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풍경 간직한 ‘사유의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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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넘어가는 보주 주립공원 산마루의 저녁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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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가 거울처럼 빛나는 들판 사이로 들어섰다. 건초더미가 쌓여 있고, 수레바퀴가 나뒹군다. 길가의 높은 외양간에서 금방이라도 소 한 마리가 걸어 나올 듯하다. 몇 집 건너에서는 암소에게서 젖을 짜는 모습이 구경꾼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와이(Y)자를 거꾸로 돌려놓은 모양이라는 마을 로터리에는 전 세계의 책마을을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다. 이 마을이 책마을의 중심지라도 된다는 표시였을까. 그 푯말에는 아직 준비 중인 머나먼 아이슬란드와 이탈리아 마을까지 이름을 올리고 있어 이 지상에 갑자기 책마을 돌풍이라도 불어오는 기분이다. 트랙터와 벽에 기댄 농기구 사이의 창고 같은 둥근 아치의 이맛돌 아래로 들어서자 소 울음 소리 대신 첩첩이 쌓인 책들이 기다리고 있다.
서점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의 문지방을 넘자마자 항상 수소문하던 책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웬일일까. 서점의 이름대로 10만권이 넘는 재고를 자랑하는 이 서점에서는 잃어버린 책이 기다리고 있을 뿐 아니라 잃어버린 문인, 저자를 찾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주인장은 작년이나 다름없이 사냥꾼 모자에 파이프를 물고 나타났다. 올해는 또 어떤지 마을의 안부를 물었다. 연간 방문객이 10만여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몇 해 전까지 6만명을 오락가락하던 데에 비해 대단히 흡족한 결과였다.
그런데 서점들은 인구 280명의 이 피폐했던 농촌을 일방적으로 점령하지 않았다. 로렌 지방의 이 마을사람들은 국적을 바꿔가며 이 점령군, 저 점령군에 치였던 기억 때문에 점령이라는 뉘앙스에 대한 반감이 여전하다. 대신 마을에서 농사짓는 사람과 책 파는 사람, 종이 만드는 사람이 어울려 살기로 했다. 농촌생활을 보존하면서 농부와 어울린 책마을이라는 참신한 발상은 누구보다 원로정치인 필립 세갱의 몫이다. 농림장관과 하원의장을 지낸 우파정객으로서 대중적 평판이 매우 좋은 세갱은 다른 문화 관료나 의원들이 화려한 공연단을 몰고 다니며 굿판을 벌이고 떡고물에 공을 들이는 동안, 진보적인 농촌 살리기 정책의 대안으로 책마을을 제안했다. 그것도 단순히 다른 책마을을 모방하지 않았다. 바로 농사와 책방이 공존하는 유례없는 방법을 실현하려 했다. 그는 주정부와 의회의 자금을 동원하는 등 유력한 정치활동으로 주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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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짜는 암소와 구경꾼. |
그의 수완은 유럽공동체 기금이나 여러 경로의 돈줄을 끌어댄 일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자금을 마을의 외관 치장이나 홍보물 제작 등에 쏟아붓지 않았다. 그 대신 농촌생활의 전통을 유지하는 데에 쏟아 내실을 기한 사람이다. 농민이 경작 생활을 그대로 지속하면서 더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서점을 정착시키도록 돕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 숙박업소 같은 구색맞추기식 투자도 자제했다. 겉으로 보기에 마을은 초라한 농가들이 어깨동무를 한 형국이다. 이렇게 해서 맑고 풋풋한 전통적 생활방식이 보존되었다. 주민을 우선시하고, 관광의 예상되는 부작용을 우선 차단한 것이다. 숙박은 지근거리에 있는 도시에서 쉽게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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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판화에 수록된 신문팔이 이미지. |
이는 일종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농가는 18세기 농촌가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목재와 회반죽이 뒤얽힌 친근한 양식이다. 농가의 일부는 서점으로 팔렸고, 고용은 증가했다. 여기에 학자들이 가세했다. 국립과학원의 세르주 보네, 다니엘 멩고트 교수, 그리고 현재 성당 옆에 인쇄박물관을 차리고 은퇴생활을 즐기는 전(前) 메스 대학 총장 조제프 로스펠트가 주역이 되어 1994년에 정기적으로 시장을 열었다.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난 96년부터 본격적인 책마을을 띄웠다.
