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이 답이다 - 한일협정 50년, 실종된 한일관계
허남정 지음 / 씽크스마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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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한일관계 박태준이 답이다/허남정/씽크스마트]일본의 정재계가 박태준에게 존경과 신뢰를 보내는 이유는...

 

근대화 1세대의 중심에 섰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 뭉클하다. 이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고 폐허에서 찬란한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이야기를 읽었다. 개인과 가족의 성장을 넘어 국가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애쓰는 그의 모습에서 열혈남아의 기상을 강렬하게 느꼈다. 아무리 시대가 위인을 만든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의 삶이었기에 절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오늘 포항제철(포스코)의 창립자 박태준 회장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열혈남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외교가, 오직 한길로 가는 애국자의 모습을 보며 더욱 숙연해진다. 불가능에서 가능의 역사를 창조해간 그의 모습에서 절로 존경심이 우러나게 된다. 그의 생전에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든다.

 

박태준은 1927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임랑리에서 태어났다. 6살 때, 일본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부모님의 높은 교육열로 5년제 사립 명문 아자부 중학교에 들어갔다. 성적이 아주 뛰어난 상류사회 자제들이 다니던 학교였지만 그는 늘 1등이었다. 식민지 백성의 설움과 차별을 알고 있었기에 실력에서라도 일본을 따라 잡고 싶었던 그는 늘 수석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수학과 수영, 유도, 스키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당시는 태평양 말기여서 일고(동경대학교)는 한국인 입학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고,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 2년을 수료했다. 일본에서 겪은 식민지 시대의 삶은 그에게 강한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해방을 맞아 귀국하면서 육사 6기로 입학하게 된다. 육사 생도 박태준과 교관 박정희의 운명적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한국전쟁에도 참여하게 해서 마지막까지 전투를 치렀다고 한다.

 

그는 5·16 군사 쿠데타 주체세력은 아니었지만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일했고, 상공 담당 최고위원이 되어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도 깊이 관여했다.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후에는 대통령 특사가 되어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25년 만에 2100톤의 철강생산 신화를 창조한 포스코의 시작은 어땠을까.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난관이었다. 1968년의 한국경제 평가보고서에는 종합제철건설을 연기하고 노동 및 기술집약적인 기계공업을 우선으로 개발하자고 했고, 1969년 세계은행마저 한국의 제철산업은 경제성이 없다고 봤다. 하지만 차관이 절실했던 박태준은 대일청구권자금을 농림부가 아닌 종합제철 건설 자금으로 쓸 수 있도록 일본 측까지 설득했다고 한다. 조국근대화를 위해 철강 산업의 육성이 절실했던 박태준은 결국 일본을 설득해서 협력까지 얻게 된다.

 

일본에서 14년간 엘리트교육을 받으면서 일본 고급문화와 고급언어를 접했고 늘 공부를 했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 지리까지 일본인들보다 해박해서 그를 아는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이 그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막후실력자인 야스오카 마사히로는 박태준이 포스코를 설립할 때 일본 정재계인사를 소개하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제5공화국 시절 한국의 정재계에 대해 일본이 경멸에 찬 시선을 보낼 때, 이들에게 포철견학을 시키며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박태준은 1970년 자본도 없고, 기술도 없고 경험은 더욱 없는 상황에서 39명의 창업요원과 함께 포항 바닷가에서 포항제철을 착공하게 된다. 그렇게 미약하게 보잘 것 없이 시작한 포철은 25년 만에 2100톤의 철강생산 신화를 창조하게 되었다.

 

포스코 설립 이후 한국은 철강무역을 통해 철강부문의 대일 흑자를 달성했고

세계적인 수준의 광양제철소를 우리의 기술로 건설했다.

이것이 바로 박태준식 극일이다.

상대방을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상대방을 뛰어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다.

(머리말에서)

 

박태준이 포철에 기울인 노력은 전방위적이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활발해진 한일경제협력은 한국 산업화에 크게 기여했고, 대일청구권자금과 일본의 공공 및 산업차관, 선질 기술 도입은 산업화의 기틀이 됐다. 산업화가 절실했던 한국은 일본의 아이디어와 경험을 적극 배우고 수용했다. 결국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한국의 산업화에 크게 기여한 셈이다. 그렇게 산업의 쌀이라는 제철소는 우리나라 중화학 공업의 토대가 되었고 조국의 경제부흥에 기여하게 된다.

 

박태준은 산업화의 기틀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외교에도 한몫 했다고 한다.

1980년대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지역과 한국의 외교단절에 직면하자 포철과 박태준은 외교개선을 위해 활약했고, 대통령의 특사가 영국 수상과 면담하지 못하고 있을 때 포철 회장의 전화가 수상의 스케줄까지 바꾸게 했다고 한다.

 

박태준을 사업가적 견지에서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김구, 이순신, 안중근 등과 같은 애국자의 계열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 할 수도 있다. 나라를 찾아 주권을 회복하는 일이나 적을 물리쳐 국권을 보호하고 백성들의 안위를 확보하는 일이 국가적 사명으로 이뤄진 일이라면, 목숨 걸고 헌신하며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초석을 놓고 민족의 자존심을 공고히 한 일은, 똑같은 국혼 실천의 소산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본문에서)

독도문제, 역사교과서 문제, 종군위안부, 징용문제의 해법을 박태준 식으로 찾는다면 어떨까. 지금의 한일관계의 경색을 풀어나가는 해법에 대해 박태준은 무슨 말을 할까.

 

아는 만큼 보이고 행동한 만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엄청난 독서량은 그의 해박한 지식과 진정성 있는 대화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설득을 이뤄내게 했으리라. 그의 실천력과 용기, 열정과 상대에 대한 배려가 합의를 도출해 냈으리라.

 

농업용으로 합의된 자금을 제철소 건설용으로 바꾸고, 일본철강연맹과 야와타제철, 후지제철, 니혼고칸 등 일본 철강 3사의 적극적인 기술협력까지 받아냈을 정도라니 놀랍다. 기술이전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얼마나 그를 믿고 존경했으면 철강 3사가 협력하겠다고 했을까.

 

미국의 철강왕이 카네기라면 한국의 철강왕은 분명 박태준이다. 하지만 그는 철강왕을 넘어 훌륭한 외교 담판가였고 충정의 애국열사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맨땅에 헤딩하는 모습,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국가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산 사람이 없을 정도라는 평가에 숙연해지고 머리 숙여진다.

 

박정희와 박태준의 이심동체 같은 협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포스코가 있었을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독재와 민주화 인사 탄압이라는 오명은 있지만 박정희와 박태준의 조합은 환상의 조합이 아니었을까.

일본의 정재계가 박태준에게 보내는 존경과 신뢰의 이야기에서 한일관계의 해법을 생각하게 된다. 감정적인 대응이 아닌 열정과 담대함, 해박한 지식과 지혜로 그들의 감동을 끌어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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