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인지라 비가 오락가락 하는 토요일 오후, 느지막히 순천에서 2번 국도를 타고 완도를 찾았다. 드라마 '해신'의 찰영지로 유명세를 치루는 지역 아니랄까봐 완도대교 초입부터 온통 '해신'의 흔적이 판을 쳐 드라마 출연자들의 사진이 박힌 깃발이 곳곳에 걸린 헤프닝을 연출한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지자체마다 관광상품 개발 과열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토지>의 소유권(?)을 두고 하동과 원주가, 동해쪽 여러 도시에서 '내가 먼저네' 싸우는 해돋이 논쟁 등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대교가 놓임으로써 더이상 섬이라 볼 수 없다는 주장에 맞서 이웃한 해남과 땅끝 논쟁이 한창이다.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그런가, 신라방 어쩌고 하는 촬영세트 쪽은 아예 관심을 꺽은 채 국립공원이라 얼마간 댓가를 치루고 도착한 정도리 구계등.



확 트인 시야에 어느 것 하나 모난 구석없는 갯돌들만 펼쳐진 해변이 시원스럽다. 평소에는 왼쪽부터 청산도 그리고 몇 개의 섬을 차례로 거쳐 오른쪽 보길도까지 예사로 보임은 물론 날이 맑은 날에는 제주도도 보인다는 앞바다에 오늘은 진한 비구름대가 걸쳐져 바다와 하늘만이 맞닿아 있다.



이 '구계등'은 갯돌층이 바다 속으로 아홉 개의 계단을 이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눈에 보이기로는 2층 계단뿐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파도에 밀리고 쓸리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자연의 걸작품 앞에 민망한 말을 쓰기가 뭐하지만, '까짓 것' 하며 걸어본 자갈밭 걷기가 만만찮은 일임을 처음으로 알았다. 이곳에선 바다 분위기만 믿고 낯간지럽게 '나~ 잡아봐라' 등의 애정행각은 절대 연출 못하겠단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곳이랄까.



바짝 귀를 열어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여느 바다의 '처얼석 차알삭'이 아니라 갯돌을 어루만지고 돌아가는 파도가 '자그르르르 구르르르 까르르르~~' 하는, 전혀 다른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산책길이 즐겁다. 예사롭게 여행의 징표로 하나씩 들고 나간 갯돌이 외부로 셀 수 없을 만큼 반출되었다가 지속적인 '갯돌 되돌려 놓기' 운동의 결과로 이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라 한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지만,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 더욱 제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닌지 한번 되짚어 볼 일이다.




잠시 해변길을 접고 태풍과 해일, 염해로부터 농작물과 생활공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풍성한 방풍림 숲길을 걸었다. 탐방로를 따라 빼곡히 들어선 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하늘과 바람 조차 비껴간다. 소사 후박 굴거리 음나무 등등 익숙하거나 생소한 다양한 식물들을 입으로 소리내어 불러주며, 나무 이름과 모양새를 기억하려 해도 이상하게 돌아서면 도루묵이다. 어느새 모기에게 물렸는지 팔의 한 부위가 한창 부풀어 오르는 중.




구계등을 띠처럼 둘러싼 방풍림을 뒤에 두고 다시 갯가로 나왔다. 수없이 바닷물에 담금질 하는 갯바위에 붙어 살고 있는 홍합, 파래, 톳, 고동 등이 두어 명 아주머니의 손을 탄다. 봉지 가득 톳을 꺽던 한분이 된장 초고추장에 무쳐 먹는 요리법까지 알려주며 권했지만 욕심낼 일이 아니라 손사래를 치고 정중하게 거절.



해변에서 유일하게 저 혼자 우뚝 선 이 느티나무가 좋다. 벤취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어도 그만이고, 가벼운 책장 뒤적거리다 졸리면 무릎 베고 잠깐 졸아도 좋겠고, 맛있는 도시락 까먹으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기에 그만인 장소다.

한창 햇볕에 달궈진 돌들을 보니 해수욕철인 한여름에 그리 사람이 들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일상에서의 팍팍한 마음 따위 내려두고 이 갯돌 마냥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한세상 살아도 좋겠다 싶다.


2005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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