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린 문명에 중독된 문학
[석유문명과예술] 막대에 찔린 난자 보고 비명 지르지는 못할 망정

출처 : <컬쳐뉴스> 2007-11-02
[박승옥 _ 시민발전 대표]

석유문명에 중독된 문학은 스스로의 근원이라 할 생태의 관점을 잊고 있다.
▲ 석유문명에 중독된 문학은 스스로의 근원이라 할 생태의 관점을 잊고 있다.
비틀린 석유문명 중독증상은 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문학에서는 그 정도가 심해 석유문명 찬양이 참으로 낯간지럽다 못해 저 지경으로까지 추락할까 싶을 정도로 몸과 영혼을 파는 수준까지 치닫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석유문명에 중독되었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른바 서구 ‘근대’에 중독되었다는 얘기이다. 저잣거리 말로 서양 근대라는 ‘뽕’을 맞고는 뿅가버리고 만 것이다. 충분히 그럴만하다. 그만큼 서구 근대는 사람들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뒤바꿀 만큼 편리하고 풍요롭고 힘과 지배력이 있다. 그것이 석유문명이라는 강력한 마약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해 제목이 아마도 ‘회장님, 우리 회장님’인지 아닌지 가물가물하지만, 옛날에 대재벌 회장과 측근 아부꾼들이 나오는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가 있었다. 그 아부꾼 가운데 하나는 늘 두 손을 귀에 대고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회장님의 영원한 종입니다” 라고 외쳐대곤 했다.

자본의 종으로 귀의한 문학

친일 문학인들을 예로 들 것도 없이 일부의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권력자들의 영원한 종이라는 사실이야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런데 또 수많은 쓸개빠진 시인과 소설가들이 스스로 자처해서 자본가들의 영원한 종으로 귀의한다. 게다가 이들 권력과 돈에 영혼을 판 글쟁이들은 뻔뻔스럽기가 그지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낮에 수많은 사람들이 벌겋게 눈을 뜨고 있는 가운데 발가벗고 홀딱쇼를 하고 있는 있으면서도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자각도 하지 못한다. 물론 홀딱쇼 제목은 ‘순수문학’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 순수한 글이 어떤 내용인지 그 맥락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전혀 창피한 줄도 모른다. 

수많은 문학인들이 궁핍함 속에서도 문학의 영혼을 돈과 권력에 파는 것은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문학은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또 다른 공동체 사람들과 함께 서로 생명의 축제와 변화를 함께 나누는 영혼의 울림이었다. 문학의 뿌리는 생태계였고 공동체였고 제사장, 곧 무당이었다. 아득한 옛적부터 시와 노래는 자연과 교감하고 공동체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아픔을 대변하는 영혼의 소통 수단이었다. 시는 땅에서 솟아올라오는 생명이었으며 대기와 하늘을 엿보는 영혼의 눈이었다. 문학은 근원에서부터 생태문학이었다.

서구의 근대문명은 이런 자연과의 소통을 근본에서부터 부정했다. 자연은 단지 정복과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자연은 단지 근대문명을 뒷받침해주는 천연자원이 저장된 장소일 뿐이었다. 나무는 목재였고 들소는 소고기였고 불의 신전은 유전지대였다. 자연은 모조리 숫자로 바꿀 수 있고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때문에 근대라는 괴물에 대해 본능에서부터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문학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근대라는 이 뒤틀린 현실에 대해 고통스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기계화된 근대인이지 진정한 자연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문학인이라면 당연히 그는 단절된 자연과 다시 소통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사람에게서 다시 흙냄새를 맡기 위해 고통스러운 저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근대 문법 자체에 대한 저항에서부터 글의 양식은 때로는 과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기이하기도 할 만큼 다양했다. 수많은 문학인들이 그렇게 영혼의 피를 흘리며 글을 쓰고 싸우다 흙으로 돌아갔다. 근대문학의 역사는 근대를 상대로 한 고귀한 영혼들의 투쟁의 역사였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은 서구 근대의 인식과 진정한 문학인라면 추구해야 할 정신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을, 왜 문학인들이 뿌리로부터 근대에 저항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당신들의 제안에 대해 심사숙고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부족은 물을 것이다. 얼굴 흰 추장이 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 판단 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워싱톤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겠다고 한 제의는 우리에게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우리의 누이와 형제와 우리 자신을 팔아넘기는 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땅을 손에 넣기 위해 한밤중에 찾아 온 낯선 자다. 대지는 그의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는 대지를 정복한 다음 그곳으로 이주한다. 그는 대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상관하지 않는다. 어머니인 대지와 맏형인 하늘을 물건처럼 취급한다. 결국 그의 욕심은 대지를 다 먹어 치워 사막으로 만들고야 말 것이다.

