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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 - 제17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
좋은 소설입니다. 건강하고 따스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기까지 하군요.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이 어떤 기준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책을 덮고 이 소설 참 마음에 든다, 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겠구나, 생각들이 그 많은 마음을 한 곳으로 움직이겠구나, 아마도 움직여진 그곳은 작가가 손을 잡아 이끈 곳이겠구나..... 오랜만에 마음을 움직이는 소설을 만났습니다. 모르긴 해도 사람과 세상에 마음이 상하는 시간이 많았던 분이라면 아마 그 마음이 같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꿈쩍 않던 마음 하나 움직이기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일수도 있으니까요.
이 소설은 무엇보다 읽는데 어떤 반감이나 무리가 전혀 없습니다. 쉽고 빠르게 넘어가는 것과는 조금 다른데 작가의 문체와 단정한 문장이 편안한 느낌입니다. 능숙한 것과도 조금 다른데 어디서 한번 마주친 듯한 사람처럼 낯설지 않았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친근한 것과도 조금은 다른데 사람으로 치자면 독특한 호감이 있어 자꾸 친해지고 싶은 느낌이랄까. 무심코 라디오를 듣다 보면 그래, 바로 지금 이런 음악을 듣고 싶었는데... 할 때가 있잖아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음악을 듣다보면 지금 내 마음이 이러했구나, 깨달을 때가 있잖아요. 이 책이 그래요. 바로 지금, 내가 듣고 싶고 읽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한번쯤 우리는 이런 소설을 기다려 온 것은 아닐까. 어딘가 불편하고 속상하고 아픈 구석이 있어도 꼭 이런 구성, 이런 결말이 필요했던 사람들처럼 말이죠. 소설이란 마치 동네 어디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감기약 같아요. 그러나 내게 유독 잘 맞고 잘 듣는 약은 흔치가 않잖아요. 글쎄, 좋은 소설이란 지금 내가 걸린 무언가를 치유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닐까 싶네요. 이 소설을 읽고 새삼 그 ‘좋은’ 감정을 정리해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가슴 속 무언가가 차분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요.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아니 세 사람이 만나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한물간 외주 제작사 PD 박상운과 경영대 출신 세오시장 상인회 총무 정기섭과 서번트 증후군에 걸린 김일우라는 소년. 주인공은 자폐인데다가 지능이 평균에 미치지 못하지만 청각에는 천재적 재능을 가진 김일우 소년이겠지만 저는 한 번 실패한 어른이라서 그런지 아주 못되지도 아주 착하지도 않은 두 아저씨들이 더 공감 갔던 것 같습니다. 아저씨들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한 시절 잘나갈 때가 있었거든요. 장애 소년이 세상에 들리지 않는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듯 우리도 그들처럼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사람들의 안 보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로 받아 들였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선한 구석은 있고 또 아무리 착한 사람도 욕심은 있기 마련이죠. 이 소설은 누가 나쁘고 누가 착하기 때문에 누가 피해자가 되고 그래서 상대가 가해자가 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리얼리티가 듬뿍 살아 있어요. 아무리 소설적인 상황이라지만 살다보면 그 보다 더 기가 막힌 일 부지기수잖아요. 그보다 더 사악한 사람들 쌔고 쌨잖아요. 일우 학생만 빼고 나면 나머지 어른들은 우리 현실세계와 꼭 같은 생각을 하는 인물들이고 어쩌면 일우마저도 가끔 등장하는 우리네 일상 속 그저 그런 불행으로 보였어요.
우리와 멀지 않은 이야기
그러나 표면적으로 아무런 연고관계가 없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작가는 이들 세 사람이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전반부에 배치하고 중반부에 그들을 만나게 한 후 각자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헤어지게 하고 다시 재기를 다짐하고 후반부에 재회하도록 만듭니다. 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작가는 무엇을 보았는지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가 이 소설의 핵심입니다. 결론은 맞아요, 돈 때문에 모여서 돈 때문에 헤어졌다가 다시 돈 때문에 재회하는 것입니다. 이 들을 운명처럼 엮어주고 그들 모두에게 희망과 상처를 번갈아 주면서 우리의 감성을 들었다 놓았다 마구 뒤흔드는 이유는 모두 돈 때문입니다. 돈이라는 같은 목적이 없었다면 이들이 사는 동안 만나야 할 기회는 전무 했을지 모릅니다. 돈 좀 벌어 보려고 그래서 명예도 얻고 사람답게 좀 살아 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죠.
