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서 화공들은 색을 만들어 그렸지만
[석유문명과예술] 색의 지식을 파괴하는 석유문명과 자본주의

출처:<컬처뉴스>(www.culturenews.net) 2007-10-20
박승옥 _ 시민발전 대표


치자 오베자 소목으로 염색한 천을 말리고 있는 모습
▲ 치자 오베자 소목으로 염색한 천을 말리고 있는 모습
사람의 눈은 물체의 색을 바라볼 때 3원색을 기본으로 삼는다. 지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과 침팬지의 눈은 정확히 같다. 개와 고양이를 비롯한 일부 포유류 동물들은 두 가지 색을 기본으로 보는 2원색 감각 눈을 갖고 있다. 개와 고양이는 물체를 볼 때 색을 보기는 하지만 사람과 침팬지처럼 다양하게 보지는 못한다. 물론 박쥐처럼 색을 보지 못하는 색맹도 있다.

그러나 일부 새들은 4~5가지 색을 기본색으로 삼는다. 이들 새는 우리가 도무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사람보다 훨씬 찬란하게 자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곤충과 어류, 포유류는 자외선을 보기도 한다. 심지어 오스트레일리아 동박새는 지구 자장을 눈으로 분명히 볼 수 있다. 이들이 보는 세계는 사람이 보는 세계보다 얼마나 아름답고 풍부할 것인가. 공작 수컷의 화려한 꼬리와 비비원숭이의 얼굴과 엉덩이 색, 아마존 밀림의 그 수많은 형형색색의 새 깃털은 그 자체가 그림이고 예술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럼에도 사람의 눈은 축복이다. 사람들은 이 자연의 선물로 세계를 보면서 느끼고 그리고 이 느낌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부터 무엇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까.

우리는 늘 유물과 유적 등 눈에 보이는 것만을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땅에 그림을 그려 의사표시를 하거나 바위를 돌로 긁거나 모래를 쌓아 무엇인가 형상화해보는 행위는 참으로 오래된 일상생활이었다고 짐작된다. 물론 증거는 세월의 이끼에 덮여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은 멸종되어 가고 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산악지대와 열대우림 원주민들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인류학 보고서들을 보면 실제로 수렵채취 부족들의 예술행위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또 탄성을 자아낼만큼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색채는 바로 자연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식물과 동물, 광물 등에서 얻었다.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도기나 채색도기 등이 한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안료로 이산화망간 등 광물질을 사용했다.

살아있는 들소가 막 뛰어나올 것만 같은 생생한 그림으로 유명한 1만 6천년 전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안료로 이산화망간 등 광물질을 사용했다. 3만년 전의 쇼베 동굴 벽화와 아프리카 나미비아 동굴벽화 또한 천연 광물질을 사용했다. 이런 원시 벽화 가운데는 아직도 그 안료가 무엇인지 현대 과학으로도 아직 밝히지 못한 것까지 있다.

사실 근대 이전의 그림은 모두 자연에서 추출한 천연 염료였다. 아름다운 붉은색 크랍 색소는 꼭두서니 뿌리에서 뽑아냈다. 황제의 보라색은 시리아 달팽이에서 추출된 것이다. 아라비아의 노란 크로커스 꽃에서는 왕의 사프란이라고 불리는 노란색이 나온다. 물론 이런 천연 염료는 만들기도 어렵고 재료도 특정 지역에서만 자라는 식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야말로 금값보다 비쌀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보라색과 노란색 등 일부 색은 황제나 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귀중하고도 특별한 색이었고 귀족과 왕가의 전유물이었다. 동양에서도 노란 색은 황제의 색으로 고귀하게 다루어졌으며 중국산 군청색은 매우 비싸 일반인들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색이 권력의 아이콘이 되었던 것은

신라시대에도 신라 왕실이 일반 백성들의 붉은 천 사용을 금지시켰다. 붉은 천 낭비를 불러 일으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쪽, 홍화, 치자, 차조기, 꼭두서니 등의 식물로부터 잿물을 사용해 은은하고도 다양한 천연색을 얻었다. 널리 알려진 감물들이기나 백반으로 봉숭아물을 들이기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색을 얻는 손쉬운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색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끝이 없을 정도이다. 열여섯에 이미 유명세를 타고 열아홉에 붓을 꺽은 랭보는 프랑스어의 모음을 색깔로 표현하는 시를 썼다. 검은 아, 하얀 으, 빨간 이 등으로 표현한 랭보의 시는 말과 색과 향기의 교감을 노래하면서 아마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세계와 자연의 강렬한 소통 욕구를 그렇게 시로써 표현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검은 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밤을 그렸던 빈센트 반 고흐는 검은 색은 수십 종류가 있다고 동생에게 말한 바 있었다. 고흐는 그만큼 예민하게 자연을 관찰하고 원시 그대로의 자연을 예찬하던 자연주의자였다.

그러나 어쨌든 근대 이전 모든 그림은 천연염료로 그린 것이었다. 조선시대 도화서에서는 화공들이 직접 색을 만들어 썼다. 그리고 때에 따라 값비싼 색을 쓰는 것은 황실과 귀족의 특권이었다.

