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 거부한 애정의 경제학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존 러스킨 지음·김석희 옮김/느린걸음·1만2000원

한승동 선임기자 / 그림 느린걸음 제공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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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존 러스킨 지음·김석희 옮김/느린걸음·1만2000원


영국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의 혁명적 사상
부는 ‘제로섬’…‘정의와 애정’이 최선 낳아
“생명 향한 열망 담아야 진짜 경제학” 역설


〈신약 성서〉 마테오복음 20장에 포도밭 일꾼 얘기가 나온다. 포도밭 주인이 이른 아침에 일꾼들에게 1데나리우스를 주기로 하고 포도밭 일을 시켰다. 주인은 아홉 시와 열두 시, 그리고 오후 세 시쯤에도 일꾼들을 각각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저녁에 일삯을 주는데 모두 1데나리우스씩 주자 일찍 시작해 긴 시간 일을 한 사람들이 불평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중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구여, 나는 너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데나리우스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너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

산업혁명으로 최성기를 구가하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비평가요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1819~1900·그림)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느린걸음)에서 애덤 스미스에서 토머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진 자본주의 정통 경제학의 전제조건들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는 고용주와 노동자를 포함한 경제 주체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정의와 애정”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당사자가 저마다 자기 이익을 꾀한다고 가정”(밀)하면서, 이기적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손”(스미스)의 역할을 낙관한 정통 경제학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정통 경제학자들은 예컨대 집주인은 가능한 한 하인들이 빈둥거릴 짬을 주지 않고 그들이 견딜 수 있는 한도 내의 빈약한 음식과 형편없는 방을 주고 다른 데로 떠나가지 않을 한도 내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며 매사에 한계점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주인과 사회, 나아가 하인에게도 최대의 이익을 안겨주는 합리적인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스킨은 기계와 달리 “영혼을 동력으로 삼는” 하인이 최대한 많은, 질 높은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은 보수나 강한 압력이 아니라 의지나 정신, 친절과 신뢰, 정의, 공평무사, 한마디로 애정이라고 말한다. 공장주와 노동자, 장교와 병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러스킨은 숙련 노동자와 미숙련 노동자에 대한 보수도 같아야 한다며, 의사나 교회 목사에 대해서는 그들 솜씨가 좋든 나쁘든 똑같은 사례를 지불하면서 노동자들에겐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노동력에 대한 대가에 차등을 두게 될 때 미숙련 노동자가 싼 값으로 숙력 노동자의 자리를 빼앗거나 임금을 깎아내리고 무한경쟁에 돌입함으로써 대다수가 망하는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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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버나드 쇼가 카를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혁명적”이라고 했다는 러스킨 사상의 급진성은 부(富)에 대한 그의 생각에 집약돼 있다. 러스킨은 일정한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면 누구나 다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근대경제학자들의 절대적 개념의 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 부는 제로섬과 같다. 누구 주머니에 든 1기니라는 돈의 힘은 이웃의 주머니 속에 1기니가 없다는 사실과 그 이웃이 돈을 원한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부자가 되는 기술은 재산을 모으는 기술일 뿐만 아니라 이웃이 자기보다 적게 소유하도록 획책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자신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불평등을 확립하는 기술인 것이다.”

러스킨은 식민지경영과 불평등 교역을 통해 전세계로부터 부를 빨아올리며 자연을 파괴·오염시키며 국가간, 그리고 국가내 차별과 불평등을 심화시켜가던 대영제국의 작동방식과 그것을 뒷받침한 근대경제학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비판했다. 나라 안팎을 넘나드는 주식투자와 신종 펀드들이 난무하고 부동산 투기 등 ‘재테크’가 일상화한 21세기 한국사회는 당시 영국사회와 닮은 구석이 많다. 그런 재테크는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부의 이전과 집중에 따른 불평등을 창출한다. 그것은 내부 양극화뿐만 아니라 전세계 차원의 국가간·지역간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강자들간의 도박게임과 같은 속성을 지닌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나오기 7년 전에 발간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말하자면 150년 전에 거기에 이의제기를 한 것이다.

근대경제학은 그런 불평등을 긍정한다. 그 바탕 위에서 각자 최대의 이익, 이윤을 짜내는 걸 정당화한다. 오늘날 세계와 한국사회를 풍미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그 연장이자 필연적 귀결이다.

러스킨에게 “진짜 경제학”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그리고 파멸로 이끄는 물건을 경멸하고 파괴하도록 국민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자립적 소농경제 쪽을 지향한 마하트마 간디가 러스킨한테서 큰 영향을 받았던 것도 이 부분일 것이다. 자본도 “생명에 유용한 어떤 물건을 공급하느냐, 생명을 보호하는 어떤 구조물을 짓느냐”를 기준으로 봐야 하며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자본의 증식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그런 자본은 아예 없느니만 못하다. “가장 부유한 나라는 최대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사람을 양성하는 나라이고,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기능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여 그 인격과 재산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 (오렌지색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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