현재 서점은 스무 군데, 수제(手製) 종이직인과 인쇄공방 겸 박물관 두 곳, 식당은 한 곳이다. 시골풍의 회식을 위한 식당 ‘만인당(萬人堂)’의 이름도 넉넉하다. 그런데 마을의 모든 서점이 연중 개장하지는 않는다. 몇몇 서점은 5월에서 9월까지만 한시적으로 연다. 구멍가게도 덩달아 변신했다. 마을 초입에 자리잡은 ‘어제의 농장’은 주말에만 문을 열고, 지역특산물을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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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빼어난 미술문고의 한 전형을 제시한 스키라판 문고 한 질. |
이렇게 퐁트누아 라 주트에서는 지식인, 학자의 전폭적인 지원이 두드러진다. 알사스 로렌 학군은 대학입시를 비롯한 각종 지표에서 늘 선두권을 지켜왔고, 타 지역에 비해 공부벌레들이 많다는 평판을 누려왔다. 지난해 프랑스 국민의 도서구입은 두 사람당 한 권꼴이었다. 국민 전체의 도서구입과 독서량은 평균치를 유지하고 있지만 10대의 경우는 현저하게 감소했다. 아무래도 인터넷 등 전자통신망의 영향이 큰 탓이다.
퐁트누아 라 주트 마을은 주변 환경도 뛰어나다. 생 디에 데 보주 시(市)처럼 학술대회를 자주 개최하는 중소도시가 바로 곁에 있다. 머리를 맑게 하는 푸른 보주 고원의 삼림과 모젤·뫼르트 강이 며칠 밤씩 계속되는 토론에 달아오른 머리를 식혀주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재작년에는 생 디에에서 북한의 식량과 기아 문제를 놓고 유럽 지리학자들이 공방을 벌였다.
‘장화 신은 고양이’ 서점에서는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판화로 전 세계로 퍼져나간 ‘에피날 판화’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그 민중판화의 이름을 보통명사 ‘이마주 데피날’이라고 부르게 했던 에피날시도 마을에서 불과 한 시간 거리에 있다. 에피날 판화는 카드와 만화, 신문삽화 등에 폭넓게 이용되었다. 우리네 혁필이나 민화와 비슷하지만 그 보급은 행상이 맡았고 각 지역마다 소규모 공방들에서 제작한다. 또 각 공방은 자기 고장의 자존심을 걸고서 갖가지 해학과 풍자에 넘치는 재기를 발휘했다. 그렇게 해서 이 판화는 오늘날 민중미술의 모범으로 자리잡았다. 이런 전통이 지난 세기 초 독일과 그 뒤를 이어 중국에서 그리고 멀리는 우리나라에까지, 민중판화의 혁명정신을 전파했다. 이런 민중판화도 대체로 성자들이나 나폴레옹 같은 위인을 풍자하게 마련인데 이 집에서는 신문팔이의 이미지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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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교차로에 서 있는 세계 책마을의 표지판. |
알랭 드 피즈는 서점에 ‘소설쓰고 있네’라는 엉뚱한 이름을 붙였다. 역사물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의 기개가 넘친다. 알사스 로렌이 배출한 역사가의 저작들이 수두룩했다. 쥘 미슐레의 프랑스혁명사는 그 이본이 셀 수 없이 많다. 그의 걸작 ‘마녀’에 민중판화로 삽화를 붙인 이본은 분명 양수겸장(兩手兼掌)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가 쓴 ‘바다’며 ‘새’ 같은 아름다운 글을 그냥 비켜갈 수 있을까. 문체의 꾸밈이 사실의 엄정성을 벗어나지 않고, 사실의 엄정성이 문체를 무디게 하지도 않는 역사가 이상으로 위대한 이 문필가의 글이 언제쯤 한글로 함께 읽어볼 수 있을까. 이 나라에서 그토록 음미할 만한 수많은 역사책이 나오고 있는 것도 그의 이런 훌륭한 모범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두 문화를 넘나들며 경계인으로서 살았기에 사회 정체성에 대한 고뇌가 남달랐고 또 이름의 표기에서 오해를 자주 낳았던 거물들의 원전도 수두룩하다. 마르크 블로흐는 물론이고 뒤르케임과 또 그 제자로 집단적 기억에 대한 역저를 남긴 모리스 알박스의 책들을 들춰보면서 그들 자신이 역사의 현장에서 고초를 겪고 희생된 사람들이니 더욱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의 불어 원전이 종종 영어판을 통해서야 우리에게 통용되니 유감이기는 하다. 영어판 정보로 유럽문화를 접하는 우리에게 소중한 원전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거대산업화한 영미와 독일 출판사들이 불어나 네덜란드 원전을 가로채고 있다. 이런 사업은 런던과 뉴욕에 정착한, 헝가리를 위시한 동유럽 이민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발품을 팔며 고생해서 공부한 선구자의 저작을 책상머리에 앉아 인용하고 재인용하면서 새로운 평가라도 내리겠다는 어투로 써낸 수많은 미술사와 예술가의 영어판 전기와 평전이 소개되는 실정이다.
