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은 ‘그들만의 전쟁’으로 버려진 지 오래다. 아프간에 남은 건 빈곤과 가혹한 삶뿐이다. 모든 세력이 아프간을 사이에 두고 자기들의 이권을 추구하는 동안 힘없는 아프간 국민들만 희생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잊힌 땅’이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잊혔다. 적어도 지난 7월 19일 가즈니주 카라바그 지역에서 한국인 23명이 탈레반에 납치되기 전까지, 이따금씩이라도 아프간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지난 봄 카불 북부 바그람 공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고 윤장호 하사가 비명에 간 직후, 잠시 그 비극의 땅에 눈길을 주긴 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곳에 남아 있는 다산▪동의부대 장병들도, 가혹한 삶을 견뎌내며 살아가는 아프간 주민들도 이내 철저히 잊혔다.
아프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잊힌 전쟁’으로 불렸다.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병력 손실도 거의 없었던 탓인지,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아프간에서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기 바쁘게 사담 후세인 정권 제거를 서둘렀다. 2003년 3월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땅은 차츰 지구촌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해 5월 1일 부시 대통령은 전함 에이브러햄 링컨호에 올라 이라크 전쟁의 ‘승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라크 주둔 미군이 들불처럼 번지는 저항세력의 공세에 서서히 발목을 잡혀가는 즈음, 아프간 주둔 미군도 ‘유령’의 출몰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쫓기듯 파키스탄 국경 산악지대로 숨어들었던 탈레반이 어느새 조직을 추슬러 아프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치고 빠지기식 게릴라 전투를 재개한 탓이다. 도로매설 폭탄과 자살폭탄 공격에 허덕이는 미군이 ‘베트남의 악몽’을 떠올릴 즈음, ‘아프간의 이라크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테러와의 전쟁’은 9·11 동시테러가 벌어진 지 9일 만인 2001년 9월 20일 워싱턴에서 서막이 올랐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이날 의회 연설에서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라덴을 비롯한 알카에다 지도부를 보호하고 있는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탈레반 정권은 부시 대통령의 연설 다음날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알카에다 지도부가 9·11 테러를 저질렀다는 증거를 내놓기 전에는 이들의 신병을 넘겨줄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탈레반 정권은 같은 달 말, 빈라덴을 파키스탄이나 인도네시아 등 이슬람 국가로 보낸 뒤 현지에서 이슬람법에 따라 재판을 받도록 하자는 수정 제안을 내놨지만, 전쟁을 피하기엔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그해 10월 7일 전폭기를 동원한 공습과 함께 토마호크 미사일이 아프간으로 날아들면서 ‘항구적 자유’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9·11 테러가 벌어진 지 26일 만의 일이다.
전쟁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인 그해 12월 7일 탈레반의 심장부인 남부 칸다하르가 북부동맹군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탈레반 정권의 붕괴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12월 22일 전쟁 발발 78일 만에 카불에서 하미드 카르자이를 임시 수반으로 하는 아프간 과도정부 수립식이 열렸다. ‘전쟁의 땅’ 아프간에 마침내 평화가 찾아온 것으로 보였다. 그로부터 6년 8개월이 흐른 지금, 아프간은 어떤 모습일까?
장터에 들이닥친 최악의 유혈사태
지난 8월 2일 오후, 아프간 남부 헬만드주 바그란 지역의 작은 마을 부그니. 금요성일(이슬람에서는 매주 금요일 점심 합동예배를 한다)을 하루 앞둔 이날은 부그니 마을에 ‘멜라’라고 불리는 주례 장터가 들어서는 날이었다. 상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프간 농촌지역에서 주례 장터는 생필품과 각종 공예품, 농산물의 물물교환과 매매가 이뤄지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다. 이날도 수백 명의 주민들이 장터에 몰려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이윽고 3시께, 갑자기 어디선가 전폭기가 날아들더니 폭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2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 명이 다쳤다. 올해 아프간에서 벌어진 최악의 유혈참사로 꼽을 만하다.
언론 활동을 통해 분쟁의 땅에 민주주의를 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전쟁과 평화 보도연구소(IWPR)’가 8월 7일 내놓은 자료에서 목격자들이 전한 ‘현장 상황은 참혹하다.’는 말 외에 따로 표현할 길이 없다. 따가운 오후의 태양 아래 한가롭게 장을 보던 이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죽음의 아비규환 앞에 처참히 스러져갔다. 천행으로 살아남은 이들은 병상에서 “섬광이 번쩍인 뒤 살점이 날아다녔고, 뼈가 허옇게 드러난 채 널브러진 주검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고 전했다. 폭격이 잦아든 뒤 현장으로 달려온 주민들은 산처럼 쌓인, 머리가 떨어져 나간 주검의 옷가지를 살펴가며 숨진 가족의 몸뚱이를 확인했단다. 한 마을주민은 IWPR과 한 인터뷰에서 “희생자 중엔 어린이와 노인들도 많았다.”며 “왜 그들이 죽어야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미군과 나토군에 의한 오폭 사고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하미드 카르자이 정부가 나서 일부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벌였을까? 오폭 사고가 벌어질 때마다 아프간 정부가 내놓는 의견은 한결같다. “동맹군에 충분히 항의했다. 민간인 보호에 더욱 각별한 주의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탈레반이 문제다. 탈레반이 민간인을 인간방패 삼아….”
