자나 부자들의 주문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 개인의 예술작품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게다가 중국 회화에서는 이미 당(唐)나라나 육조(六朝)시대부터 이미 낙관이 일부 사용되었고, 14세기인 원(元)대에 와서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이런 것을 갖고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 개인주의적인 특성을 너무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예찬(倪瓚, 1301~1374)의 우산림학도(虞山林壑圖)의 일부. 원말 사대가의 한사람인 예찬은 제관(題款)이나 화찬(畵讚)을 쓴 다음 자신의 인장을 찍었는데 그 후 낙관이 일반화 되었다.

  5) 르네상스의 새로운 인식
  
  르네상스 문화의 절충성

  
  르네상스 문화는 전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미술 부분의 업적은 뛰어나다. 회화, 조각, 건축에서 모두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다. 새 양식, 새 기술, 새 장르가 등장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적인 것을 모방하려는 경향도 강하게 나타났다.
  
  이탈리아어 문학의 경우는 단테나 페트라르카 이후 시(詩)없는 한 세기가 왔고 그 후 폴리치아노, 아리오스토 등이 등장한다. 이탈리아 산문도 14, 16세기는 뛰어나나 15세기는 비어 있다. 여기에서도 로마의 테렌스, 플라우투스, 세네카, 베르길리우스가 모범이 되었다.
  
  사상의 영역에는 브루노, 피치노, 마키아벨리 같은 유명한 인물들과 인문주의라는 주된 운동이 있다. 그러나 인문주의의 등장이 중세 스콜라 철학을 밀어낸 것은 아니다.
  
  또 당대인들은 자신들이 고대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고대와 중세 양쪽 전통에서 불완전하게 빌려왔다. 새로운 진보적 변화가 있었다 해도 그것은 반동적 요소와도 결합했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 문화는 절충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근대적인 문화라고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여러 근대적 변화들은 모두 몇 세기 후의 일들이다. 개인의 발견이나 신분제의 해체는 모두 18세기 말 이후 19세기의 일이다. 자연과학의 근대적인 발전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인문주의는 중요하나 그것이 새로운 형태로 서양 근대문화 속에 녹아드는 것도 19세기 이후이다. 근대국가도 18세기에 절대주의 국가들이 만들어지며 본격화한다. 세속문화의 발전도 18세기 계몽사상 시대 이후의 일이다.
  
  이렇게 근세의 명백한 특징들이 17, 18세기 이후에야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변화들을 몇 세기나 앞당겨 르네상스의 시대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당화되기 힘들다.
  
  게다가 르네상스 문화는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도 아니다. 13세기 후반부터 비잔틴 제국에서 나타난 사실주의적인 그림 양식이나 고대 그리스 문학, 철학, 과학에 대한 집약적 연구가 큰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이미 14세기 후반부터 비잔틴 학자들의 초빙을 통해, 또 비잔틴 제국이 망한 1476년 이후에는 많은 망명 학자들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르네상스 문화의 독창성을 너무 강조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르네상스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사실 부르크하르트의 여러 주장들은 그가 처음 생각해낸 것도 아니다. 계몽사상 이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하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으로 묶어 낸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완성시킨 르네상스의 모습은 18, 19세기의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유럽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역사적 신화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이렇게 서양 학자들의 이데올로기적 태도에 의해 오랫동안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 왔다. 또 그 과정에서 역사가 끊임없이 일직선적으로 발전한다고 믿는, 18세기 이후 서양인들이 만들어낸 진보사관과 굳게 결합하였다. 그리하여 르네상스가 서양 역사의 발전에서 뺄 수 없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한 단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이 부르크하르트를 포함해 서양인들의 이런 주장은 이제 더 이상 그대로 받아들여지기가 어렵다. 그런 주장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의 검증을 이겨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사이 서양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전체 서양 전통 안에서 르네상스의 위치에 대한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역사적 가정들이 고쳐질 때가 되었으며 점점 많은 역사가들이 이를 의식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더 극단적인 역사가들은 아예 르네상스의 존재 가치까지도 부정한다.
  
  더욱이 다른 문화권과의 비교작업은 부르크하르트적 해석의 타당성을 더욱 의심하게 한다. 서양인들은 세속주의나 인간중심주의를 르네상스 이후 서양문화의 산물로 이야기하나 실제로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은 일찍부터 세속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우주관, 인간관을 발전시킨 곳이다.
  
