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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진2] ‘조동진 사단’엔 세월이 머무네


언더그라운드 음악 대부에서 은둔자 시인으로… 새로운 음악의 흐름 소화하며 언제나 그 자리에

신현준/ 대중음악 평론가
출처:<한겨레21> 제496호(h21.hani.co.kr)



1980년 상처 입은 사람들을 조용히 위무한 노래 하나가 발표되었다. <나뭇잎 사이로>라는 조동진의 두 번째이자 최고의 히트곡이었다. ‘나뭇잎’과 ‘가로등’과 ‘너의 얼굴’과 ‘지붕들’과 ‘하늘’과 ‘사람들 물결’이 등장하면서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땅으로 시선이 교차하는 이 곡은 시적이고 회화적인 이미지를 동반하면서 1980년의 복잡한 정서를 적확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늘 정치적으로 초연했던 이 곡의 주인공이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 1980년대 초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대부’로 불리기 시작할 무렵의 조동진.

상처 입은 영혼에 한줄기 햇살을…

그 뒤로 그는 의도하지 않게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대부’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방송에 나가 아부하지 않으면서 뜸하게 음반을 발표하고 콘서트만 열면서도 음악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그때까지 누구도 개척하지 못한 길이었다. 1981년 10월 숭의음악당, 1986년 5월 미리내극장에서의 ‘조동진 콘서트’는 이후 소극장 라이브 공연의 붐을 이루는 기폭제였다. 그 전부터 이미 ‘조동진의 집’은 최성원·전인권·이영재·이승희·하덕규·함춘호·허성욱·이병우 등이 들락날락하는 아지트가 되었다. 물론 조동진의 가장 가까운 후배는 그의 친동생 조동익(1960~)이었다. 조동진의 2집에 수록된 <어떤 날>의 작곡자이자 1980년대 중반 이병우와 함께 듀엣 ‘어떤날’을 결성해 활동한 바로 그 조동익이다.

광화문에서 음반소매상을 경영하던 김영이 음반 제작에 뛰어들면서 조동진 사단의 일원들은 김영의 동아기획에서 음반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조동진 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85년 들국화의 음반이 대박을 터뜨리고 뒤에는 김현식·한영애·신촌블루스·봄여름가을겨울·푸른하늘까지 합류하면서 동아기획은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본산이 된다. 이 이야기는 꽤 복잡하고 다양하니 다른 인물들을 다룰 때 하도록 하자. 이 모든 이야기의 신호탄이 <제비꽃>이 수록된 조동진의 세 번째 음반(1985)이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 지난 1월 말 LG아트센터에서 열린 ‘조동진 음악회’를 앞둔 조동진.

그렇지만 이 무렵 조동진의 이전 음반들이 여러 음반사에서 어지럽게 발표되었고 편집음반들도 시중에 나뒹굴었다. 비즈니스를 맡은 사람이 계약관계를 매끄럽게 하지 못한 결과였다. 조동진이 자신의 권리를 찾는 방식은 1집과 2집 음반을 다시 녹음하는 것이었고, 1986년에 ‘재녹음 음반’이 발표되었다. 이 음반부터 조동진의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인들은 강근식·조원익·이호준 등의 베테랑에서 이병우·조동익·김광민 등의 (당시로서는) 젊은 음악인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한 음악인이 세대를 이어가면서 하나의 계보를 만든 드문 경우였다.

동아기획이 주류에 진입한 뒤 조동진은 자기 발로 서는 작업을 추진했다. 1980년대 후반 조원익이 문예부장으로 근무하던 서울음반을 통해 자신과 후배들의 음반을 발표했지만, 1992년에는 음반산업에 진출한 한 대기업의 투자를 받아 전문 프로덕션인 ‘하나음악’을 탄생시켰다. 조원익이 비즈니스를 전담하고 ‘사단장’ 조동진과 ‘야전사령관’ 조동익의 휘하에 장필순·한동준·권혁진·이소라·박용준·고찬용·조규찬·신진 등이 모여들었고, 이들 가운데 몇몇은 엉클·더 클래식·낯선 사람들 등의 그룹으로 활동하면서 몇몇 히트곡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들의 면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 1989년부터 개최된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는 조동진 사단과 하나음악의 식구들을 재생산하는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