층계참 사이의 선반에서 외젠 뮌츠의 저서들도 마주친다. 뮌츠는 사실상 화려한 도판을 수록한 미술사 책자의 원조 격인 미술사가다. 르네상스 전문가로서 프랑스 르네상스의 중요성을 탐구했던 이 사람은 각 개별 미술가의 평전을 쓰는 새시대를 열었다. 뮌츠는 라파엘로에 정통했지만, 로마의 옛 유적 발굴조사에 나섰던 이 화가의 고고학자로서의 면모를 밝혀주는 간략한 보고서를 손에 쥐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을의 방문객으로서는 엄청난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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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책 제본술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반데르 헤이덴. |
뤽상부르 지방의 책마을에 근거를 둔 벨기에인 반데르 헤이덴은 격주 간격으로 두 마을을 오가며 일한다. 그의 공방의 애호가를 위한 실습연수 프로그램은 2주 기간인데 한 해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수강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일본인도 참여한다고 한다. 다른 공방보다 높은 인기는 그가 ‘약물’이라고 부르는 장식용 구리인장의 아름답고 방대한 컬렉션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유행하는 한 권밖에 없는 책이나 책 자체를 작품으로 만들자는 ‘예술책’ 바람도 도움이 되었다. 수강생들은 일기장이나 선물용 책자를 가죽 표지로 꾸미고, 과거의 활판 인쇄술로 문자를 새긴다.
외견상 가장 소박하고 규모가 작은 이 마을은 농촌공동체를 쇄신하는 문제에서 당분간 모범적 사례로 보인다. 제국주의 문화에 뿌리를 둔 관광문화를 최소한 수용하면서 위장된 민속촌 같은 마을이 아니라 서로의 생활방식에서 현저히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어울려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로 찾아오는 길도 파리와 스트라스부르를 왕복하는 초고속열차의 개통으로 한결 편리해졌다. 바로 10분 거리에 있는 화려한 크리스털의 본거지, 바카라를 거쳐 들어오는 길이다. 그러나 그 반대편의, 이 마을의 자연친화적 성격과 직결된 보주 주립공원의 산행을 즐기며 알사스로 넘어가는 산길이 더욱 매력적이다. 그 길이 알사스 포도밭 ‘루트’이다. 그 길을 따라 16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리크비르 마을을 들를 참이었다.
그 산길을 올라 알사스 평원과 마을을 양쪽으로 내려다보는 정상의 능선을 따라 소와 개를 끌고 나온 목동이 저물어가는 낙조와 짙은 구름 사이에서 실루엣을 그리고 있다. 이미 퐁트누아 라 주트는 물안개에 싸여 자취도 희미했다. 산마루에는 미국의 성조기가 나부끼고 있다. 2차대전 때 전몰용사를 기리는 비석과 함께…. 당시 이 산골의 청소년들도 미군이 주는 초콜릿과 껌을 즐겼고, 밤에는 클럽으로 몰려가 재즈를 즐겼다. 그들도 지금은 살아 있는 마지막 세대가 됐지만….
〈글·사진 정진국|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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