  종교적인 요소가 크지 않으며 이는 서양의 기독교 사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서양인들의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인 우리는 무심코 오늘날 동아시아의 세속주의나 인간중심주의마저도 서양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일이다.
  
  이렇게 '서양 근대문명의 흥기'라는 큰 논의 틀의 일부로 연구되어온 르네상스 연구는 이제 심각한 저항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시대를 규정하는 이름만으로는 당분간 르네상스를 받아들인다 해도 부르크하르트가 강조하는 '근대성'이나 '진보'라는 관점에서 르네상스를 규정하는 일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르네상스에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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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
[연재] 21세기의 사유들⑩ 자크 랑시에르

진태원 강사(서울대ㆍ철학과)
출처:<대학신문> 2007년 11월 10일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21세기 벽두 프랑스 철학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후예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불화』(1995),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998),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 같은 혁신적인 정치철학 저서들뿐 아니라, 지적 평등을 교육의 기초로 제시하는 『알지 못하는 선생』(1987)에서부터 아날학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역사의 이름들』(1992)을 비롯해 문학, 영화 및 미학에 관한 독창적인 작업으로 세계 학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이처럼 그가 광범위한 주제에 관해 많은 책들을 출간하고 있지만, 그의 저술 전체는 단일한 주제, 곧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에 대한 다양한 변주로 이해될 수 있다.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라는 문구는 진부한 느낌마저 주는 것이 사실이다. 평등을 반대하든 찬성하든 간에, 철학자 또는 사상가치고 평등에 관해 한두 마디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랑시에르가 옹호하는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나 조건의 평등, 심지어 결과의 평등도 아니다. 그것은 원리로서, 공리(axiom)로서의 평등이다. 곧 평등은 달성해야 할 (또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나 과제가 아니라, 항상 이미 모든 인간의 행위 속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이해하는 정치 역시 이러한 평등 원리의 옹호와 다르지 않으며, 이는 또한 올바른 의미의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사람들은 실제로 평등할까? 가령 지적 능력의 차이는 어떨까? 우리가 알다시피 천재와 바보, 수재와 둔재, 세계적인 석학과 범인(凡人)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능력의 차이, 괴리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이 교육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아닐까?

놀랍게도 랑시에르는 이러한 차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알지 못하는 선생』은 19세기 네덜란드로 이주한 장 조제프 자코토(Jean-Joseph Jacotot)라는 프랑스 교사의 경험을 들려준다. 네덜란드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 불어 선생은 불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 학생들이 불어-네덜란드어 대역본 책 한 권을 교사의 가르침 없이 그들 스스로 읽으면서 불어로 말하고 글을 써나간다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의 교훈은 무엇일까? 랑시에르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교육이란 지식을 소유한 스승이 무지한 제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육은 학생들(또는 무언가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 일반)이 이미 지니고 있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발휘하고 연마해가는 과정이지, 지적으로 우월한 누군가가 지적으로 열등한 이들을 가르치고 이끌어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이는 곧 지식의 위계, 지적 능력의 격차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교육의 행위 자체는 항상 이미 지적 능력의 평등을 전제하고 있다. 누군가가 이미 알지 못한다면, 이미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교육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지적 평등의 원리는 정치에 관해, 민주주의에 관해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 랑시에르는 서양 정치사상의 역사 전체는 민주주의의 불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논증의 역사라고 간주한다. 왜 민주주의란 불가능한 정치일까? 또는 적어도 최악의 정치일까? 그것은 민주주의가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두지 않는, 다시 말해 어떤 특별한 통치의 능력도 인정하지 않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통치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피통치자가 될 수 있는 정치,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 자체이며, 여기에는 모든 사람의 평등에 대한 공리가 깔려 있다. 통치에 특별한 자격을 가정하는 것은 사회적 분업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는 또한 능력의 차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추첨이야말로 민주주의에 걸맞은 제도이며 선거는 본질상 귀족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곧바로 다음과 같은 비판들이 제기된다. 과연 전문적인 지식과 자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와 같이 복잡한 사회를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까? 더욱이 현대 사회의 대중은 공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고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평등한 소비 주체들일 뿐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등만을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우파와 좌파의 구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랑시에르의 주장은 황당한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기존 제도권 정치 안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들이 통치하거나 사회적인 몫의 분배 질서를 뒤흔드는 일이 계속 되풀이돼 왔다. 고대 그리스의 빈민들의 반란이나 파리 코뮌, 68 운동 등은 그에 대한 증거들이다. 따라서 이는 적어도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사건의 분출은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번득임이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랑시에르는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그가 좀 더 대결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늘 예외적인 사건, 봉기로만 존재하는가? 지속적인 제도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한가? 평등의 원리를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구현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 그 이전에 대중이 스스로 행위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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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새로운 문화 창조에 실패"
[정치와 사람들④ 홍세화] "그래도 한나라당은 '삼진아웃' 돼야"

