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세의 나이에 마약중독으로 생을 마감한 천재 낙서화가 바스키아. 그의 그림을 보면 나는 자유를 느낀다. 제 안의 것을 가능한 모든 평면에 풀어냈던 바스키아. 그를 억압한 것은 무엇이었고 그 안의 자유는 얼마나 큰 형체였기에 스물일곱의 나이조차 감당치 못하고 사라졌을까. 바스키아는 회계사 아버지를 둔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빈민가에서 널빤지를 깔고 생활한 흑인 화가다. 그림 만큼이나 음악을 좋아했고, 살아있다면 마흔 살이 더 되었을 사람. 기자가 바스키아에게 물었다. "그림 안에 있는 이 글을 해석해주시겠소?" "해석이요? 그냥 글자예요." "압니다. 어디서 따온 겁니까?" "모르겠어요. 음악가에게 음표는 어디서 따오는지 물어보세요. 당신은 어디서 말을 따옵니까?" "......"
타르(TAR)마을ⓒ, 1981, 244X244cm : 금속 판넬 위에 스프레이 페인트, 유성 크레용
무제, 1981, 61X51cm : 나무 판넬 위에 아크릴릭, 유성 크레용, 종이 꼴라쥬
무제, 1982, 244X244 : 십자 모양 프레임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 크레용
트렁크, 1982, 183X183 cm : 프레임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 크레용
피렌체, 1983, 212X390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치아라를 위한 피아노 레슨, 1983, 167.5X152.5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 크레용
잿물, 1983, 167.5X152.5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 크레용
즐거움, 1984, 218.5X172.5cm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 크레용, 종이 꼴라쥬
큰 탑, 1984, 152.5X122cm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 크레용, 실크 스크린
인물3A, 1984, 182X121cm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 크레용
보행자1, 1984, 152.5X122cm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 크레용
기도하는 사람, 1984, 172.5X218.5cm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 크레용, 실크 스크린
페즈 디스펜서, 1984, 183X122cm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 크레용
사회에서 버림받은 길거리의 낙서광이었으나 오늘날 팝 아트 계열의 천재적 자유구상화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27세의 짧은 생애를 통틀어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현하려 애썼던 브루클린 출신의 화가 장 미셀 바스키아.
우리나라에선 조금은 생소한 장 미셀 바스키아는 철저하게 버림받은 비극적인 삶 속에서도 생존적 본능이 뚜렷이 나타나는 충격적이고도 충동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기존 제도에서의 의식과 감성의 허구를 폭로하고 거부하면서 비인간화를 주도하는 일체의 모순을 말없이, 그러나 어느 표현수단 보다도 더 강렬하게 웅변하고 있는 것.
바스키아의 이러한 아픔을 달래주던 동반자는 첫째는 그림, 둘째는 자신의 정신적 지주인 앤디 워홀이었다.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자신의 세계를 이해해 준 워홀. 그는 바스키아에게 정신적인 아버지였다. 비록 앤디 워홀을 둘러싼 갖가지 의혹들이 제기되지만 바스키아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를 스승으로 모신다. 1987년 2월 워홀이 죽자 바스키아는 실의에 빠져 자신의 영혼을 잃은 듯 매일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방황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거리에서 시작된 열정적인 천재화가 바스키아의 예술세계가 거리에서 끝을 맺은 것이다.
오늘날 바스키아의 그림들은 지하철, 거리의 벽을 장식한 지저분한 낙서를 미술의 차원으로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들은 전세계를 돌며 전시되어 새로운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