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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
페르낭 브로델 지음, 김홍식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3월
평점 :
짧고 강렬합니다. 색상이 진하거나 화려하지 않은데도 인상은 강렬했어요.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며 가장 많이 놀란 것은 저자가 여러 방향으로 에둘러 이야기 하면서도 결국 핵심을 전달하는 어법이었습니다. 인문서를 읽다보면 보통 처음에 정의를 하고 부연 설명을 하거나 반대로 설명을 이어가다 마지막에 결론을 내는 방법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특이하게도 방대한 다른 이야기로만 중심을 구축한다는 것입니다. 놀이기구로 말하자면 하이라이트는 없지만 전체를 둘러보는 식의 투어형 탑승기구를 상상하게 됩니다. 모두 둘러보았더니 출구에서야 모아진 하나의 그림이 남겨지는 것. 여행은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습니다. 호흡도 길고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들었다고 꼭 끝에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렵진 않은데 그 하나의 그림을 무언가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해설이 참 고맙더군요. 평소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해 의문을 가졌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독자에겐 일독을 권합니다.
이 책은 저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이 1979년 출간한 자신의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주제를 미리 소개하는 세 차례 강연 모음집입니다. 강연은 1976년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이루어졌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경어체에다 설명위주로 구성되었어요. 강연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가 출간되기 전에 이루어졌지만 이 책은 원저 못지않게 자주 인용되며 경제사회학 분야를 비롯한 여러 강의와 세미나에서 필수 교재로 사용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왜냐하면 원저는 너무나 방대하여 일반 독자외에 전문가로서도 힘겹다고 하더군요.
저자는 프랑스 역사학자인데 15-18세기 세계 경제사를 30년에 걸쳐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 30년 세월의 결론을 그려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저술 하는데는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책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저자는 1985년 사망했는데 그렇다면 40대 후반부터 인생 말년기를 통털어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집요하게 천착한 것이 됩니다. 바로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닌 ‘역사가’였다는 것이 이 책을 꿰뚫어보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듯합니다. 저자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면 변하지 않고 오래 지속(장기 지속)되는 것들을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말합니다. 아주 핵심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전제조건이 아닐까요.
다시 말하면 ‘거의 변하지 않는 관성적인 것, 인간의 명료한 의식 밖의 역사, 인간이 능동적 존재라기보다 피동적 존재로 놓이게 되는 역사’ 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는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 생활을 지탱해주는 습관 같은 관행을 ‘물질생활’이라 했는데 이것은 우리 몸속의 내장처럼 깊숙한 곳에 흡수되어 있는 삶이며, 인류의 삶은 절반이상이 일상생활에 묻어서 굴러간다고 보았어요. 예를 들어 화폐와 도시는 수백 년에 걸쳐 가장 일상적인 생활의 뼈대를 이룬 구조물입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것은 단기적 시간대에 주목하는 ‘표층의 역사’가 아니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장기 지속하는 ‘심층의 역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구조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죠. 좀 섬직한 이야기도 되는데 인간은 태어나 기껏해야 백년도 못사는 존재이지만 역사는 내가 태어나기 100년, 200년, 1000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기에 우리는 오늘날에도 옛 모습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그 역사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저 기나긴 역사의 물결 속에서 흘러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일뿐. 자본주의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닐 텐데 그렇다면 그 언제를 정확하게 말하려면 인간 생활의 변화부터 포착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자는 14-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약 400-500년 동안 유럽에서의 경제를 해부했어요. 이 책이 의미 있었던 건 현재 금융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 뉴욕 이전에 서유럽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의 흐름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그 시기 서유럽을 살펴보았더니 맨 밑에 물질생활, 그 위에 시장경제, 그리고 맨 위에 자본주의가 위치한다는 구조를 발견했어요. 400년 이상 서유럽에서 장기 지속했던 이 구조의 특징은 바로 상업자본주의의 주된 특징들(운송, 상인, 화폐, 무역의 역할 등)이었고 이 오래된 역사가 사실상 자본주의를 탄생케 하였다고 본 것이죠.