정제혁/객원기자
출처 : <프레시안> 2007년 11월 19일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에게 '인문성'이란 대단히 정치적인 주제다. 그에게서 주체성, 의식, 문화와 같은 어휘들은 직접적인 정치적 의미를 얻는다. 그가 보기에 정치, 사회, 경제적 진보는 사람들의 의식이 발전하는 것만큼 이뤄진다. 달리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묘책은 없다.
  
  의식의 발전이란 뭔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각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다. 이런 고민의 사회적 축적 없이 이뤄진 단기적 권력 변동의 결과는 늘 허탈하다. 동일한 의식의 장에서 사람들은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그저 정치적 선호를 옮긴다.
  
  홍 기획위원은 "참여정부의 잘못은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실패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노력 없이 오로지 경제수치에만 매달렸다는 얘기다. 이제 사람들은 나날이 경제적 동물로 축소되고 있고, 이런 풍토에서이명박 씨가 고평가되는 건 외려 자연스럽다. 이명박 씨가 뜰 수 있는 정신적 토양을 일군 건 노무현 정부다.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정치도 바뀐다. 홍 기획위원은 "사회구성원의 의식을 한꺼번에 바꾸는 게 혁명"인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집요하고, 성실하고, 무엇보다 겸손"하게 다가서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했다.
  
  그는 "사회 구성원의 의식이 바뀌어야 제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제도 변화는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구성원의 의식에 관계하는 제도 가운데 그가 특히 주목하는 건 교육이다. 그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무상교육, 무상의료만 가능하다고 해도 참 행복하겠다. 무상교육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람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홍 기획위원은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민주주의가 후퇴할 수 있다"고 했다. '잃어버린 10년'의 기득권이 부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조중동과 한나라당 세력을 삼진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라며 "이념과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한나라당에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얼마 전 '진보정치에 대한 예의'라는 칼럼을 통해 '비판적 지지론'에 따끔한 일침을 가했던 그가 "한나라당을 패배시키는, 삼진아웃시키는 가능성을 놓지 못하겠다"고 고백하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홍 기획위원은 "다른 어떤 후보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품격'이라는 게 보이지 않나 싶다"며 문국현 씨에게 호감을 보이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개혁의 문화' 조성 실패"
  
▲ ⓒ프레시안

  프레시안:이회창 씨가 대선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이회창 씨와 이명박 씨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홍세화 : 차이야 있겠죠. 이회창 씨 발언을 보더라도 수구적인 냉전보수의 대표성, 차별성을 내걸고 있지 않습니까. 한나라당이 집권에 두 번 실패하고 나서 수구적인 냉전보수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느냐 하는 흐름이 있지 않았나 생각되고, 이명박 씨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 추대됐다고 보여집니다. 과거의 냉전보수로는 안 된다는 것이죠. 특히 남북관계에서는.
  
  프레시안 : 이회창 씨의 등장을 퇴행으로 볼 수 있겠군요.
  
  홍세화 : 그렇게 볼 수 있죠. 퇴행이라고 할 수 있죠. 한나라당의 울타리 안에 있던 냉전보수세력들이 헤게모니를 좀 빼앗겨온 것 아닙니까? 그 세력들이 이제 나서겠다고 하는 거죠. 한편으론 자기들이 망하는 길을 재촉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퇴행이지만 한번쯤은 거쳐야 할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프레시안 : 이회창 씨의 등장을 보수의 분화로 보시는군요.
  
  홍세화 : 수구세력의 분화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회창 씨는 극우적이며 냉전적인 보수죠. 이명박 씨는 울트라 신자유주의자고요. 수구적인 보수세력은 한나라당으로 뭉뚱그려졌는데 거기서도 분화가 이뤄지는 거죠.
  
  프레시안 :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 중 상당수가 현재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일까요.
  