상업성 잃고 변방으로 밀려날지라도

그렇지만 한국에서 방송에 의존하지 않는 음악인들의 설 땅은 넓지 않았고, 시간이 가면서 하나음악은 재정적 어려움에 빠진다. 199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의 판세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안다면 그 이유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결국 하나음악은 1995년께 일단 해산되었다가 1997년 서초동에 스튜디오를 마련하여 다시 모였지만 몇년 뒤 합정동으로, 그 뒤에는 다시 일산으로 이사하면서 중심부에서 멀어졌다.


조동진 (아세아, ALS-1000, 1983) 조동진 <슬픔이 너의 가슴에/제비꽃(3집)>(동아기획/태광음반, VIP-20015, 1985) 조동진 <일요일 아침/당신은 기억하는지(4집)>(서울음반, spdr-231, 1990) 조동진 <조동진5>(킹 레코드, KSC-6033 SA, 1996) 조동진 (신나라뮤직, KSC-A0002, 2000)

그사이 조동진의 음악은 더 느려지고 더 우울해졌다. 4집(1990)과 5집(1996)에는 한번만 들어도 귀에 착 감기는 ‘히트곡’은 없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슬프도록 아름다운 곡들로 채워졌다. 또한 변칙 조율을 이용해 만들어낸 기타 연주는 그 자체로 서정적이었다. 또한 후배들과의 일상적 교류를 통해 ‘퓨전 재즈’나 ‘모던 록’ 등 새로운 음악적 흐름도 능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고 있다.

이렇게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으면서도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음악인의 섬세한 노력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을까. 1995년 이후 조동진이 더 이상 새로운 정규 음반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간접적인 답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그의 공적 활동으로는 1997년 세종문화회관에서의 합동공연, 2000년 예술의전당에서의 공연, 그리고 지난 1월 말 LG아트센터에서 개최한 공연 등이 전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사이에도 그와 하나음악 후배들의 재정적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대중음악계 장인

그래서인지 최근 그의 모습은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은둔하는 가난한 시인 같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때문인지 어쩌다가 무대에 오른 그의 모습은 그 나잇대의 다른 사람들이 발휘하지 못하는 ‘아우라’로 가득하다. 이는 이런저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속칭 ‘삐딱선’을 타지 않고) 자신의 길을 올곧게 걸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후배 연주인들과 함께 들려주는 음향도 오랫동안 공동체를 이루어 음악 세계를 가꾼 집단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나는 이 점이 그가 셰그린이라는 ‘커버 밴드’와 동방의 빛이라는 ‘세션 밴드’를 거친 것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가 마음 편히 노후를 보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그뿐만 아니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을 이 사회가 어떻게 대우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대우와 무관하게 조동진은 특유의 ‘느리지만 진지한’ 행보를 계속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듯하지만, ‘아침 기차’를 타고 ‘바다’로 흘러가서 ‘작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등 부단히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P.S. 하나음악은 2003년 옴니버스 음반 <꿈>을 발표한 데 이어 올해에는 재즈 연주그룹 ‘더 버드’(The Bird)와 모던 록 싱어송라이터 ‘이다오’의 독집을 준비하고 있다. 이 음반들을 포함하여 하나음악에서 제작한 모든 음반에서 조동진은 프로듀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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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진1] 그윽한 소리, 강렬한 울림


낮고 느리고 간결한 목소리로 비주류 포크 일궈… 록에 음악적 뿌리 두고 기타 반주자로도 활약


새해를 맞이했으니 ‘운수풀이’식으로 글을 시작할까 한다. 물론 심심풀이 이상은 아닌데, 한국의 음악인들 가운데 거물급들이 몰려서 태어난 해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번에는 1947년 돼지띠 해에 태어난 사람들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이해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1970년대 싱어송라이터(자작곡 가수)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해방정국의 소용돌이에서 태어나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경험이 오히려 예술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한 것일까. 아무튼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오세은, 그리고 조동진이 ‘1947년생’이다.



