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버리기 연습 2 - 복잡한 생각을 잠재우는 행복한 마음 다스리기 생각 버리기 연습 2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양영철 옮김, 스즈키 도모코 그림 / 21세기북스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자주 괴로웠다면 자주 원했기 때문이다

 

 

먼저 이번 책에서 말하는 ‘생각’은 ‘괴로움’을 유발하는 생각이다. 지난번 책에서의 생각은 ‘잡념’이었다. 넓게 보면 괴로움을 유발하는 생각도 쓸데없는 잡념에 속한다. 저자가 말하는 ‘생각 버리기’란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까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생각만 하고 살라는 뜻이다. 이년 전 베스트셀러가 된 후 ‘생각 버리기 연습’을 읽었을 때 처음 느낌은 썩 좋진 않았다. 언뜻 보기에 생각의 총량을 줄이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인 나는 현재 지금 하고 있는 것에 모든 오감과 생각을 집중하라는 충고가 부담스러웠다. 절망을 뿌리치기 위해선 절망과 싸울 것이 아니라 다른 희망을 붙잡기만 하면 절망이 사라지듯이 생각도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다른 쓸데없는 잡념들은 사라진다는 이치가 머리로는 이해되었지만 조금은 공허하게 들렸었다. 외려 생각이 없어도 되는 영역까지 피곤하게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하는구나 싶어 현실감 있게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내 모든 생각들이 쓸데없다고 여기기에 나는 미련이 많았다. 가끔 책이 공허하게 느껴지면 더욱 리뷰의 완성도를 높여 나름 그 책을 보완하고 싶다는 부질없는 욕심에 시달릴 때가 있다. 기대했던 책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더 청개구리 심보가 고개를 내미는 것도 어쩌면 내 선택에 대한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더욱 완벽주의자가 되기 위해 현실에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해 논리를 만들고 지루한 설명을 붙여가며 리뷰를 썼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그때 생각이 소록소록 떠올랐는데 가장 공감하던 불교용어가 흡사 불이 켜지듯 뇌리에서 주르륵 반응했다. 바로 만(慢)이라 불리는 번뇌의 스위치이다. 저자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 걱정하고 조바심 내며 프라이드에 집착하는 탐욕'이 만(慢)의 번뇌라 하였다. 인간은 자기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면 뇌에서 만(慢)이라는 번뇌모드가 활성화된다. 그 순간 끼어드는 생각의 잡음은 안타깝게도 우리 삶을 삐뚤어지게 이끌어온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만(慢)의 번뇌에는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과시욕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과시욕의 밑바탕엔 '그렇지만 나는 못난 사람이다'라는 열등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만(慢)이라는 번뇌에 쫓겨 행동할 때에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드레날린이 활성화되어 흥분 상태가 되고 이러한 고통은 뇌에 자극을 주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뇌는 우리의 마음과 같지 않아 이 자극을 쾌락이라는 정보로 받아들이고 다음번을 기약하게 된다. 뇌는 옳고 그른 가치판단을 하지 않으며 정보수용을 통해 생각구조를 프로그램화해 셋팅해 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뇌가 원하는 일, 뇌가 좋다고 판단한 일을 자신도 모르게 좇아가며 한번 긍정으로 저장된 생각구조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뇌 속의 연인’이 있어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고 했던 저자의 주장이 비로소 실감나게 기억났다. 누구든 스스로 괴롭고 싶어서, 고통이 좋아서 괴로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사람은 모순되게도 괴로움의 고통을 원하는 존재였다.

 

 