  홍세화 :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경제지상주의적 조류와 맞물리면서 이명박 씨에게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참여정부의 잘못은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실패했다는 겁니다. 개혁의 문화를 조성하지 못했다는 거죠.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나,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풍토를 만들지 못했다는 거죠. 경제지상주의적 가치관으로 보면 노무현 정부나 한나라당이나 박정희 집권 때나 차이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새만금 사업 같은 경우 오로지 경제적인 수치의 문제로만 접근했는데, 그런 기준으로 보면 이명박 씨가 성공한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겠죠. 지금의 40~50대는 20대에 '이 억압에 맞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을 강요받으면서 정치적 동물이 됐고, 나이 들어 외환위기와 같은 시대적 흐름을 거치면서 '경제적 동물'로 축소됐죠. 지금 20대는 그런 과정 없이 '경제적 동물'이 되고 있고요. 결국 모두 경제적 동물이 되어 있는 셈인데, 이들의 가치관으로 보면 이명박 씨에게서 커다란 하자를 발견하기 어렵죠. 노무현 정부에 실망한 사람들이 '결국 누가 해도 마찬가지네' 하면서 '저 사람이 경제는 잘 할 것 같다'고 이명박 씨를 지지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
  
  한나라당이 '삼진아웃' 돼야 하는 이유
  
  프레시안 : 한나라당과 범여권의 차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그 차이를 중시하는 논리의 연장선에서 반한나라당 연합론이 나오는데요. 권영길 후보도 가치연정을 말했죠.
  
  홍세화 : 이거 아주 난처한 질문인데(웃음). 골치 아파요. 아주 난처한 상황인데, 사실 조중동과 한나라당 세력을 삼진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라는 기본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의 처지에서 보면 사태가 제대로 보일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잃어버린 10년' 소리를 계속 해온 세력이 이번에 이렇게 고공행진을 했는데도 집권하지 못한다면 '잃어버린 15년' 소리를 할 수 없다는 거죠.
  
  이 얘긴 뭐냐 하면, 한나라당이 현재의 이념적 지향으로는 집권을 할 수 없다는 게 확인되면, 냉전적 보수는 물론 시장만능주의적인 것과도 일정정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흔히 얘기하는 합리적 보수로의 자리매김이 이뤄지지 않겠느냐, 전망을 해보는 거죠. 그렇게 되면 한나라당과 자유주의 보수 세력의 차별성은 정말 별 게 없어지는 거고, 결국 진보정당의 입지도 강화되지 않겠느냐 생각해보는 거죠. 또 남북관계의 변화로 냉전의식에서 벗어나게 되면 분단 상황에서 진보정당은 들여다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에게 접근이 용이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하고요.
  
  프레시안 :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경우 민주주의가 후퇴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시는군요.
  
  홍세화 : 그렇습니다. 중요한 점을 하나 지적해야 할 것 같아요. 사학법 재개정에서도 드러났듯이 사익추구집단은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아주 집요합니다. 조선일보의 극악함도 마찬가지인데,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얘기하듯이 과거로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까 말한 대로 집권에 실패하게 되면 이제 집요함을 버리고 자기 이익을 챙기는 수준에서 양보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 거죠. 예를 들어 남아공에서 과거사 청산이 일정하게 성과를 거뒀던 이유는 백인정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식이 결국 백인들로 하여금 사회경제적인 기득권을 향유하는 선에서 일정정도 타협을 하도록 강제한 거죠.
  
  프레시안 :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집권이 저지되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강조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60(한나라당)대 20(범여권)대 2(민주노동당)입니다. 현재로서는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데요. 그래서 '진보개혁' 일각에선 단기 승리를 위한 '사술'보다는 '준비된 패배'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지적도 합니다.
  
  홍세화 : 어…(한숨). 준비된 패배라…. 준비 됐건 안 됐건 패배는 안했으면 좋겠어요(웃음). 저는 여전히 기대를 놓지 못하고 있어요. 어쨌건 이명박 씨는 상한선을 그은 거고 이제 내리막길밖에 없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이회창 씨에게도 거품이 있다고 보고요. 제가 주목하는 건 오히려 정동영 씨와 문국현 씨의 지지율 변화예요. 정동영 씨가 계속 정체상태에 머물고, 문국현 씨가 약진하는 모습이 나타나면 기대의 집중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거죠. 한국사회는 짧은 시간에도 변화무쌍하니까요. 그럼 문국현 씨는 어떠냐, 이런 질문이 나오면 골치 아픈데(웃음). 결국은 기대인거죠. 어쨌든 준비된 패배가 아니라 한나라당을 패배시키는, 삼진아웃시키는 가능성을 놓지 못하겠어요.
  
