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철학자…’ 김상봉 교수 “삼성의 협박에 끌려다녀선 안돼”

글 손제민·사진 박재찬 기자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26일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 2007년이 저물어가는 한국사회에서 철학자들이 발언하기 시작했다. 참여연대 느티나무 카페에서 이용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의 삼성 뇌물 500만원 폭로가 있었던 그 날(11월19일).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앞에서는 전국의 철학자들이 ‘전국 철학자 앙가주망 네트워크(PEN)’의 이름으로 삼성 특검법 도입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 참여한 철학자는 210명이다. 김남두 서울대 교수, 유초하 충북대 교수, 홍윤기 동국대 교수, 박상환 성균관대 교수, 강신익 인제대 교수, 신승환 가톨릭대 교수 등 참여자들의 면면은 한국 철학계를 이끄는 주축들이다. 이 전 비서관의 폭로와 맞물려 국회의 특검법 통과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이번 성명 뒤에는 신속하게 철학자들의 뜻을 모은 김상봉 교수(47)가 있었다. 김교수를 25일 오후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만났다.

25일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만난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박재찬기자>
김교수는 한사코 자신은 ‘잡일’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시작은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이 음해성 시비 등으로 본질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던 2주일 쯤 전 홍윤기 동국대 교수와의 대화에서였다. “우리가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김교수의 말에 홍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홍교수가 ‘격문’을 쓰기로 하고 김교수는 ‘연락책’을 맡았다. “과연 시민과 성직자의 양심이 이렇게 무시되고 경시돼야 하는가”를 묻는 홍교수의 ‘명문’이 나왔다. 김교수는 전국 각지에 분포된 10여명의 철학 교수들에게 연락했다. 철학자들의 중지를 모아달라고. 이윽고 210여명의 교수의 이름이 모였다.

철학자들이 발언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민교협 같은 운동단체와는 좀 다른 느낌을 주죠. 같은 말이라도 ‘철학자들은 저렇게 말하는구나’ 하는 걸 보여줄 수 있어요. 똑같은 정치·사회 이슈를 철학의 눈으로 봤을 때 더 근본적으로 성찰 수 있는 지점이 있는 겁니다. 이번 경우 다들 비리가 어떻고 얘기들을 많이 하고, 그것도 일리가 있지만, 철학자 입장에서는 한 인간이 양심선언이라고 해서 발언할 때 우리는 그 양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봤어요.”

철학자들이 모여 성명을 낸 것은 이번이 여섯번째다. 2004년 탄핵 후 4·15 총선을 앞두고 정동영 열린우리당 선대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한 것을 시작으로(실제로 정위원장은 사퇴했고, 여권은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이라크 파병 반대 성명, 송두율 교수 사건을 맡은 서울고법 항소심 재판부에 보낸 무죄 석방과 국보법 폐지 성명, 보수단체의 전시작통권 환수 반대 서명에 전·현직 한국철학회 회장들이 악의적으로 활용될 때 학회장의 사퇴를 촉구한 성명 등 고비고비마다 이들은 발언하고 개입했다.

“PEN은 사실 실체가 없는 조직입니다. 회장도, 대표도, 사무실도 없어요. 일종의 유목 네트워크죠. 하지만 몇 차례 이런 경험을 공유하며 한국사회에 중요한 사안이 터지면 신속하게 중지를 모아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내는 체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은 문구 하나도 치열하게 토론한다. 이번에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것은 ‘삼성제품 불매운동’ 문구이다.

“불매운동 안하겠다는 얘기는 그냥 한 번 짖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네(삼성)들이 뭘 겁내겠느냐는 말이죠. ‘이 녀석들아, 또 떠들어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국가경제 어쩌고 하는 여론몰이 때문에 불매운동 못하겠다는 것은 저쪽이 바라는 바이자, 노리는 바입니다. ‘공포의 동원’이죠.”

그는 삼성 불매운동 때문에 국가경제가 위험에 빠진다는 논리는 박정희 독재 때 독재를 비판하면 북이 남침해 올 지 모른다는 논리와 똑같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는 국가권력이든 삼성이든, 황우석이든 자신을 국가(또는 국민)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위험에 처하면 국가가 위험에 처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동일화의 논법으로 전국민을 협박합니다. 삼성 족벌체제가 무너진다고 해서 삼성이 망하겠습니까. 백번 양보해 삼성이 망한다고 해서 국가경제가 무너지겠습니까. 평소엔 세계 12위 경제대국을 자랑하다가도 매번 비리 척결 얘기만 나오면 유아기로 퇴행해버립니다. 언제까지 삼성의 협박에 끌려다닐 건가요. 인간을 억압하고 노예화시키는 것은 국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도 할 수 있고 기업도 자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PEN에 동참한 철학자들은 조만간 대학 내에서 ‘쟁점 강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강의명은 ‘아직도 삼성 제품을 쓰십니까?’다. “부도덕한 기업의 제품을 쓰는 것은 부도덕을 방조하는 것입니다. 각자가 한 학기에 30분이라씩이라도 할 것입니다. 기왕의 삼성제품은 마크를 지우고 쓰고, 다 쓰면 다른 회사 제품을 사도록, 민교협과 함께 지속적으로 홍보할 것입니다. 언젠가 삼성 제품 들고 있으면 부도덕하고 교양없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김교수는 지난 4월 전남대가 정몽준 의원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려 했던 계획을 철회토록 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죽고 사는 것은 돈이나 건물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정신이 죽으면 철학은 끝입니다. 정몽준씨가 대학에 어떤 건물을 지어주기로 되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돈을 주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학이 기업 찾아다니며 ‘앵벌이’ 한다는 것은 학문의 독립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학자들이 양심의 가책 없이 인간을 위한 학문을 한다는 말을 한다는 게 너무 놀랍습니다. 400억~500억원 들여 삼성관, 엘지관을 지은 대학들은 언젠가 그 건물이 수치스러운 기념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들에게 분명히 물어야 합니다. 당신들 자랑스럽냐고. 그러고도 당신들이 국민 세금을 지원 받을 존재 이유가 있느냐고.”

