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뭉크와 함께
무정유
출처:www.jinbonuri.com
노르웨이 출신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1863-1944)의 대표적인 명화 <절규>와 <마돈나>가 도난 당했다. 지난 22일(8월) 이들 작품이 전시돼 있던 오슬로 뭉크박물관에서다.
당시 상황의 목격자는 절도범들이 작품의 테두리를 떼어내기 위해 작품을 손으로 치고 발로 차는 것을 봤다고 말해서, 이 작품들이 훼손됐을 가능성이 제기돼 우려를 낳고 있다.
어서 빨리 뭉크의 그림들이 박물관으로 돌아와서, 다시 모든 이들의 시선 속으로 그 그로테스크한 신체를 들이밀기를 바란다.
뭉크의 그림들, 특히 누구나 한번쯤은 어디선가 봤을 법한 <절규>는 시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는데, 그 중 이승하 시인의 <화가 뭉크와 함께>라는 시를 소개한다.
畵家 뭉크와 함께
-이승하-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드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끊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도 同化와 도 童話의 세계야 저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미 미처 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우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1.
이 시는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사랑의 탐구>에 실려 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라고 한다. 반면 뭉크의 <절규>는 1893년 베를린에서 처음 전시됐다. 이승하의 시가 발표된 1984년은 세기말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른 해였으며, 뭉크의 <절규>가 처음 전시된 1993년은 오히려 '벨 에포크(la belle epoque)'의 시기였다. 말하자면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간 대규모 전쟁이 없었고, 파리나 비엔나를 비롯한 유럽 문명은 난숙해져갔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벨 에포크의 화려함과 들뜸 속에서 전쟁과 혁명은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있었다. 또한 무르익은 유럽 문명의 어두운 이면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억압된 것으로서의 무의식이라는 미지의 대륙을 발견함으로써 데카르트 이후의 주체철학, 의식철학을 부셔버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뭉크의 그림 세계를 관통하는 모티브는 '불안'이다. 그것은 또한 까닭 모를 공포이기도 한데, 아무리 외쳐도 그 절규의 소리가 목구멍에 달라붙어 나오지 않는 악몽과도 같은 공포다. 즉 뭉크의 <절규>에서 우리는 목소리 없는 절규(혹은 해골의 절규), 목소리를 내보내면서도 다시 안으로 잡아당기는 입 속의 공허, 그 텅 빈 목구멍을 보게 되는 것이다.
2.
뭉크의 목소리 없는 절규는 시공간을 넘어서 머나먼 한반도 남쪽 시인 이승하를 통해 말더듬이의 목소리를 얻었다. 그것은 세기말의 광경에 할 말을 잊어서 더듬거리는 나약한 지식인의 자기 초상이다.
시인에 따르면 세기말의 세계는 동화(同化)와 동화(童話)의 세계다. 서로 동화(同化)되어서 창백하고 비현실적인 동화(童話)처럼 돼버린 도시와 세계.. 그에 대한 시인의 더듬거리는 절규는 이 시가 발표됐던 1980년대보다는 90년대와 2천년대 벽두에 더 어울린다. 이승하는 일종의 예언을 한 셈이고, 그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세기말과 세기초 그 밀레니엄의 전환기에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체제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제공하는 상상과 판타지의 보트를 탄 보트피플이 되어 표류하거나 현실을 떠나고 있다. 이미지와 시뮬라크르의 버추얼 리얼리티 세계가 넘쳐날수록 리얼 리얼리티의 세계는 갈수록 비게 된다.
가령 '나는 나'라며 너도나도 똑같은 부위를 찢어서 입는 청바지.. 동화(同化)의 세계다. 그리고 개성이라며 너도나도 머리에 노랑 빨강 물을 들이는 동화(同化)들, 명품 사재기, 똑같은 신체를 만들어내려는 몸짱 열풍...... 그것은 세기말의 배후에서 자본주의와 체제와 매체의 공모에 의해 벌어지는 '무수한 학살극'이다. 개성이 학살당한 소비자들. 그러한 동화(同化)는 일테면 신데렐라 동화(童話)로 이어지는데, 거기서 어른들은 '애기'가 된다.
"애기야 가자!" 어디로? 이 현실을 떠나 동화 속으로! 티비는 대표적인 상상의 보트이고, 허수아비처럼('양팔을 벌리고') 일방향 주파수의 과녁에 서있는 시청자들은 현실을 떠나 판타지의 세계를 향해 표류하는 보트피플이다.
3.