부그니 마을 오폭 사건에 대해서도 현지 주둔 미군 쪽에선 목격자들의 증언과 전혀 다른 주장을 내놨다. 미군 당국은 사건과 관련해 성명을 내 “동맹군은 2명의 탈레반 고위 지휘관이 바그란 지역 외곽에서 회합을 열고 있는 장소에 정밀 타격을 가했다.”며 “공격 목표지점 인근에 무고한 아프간 주민들이 없음을 확인한 뒤 유도폭탄을 투하했다.”고 주장했다. 같은 지역에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이런 인식의 간극은, 탈레반 세력이 강한 헬만드주는 물론 아프간 전역에서 현지 주민들과 미국 주도의 ‘동맹군’ 사이가 어떤 상태인지를 극명히 보여준다.
탈레반을 포함한 각종 무장세력의 유혈공세도 아프간 주민들이 감내해야 할 삶의 무게다. 미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가 지난 4월 내놓은 <인명피해-아프간에서 저항세력의 공세가 가져온 결과>란 제목의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아프간에선 탈레반 몰락 이후 가장 격렬한 교전상황이 벌어지면서 민간인 인명 피해가 급증했다. 이 단체는 “도로매설 폭탄공격을 포함한 각종 유혈사태가 전년 대비 최소한 2배로 늘었다.”며 “바깥으로 알려진 사례만 집계해도 2006년 한 해 동안 모두 189차례 폭탄공격이 벌어져 500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했다.
‘자살폭탄’ 테러 그리고 아편 천국
외국군의 점령은 끝없이 이어지고, 나락으로 떨어진 삶의 조건은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없다. 돌아온 탈레반은 대다수 아프간 주민들에게 여전히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도처에서 벌어지는 억울한 죽음은 외국군에 맞서 싸울 명분을 만들어낸다. 인터넷 대안매체 <인터프레스서비스>가 지난 8월 9일 아프간 정치평론가 하비불라 라피의 말을 따 상황을 이렇게 분석했다.
“탈레반이 권좌에서 축출된 이후 미국 주도의 동맹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규모는 오히려 급격히 늘었다. 공습 피해자는 대부분 무고한 민간인이지, 탈레반 조직원이 아니다. 게다가 외국군의 장기 주둔은 아프간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대신 결혼식장에 폭탄이 날아들고, 한적한 농촌 마을에 중무장한 외국군이 들이닥쳐 탈레반 색출 작전을 벌이는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이 외국군에 맞서 싸우는 탈레반에 가담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1979년 친소 정권 보호를 명분으로 옛 소련의 탱크가 아프간 땅으로 진입해 들어온 이후 내리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아프간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테러와의 전쟁’에 아프간의 비극에 대한 책임을 모두 들씌울 필요는 없겠다. 미국의 공격 이전에도 아프간은 충분히 가난했고, 또 불행했다. 평균 수명은 44.5세에 불과했고, 영유아 5명 가운데 1명이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숨졌다. 30분마다 여성 1명이 임신과 관련한 합병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한 해 2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고, 성인 70%가 문맹이었다. 농촌 인구 가운데 적어도 30% 이상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군’은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린 자리에 카르자이 정권을 세우고 호기롭게 아프간의 재건·복구를 약속했다. 한국군도 그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서둘러 바그람 공군기지로 날아갔다. 하지만 지난해까지 5년 동안 아프간에 쏟아 부은 천문학적 군사비에 비해, 재건·복구 관련 예산은 이상할 정도로 인색했다. 지난 2002~2006년 아프간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군’이 사용한 군사비는 약 825억달러에 이르는 반면, 같은 기간 재건▪복구 예산은 그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73억달러에 불과했다.
‘아프간의 석유’로 불리며, 아프간 국민총생산(GN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편 생산량이 탈레반 몰락 이후 매년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것도 이런 서글픈 현실의 반영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7월 4일자에서 “아프간 전체 인구 2300만 명 가운데 12% 정도가 아편 재배에 나선 상황”이라며 “영국군이 탈레반과 격전을 치르고 있는 헬만드주를 중심으로 올해 아프간 아편 생산량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라고 전했다. 탈레반의 근거지인 헬만드주에서 아프간 전체 아편의 3분의 1을 생산하고 있으니, 그 수익이 어디에 쓰일 것인지는 쉽게 짐작이 가능하다.
‘테러와의 전쟁’은 허깨비를 쫓는 싸움이다. 군사전술에 불과한 ‘테러’를 ‘이즘’의 반열에 올려놓고 벌이는 ‘이데올로기 전쟁’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그 전쟁이 쉽게 끝날 리 없다. 앞선 이데올로기 전쟁은 반세기 동안 ‘차갑게’ 이어졌다. 이미 30년 세월 전쟁의 포화를 감내해온 아프간 주민들이 얼마나 더 시련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가?
★ 정인환 님은 <한겨레 21> 기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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