정의원에 대한 명예철학박사 수여를 철회하라는 요구는 교수들이 먼저 내서, 대학원생, 학부생, 학생회까지 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책임이 무거운 교수들이 청년학생들보다 먼저 알고, 먼저 얘기를 하는 게 마땅합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사회적인 발언, 비판의 몫이 계속 학생들에게만 돌아가다보니 젊은 학생들이 그에 대한 비판까지 모두 떠안아야 했습니다. 학생들이 모든 걸 다 떠안게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그러면 학생들이 공부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번 일은 일종의 교육적 효과도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자기 선생들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된 거죠. 저 사람들은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구나. 교수회의에서도 그 점이 크게 작용했어요.”

자본의 공세에 거의 모든 대학들이 무릎을 꿇은 지금 전남대 철학과 혼자만으로는 너무 미약하지 않을까.

“아직은 그런 걸 물리칠 줄 아는 대학은 전남대 그것도 철학과 뿐이죠. 그러나 처음이 어려워요. 이런 식의 사례가 생겨난다면 다른 데서도 이런 비슷한 일들에 직면할 때 생각 안할 것을 한 번 생각하고, 한 번 생각할 것을 두 번 생각하겠죠. 대학 사회가 자본의 매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는다는 사례를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전남대 철학과와 PEN에서 새로운 지식인 운동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는 신뢰를 못 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자기가 선 자리를 진보적으로 견인하지 못하면서 밖에 나가서 세상을 진보적으로 견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철학계는 한창 공부하는 사람들이 일관되게 진보적 목소리를 내니까 학문후속세대도 그런 쪽으로 견인되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보고 누가 ‘김상봉이 공부하기 싫어서 저 짓 하고 다닌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어떤 새로운 공동체의 전망을 열어줍니다. 한국 학계 초유의 일입니다.”

그는 “1970~80년대 진보운동 진영을 문학계와 역사학계가 견인해 왔다면 앞으로는 철학계가 견인할 것”이라고도 했다. 사실 문학계 안팎에서는 이미 근대문학의 역할은 끝났다는 얘기가 나온 지 오래다. 지금까지 PEN의 활동은 새로운 지식인 운동을 위한 준비였고 어느 정도 검증도 됐다.

“정파를 만들지 않고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오직 이성을 신뢰하고 약자의 편에 서서 한국사회를 진보적 방향으로 견인해 나가려 합니다. 사실 지난 100년간 한국 철학은 외래철학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그 덕에 지식이라면 많이 축적했어요. 이제는 현실과 만나며 현실을 철학적으로 해석해내고 현실을 끊임없이 참된 방향으로 견인해나갈 것입니다. 한 사회 내에서 왜 철학이 필요한가를 보여줄 자신이 있습니다.”

그날 새벽차를 타고 상경해 인터뷰를 하고 월요일 아침 강의가 있어 광주로 내려가야 한다며 총총걸음으로 돌아서는 김교수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에 철학자가 발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김상봉 교수는

독일에서 칸트 철학을 전공한 뒤 1995년 그리스도 장신대 종교철학과 교수로 부임다. 3년만에 ‘학내문제’로 교수직을 벗고, ‘거리의 철학자’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2001~05년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을 지내며, 학벌타파 운동을 처음으로 공론화한 ‘학벌없는 사회’를 홍세화 한겨레 편집위원 등과 함께 탄생시켰다. 2005년부터 서울 생활을 접고 아무런 연고가 없는 광주에 내려가 5·18과 철학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매주 주말 서울에 올라와 가족들과 상봉한다. 지난 3월 ‘서로주체성의 이념’이라는 책을 통해 서양철학의 ‘홀로주체성’을 넘어서는 ‘이 땅에서 우리 말로 철학하기’를 펼쳐보인 바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교수협의회 상임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저서로 ‘자기의식과 존재사유: 칸트철학과 근대적 주체성의 존재론’ ‘호모에티쿠스: 윤리적 인간의 탄생’ ‘나르시스의 꿈: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 ‘서로주체성의 이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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