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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평전〉
김호웅 김해양 엮어지음/실천문학사·1만5000원
<항전별곡>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태항산록> <최후의 분대장>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20세기의 신화>…. 1980년대 후반 이태의 <남부군> 열풍이 불었던 민주화 질풍노도시대 무렵 시작해 1990년대 냉전붕괴 이후 본격적으로 이땅에 소개된 재중 동포작가 김학철의 작품들은 그때까지 ‘좌익금기’에 속박당했던 한국의 문학지형을 흔들고 현대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평론가 김윤식 교수는 “조선의용군의 일단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이유로 중국공산당의 집결지 태항산까지 넘어가게 되었는가를 증언하는 기록은 김학철의 것이 유일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학철은 그 자체가 역사요, 기구한 한·중·일 현대사의 광대한 미발굴 지층 탐사의 한 이정표다.
도대체 조선의용군이란 존재 자체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 항일전쟁 시기 나라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빛나는 ‘국제 전우’들이었던 그들은 남북한 역사 모두에서 배반당했다. 중국마저 한때 그들 다수를 우파반동으로 몰아 모질게 박해했다. 김학철은 거기에 초지일관 저항했고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아 당당하게 그 시대를 증언했다. 2001년 9월 50여년 외다리로 버텨온 몸이 더는 가망이 없다는 걸 확인한 85살의 노작가는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연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는 유서를 써놓고 21일간 단식 끝에 세상을 떴다. 시종 꼿꼿했다. 말년의 김학철과 가깝게 지냈던 연변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김호웅(54) 소장이 연변공회간부학교 교장 등을 지낸 김학철의 외아들 김해양(59)씨와 함께 쓴 <김학철 평전>(실천문학사)은 그런 김학철의 생애와 그의 시대를 종합적으로 재구성하고 의미를 되새긴다.
팔로군 조선의용대로 일제와 싸우고
남·북·중 모두 비판한 마르크스주의자
타협을 모르던 인생과 작품 되돌아봐
신실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 김학철은 4년간의 나가사키 형무소 복역 뒤 1945년 광복과 함께 출소해 서울에서 정치활동과 작가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민족의 태양’이니 ‘위대한 은인’ 따위 치졸한 수식어들과 함께 개인숭배로 치닫던 박헌영과 스탈린, 김일성 세력에 절망하고 그들과 불화했다.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1946년 북으로 탈출한 그는 <노동신문> 기자가 됐으나 ‘누가 건설을 파괴하는가’라는 비판적 기사를 썼다가 밀려나 외금강휴양소 소장, 인민군 전신인 민족군대 신문 주필로 돌다가 전쟁이 터지고 미군이 북진하자 중국으로 가 눌러앉는다. 북에 남았던 김두봉 한빈 정률성 왕련 등 항일전장 동료 선후배들과 어머니, 누이 가족은 모두 숙청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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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펜으로 시대와 싸웠던 ‘마지막 조선의용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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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중화전국문학공작자협회 연구원을 거쳐 1952년 연변자치주 문학예술계연합회주비위원회 주임직을 맡아 연길로 간 김학철은 곧 전업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57년 ‘제왕’이 된 마오쩌둥의 정풍운동·반우파투쟁에 휘말려 우파분자로 숙청당했고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 때 개인숭배와 극좌교조주의를 비판한 <20세기의 신화>가 반동죄에 걸려 징역 10년형을 받는 등 당적(1940년에 중국공산당 입당)을 박탈당하고 무려 24년간 유배당했다. 1980년 복권(당적 복귀는 1989년)한 뒤 이듬해 65살 때부터 창작활동을 재개해 잃은 시간을 벌충하듯 20년간 일로매진했다.
권력과 불의에 맞서 사투를 벌인 이런 후반생 못지않게 침략자에 대들었던 1945년까지의 전반생도 극적이다.
서울 보성고에 다니던 시절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폭탄거사에 충격받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감동받아 총으로 나라를 되찾겠다며 1935년 19살 나이에 중국으로 탈출했고, 의열단과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황포군관학교, 국민당군 소속 조선의용대를 거쳐 팔로군 아래로 들어가 조선의용군 허베이지대 제2대 분대장이 됐다. 1941년 호가장 전투에서 일본군 총탄에 왼쪽다리를 맞고 붙잡혀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돼 전향서 쓰기를 거부하다 3년 6개월 동안 다리 치료 못받아 결국 잘라냈다.
드문 반골기질이다. 루쉰을 사표로 삼아 자신을 엄격히 규율한 그는 자유와 정의를 위한 길에서 한치도 타협하지 않았다. 왕후이 칭화대 교수는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에 어떻게 유효하게 저항하고 그것들을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아시아 근대의 역사적 과제를 풀고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하는 데 김학철 문학이 긴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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