그렇다고 우리 사는 곳과 아주 멀거나 가기 어려운 곳도 아니지요. 그들이 원하는 돈도 백만장자가 될 만큼의 일확천금은 아니었어요. 사실 이 부분이 아스라이 저릿해지는 부분입니다. 김일우의 부모인 오영미와 김민구는 말합니다. 주제넘게 분수에 넘치는 돈이 아니라 ‘그럭저럭 살 만한 동네에서 식구 살기에 좁지 않은 아파트 한 채 사고 중형차도 한 대 뽑고 기분 내면서 외식도 좀 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랍니다. 조금 더 바란다면 보너스와 연말 정산 모아 일 년에 한번 해외여행 정도 추가해 볼까요. 수천 만 원 짜리 명품백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A나 B로 시작되는 외제차를 굴리자는 것도 아니고 무슨 호텔이나 콘도, 골프회원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주식으로 갑자기 대박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욕심이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런데 그들 부부의 소박하고도 평범한 바람이 슬퍼지는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소박하다고 여기는 그 정도, 그 평범함이 이루어지고 지속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실 평범이란 개념은 대중적일뿐 결코 많거나 쉽다는 뜻과는 전혀 별개지요.
거리에 나가보면 곳곳에 짓는 것이 아파트이고 24시간 달리는 것이 자동차인데 내 집과 내 자동차는 늘 그들보다 작고 형편 없습니다. 어느 개그맨이 그랬죠. 아이 키우는 집에선 월급 받고 아무 것도 안하고 숨만 쉬고 200살까지 살면 내 집을 장만할 수 있다고요. 요즘처럼 물가가 오른 식당에서는 아이들 데리고 고기 한번 먹으러 나가기도 얼마나 무섭던가요. 지금은 멀쩡하지만 언제 회사가 주저앉아 거리로 나 안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도 그랬지만 사업하다 한 번 망하면 삼년은 빚 갚느라 아무것도 못합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로 이어질 확률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김일우네 가족에 닥친 시련은 서민에서 최하층 신세로 추락하는 보기 좋은 촉매제가 되고도 남았을 거예요. 그런데 말이죠. 작가는 인물의 이름이 캐릭터와 딱 들어맞게 잘도 작명하신 것 같아요. 김일우의 이름은 어쩐지 한번 바보(一愚)는 영원한 바보일 것 같고 엄마인 오영미와 아빠인 김민구는 말 그대로 쌀이 없고 구직이 어려운 사람들 같아요. 잘 풀렸으면 영리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국민을 구하는 부부가 되었을 텐데요... 설상가상으로 아빠 김민구는 십년 넘도록 일해 온 직장을 하루 아침에 잃고 중국집 배달부로 전락합니다. 사립학교 비정규직이었다고 해요. 법에 호소해 복직을 하지만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은 똘똘 뭉쳐 이미 오래전 해결된 공금횡령을 이유로 사람을 짓밟기만 하네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가진 사람들은 그 잠깐의 미동도 보기 싫고 귀찮은 법이거든요. 내 발밑에서 죽어가는 지렁이 보다는 더러워질 내 구두 밑창이 더 걱정인 것이죠. 어떻게 마련한 구두인데요...
하지만, 지능이 떨어지던 자식을 돈이 없어 제때 치료도 못한 채 입에 풀칠을 면하기 위해 극한 생활전선에 내몰리는 가장의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보아온 그림 이라구요? 치매할머니를 모시고 학교를 다니는 소녀가장도 있고 건설현장에서 불구가 된 아버지를 수발하는 소년도 있다구요. 예, 맞아요. 이 소설은 우리와 많이 멀지는 않아요. 너무 불행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더 흠칫하고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어쩔 줄 모르겠어요. 일우 아빠는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들을 학대하는 일만 남게 되었어요. 엄마는 늘 쪼들리는 생활에 성격은 급하여 아들을 바보같은 놈이라고 윽박지르기만 했어요. 평범한 서민에게 가족의 병은 빈곤과 추락을 피할 수 없는 지름길이 되고 맙니다. 이들 부부에게 유일한 희망은 삼대독자 일우인데 그 일우가 바보라는 건 희망을 안주느니만 못한 주었다 빼앗는 더 억울한 일은 아닐까요. 무능력해 보이는 가장 김민구는 말해요.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세상 험한 꼴 많이 봤다 해도 힘든 건 힘든 거’라구요. 그 말이 왜 그리도 시큰한지 한참 입에 맴돌았어요. 힘든 건 힘든 거라구... 불행의 크기는 그것을 겪는 사람에겐 전부이고 더 할 수 없죠... 그렇게 말하고 나면 정말 힘들어 질까봐 입술을 깨물었어요.