▲ 석유에서 온갖 무지개빛 색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현대미술의 혁명은 열일곱살의 윌리엄 헨리 퍼킨이 1856년 석탄타르에서 아닐린 보라색을 얻는 데 성공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는 역사상 최초의 합성색인 이 색에 티리안 보라색(Tyrian Purple)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 새로운 염색재료는 1859년부터 비단염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석탄과 같은 종류의 탄소화합물로서 사이좋은 이복남매인 석유에서 온갖 무지개빛 색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석유는 이제 색을 만드는 마법의 검은 액체가 되었다. 값싼 석유로부터 값싼 색을 엄청 다양하게 얻을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현대 대중미술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왕실에서만 사용되던 푸른색은 대청에서 추출한 것이었다. 왕실 소유의 대청재배지는 특별관리지역이었다. 그런데 석유로 만든 인디고블루는 푸른색을 대중들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원래 인디고블루는 인도의 관목 잎사귀를 오줌과 함께 오랫동안 처리해서 만든, 유럽의 대청보다도 훨씬 광채나고 귀티나는 푸른색이었다. 오죽하면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발견했을 때 맨먼저 인도로부터 수입된 것이 바로 인디고블루였다. 1577년 신성로마제국은 인도로부터의 인디고블루 수입을 금지시켰다. 1654년에는 아예 황제령으로 사용이 금지되기까지 했다. 이 금지령은 173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풀리게 되고 대청 경작지 농민들은 다른 대체 작물을 찾아나서야 했다. 포르투칼과 스페인, 그 뒤를 이어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국이 식민지 주인이자 해양강국으로 이 인디고 불루로 수세대에 걸쳐 부를 축적했다.

그만큼 색을 둘러싼 역사에서 석유가 이룩한 혁명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와 함께 19세기 중반 바이엘(1863년), 획스트(1863), 바스프(1865) 등 세계에서 손꼽는 색조 콘체른들이 탄생했다. 이들 거대 화학회사들은 석유에서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을 뽑아내 떼돈을 벌었다. 물론 바스프가 있던 루트비히스하펜 시는 그 댓가로 늘 유황 냄새가 도시에 퍼져 있었고, 시민들은 화가들의 그림을 위해 최근까지도 그 냄새를 맡으며 살아야 했다. 새로운 색 생산 기술은 지금까지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산업분야이다. 예컨대 아크릴 물감은 1956년에 상품화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또다른 상실도 있다. 인공색의 등장과 함께 자연에 대한 지식, 천연염료에 대한 지식이 사라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파괴해야만 성립되는 체제이다. 공동체가 사라져야만 토지에서 추방된 자유로운 인간, 임금노예가 될 자유만 있는 노동자가 넘쳐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자본주의와 결합된 색조 산업은 천연색에 대한 지식도 파괴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야만 색을 팔아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색의 지식을 파괴하는 석유문명과 자본주의

근대 화학농법의 창시자로 알려진 리비히는 또한 열렬한 석유화학 전도사이기도 했다. 그는 전기 기술도 발명되기 훨씬 이전에, 석유로부터 색을 만들어내는 기술도 발견되기 훨씬 이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도시 전체를 불꽃도 피어오르지 않고 타오르는 불빛도 없는 등으로 아주 밝게 비추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꽃도 안 일고 따라서 이글거리며 타는 불도 필요없다면 등 안에 공기가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내일이나 모레, 누군가 숯 한 덩이로 오색찬연한 다이아몬드를, 백반으로부터 사파이어와 루비를, 석탄타르에서 영롱한 크랍 색소나 또는 유익한 퀴닌(말라리아 특효약), 아편 등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발견하리라 믿습니다. - 귄터 바루디오, 『악마의 눈물, 석유의 역사』, 뿌리와이파리, 2004

열렬한 진보낙관론자이자 비록 농업을 망친 주범이기는 하지만 리비히는 그야말로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긴 했다. 실제로 그가 말한 바대로 유럽의 밤은 원자력과 석탄 등으로 만든 전기로 휘황찬란해졌고, 석유로부터는 영롱한 붉은 크랍색뿐만 아니라 수많은 색조를 만들어내 오늘날 길거리 여성과 남성들의 총천연색 의상들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윽고 사람들은 석유문명의 토대 위에서 이제껏 어떤 사람도 누리지 못한 풍요와 함께 석유로 만든 문화예술을 한껏 꽃피우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현대 건축은 석유가 없으면 그렇게 거대하고 정교한 구조물을 지상 위에 세울 수가 없다. 르 코르비지에를 비롯한 현대 건축가들의 작품은 석유가 없으면 불가능한 건축물들이다.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연극과 현대음악, 심지어는 춤까지도 이제는 석유가 없으면 상연이나 공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도대체 지금 어떤 예술 작품을 만들고 감상하고 있는 것인지, 심각하고도 근원이 질문이 필요한 때이다.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 우리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찢어지고 파헤쳐진 산과 들, 굉음 속에 엔진톱으로 허리를 잘리고 넘어지는 나무들의 절규를 외면하고 헤드폰을 낀 채 우아한 음악이나 그림을 만들어 내는 예술가를 진정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까.




* 박승옥은 구로동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10여 년 동안 시골을 돌아다님. 지금은 에너지전환 운동 시민기업인 시민발전 일과 전태일기념사업회 일을 하면서 기고와 강연으로 한국 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일하고 있음


편집 : [김소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