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속도, 그 너머의 삶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풀과 나무가 드리워진 절벽 아래, 바위 위에 엎드린 채 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한가롭다거나 여유롭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듯 싶은, 차라리 눈을 뜨고 꿈을 꾸는 듯한 모습. 그는 어디쯤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한바탕 집중호우가 지나가고 난 오후, 다리를 꼬고 누워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를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저토록 ‘무심하게’ 무엇을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고,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듣고, 나무 그늘에 누워 하늘을 본 적이 있기나 했던가. 그렇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 또는 무엇이 그 한없는 게으름을 방해라도 했단 말인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그 권리를 빼앗긴 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 인간이기를 포기한 채 자본의 충직한 노예가 되기를 자발적으로 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얘기한 것은 맑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였다. 그런데 그 아픈 충고를 들을 때조차도 우리는 가슴에 품은 휴대폰이 더욱 강렬하게 구속해 주기를 초조하게 바라지는 않았던가. 지독한 매저키스트! 그런 마당에 「고사관수도」라니.
한치의 에누리 없이 분절된 시간과 세밀하게 구획된 공간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모세혈관은 싱싱한 피로 숨쉬기를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그리하여 우리는 화폐로 정확하게 환산되는 시간의 채찍에 쫓겨 헐떡거리며 살아왔고 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여유롭게 그리고 느릿느릿 사는 것이야말로 육체적 생명뿐만 아니라 정신적 생명을 다시금 약동하게 하는 원천이다. 그런데 게으름과 느림은 이 현란한 자본의 제국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격언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피에를 쌍소는 힘주어 말한다. 게으름과 느림은 이 황금의 성전에 발을 디뎌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을 파기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대담한 도발이다.
하기야 러셀이 게으름을 드높이 찬양한 적이 있고, 밀란 쿤데라가 『느림』의 복권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이들에 비해 느림에 대한 쌍소의 견해는 훨씬 구체적이다. 한가로이 거닐기, 남의 말을 차분히 들어주기, ‘고급스러운’ 권태에 빠져보기, 꿈꾸기, 진득하니 기다리기, 낡은 시간 떠올리기, 술 한 잔의 지혜…. 일견 가벼워 보이지만 우리의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빈 칸을 채우면서 본다면 그다지 가벼운 것만도 아니다.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사람은 생명의 왕국을 피폐하게 만드는 폭군이자 독재자이다. 또는 삶의 또 다른 일부인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바보거나 천치다. 최고의 스피드야말로 최상의 미덕이라는 음험한 자본의 논리, 그 가증할 수사 전략을 간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이보그와 인간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말초적인 감각을 충족시키는 물질적 풍요가 우리 삶이 원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전략의 이면을 투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무뎌진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때 필요한 무기가 느림이다. 물론 느림만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느림과 빠름의 역동적 교직, 그리하여 드러나는 삶의 무늬, 이를 두고 ‘아름다운’ 삶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상투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말해보자. “느림의 미학 또는 느림의 철학을 내면화함으로써 삶의 견인력을 확보할 것, ‘빨리빨리’라는 자본의 주문을 끊어버릴 것, 그리하여 황폐해진 나의 삶을 복원할 것!”
느림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삶의 조건이자 우리의 삶을 노예화하는 자본의 논리에 저항할 수 있는 거점이다. 곧 거부를 통해 해방을 꿈꾸는 사람은 느리게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왜?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쌍소의 말이다. 나른한 몽상과 한가로운 산책은 상상력을 뿜어내는 셈이다. 그 샘물을 길어올려 들이킬 때 속도에 지친 우리의 생명은 다시금 약동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다시금 「고사관수도」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나란히 놓고 그 사이에서 출렁이는 생명의 ‘힘’을 호흡할 일이다.
목차
001. 머리말...9
제1장..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19
1.. 한가로이 거닐기...41
2.. 듣기...53
3.. 고급스러운 권태...65
4.. 꿈꾸기...77
5.. 기다리기...85
6.. 내 마음의 시골 고향...97
7.. 글쓰기...107
8.. 포도주 한 잔의 지혜...117
9.. 모데라토 칸타빌레...129
제2장.. 리듬의 교체(막간의 시간)...139
제3장.. 과정. 유토피아와 충고...139
1.. 문화적 흥분...163
2.. 뒤늦은 도시 계획을 위해...179
3.. 분주하지 말기...201
4.. 소박한 사람들의 휴식...211
5.. 하루의 탄생...225
정선태, 「시간과 속도, 그 너머의 삶」, 『BOOK+ING 책과 만나다』, 그린비(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