△ 1971년 1월 솔로 데뷔 무렵 한 주간지에 나온 조동진.

47년생 싱어송라이터 대열에 합류

조동진을 ‘포크 가수’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그를 포크의 영향을 받은 싱어송라이터라고 묘사하는 것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흔한 ‘통기타 가수’와는 무언가 다른 비범함을 가지고 있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이 미사리 등지의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고 있는 반면, 그는 몇년 만에 한번씩 음반을 발표하고 공연을 한다. 무거운 침묵 뒤에 나직이, 그렇지만 강렬하게 말 한마디를 던지는 고수 같은 모습이다.

그러니 조동진을 ‘악사열전’에서 다루는 것은 조금은 번지수가 틀린 일이다. 나중에 ‘작가열전’이나 ‘가수열전’을 하게 된다면 그때 더 어울릴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세히 모르는 일이 있다. 그것은 그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 중반부터 ‘보컬 그룹’ 혹은 ‘그룹사운드’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대광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친구들끼리 그룹을 만들어 전기기타를 연주하면서 교내 행사 때마다 무대에 섰다. 1972년 한 주간지가 그를 “1인의 그룹사운드”라고 묘사한 것이나, 시나위의 신대철이 “조동진 형의 곡을 밴드가 연주하면 곧바로 록 음악이 된다”고 말한 것은 조동진의 음악적 뿌리를 잘 묘사해준다.



△ “차나 한잔 하지….” 경기도 일산의 자택 근처 카페에서 인터뷰할 때 모습.

조동진의 부친은 영화감독 조긍하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것이나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것도 부친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그는 그룹에 가담하여 미8군 클럽과 종로의 우미회관 등의 무대에 섰다. 이 시절 황규현, 이태원, 전언수 등과 결성한 5인조 그룹 ‘더 셰그린’(The Shagreen)에서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도 불렀다는 일은 전설 같기만 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들 가운데 황규현은 1969년 솔로 가수로 ‘전향’해 <애원> 등을 히트시킨 솔 가수가 되었고, 이태원과 전언수는 ‘쉐그린’이라는 이름으로 포크 듀엣을 결성했다.

셰그린을 마지막으로 그룹에서 연주하는 생활을 그만두면서 그는 학교도 그만뒀다. 팝송을 모방하는 일보다는 “무언가 나의 것을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가장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음악”이었다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신촌 로터리에 있는 카페 ‘비잔티움’에서 아르바이트로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한때 물 좋고 잘나갔다는 나이트클럽 ‘우산속’이 있던 빌딩에 함께 있던 커피숍이다. 그때 그곳을 찾았던 사람이라면 비틀스의 , 롤링 스톤스의 , 비지스의 같은 노래를 부르는 키가 큰 장발의 청년을 보았을 것이다.

5인조 그룹 활동… ‘우리 것’을 찾아서

때는 마침 ‘통기타 포크송’의 전성시대였다. 조동진 역시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민기, 양희은 등과 어울렸지만, 그는 ‘쎄시봉’에서 ‘오비스 캐빈’으로 맥을 이어가던 포크송의 주류와도 거리가 있었다. 그 대신 그는 나현구가 경영하던 뚝섬(성수동)의 오리엔트 스튜디오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작곡을 하면서 ‘기타 반주자’로 활동한다. 1972년경부터 그가 작곡하고 기타를 연주한 곡들이 다른 가수들의 목소리로 녹음되기 시작했다. 1968년에 만든 <마지막 노래>는 서유석, 김세환, 현경과 영애, 이수만(!)이 불렀고, 1969년에 만든 <작은 배>(작사는 시인 고은)는 양희은이 불렀다. 서유석은 <긴 다리 위에 석양이 걸릴 때>를 불렀고, 김세환은 <그림자 따라>를 불렀고, 윤형주는 <작은 불 밝히고>를 불렀고, 송창식은 <바람 부는 길>을 불렀고, 최헌과 투 코리언스(김도향·손장철)는 <들리지 않네>를 불렀다. 조동진은 자신의 목소리로 <작은 배>를 녹음했다. 이 당시 그의 목소리가 녹음된 것으로는 유일한 이 음원은 라는 ‘옴니버스 음반’에 실려 있다.