문학이 뿌리로부터 근대에 저항해야 하는 이유
 
▲ 정현종 시인은 『대산문화』2005 가을호에 "대작에세이
「마음의 빛: 새벽-빛 그리고 황우석 예찬을 겸하여」를
게재한 바 있다.
정현종이란 시인은 소로우와 에머슨을 자주 인용하면서 자연과 생명의 야생상태를 찬양하는 이른바 순수시를 쓴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짧은 시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독서 목록에 올라 있는 시인이다.

그가 『대산문화』라는 잡지에 이른바 대작에세이를 연재하면서 쓴 글이 있다. 글짜를 크게 쓰면 대작이라고 하는지, 아니면 긴 글을 대작이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근대 이후, 특히 자본주의 산업화가 최고의 가치인 줄 아는 한국인들은 서구 문명에 대한 뿌리깊은 열등의식의 소산으로 무엇이건 세계 제일을 추구하면 제일인 줄 알았다. 무조건 크고 높고 거대한 것을 추구하는 이른바 거대컴플렉스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다리도 세계 최장이어야 성이 차고 빌딩도 세계 최고여야 성이 찬다. 어찌됐든 그런 ‘대작’이니만큼 조금 길게 인용해보자.

나는 황우석 교수가 TV에서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그동안 사람은 이래야 한다고 들어온 미덕들 - 겸손, 사랑, 천진성, 공정성, 소박함 같은 것들이 황우석이라는 사람에게 수렴되어 2005년 한국 땅에서 육화(肉化)되어 나타났다는 느낌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정작 마음을 빼앗긴 건 그의 얼굴과 표정과 태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슨 빛 - 내 생애에 처음 보기 때문에 신선하기 짝이 없는 빛이었다... 그의 눈과 웃음은 맑음과 천진함을 내뿜고 그의 표정과 태도는 타고 난 그대로의 겸손과 소박함과 진정성을 보여주며 그의 말과 그 어조에는 위의 미덕들과 함께 공명정대함과 사려 깊음과 참됨 같은 게 들어있다. 그가 목장에서 인공수정한 소의 새끼를 손을 넣어 꺼내는 모습도 감동적이었다. 그 비할 데 없는 몰입과 열심!

『나의 생명 이야기』라는 책을 보면 어려서 시골에 살았던 그는 자연에 대해 신비감을 항상 갖고 있었는데, 과학자의 창의성은 세속적인 욕심 없이 “맑은 영혼의 오로지 밝은 시계(視界)”에서만 확보된다고 하면서 “여명의 빛”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명의 빛은 영혼의 시력을 열게 한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개인적인 욕망이나 목표를 뛰어넘어 사회와 인간을 위한 지고한 목표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줄기세포 연구의 윤리적인 문제도, “윤리” 운운하며 문제를 삼으려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실제로 무슨 일을 했으며 생명을 살리기 위해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한데, 난치병을 고쳐서 여러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 혜택을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이 받을 수 있게 하는 것만큼 윤리적인 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툭하면 “윤리”를 치켜들고 나와서 반대나 하는 게 윤리적인 행동은 아닐 것이다. 가치있는 일을 알아보고 그걸 긍정하고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이 한층 더 윤리적인 것일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줄기세포가 장차 불치병을 고치기 시작하면, 실은, 황우석 교수를 시성(諡聖)해야 한다고 나는 사석에서 말하곤 했다. 예수나 프란체스코 같은 성자들이 난치병 환자들을 고쳤다는 건 다 아는 일이다. 옛날에는 성자들이 신화적인 초자연력으로 병을 고쳤으나 오늘날에는 자연과학자가 그런 기적을 행하게 되었다.