살면서 어디서든 보게 되는 유형의 사람이 있다. 저 사람은 분명 괴로움에 처했을 것이 확실한데 어쩐 일인지 그 괴롭고 힘든 감정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스스로 괴롭다고도 말하면서 가만 보면 상황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무언가 괴롭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데 비슷한 유형의 괴로움을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자꾸 괴로움의 구렁텅이를 스스로 파헤쳐 빠지게 되는 걸까. 이것은 같은 사람이 비슷한 상처를 자꾸 겪게 되는 과정과도 유사한 듯하다. 저자는 괴로움의 신호가 인간에게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기억되기 때문이라 말한다. 위험을 피하고자하는 것은 생존본능이다. 이때 뇌에 전달된 정보는 다른 정보보다 강렬하고 중요하게 인식될 것이다. 때론 ‘괴로움의 신경회로’가 자극되어 적절한 시기에 실수를 인정하거나 잘못을 사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자극이 반복되어 습관이 되고 이어서 생각의 패턴으로 굳어지면 어떻게 될까. 혹시 그전 보다 더 강하고 더 힘겨운 괴로움에 직면하게 되지는 않을까. 괴로움의 자극은 뇌에서 마약과도 같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을 인지하고 괴로움에서 당당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불교에서는 이렇듯 ‘괴로움의 신경회로’가 습관화되는 현상을 ‘업을 쌓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쓸데없는 생각을 깨닫는 힘을 '염력(念力)'이라 칭한다. ‘념(念)’은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잡다한 생각을 잡념(雜念)이라고 하지 않는가. 흔히들 정신을 집중해 물체에 손을 대지 않고서도 위치를 옮기는 초능력을 염력이라고도 하는데 그만큼 쓸데없는 생각을 깨닫는 것이 힘들다는 뜻은 아닐까.

 

 

저자는 우리가 살면서 자유의지대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무의식, 무자각의 상태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좇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보았다. 현실에서 지혜롭게 매번 괴로움의 신호를 알아차리면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반복, 더 나아가 괴로움의 증폭, 내달리게 되는 폭주 현상을 막기 위해선 무엇을 깨닫고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 후회하지 않아도 될 일, 화내지 않아도 될 일들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가 말하는 ‘괴로움 버리기 연습’은 바로 괴로움을 만드는 신경회로를 개인의 의지로 통제해 나가는 여정이었다. 뇌에서 일어나는 착각과 왜곡에 사로잡히지 말고 고통스런 현실을 정확히 인식해야 마음을 괴롭히는 사고나 언어 패턴을 줄일 수 있다는 것. 혹시 비슷한 패턴의 괴로움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마땅한 탈출구가 없는 독자들이라면 퍽이나 유용한 정보가 될 듯 하다. 지난번 1권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은 ‘괴로움’이라는 한정된 잡념의 영역을 겨냥하고 있으며 그 해결법 또한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자주 비난했다면 자주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유익한 충고는 비난에 대한 대처였다. 비난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저자는 서두부터 비난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은 아닐까. 어떤 일이 발생하고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한 뒤 다음날 언론기사를 보면 열에 아홉은 비난이다. 아무리 좋은 말을 선한 의도로 했다 해도 비난을 면할 순 없다. 저자는 세상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트집을 잡으려 하고 이유를 찾아내 남을 헐뜯으려 하는 속성을 지녔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비난받도록 되어 있기에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의견이나 주장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의견과 관련된 기억정보를 떠올리게 한다. 기억 속에는 공감뿐 아니라 개인적인 반감, 상처, 이해관계, 경험, 지식 등이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개인의 기억구조를 피할 수 없었던 부처도 심한 공격과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무언가 의견을 제시하는 쪽은 이러한 인간의 생각구조를 생각하기 보다는 ‘나를 이해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앞세우게 된다. 저자는 타자의 이해를 바라는 심리 자체를 헛된 기대, 응석, 혹은 망상이나 환상이라 일갈한다. 비난은 세상의 이치이고 원리이며 자연스런 인간 활동에 불과한데 왜 부자연스런 칭찬이나 이해를 먼저 구하냐는 말로 들렸다. 그러니 누군가 비난을 받았다면 그건 애초부터 억울할 일도 화가 날 일도 따질 일도 아닌 것이다. 물론 누구나 비난을 해도 상관없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비난하는 사람이 옳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마음속에서 비난이 아닌 칭찬을 받고 싶다는 기대가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뜻이다. 더 구체적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인터넷과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이 쓴 글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라는 뜻으로도 이해되었다. 무엇보다 지금 이 글도 나 혼자 쓰고 말 일이 아닌 세상을 향해 떠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글을 쓸 땐 칭찬보단 비난이 더 당연하다는 걸 스스로 인식하고 있으면 어떠한 비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저자는 전에부터 분노 에너지를 극대화시키지 않기 위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일체의 방문회수나 댓글에도 마음을 닫으라 충고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주고받는 메일에서도 서로 자아를 자극하는 정보를 전달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고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바로 번뇌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심리가 쓸데없는 잡념을 만드는 요인이다. 무언가 모자라다는 느낌은 뇌에서 감지하는 만큼의 쾌락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인 것. 저자의 일침은 사실 소셜 네트워크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절대적인 해결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간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활성화하기 이전에 자신의 생각부터 정돈 하는 것이 더욱 단단한 네티즌으로 살아가는 한 방법이라 깨우쳐 주는 적절한 가르침임에는 틀림없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상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의견을 제시하며 그 의견에 동조하길 바란다. 겉으론 사람들 마다 다양한 생각이 있다고 전제를 두지만 더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가 보면 그래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뇌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환상의 방을 마련해 놓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그래서 옳은 생각을 했고 이 의견은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의 생각에 사람들이 공감하거나 동조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생각이 불가에서 보자면 왜 쓸데없는 집착에 불과한 것일까.