송창식·조동진 외 〈Golden Folk Album vol.5〉(오리엔트/대도, 1974. 조동진 〈행복한 사람/불꽃(1집)〉(대도, DSAP-79001, 1979). 조동진 〈어느날 갑자기/그(2집)〉(한국음반 HC-200089, 1980. 조동진 〈조동진 1(재녹음)〉(문화레코드, MHKL-0002, 1986). 조동진 〈조동진 2(재녹음)〉(서라벌, VIP-20026, 1986).

한편 그는 강근식(기타), 조원익(베이스), 이호준(키보드), 유영수(드럼), 이영림(퍼커션) 등과 함께 오리엔트 스튜디오의 전속 밴드인 ‘동방의 빛’에서 리듬기타를 맡았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킹 크림슨(King Crimson) 등의 ‘프로그레시브 록’을 추구했다는 이때의 실험은 <어둠 속에서>(1980) 같은 조동진의 숨겨진 명곡에서 다시 한번 발휘된다(이 당시 동방의 빛의 ‘증거물’로는 송창식의 공연에서 <딩동댕 지난 여름>을 연주한 불완전한 음원이 남아 있다. 물론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수고를 해야 한다). 군대 문제로 인해 조동진이 동방의 빛에서 활동한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이때 맺은 인맥은 뒤에 그가 솔로로 활동할 때 든든한 힘이 된다.

1975년 말 대마초 파동으로 오리엔트 프로덕션(‘나현구 사단’)이 풍비박산이 난 뒤 조동진은 더욱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본인의 표현대로 “조국 근대화와 독재타도의 틈바구니에서 슬쩍 비껴나온 나 같은 장발족”이 설 땅은 협소했다. 그처럼 실내에 칩거하면서 내면의 세계를 가꾸는 사람으로서는 더욱 견디기 힘든 시간이 흘러갔다. 후배 이정선의 음반에서 세션으로 기타를 연주해주거나, 강근식이 설립한 CM송 프로덕션 ‘강 프로’에서 CM송을 만들거나 엔지니어를 맡았지만 가장으로서 생계를 해결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라디오 강타한 ‘자연뽕’을 아시나요

결국 “가족 전체가 거리에 나앉을 판이 되었을 때” 그의 정규 데뷔 음반이 발표되었다.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사원이었던 구자영(뒤에 ‘진양 오디오’의 대표)이 제작을 맡고, 강근식과 조원익 등 동방의 빛 멤버들의 도움을 받아 녹음한 음반은 1979년 <행복한 사람>을 타이틀곡으로 삼아 소리 소문 없이 발표되었다. 홍보도 없었고 공연도 없었지만 <행복한 사람>은 라디오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오는 히트곡이 되었다. 업계 용어로 ‘자연뽕’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이 곡은 김세환의 목소리로 녹음한 적이 있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발표하지 못했다. 다른 가수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므로 정작 조동진은 이 곡을 타이틀곡으로 내세우는 것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10년의 내공이 담긴 10개의 곡은 하나도 버릴 것 없이 정갈하고 완벽한 작품이었다. <나뭇잎 사이로>를 수록한 2집 음반(1980)과 더불어 그의 음반은 1970년의 종언과 1980년대의 시작을 알려주는 듯했다. 실제로 그랬다.

추신- 1월30일부터 2월1일까지 서울 LG아트센터에서 ‘2004 조동진 음악회’라는 소박한 이름의 공연이 열린다. 이 글이 그의 공연을 ‘홍보’하는 내용이 되는 것은 나로서는 그다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
출처:<한겨레21> 494호 2004/01/29 (h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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