당시 교환메커니즘은 중국이나 이슬람등 유럽 외에도 있었지만 거래소와 다양한 신용 형태같은 우월한 장치와 제도 덕분에 세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볼 때 유럽경제가 다른 곳보다 앞서 있었다고 합니다. 괜히 선진국이 아니었던 겁니다. 물론 자본주의가 먼저 발전한 나라가 선진국이 되었다는 점이 슬프긴 하지만요. 그런데 저자는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와는 구별되는 시대의 활동을 가리키는 용어라 주장합니다. 시장경제는 늘 역사가들이 무대의 중앙에 배치했던 주제이잖아요. 브로델은 역사가로서 애석한 점이 바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구분하지 않는 점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최하층에서 자본주의 실체가 맥박이 뛰는 것이 아니라 최상층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시장은 공정하게 경쟁하는 게 아니라 독점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일어난다고 보았어요. 장기 지속하는 역사를 보았더니 자본주의는 결코 경쟁에 바탕을 둔 게 아니라 경쟁을 없애는 반시장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교과서와 반대되는 새로운 시각입니다. 늘 자동반사적으로 시장은 경쟁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외워왔으니까요. (그런데 독점을 자본주의 본성으로 보는 것은 요즘 동네빵집을 잠식하고 있는 대기업 제과 프랜차이즈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공정한 경쟁이 아닌 독점으로 시장을 장악한 것이니까요)
예를 들어 수직적 위계의 교환의 세계에서 상인자본가들은 선주이면서 보험업자이면서 대부업자, 차입자, 금융가, 은행가이기도 했어요. 한편 농장의 경영주이기도 했죠. 외려 하층은 전문화 되어 있는 반면 최상층은 전문화가 거의 없어 통제를 받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먼저 손에 자본을 손에 쥔 상인들의 기득권이 곧 선점효과였고 그것이 전문성 없이 유지되어온 배경이었어요. 당시 원거리 무역이 일어나면서 자본가들은 그들이 축적한 자본덕분에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고 해당 시대의 굵직한 국제사업을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즉 유럽에서 자본주의적 과정은 곧 최상층의 상거래 활동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브로델에 의하면 낮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환은 경쟁하고 투명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는데 높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환은 불평등한 힘의 관계를 그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자본주의가 싹트는 본질적 요소인데 이 ‘불평등의 힘’, ‘소수 특권층의 힘’은 단지 경제 활동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수준으로 뻗어 나간다는 게 자본주의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하면서 영국이 산업혁명을 거쳐 자본주의가 먼저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을 운 좋게도 전 세계가 도와주었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성공하려면 사회질서가 어느 정도 안정적이어야 하고 국가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중립적이거나 호의적이어야 하는데 영국은 바로 그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안팍으로 갖추어졌기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촉발되고 나서 기초적 경제의 힘과 활력이 넘쳐났고 그러한 배경이 산업 자본주의를 받쳐주었던 것이죠. 그래서 자본주의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을 때 당도하는 ‘밤의 손님’이라고 말합니다. 자본주의가 좋아서 하고 싶다고 아무나 시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죠.
역사가는 ‘왜?’라는 문제보다는 ‘어떻게?’라는 문제를 더 편하게 접근합니다. 또 커다란 문제의 근원보다는 결과를 더 잘 알아 봅니다. 물론 그 때문에 역사가는 더욱 더 그 근원을 찾는데 열광합니다. 비록 그러한 근원들이 역사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를 자주 비껴가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 p94
역사가라는 직업이 원래 유럽에서 발달했잖아요. 역사가들이 관심을 갖는 건 항상 자신들의 과거였구요. 저자가 보기에 15세기엔 베네치아, 17세기엔 암스테르담, 18세기엔 런던, 그리고 19세기 뉴욕까지 자본주의는 상부구조에서 발달했고 지속적으로 세계의 불평등을 만들어냈다고 말합니다. 불평등을 조성해내는 과정은 당연히 권위적이었을 것이구요. 브로델은 자신이 말하는 심층의 역사를 통해 유럽이 팽창했고 더불어 유럽의 경제계들이 자본주의적 과정을 거쳐 왔으며 이들 전형적인 경제계가 유럽자본주의를 낳았고 이것이 다시 세계 자본주의의 모태가 되었다고 결론 냅니다. 유럽항해를 마치고 도착한 미국. 크루즈 여행으로 보면 자본주의 탐험은 그렇게 막을 내립니다.