  프레시안 : 문국현 씨가 내세우는 가치나 그가 현재까지 보여준 걸로 추론되는 실력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홍세화 : 참 어렵습니다. 사람은 놀음을 같이 해봐야 안다는데(웃음). 내가 그 분을 알 기회는 없었죠. 그러나 뭔가 기대해볼 만하다는 면에서 단어 하나를 떠올려보면 '품격'이라는 겁니다. 다른 어떤 후보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품격'이라는 게 보이지 않나 싶습니다. 문 후보의 정치철학이나 내공은 검증되지 않았고 지금 검증할 수도 없지만 '품격'이라는 데 이끌리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그 분의 공약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죠. 그러나 공약이야 노무현 대통령도 화려하지 않았습니까. 다 '사기'여서 문제였죠. 문 후보의 정치철학이나 공약이 제 기준에서 미흡하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자신이 내놓은 공약에 대해 오리발을 내밀지는 않는 품격 같은 것에 기대를 걸고 싶은 면도 없지 않죠, 솔직히.
  
  "민노당, 이래서야 무슨 수권능력이 생기겠나"
  
▲ ⓒ프레시안

  프레시안 : 권영길 후보가 고전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소통의 중요성을 각별히 강조하시는데요. 지난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의 활동을 소통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어떤가요.
  
  홍세화 : 우선 민노당이 위기를 맞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지난 총선에서 열 분이 국회에 들어가면서 분위기가 막 떴죠. 당시 민노당이 가장 먼저 한 게 기자실을 크게 만든 겁니다. 홍보를 제대로 하면 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이 있었다고 봅니다. 분단 상황 속에서 진보정당을 잘 모르면서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책개발도 열심히 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당원 상대의 정치에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외연을 확대하려는 노력은 당원을 대상으로 한 정치에 비하면 아주 적었죠.
  
  비근한 예로 2012년 집권을 말하면서도 지역구에 전혀 힘을 기울이지 않았고 정책개발도 미흡했습니다. 저는 비례대표제가 당의 초기 약진에는 기여했지만 나중에는 독약이 됐다고 봅니다. 당의 지도부가 어디를 보느냐가 중요한데, 민중을 보지 않고 당원만 바라보게 됐습니다. 말은 안 해도 비례대표 의석을 바라보는 거죠. 그러는 동안 민중과의 진정한 소통을 위한 노력이나 의지는 실종됐어요. 또 그렇게 내부정치에 몰두하다 보니 정파의 문제에서도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거죠. 정파의 우두머리는 비례대표로 선출되는 데만 매몰되고요.
  
  프레시안 : 비정규직에 비례 2, 3번을 주자고 제안하셨는데요. 당내 반응은 어떤가요. (인터뷰 뒤인 17일 민주노동당은 중앙위원회에서 비정규직을 비례대표 2번에 할당키로 결정했다.)
  
  홍세화 : 잘 모르겠어요. 곧 토론회도 한다고 하는데, 저야 얼마 전에 <레디앙>에 기고한 대로, 말로만 비정규직 얘기하지 말고 선언적이라도 비례대표 2, 3번 줘야한다, 4번부터는 전략공천 해야 한다, 8번까지는 2004년에 획득한 것이기 때문에 당 지도부들은 넘볼 게 못된다, 당 지도부가 역할을 했다면 9번부터 자격이 있는 거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죠. 평당원 주제에 마구…(웃음).
  
  프레시안 : 선생께서는 지역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 민주노동당에겐 계급정치 역시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노동당을 떠받치는 골간이 민주노총과 전농 같은 대중조직인데요. 이들 조직이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대표성을 갖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대중을 폭넓게 포괄하지 있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민주노총 위기론도 나오는 것일 테고요. 민주노동당이 보다 폭넓게 노동자, 농민과 소통하려면 민주노총과 전농에만 기대는 활동방식에서 벗어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홍세화 : 어렵죠. 민주노총은 잘 아시다시피 대기업 노조 중심입니다. 한국 산업구조의 영향 때문이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균형으로 인해 노조 조직률 같은 게 대기업 중심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죠. 이건 일종의 한계인데, 이 한계를 뚫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한계를 뚫고 나가기 위해서도 지역 기반의 활동이 모색돼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마포지역위원회와 문화연대, 마포지역 단체들이 '민중의 집'을 해보자고 해서 저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민중들이 만나서 문화적 프로그램을 향유하고 같이 교육도 하는 공간을 모색해보자는 취지죠.
  
