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 포구기행
벌교 현부자집에서 빠져나와 순천방향 2번 국도에 접어드니 아직 해가 중천이다. 해가 제법 많이 길어졌나 보다. 곧장 여수집으로 귀가하기엔 좀 섭섭한 시각. 그래서 순천만 일대 이름모를 포구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아마도 곽재구의 <포구기행>에 소개된 '거차'와 '화포'라는 곳이 이곳에서 멀지 않다는 생각이 작용했으리라. 불빛들이 빛나기 시작한다. 저 불빛은 화포의 불빛이고, 저 불빛은 거차의 불빛이며, 저 불빛은 와온 마을의 불빛이다. 하늘의 별과 순천만 갯마을들의 불빛들을 차례로 바라보며 나는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 하는 싱거운 생각에도 잠겨본다. 당신 같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나의 선택은 마을의 불빛들이다.- 곽재구, <포구기행> 중에서 - 마른 논에 물들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 그닥 춥다고 할 수 없었던 지난 겨울이 한꺼풀 더 엷어져 바람조차 상냥한 휴일 오후. 빠른 길을 택하느라 피하게 되는 협소한 지방도로를 달리는 재미는, 달려본 사람만이 알지 않을까. 제한 속도 60km는 주변과 조화롭게 어우러지기에는 다소 빠른 감도다. 살기가 하도 팍팍하고 거칠거칠해서 붙여졌다는 이름. 바로 여기가 그 '거차'인가 보다. 물 빠진 넓은 갯벌에 사람의 흔적은 없다. 적어도 갯일 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할 일이 없으니, 막연한 정취에 취한 외지인에게 참 다행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길다랗게 뻗은 거차의 방파제(?)는 그 꼬리가 무척이나 길다.길이 3미터, 폭이 30센티미터쯤. 나무썰매의 맨 끝은 눈썰매의 그것처럼 앞부분이 들려져 있었다. 개펄을 나아갈 때 부딪는 마찰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나무썰매를 '널'이라 불렀다. 널을 타고 그들은 갯펄을 씽씽 달렸다. 왼 무릎을 널 위에 올리고 오른발을 이용해 엎더린 채 개펄 위를 달려나가는 그들의 모습이 설원 위의 스키어 못지않았다. - 곽재구 <포구기행> 중에서.
그 널배가 만든 물길을 따라 바다는 저만치 밀려나 있다. 무작정 들어가 밟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르며 해안길을 따라 텅빈 갯벌을 끼고 돌아 나오는 길에 마추친 화포. '꽃피는 포구'라는 지명이 무색하게 꽃도 포구도 없지만, 花浦에 왔다. 그저, 이름이 예뻐서였을까? 남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인데, 내 기억 속에는 왜 그리 유난히 강하게 자리하고 있을까?
생긴대로 구불구불 곡선을 그린 바닷길을 따라 화포를 넘어서니 낯익은 단골집 간판이 보인다. 한여름이면 짱둥어를 먹기 위해 늘 여기까지만 왔었다. 순천만을 배경 삼아 땀구멍 활짝 열어가며, 짱뚱어 한그릇 후루룩 먹고 난 뒤의 행복감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대대포구로 들어가는 길옆 미나리깡을 지키는 허수아비. 용산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면 갯벌 만큼이나 반듯반듯하게 보이는 그 간척지다. 아직 해넘이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기에 순천만 길대밭에 들렀다. 사람들이 붐비는 선착장쪽을 지나 뚝방길로 왔다.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갈대숲 너머로 오늘 해넘이 목적지인 와온해변의 솔섬이 고개를 내밀고 앉아 있다.
어차피 여수 들어가는 나들목이므로 꼭 해넘이가 아니더라도 자주 들리게 되는 곳이 바로 이 와온해변이다. 갈 때마다 한적했는데, '오늘이 무슨 날인가' 싶게 해수탕 앞에는 일몰을 담기 위해 삼각대를 세운 사람들로 북적인다. 정말 무슨 날인가?
우리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잡고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는 서녘 하늘을 본다. 늘상 마주치게 되는 일몰, 이곳에서의 일몰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일몰과 과연 무엇이 다른 것일까? 솔섬이 어둠에 묻히기 직전! 마지막 숨을 토하듯 날은 저물고, 번잡한 일상의 무거움을 덜어낸 반나절의 나들이도 이제 그만 접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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