 

 

당신의 의견을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 줄 때,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이미지를 뇌에 형성하고 싶은 까닭에, 비난의 위험을 망각하고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음으로써 당신이 옳다는 망상을 뇌에 심어두고 싶은 것이다. -21p

 

 

이 책은 맨 앞에서 비난을 대비하는 방법을 말하고 마지막에 ‘의견에서 벗어나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의견 자체는 논쟁이나 말싸움과 다르다. 다양한 의견이 모아져 발전적인 방향을 이끄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의견을 주장하다보면 주장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른 의견은 다른 기억을 부르고 그것은 다양한 욕망에 의해 분노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분노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인간에게는 공통적으로 ‘나는 옳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존재한다. 뇌 속의 연인은 온갖 환타지로 구성된 자신만이 드나드는 착각의 방을 근사하게 꾸며놓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칭찬과 공감, 찬성의 목소리는 뇌를 수시로 자극하는 정보들이다. 마찬가지로 남의 의견에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은 마음도 같은 이치다. 흔히 길고 충분하게 설명하면 상대가 이해할 것이라 여기지만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상대의 마음이 혼란스러운 한 내용을 이해하진 못한다. 의견에 집착하다가 결국은 반대하는 자신만 주장하거나 마찬가지인 상대방만 보게 되어 논쟁의 상처만 남게 된다. 저자는 빈번한 논쟁이 마음속에 뒤틀어진 망상만 키우게 된다며 의견자체에서 벗어나라 따끔히 충고했다.

 

 

자주 흔들렸다면 자주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모든 망상의 업을 키우지 않기 위해 저자는 무엇보다 타인을 구실로 자신감, 자존감, 자만심을 구하거나 잃지도 말 것을 강조했다. 타인과 바깥세상에서 고통의 원인을 찾는 일은 외부 세계에 좌지우지 되어 평정심을 잃고 흔들리는 인생을 사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주변의 반응 때문에 자존심을 상해한다거나 자신감을 잃는 것 모두 평정심이 없기 때문이므로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사람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주장을 피력하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지 자신이 있다면 아무 주장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보자면 주장을 많이 하는 사람이 가장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자신을 찾지 못한 사람,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 자신을 잃어 버려 놓고 타자나 세상을 통해 자존심을 찾으려는 발상은 계속하여 자존심에만 집착하게 되는 요인은 아닐까.

 

 

예를 들어 살면서 친한 친구는 하나쯤 만들어야 한다는 걱정, 연인이 필요하다는 생각, 아이는 있어야 한다는 확신, 가족이 어떠해야 한다는 편견, 동료가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이기심, 배우자가 이것을 해주어야 한다는 고집도 모두모두 내 평정심을 해치는 쓸데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면 어떨까. 중요한건 내 마음의 평정이지 그들과의 관계 완성도가 아니다. 특히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혹은 타자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논리로 설득하려는 것도 대표적으로 쓸데없는 만(慢)의 욕구에 해당된다 가르친다. 부처가 말한 악마란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욕망이자 불만이 악마부대를 늘리기도 줄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악마는 다분 자기학대적인 성향이 있어 불쾌한 자극을 반복하려 든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된다. 그러니 우리 자신의 뇌는 정보를 왜곡해 그릇된 환상을 만드는 사기꾼이라 여기고 뇌의 정보처리에 농락당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과거에 얽매이고 헛된 미래를 꿈꾸는 것 역시 오늘의 나를 보지 못하는 자세이다. 저자는 다른 누구보다 지금의 나를 응시하고 집중하며 관찰하는 습관을 반복하라 주입한다. 화가 났다면 내가 지금 처한 감정이 무엇이라는 자각만 제대로 인지해도 금방 화는 줄어들게 된다. 친한 사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고독을 음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인간을 미화하지 말고 호흡을 가다듬는 것도 심신을 안정시키는 오래된 방법이다.