  제가 또 강조하고 싶은 건 학습입니다. 학습을 너무 안 합니다. 우리 사회 노동자들은 노동자 의식이 없는 게 아니라 반노동자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고 변화시키려면 다른 것보다 학습을 해야 하는데 공부를 안 합니다. 대충 다 알고 있다고 믿는 거죠. 아까 2004년 총선 끝나고 기자실 크게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것보다 연수공간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는 거죠. 학습도 안 하는 당이 무슨 진보정당이냐,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평당원은 평당원대로 학습과정이 있어야 하고 간부는 간부대로 학습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진보정당이 자기 나름의 역할을 하려면 유럽의 정당처럼 지적인 역량을 갖춰야 합니다. 그런 게 섀도우 캐비닛하고도 연결돼야 하는 건데 그런 게 없습니다. 이래가지고야 무슨 수권정당의 가능성이 있겠느냐, 그런 생각도 드는 겁니다.
  
  학교교육의 민주주의가 관건
  
  프레시안 : 선생의 칼럼에는 이 시대의 지배적 정서를 나타내는 말로 '불안'이라는 어휘가 자주 등장합니다. 얼마 전 '이 땅의 교사는 분노를 모르는가' 칼럼에서 "20 대 80으로 양극화된 사회,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존 조건을 각개약진으로 해결해야 하는 사회에서 구성원을 지배하는 것은 불안"이라는 통찰이 인상적이었는데요. 불안이 깊어질수록 "사회구조를 혁파하려는" 노력보다는 "로또복권에 매달리듯 엷은 가능성에 절망적으로 매달리는" 경향이 강해지는 듯 합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홍세화 :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은 주체적으로 형성된 게 아니고 주입된 의식인데, 의식화의 주체는 학교권력을 장악한 국가권력과 대중매체를 장악한 자본이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학교매체와 대중매체의 조합에 지나지 않은 의식세계를 갖고 있으면서 그걸 고집하는 거죠. 이런 것을 보게 해 주는 게 교육입니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의식세계를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학교 교육의 민주주의를 관철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가령 교장제도만 해도 일제 때 시작된 건데 아직 그대로 관철되고 있어요.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시민을 형성하는 게 아니죠. 일제 때 타율적인 질서의식을 의식화했던 걸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학교에 주목하고 교육 문제에 주목하는 거죠.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사회비판의식을 형성할 수 있을까. 그건 학교 교육을 통해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대중매체를 통해서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특별한 계기가 항상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학교 교육과 대중 매체를 통해 형성한 자기의식에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계기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 계기가 된 게 70년대 이후에는 주로 선배였습니다. 선배가 책을 같이 읽자고 하면 선후배간이라는 특수한 인격적 관계 때문에 내치지 못하고 따라갔던 거죠. 그렇게 실제 책을 읽어 보고 나서 '아 이게 아니네' 하면서 그때까지 형성한 의식을 벗어내는 것이 가능했죠.
  
  그런데 지금은 그 선배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학교 교육의 현장이 더욱 중요하게 된 거죠. 학교 현장 자체가 비판적 안목을 키워줄 수 있는 곳이 돼야 하는 상황입니다. 과거처럼 따로 교정할 거처와 기회가 없는 거죠. 진보세력보다 냉전보수세력이 학교의 중요성과 전교조의 역할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교조를 약화시키고 주변화 시키는 데 집요한 겁니다.
  
  "살아 있는 동안 무상교육, 무상의료만 가능해도 행복하겠다"
  
▲ ⓒ프레시안

  프레시안 : 교육문제가 나온 김에 묻겠습니다. 최근 정동영 후보가 입시폐지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내신으로 학생을 선발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인데요. 민주노동당은 제대로 된 입시폐지 공약을 갖고 있으면서도 '입시폐지'란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정 후보에게 선점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레디앙> 기사에 따르면 당 정책위의장이 "교육운동 일부에서 '입시 폐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이유로 '입시폐지' 슬로건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홍세화 : 한심한 얘기죠.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런 식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게 참 답답합니다. 결국 입시폐지도 정동영 씨에게 내준 꼴이 된 거고요. 참 얘기하기 싫어요(웃음). 다만 정동영 씨 공약이 산뜻해 보이지만 내용이 없다는 건 분명한 거고요. 대학서열화를 그대로 놔둔 상태에서 입시폐지를 한들 사교육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거며 내신을 올리기 위한 엄청난 로비와 부패를 어떻게 감당할 겁니까. 내건 건 산뜻했지만 내용은 반쪽짜리입니다.
  