뭉크의 그림은 벨 에포크의 난숙하고 화려한 장막에 가려진 목소리 없는 절규를 들려준다. 그것은 비슷한 시기에 프로이트가 발견한 '억압돼서 보이지 않는 무의식'과 통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심리적인 것이다.
절규하는 자가 해골 모양이듯, 뭉크의 시선은 또한 그로테스크한 것이다. 그것은 문학비평가 김현이 기형도에 대해서 말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과 통한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죽음의 시선으로 리얼리티를 바라보는 것이다. 가령 <절규>와 함께 도난 당한 그림 <마돈나>에 대해서 뭉크는 말한다.
"이 작품에서 죽음의 손길이 삶에 미치고 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서구 문명은 전 세계를 석권했다. '세기말'이라는 게 그저 기독교적인 시간표에 따른 기독교적 표상일 뿐인데도 이승하의 저 시에서 중요한 기호로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또한 대규모 전쟁과 태러는 기본적으로 서구 문명이 그 전 세계적 확산과 제패 과정에서 지구 곳곳에 씨를 뿌려놓은 것이다. 이제 정말 죽음은 도처에 있다. 죽음은, 인간을 넘어 자연의 뿌리까지 건드리고 있다.
이승하는 자문한다. "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내가 무얼 어쨌기에......? 그렇다. 우리는 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다. 이승하는 이렇게 시를 끝맺는다.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동화(同化)의 나라 그 판타지로 도피하는 보트피플을 부인하면, 정신적 만족감은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 보트에 타지 않았다는, 동화하지 않았다는, 그런. 그러나 몽상에 빠진 정신은 때론 고고하게, 고독하게 홀로 존재할 수 있지만, 신체는 결코 홀로 존재하는 법이 없다. 나의 신체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신체와 이어져 있다. '우리'라는 그러한 신체들이 일차적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우리는 사회적 차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의 유물론이다.
동화(同化)하는 사람들을, 그 이미지와 시뮬라크르만이 가득 찬 텅 빈 세계를 부인한다고 그 세계가 달라지는가. 맘에 안 드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부인하고 돌아누울 것이 아니라, 세계가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양태를 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러한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나 자신을 부정하고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얽히고 설킨 이런 세계에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체계와 한올만큼이라도 이어지지 않은 신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비록 공모까지는 아니더라도). 두메산골에 은거하지 않는 이상, 아니 두메산골에 은거하더라도. 그것을 깨닫고 실천하게 될 때, 결국 나의 신체는 우리의 신체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저 시에서, 최소한 저 시에서의 이승하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유물론이다.
내오랜꿈 ----------------------------------------------
뭉크의 <절규>. 워낙에 많이 알려진 작품이기에 위의 설명이 새롭지 않을 만큼 익숙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나에겐 이 <절규>보다 더 처절하게 다가온 화가가 있다. 바로 프랜시스 베이컨. 뭐, 특별하게 그림에 대해 조예가 깊다든가 해서 알고 있는 게 아니라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란 책 때문이다. 처음 <감각의 논리>를 접할 땐 워낙에 아는 게 부족했던 때인지라 중간중간 삽입된 베이컨의 그림만 눈에 들어왔었다. 그러면서 애꿎은 번역자 욕만 숱하게 했다. 짜식이 번역을 개판으로 해놓은 게 아니고서야 뭔 말인지 못알아먹을 리가 없지, 하면서. 그후 이런저런 관련서적을 접하면서 <감각의 논리>의 번역은 크게 문제가 없다는 사실도 알았고, 들뢰즈에 관해 이것저것 읽은 게 쌓이고 난 다음 두번째 읽을 때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책이다.
위 글에 소개된 뭉크의 <절규>에 공감하시는 분들은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를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뭉크의 <절규>보다 더 고통스럽고 음산한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참고로 영화 <배트맨>(아마도 1편일 것이다)에 보면 '조우커'(영화속 이름이 '잭'이었던 거 같은데, 잭 니콜슨이 연기한다) 일당이 박물관인가, 미술관인가를 부수는 장면이 있다. '조우커'의 부하들이 온갖 전시된 그림들을 깨부수고 있는데, 잭이 어떤 그림을 보고선 '그건 놔둬', 뭐 이런 식으로 부하들을 말린다. 그러고선 그 그림을 유심히 쳐다보면서 '정말 멋있는 그림이야. 그림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뭐 이런 식으로 되뇌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잭'이 찢지 말라는 그림이 바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이다. 내가 <배트맨>을 나름대로 철학을 갖춘 영화라 평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 에피소드 때문이다. 아마도 팀버튼이란 '작가'가 가진 철학의 반영일 것이다.
2004/08/31
내오랜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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