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사탕』- 개인사를 시대의 전장(戰場)으로 끌고가는 슬픈 한국현대사

Main Title I :『박하사탕』 O.S.T.
과거로 가는 기차 I :『박하사탕』 O.S.T.
비오는 연휴, 할일없이 책 보다, 음악 듣다 무심코 TV를 켜니 『박하사탕』을 하고 있다. 몇 번이나 보았음에도 나를 소파에 주저앉게 만드는 이 마력이라니... 영화야 안 본 사람이 드물 것이므로 영화 리뷰보다는 이창동 감독의 생각과 O.S.T. 음반에 관해서 간략하게 소개할까 한다.
이창동 감독.
『초록물고기』라는 데뷔작의 그 짙은 여운으로 인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되어버린 사람. 영화 한편 보고 이렇게 반한 감독은 아마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그가 『박하사탕』으로 나에게 다가온 날, 그는 진정 이 시대의 리얼리스트였다.
『초록물고기』는 공간에 관한 영화였다. 일산이라는 변두리 공간이 서울이라는 위압적 현대도시에 밀려 차츰 탈색되고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대도시가 잔혹하고 비열한 게임의 법칙으로 건설된 위선의 왕국임을 암시했다. 그의 두 번째 작품 『박하사탕』은 시간에 관한 영화다. 골치 아픈 예술영화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찡그릴 필요는 없다.
한 사람이, 그의 관계가, 그리고 그를 둘러싼 주변과 시대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첫사랑을 중심으로 보여주는 낯익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건 너무 단순하고 밋밋할 거 같다고 단정하면 오해다. 『박하사탕』은 시간이 거꾸로 진행되는 기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맨 처음 장면이 가장 최근의 일이고, 점차 과거의 사건으로 가다가 마지막 장면은 가장 먼 과거의 일로 끝맺는다. 이 감독은 이를 "사진첩을 맨 뒷장에서부터 보는 것과 마찬가지"에 비유한다.
왜 거꾸로인가?
"출발점으로 다시 가고 싶어서다. 많은 게 변했는데, 이 변화로 우리는 편할지는 모르지만 행복하지 못하다. 무엇이 언제 어떻게 변했는지 하나씩 살펴 보면 차츰 우리의 처음이 드러 날 것이다."
이감독이 말하는 현재는 1998년이며 처음은 20년 전인 1970년대말. 20년전 이감독은 대학생이었고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그뒤 20년은 시대적으로나 개인에게나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학살,열정,저항,분신,변절,쾌락,축제,권태가 별다른 해명없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20년 전에 사람들은 '공동선'이란 걸 믿었고, 이상을 향해 가는 길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쨌든 그런 믿음이 일정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이상해졌다. 옳은 소리 하면 썰렁해지는 시대가 돼버렸다. 시대의 변화와 나의 변화가 일치한다. 20대에 쉽게 꿈꾸고 쉽게 절망했지만 옳은 것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이제 뭐가 먼지 나는 모른다. 이기적 욕구만 항상 있다. 그러다 보니 세기말이다. 아무런 전망도 없다. 영화 속에서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
이 감독의 또다른 생각 하나는 영화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영화는 결국 시간이다. 현실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만들어 100분 여의 시간 속에 압축하는 것이다. 나는 단순한 압축이 아닌,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시간 말이다."
여기서 시간은 추상적 시간도 아니고 개인적 일상에 한정된 시간도 아니다. 개인의 시간은 현대사의 시간과 끊임없이 만나고 충돌한다. 한국의 현대사는 개인사를 개인의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끊임없이 교란시켜 시대의 전장으로 끌고 들어온다.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다. 평범한 중년이 첫사랑의 경험을 향해 조금씩 과거로 여행한다. 공장 노동자였던 20대에 사탕공장에서 포장일을 하는 20대여인과 첫사랑에 빠진 기억이 있다. 시대와 시간이 무엇을 바꾸어 놓았고 무엇을 가져다 주었으며 무엇을 잃게 했는지가 차츰 드러난다. 마침내 출발점에 이르면 박하사탕 같은 첫사랑과 만난다.
"박하사탕은 그렇게 깨끗하거나 멋진 이미지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온 모양도 그렇게 깨끗하고 멋진 것만은 아니듯이. 그렇지만 박하사탕의 하얀 색, 입 안에 퍼지는 환한 느낌은 내 기억에 뿌리깊다. 별거 아니지만 그걸 꿈꾸고 찾아가는 일. 그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감독은 30대 이상의 향수를 겨냥했다거나 어둡고 무겁기만 한 영화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권유한다.
"회고 취향이 결코 아니다. 마지막 장면의 20대 주인공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현재성으로 다가갈 것이다. 과거가 현재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면 왜 과거를 이야기 할 것인가.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환한 기분을 가지기를 기대한다. 박하사탕의 맛처럼…."
2003/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