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깊이읽기] 英 좌파 지식인이 본 ‘문화’

정정호 | 중앙대교수·영문학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16일

▲기나긴 혁명 … 레이먼드 윌리엄스 | 문학동네


레이먼드 윌리엄스(1921~88)는 2차대전 이후 영국의 가장 위대한 좌파 지식인이다. 60년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문화유물론과 문화연구에 이론적 토대를 놓은 윌리엄스는 웨일스와의 접경지역에서 철도 신호수의 아들로 태어나 1939년 장학금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946년부터 1961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 평생교육원 성인교육 강사로 일하며 노동계급의 교육과 대중문화에 관한 성찰을 할 수 있었다. 초기에 F R 리비스와 ‘스쿠르티니’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윌리엄스는 리비스의 문화에 대한 유기론적 개념, 꼼꼼히 읽기로서의 분석방법, 문화의 중요성은 수용하면서도 스승의 대중문명과 소수문화의 논의에서 보여준 문화적 엘리트주의는 거부하였다. 노동계급 태생이고 평생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지배계급의 정치, 경제, 문화적 힘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과 유물론을 배웠지만 토대와 상부구조의 경제결정론은 반대하였다. 언제나 변경인 의식을 지녔던 윌리엄스는 상반된 이 두 전통 속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영국적 좌파 문화이론을 구축해내었다.

초기 주저 중 하나인 ‘기나긴 혁명’(The Long Revolution, 1961)은 ‘문학과 사회 1780~1950’(1958)에서 제기한 문제를 계속 논의한 저서로 ‘기나긴 혁명’을 ‘민주주의 혁명’, 과학발전과 관련된 ‘산업 혁명’, 커뮤니케이션의 확장과 민주주의에 구현되어 있는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제3의 혁명인 ‘문화혁명’ 3가지로 나누었다.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제1부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사유에서 ‘창조적 정신’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문화의 정의와 분석에 관한 이론적인 문제들을 실제적인 사례를 들어 검토한다. 제2부는 교육에서 언론에 이르는 주요한 문화적 제도의 발전을 분석하고 예술의 특정한 형식과 사회 전체의 발전 관계를 논구한다. 제3부는 결론부분으로 윌리엄스가 변화유형으로 인식하는 현대문화와 사회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여 특히 영국에서 일어난 기나긴 혁명의 과정들을 문화적으로 분석하면서 다음 단계인 1960년대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

이 책에서 평자의 관심을 끄는 핵심 개념은 두 가지로 하나는 문화 분석을 위한 윌리엄스의 문화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윌리엄스의 독창적 개념인 ‘감정의 구조’(structure of feeling)다. 우선 윌리엄스의 문화 정의에는 3가지 범주가 있다. 첫째, ‘이상(理想)’의 정의로 “문화는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인 가치의 견지에서 인간의 완성상태 또는 완성의 과정”이다. 둘째는 ‘기록’의 정의로 “문화는 세밀한 방식으로 인간의 생각과 경험을 다양하게 기록하는 지적이고 상상력이 깃든 작품의 총체”(83쪽)이다. 셋째는 ‘사회적’ 정의로 “문화는 예술이나 학문에서뿐만 아니라 제도나 일상적 행위에서 어떤 의미나 가치를 표현하는 특정한 삶의 방식을 묘사”(84쪽)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윌리엄스는 세 영역이 모두 포괄될 때 문화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이론이라고 단언한다.

다음으로 윌리엄스의 문화이론 중에서 가장 난해한 개념은 ‘감정의 구조’이다. 이 용어는 지극히 영국적인 경험론적 개념이면서도 유럽 대륙의 관념적인 구조론적 개념이 교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윌리엄스는 제2부에서 교육, 독서대중, 대중언론, 표준영어, 영국작가, 극형식, 리얼리즘 등 다양한 영역 등에서 “일과 관계 속에서 체험되는 의미와 가치들”(437쪽)인 실제의 감정 구조를 밝혀내고 있다.

윌리엄스의 이론적 선도로 60년대에 영국 버밍엄대학에서 시작된 영국의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는 현재 세계 각처로 수출되어 새로운 학문담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미국이나 호주에서는 대학 학부에까지 학과가 생기는 등 손쉽게 제도화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이미 대학원 과정에서 문화연구는 협동과정의 석·박사 학위과정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비판적·변혁적인 문화연구는 아쉽게도 변질되어 거대한 자본시장에 함몰당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문화를 하나의 상품으로 시장경제 체제에 편승시키려는 경향이 짙어가는 상황이다. 뒤늦게나마 번역 출간된 ‘기나긴 혁명’은 포괄적인 이론적 논의와 구체적인 문화 분석, 그리고 비판적 기획이 균형 있게 결합된 탁월한 저작이다. 이 책을 통해 문화연구가 원래 지녔던 초심을 회복하는 기회가 마련되기 바란다. 본 역서에는 아쉽게도 원서 펠리칸 본에 붙어있는 색인이 빠져있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이 매우 자연스럽고 매끄럽다. 번역은 사랑의 노동일진대 역자의 노고가 크게 돋보인다. 그러나 비판적 지식인이었던 윌리엄스의 영어가 가지고 있는 ‘낯섦’이 지나치게 순치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서문
펠리컨 판의 서문
서론

제1부
1. 창조적 정신
2. 문화의 분석
3. 개인과 사회
4. 사회의 이미지

제2부
1. 교육과 영국사회
2. 독서 대중의 성장
3. 대중 언론의 성장
4. '표준 영어'의 성장
5. 영국 작가의 사회사
6. 극 형식의 사회사
7. 리얼리즘과 현대소설

제3부
1960년대의 영국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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