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당없는 한국정치] 정체성 확고한 서구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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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01일 |
-노선 수정땐 치열한 당내 사상투쟁
정당정치가 활성화된 유럽이나 양당제 전통이 뿌리깊은 미국에서도 아웃사이더의 등장, 당원 수 감소, 정당 일체감 약화, 이로 인한 영향력 감소 등을 겪고 있다. 심지어 “머지않은 장래에 정당이 소멸할 것”이란 예측이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다. 탈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시민의 가치관이 급변, 세분화된 데다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해 정당을 통하지 않고도 정부와 시민이 직접 소통할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정당이 겪고 있는 위기와 한국의 정당정치가 처한 위기는 현상적으로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질적으로는 차원이 다르다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다. 정당정치의 심화 정도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선거를 앞두고 탈당과 창당 등 이합집산이 일상화된 한국과 달리 서구의 정당들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영국은 보수당이 창당한 지 175년이 넘었고, 노동당도 101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미국은 공화당이 152년, 민주당이 178년 전에 만들어졌다. 스웨덴에서는 사민당이 다양한 연정을 통해 60년 동안이나 집권하기도 했다. 한국은 1997년 11월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통합하면서 만들어진 한나라당이 현존하는 정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최근 들어 ‘아웃사이더’의 출현이 잦아지고는 있지만 서구에서 주요 정치 지도자들은 오랜 정당생활을 통해 경험과 행정 경력을 쌓은 뒤에 배출되는 것이 당연시된다.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현재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레이스를 펼치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역시 대학 시절부터 학생회장을 역임하며 의회 인턴·전당대회 자원봉사 등 다양한 정당활동을 경험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 역시 20대 시절부터 정당생활을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블레어 전 총리가 29세의 새내기 정치인이었던 시절 마이클 푸트 당시 노동당 당수에게 보낸 편지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보수당 집권 시절 야당인 노동당의 예비내각에서 내무·법무·에너지·노동 장관을 두루 거친 뒤 총리에 올랐다. 고든 브라운 현 총리 역시 최장수 재무장관(10년)을 역임했다.
서구에서 정당들이 오랜 역사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를 오래 전부터 도입했다는 당연한 이유 외에도 정당들이 지역·계층·이념적 정체성이 뚜렷하고 서로 대비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은 대외정책, 이민자 정책, 낙태·피임, 총기 규제 등 각종 정책에 대해 뚜렷하게 대비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의 정당 균열이 1차적으로 지역 연고에 의존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이처럼 당의 정체성이 명확하기 때문에 노선 변화를 위해선 치열한 당내 노선 투쟁이 벌어진다. 1994년 노동당 당수가 된 블레어 전 총리가 국유화 등 전통적인 노동당 강령을 버리고 중산층 껴안기를 시도하면서 전통적 지지기반인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벌인 치열한 ‘사상투쟁’이 한 예다.
명지대 정진민 교수는 “서구의 정당과 한국의 정당은 출발 자체가 다르다”면서 “우리는 정당 정치가 뿌리가 내리기도 전에 사회가 심대한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중첩돼 있다”고 말했다.
〈김재중기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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