  프레시안 : 조금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이 했다는 얘기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입시폐지'라는 말이 대중에게 거부감을 줄까봐 걱정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해봅니다. 대중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과격한 구호라고 판단한 게 아닌가 싶은 거죠.
  
  홍세화 : 너무 과격해서? 한국의 교육현실이 과격한 것을 요구하고 있죠.
  
  프레시안 : 정동영 씨가 '입시폐지'를 들고 나온 것도 그래서겠죠. 실제 내용물보다 더 과격한 포장을 해가면서요.
  
  홍세화 : 진보정당이 스스로 위축되는 면이 분명히 있죠.
  
  프레시안 : 위축이 선택적으로 나타나서 문제인 것 같은데요.(웃음)
  
  홍세화 : 선택적으로?(웃음)
  
  프레시안 : 지금은 메인 슬로건이 아닙니다만, 권영길 후보가 처음에 들고 나온 게 '코리아연방공화국'이었습니다. 대중들의 반응은 그리 신통치 않았는데요. 차제에 진보진영의 대북정책 및 통일정책 전반에 대한 점검과 반성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대중과의 소통이란 기준에서 말이지요. 선생께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홍세화 : 그건 말 안 할랍니다. 뻔히 아는 얘기를 왜 물어봐요?(웃음)
  
  프레시안 : 민주노동당은 사회의 진보를 말하지만 정작 민주노동당 내부의 구조는 그리 진보적이지 않은 듯 합니다. 외려 사회 전반의 평균적 합리성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아닌가, 느껴질 때가 많은데요. 각종 회계문제나 당직자들 급여문제, 당내 노조를 대하는 지도부의 태도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역설적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홍세화 : 어려운 질문 계속하시네(웃음).
  
  프레시안 : 기존의 국가모델 가운데 선생께서 생각하는 바람직한 국가모델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요즘 사민주의 모델에 대한 얘기가 당 안팎에서 나오고 있는데요.
  
  홍세화 : 저야 물론 북유럽 사민주의죠. 일단 사민주의라도 됐으면 좋겠어요. 제가 살아있는 동안 무상교육, 무상의료만 가능하다고 해도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상교육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람의 의식을 바꾸는 겁니다. 얼마 전 칼럼에서도 썼지만, 무상교육에 의해 의사가 된다고 하면 한국의 의사들하고는 전혀 다른 멘탈리티를 가질 수 있을 겁니다. 사회 비용으로 의사가 됐기 때문에 사회에 되돌려 준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거죠. 의사뿐이겠습니까. 무상교육은 사회적 연대의 실현입니다. 아이들 스스로 알게 모르게 연대의식과 사회 환원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인간관계가 파괴될 때 더불어 사는 제도를 만드는 건 대단히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프레시안 : 선생께서는 올 초 칼럼에서 우리 사회의 물신주의적 가치관을 개탄하면서 "사회 구성원의 의식이 바뀌어야 제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제도 변화는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현재의 사회적 세력관계로 보면 제도 변화라는 게 참 쉽지 않아 보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홍세화 : 쉽지 않죠.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죠. 집요해야 합니다. 집요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고, 무엇보다 겸손해야 합니다. 단순한 품성의 얘기가 아닙니다. 절대 포기해선 안 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회구성원의 의식을 한꺼번에 바꾸는 것이 혁명인데, 지금 한국 자체의 역량으로 그것을 기대할 수 있느냐, 어렵다고 봅니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와 달리 정보의 흐름에 대한 지배와 통제가 강화된 지금 소수에 의한 변혁은 불가능합니다. 해외에서 과거의 68 혁명과 같은 게 일어나서 우리나라에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하기도 힘듭니다. 일부에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를 말하지만 남미만 해도 주변부여서 우리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결국 다른 길은 없습니다. 기동전이건 진지전이건 전방위적으로 성실하게 해나갈 수밖에 없지 않겠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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