 

 

이처럼 저자가 알려준 방법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업을 쌓지 말라는 뼈아픈 충고였다. 불교에서 ‘업’이란 ‘마음에 축적되어 다음에 생길 감정을 낳는 에너지’를 의미한다. 이 마음의 에너지는 사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운동성을 지니고 있지만 결국 내게로 돌아온다. 내가 뿌린 마음의 씨앗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것 같아도 결국 내 마음을 불태우거나 재로 만든다. 업을 쌓아가는 주체가 언젠가 어디선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생겨난 에너지의 여파는 반드시 본인과 상대에게 다음 감정을 불러들이고 좋건 나쁘건 어떤 형태로든 이차적인 에너지로 축적, 응고되어 훗날 더 큰 고통의 감정, 업의 결실을 만들게 된다. 부정적인 행위, 생각들이 업이라는 에너지의 흐름을 활성화시켜 괴로움을 유발하는 패턴이 된다. 그러니 남의 험담, 혹은 잘 보이기 위한 위선, 무심코 던진 거짓, 사소한 말다툼 이런 것들은 죄다 훗날 분노와 욕망의 열매로 익어가는 착실한 과정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온라인에 글을 남기고 이웃과 글을 나누는 것 자체가 업을 쌓는 행위이고 또 다른 감정을 유발하는 악업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내가 남겨온 글들과 수많은 대화의 궤적을 생각하면 새삼 소름이 끼친다. 더욱 평정심을 뒤 흔드는 글과 말을 삼가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특히 내 경우는 글을 쓰면서 힘겨웠던 시간을 털어버리는 습관이 있어 일단 쓰고 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편에 속한다. 그동안 내 평정심을 위해 다른 누군가의 평정심을 해치지 않았나 싶고 사실 이 글도 그다지 속이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모두 내가 범했던 시행착오들이니 다른 오해는 없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가만 보면 오해하는 것도 기실 하는 입장에선 자기 입장에서의 이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오해는 대부분 오해를 부르는 대상으로부터 기인한 자업자득의 결과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해보다는 오해가 더 일반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해는 보다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기에 늘 오해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우리는 마음에 사소한 악업을 쌓지 않도록, 욕망과 분노에 휘둘리지 않도록 늘 의식의 센서를 켜놓는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생활속에서 염력을 발휘하는 경지를 지향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읽었다고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실천하기도 쉽지가 않다. 나만해도 지난번에 읽은 ‘생각버리기 연습’에서의 충고를 또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우를 범했다. 나를 버리는 것이 나를 찾는 가장 현명한 방법임을 다시 한번 깨우친다. 괴롭고 싶어 하는 우리 자신에게 더 이상 자신에게 속지도 자신을 속이지도 말아야 할 것을 당부드리고 싶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괴로움을 유발하는 생각을 차단하는 것이다. 괴로움을 진정 괴로운 것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그 당연한 절차를 거부해온 시간들에 사과한다. 괴로운 건 괴로운 것이다. 미처 몰랐다면 지금부터 괴롭다고 적어보자. 그리고 읽어보자. ‘괴롭다’고 쓰고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자. 부디 당신도 그래주시길. 괴로움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괴롭지 않은 나와 당신을 사랑하시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6-06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6-06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답게 살아가는 내 하루를 사랑할 수 있으면
언제나 좋은 이야기 피어나리라 믿어요

가연 2012-06-06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뇌 리셋, 이 코이케 류노스케의 전작이었는데.. 그 책은 조금 읽어본 기억이 나네요. 저는 또 얼마나 많은 업을 쌓으며 살아가는지.. ㅎㅎ

비로그인 2012-06-06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내가 범했던 시행착오들이니 다른 오해는 없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이렇게 이쁜 글이라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