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민주노동당, 다시 광야에 서라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장·전 민주노동당 의원
출처 : <경향신문> 2007-12-24


71만2121표. 참담한 대선 결과를 두고 민주노동당 당원으로서 고통스럽다. 필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당원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이 당이 어떻게 만들어진 당인가? 오늘의 민주노동당이 있기까지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방울과 피눈물, 심지어 목숨까지 내걸었던가?

-‘71만표’ 심판의 의미 알아야-

지금의 민주노동당은 2000년에 창당한 신생정당이 아니다. 지난 19일까지 민주노동당은 국민들이 2004년 총선에서 원내 10석으로 만들어 준 희망이자 그들의 고단한 삶을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 그런데 19일을 기점으로 국민들은 민주노동당을 71만2121표 정당, 정규직당, 친북당, 회계부정 공모당, 자기들끼리 싸우는 당으로 확인시켜줬다. 이 꼬리표가 최소한 5년은 갈 것 같다. 어쩌면 더 길어질 수도 있고, 또 어쩌면 한국 정치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나마 위안을 삼는 것은 당 외부의 지식인과 전문가들이 당에 대한 애정 어린 질책과 주문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작 민주노동당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은 아직 침묵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를 포함하여 모두 원칙적이고 무난한 립 서비스만 하고 있다. 제도권에, 그리고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것이라고 결코 믿지 않고 싶다. 민주노동당의 말세에는 왜 예언자가 나서지 않는 걸까? 다시 절망이 밀려오는 순간이다.

71만2121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으로 다시 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정당으로 할 것인지 하는 문제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있다.

북한의 군사 왕조정권을 보위하고, 북한식 사회주의로 통일하는 것을 자신의 최고 임무로 하는 세력과는 진보정당을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허한 원칙주의와 갈라치기로 자기만족적인 운동을 해온 이른바 좌파의 철저한 반성 없이는 진보정당은 가능하지 않다. 사회주의든 사회민주주의든 한국적 토양과 국민들의 구체적인 삶에 기반하지 않는 그 어떤 노선도, 주의도 의미가 없다. 민주노총의 배타적 방침에 안주하여 돈과 표를 얻는 대신 그들의 잘못에는 침묵하는 비겁한 거래를 중단해야 한다. 조직노조 운동을 올바르게 세우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변하는, 사회연대를 추진하는 정당이어야 한다. 지구온난화에 대비하고 생태적 생활방식의 삶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이주노동자의 제한 없는 기본권 확보를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면 진보일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진보다운 진보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진보다운 진보정당이 지금의 민주노동당이라는 틀 안에서 가능할 것인가? 우리 스스로 반성하고 고칠 자세가 되어 있는가? 이것을 판단하면 된다.

-처절한 반성 없인 ‘진보’ 없다-

위기가 기회라고 했던가? 상상을 해보자. 만일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적당히 표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아마 적당히 싸우고 대충 반성하는 척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나아갔을 것이다. 선거 결과를 되짚어보면 우리 국민들이 눈물나게 고맙다. 그 현명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국민들은 표로써 민주노동당에 회초리를 들면서 새로운 길로 가라고 가르쳐 준 것이다. 이것을 민주노동당 당원들과 지도자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퇴장해야 한다. 최소한 앞으로 이 극단의 이윤추구와 경쟁이 압도하는 사회를 거부하고 떨쳐 나올 세대들에게 걸림돌이 되지는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