- 대산문화재단, 『대산문화』, 대작에세이 「마음의 빛: 새벽-빛 그리고 황우석 예찬을 겸하여」, 2005년 가을호


아마도 한국인들만큼 줄기세포와 생명공학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그만큼 황우석 사태는 미친 바람처럼 한국인들의 애국주의 열풍을 불러 일으켰고 그에 대한 깊은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생명공학이나 유전공학 자체가 사실은 서구 근대 패러다임의 막다른 길, 기괴한 과학기술의 극단임을 알아야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과학기술은 자본주의와 결합해 말하자면 한 손가락만 이상비대증에 걸리고 만 상업 과학기술이다. 돈이 된다면 멀쩡한 사람의 사지를 자르고나서는 마이크로칩이 부착된 기계손을 붙여놓고 영생의 손과 발을 붙였다고 선전해대는 것이 자본주의의 상업 과학기술이다.

막대에 찔린 난자를 보고 비명은 지르지는 못할 망정

오늘날 과학기술은 그렇게 영혼을 잃어버린지 오래이다. 우주와 자연 앞에서 겸손도 잊은 지 오래이다. 진리란 무지를 아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밝힌 지식은 진리라는 나무의 나뭇잎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우주와 자연이라는 모래밭의 모래알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아예 외면하고 있다. 때문에 과학기술의 사용은, 특히 사람의 생명, 자연의 생명체와 관련된 과학기술은 다른 과학 학문의 검증뿐만이 아니라 철학과 윤리를 비롯한 인문학과 사회학, 법학 등 모든 분야의 엄격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학인이, 그것도 순수시인이라고 알려진 사람이 근대과학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 황우석에 대해 어떻게 이런 대작의 용비어천가를 쓸 수 있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생명체인 난자에 아무렇지도 않게 젓가락같은 막대를 찔러넣는 장면을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끔찍함에 비명을 지르지는 못할 망정 ‘그 비할 데 없는 몰입과 열심’을 찬양하며 감동을 읊조리다니, 그것이 순수시인의 그 비할 데 없는 감수성이란 말인가.

같은 글에서 정현종은 “릴케는 붓다를 기리는 시를 세 편이나 썼는데, 인류가 성자들을 갖고 있다는 건 물론 인류의 행운이지만 그들의 불멸의 행적과 말의 광채를 되비치는 시인들이 있다는 것도 인류의 행운이다”라고 썼다. 아마도 그는 황우석을 성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었고, 그 또한 스스로 ‘황우석 성자’를 기리는 릴케 같은 시인 반열에 오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자(여기서 자는 놈 자이다!)들이 순수시를 씁네 하며 1970년대와 80년대의 ‘순수한’ 수많은 젊은 가슴과 영혼들을 물들였다. 그리고 군사독재의 질풍노도 시대에는 대학교수의 월급으로 편안한 삶을 살았다. 그렇게 현실을 외면하고 살던 이 순수시인은 얼마 전에는 북한 핵실험에 대해 대다수 문인 예술가들이 침묵하고 있다며 북한을 질타하는 분노의 참여시를 조선일보에 쓰기도 했다.

순수의 본색이 실은 지독한 현실 권력에의 욕망이었음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예가 있을까.



* 박승옥은 구로동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10여 년 동안 시골을 돌아다님. 지금은 에너지전환 운동 시민기업인 시민발전 일과 전태일기념사업회 일을 하면서 기고와 강연으로 한국 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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