결론은 무엇보다 자본주의는 경쟁이 아니라 독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질적으로 가장 높은 곳의 경제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자본주의이고 물질생활과 시장경제를 깔고 앉아 높은 수익이 나는 영역에서 서식하는 최상층의 존재라는 것. 자본주의의 특징과 강점은 카멜레온처럼 변신이 가능하고 그 변화하는 국면에 따라 수도 없이 새로운 방법을 강구한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변화무쌍함의 와중에도 비교적 자본주의의 고유한 본질에 충실한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 또한 자본주의 특징이라는 점. 그래서 자본주의의 문제는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문제이고 언제나 자본주의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죠. 아무리 위기가 닥쳐도 자본주의가 곧 멸망할 것 같아도 어느듯 다시 생환해 있잖아요. (지금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읽고 있는데 몇번의 위기를 거치며 그때마다 불사신처럼 살아나던 자본주의를 다시한번 정리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의 부제인 ‘브로델이 들려주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가 와닿는 것 같습니다. 히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같은 뱀이죠. 머리가 9개 달린 괴물의 머리를 한 개 떨어뜨릴 때마다 두 개의 머리가 생겨났다고 해요. 바로 자본주의를 불사의 영속적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지독하고도 끈질기며 탁월한 유연성과 적응력으로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 역사가 아니라는 것. 소름이 끼쳤습니다.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금융자본주의의 폐해를 목격할 때 이제 곧 자본주의는 사라진다는 기사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자본주의는 필멸한다며 다음 세대를 위한 공생의 생태계를 만들자는 책도 보았습니다. 세계의 경제계는 지금 이 시각에도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기 위해 얼마나들 노력하고 있습니까. 몇 백 년 전부터 이미 형성된 자본주의의 역사가 새삼 두려워 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의 대안도 중요하겠지만 변하지 않았던 과거의 원대한 흐름을 뒤돌아 보는 것도 오늘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좋은 거울이 될 듯 합니다. 무엇보다 한 평생 자신들의 과거만 연구한 역사가의 충고가 너무나 명징하기 때문입니다.
“ 수백 년 전의 과거는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현재로 흘러들어옵니다. 마치 아마존 강이 엄청난 물줄기에 토사를 실어 대서양으로 쏟아내는 모습처럼...”
프랑스의 역사가가 그려낸 세계지도는 과거의 강물이 현재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아주 오래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어쩐지 우리의 미래를 더 입체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아 그림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마치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사진처럼요.
덧붙임)
책의 표지를 장식한 그림이 궁금해 찾아보니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작품 중 일부를 확대한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산 루이지 교회에 그려진 그림 중 하나인데 제목은 <성 마태의 소명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1599-1600>이다. 마태는 예수의 부름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된 인물이다. 이 그림은 바로 세리(세무관리)인 마태가 예수의 부름을 받는 순간을 은유해 포착한 것이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일생이 뒤바뀌게 되는 운명적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을 잘 보면 오른 쪽에 나타나 ‘나를 따르라’고 손짓을 하는 이가 예수이고 놀란 눈을 한 채 왼손으로 ‘나 말입니까’하는 인물이 마태 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책에서는 세금 징수업자였던 마태가 아닌 고개 숙여 돈을 세고 있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어 표지로 한 것일까.
자세히 보면 표지에서 돈을 향한 손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언뜻 보기엔 돈에 눈을 맞추고 있는 인물의 손 같지만 위에 손은 바로 마태의 손이고 아랫 손만 고개숙인 인물의 손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면 마태는 왼손으로는 자신을 손가락질 하고 있지만 오른속으로는 계속 하던 일인 돈을 세고 있는 것이었다.
악덕업자로 불리던 세금관리는 그 시절 무척 안정된 직업군이 아니었을까. 이 책에 의하면 16, 17세기 이탈리아는 자본주의를 태동케 한 일등공신이다. 자본주의가 일부 소수 특권층에게만 일어나는 최상층의 현상을 상징한다고 보았을때 이 그림에서 돈을 가리키는 손은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표상은 아닐까 싶다. 아무리 돈을 열심히 정확히 세고 있어도 자본주의는 그와 상관없이 경쟁을 비껴나와 독점으로 향하는 히드라와 같은 괴물. 그렇다면 아마도 고개를 숙인 청년의 눈은 돈에 눈멀어 자본주의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대다수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아닐지. 나쁜 건 자본주의가 아니라 혹 사람의 욕심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