서울에서 이름 있는 대학의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부친의 가게를 물려받아 세오 건어물의 사장이 된 정기섭의 사연은 웃기고도 서글펐어요. 딴에는 대학물을 먹었고 전공이 컨설팅이라고 장사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위인이지만 상인회 일에는 물불을 안 가리는 기섭씨 같은 가장은 어쩌면 무능력한 일우 아빠보다 더 지독할지 몰라요. 작가는 기섭씨의 상인회 총무활동을 통해 대형마트의 무차별적 진출과정과 지역상권의 피해상황을 넌지시 고발하고 싶었나 봐요. 기섭씨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시장의 영웅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꼭 요즘 개봉중인 영화 <댄싱퀸>에서 황정민이 우연치 않게 시민을 구하는 덕에 일약 서울시민의 영웅이 되는 과정과 비슷하더라구요. 유머가 잘 믹스된 에피소드였습니다. 살다보면 별 생각 없이 한 일도 마치 정의에 불타는 시민이 행한 개념적 사건이 될 때가 있는 것이죠. 어쩌면 사람들은 늘 시민을 구해주는 슈퍼맨 같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리는지 모르겠어요. 작가는 자신의 손 끝에 마치 고화질의 다양한 카메라 렌즈가 달린 것처럼 행동과 심리를 디테일하게 혹은 대범하게 포착하더군요. 아마 방송 구성작가 출신인 이점을 살린 덕인지 후반부로 지날수록 더욱 사실적 현장감이 빛을 발했던 듯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이야기
그러나 이 소설에서 가장 저를 웃고 울게 한 사람은 네오 프로덕션의 사장 박상운이었어요. 아내된 입장에서 기섭씨의 행보가 매우 ‘섭섭’하다면 박상운 PD의 사회생활은 참 팔자가 센 것이라고 할 밖에요. ‘운’이 필요이상으로 좋았다가 또 억세게 ‘운’이 나빠지는 경우. 늘 그 놈의 ‘운’ 때문에 성패가 좌우되는 사람. 어떤 면에서 작가는 박 PD를 통해 결국 자신이 몸담았던 시사 프로그램 방송 현장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말하고자 했던 것 같아요. 시청자 입장에서 보자면 김일우가 대박을 터뜨릴만한 게스트이고 정기섭이 어리버리한 협찬사라면 박 PD는 마음 급한 연출자인 것이죠. 엔조이 채널의 정용준 국장은 시청률 지상주의 제작자 이구요. 박 PD가 자꾸 눈에 밟혔던 이유는 순전 한 때 잘 나가가는 PD였기 때문이어요. 그는 사이비 수련원에서 ‘종교의식으로 포장된 원장 교주의 성폭력과 집단 구타 현장을 몰래 촬영’하기도 하고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원장이 원생을 학대하는 장면을 고발하기도 하여 시사다큐분야에선 스타가 된 인물이었죠. 하지만 그 시절 꼴통이라 수없이 불렀던 후배 김상호가 방송국의 갑이 되어 박 PD에게 당한만큼 되돌려 주더군요... 공교롭게도 저 역시 큰 회사에 있다가 나와 그 회사 용역을 수행하는 개인회사를 운영했는데 직원들 월급 주려고 옛날 까마득한 후배 찾아가 굽실거린 적이 있었거든요. 영세한 개인 프로덕션 사정이야 뻔하죠. 드럽고 치사고 목구멍에 욕지기가 수없이 올라와도 그 놈의 돈 때문에 지긋이 참아야 하는 것이죠.
작가는 박상운 PD가 궁지에 몰려 있을 때 무리한 기획을 하게 되는 배경으로 열악한 방송제작현실과 갑과 을 간의 관례화된 부당한 방송시스템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방송국은 시청률 위주의 ‘의미고 나발이고 확 터뜨릴 수 있을 만큼 쌈박하고도 통 큰 협찬사가 붙을 만한 대단한 프로그램’을 원한다는 것이죠. 힘들다고 모두 도둑질하고 사기 치는 것은 아니지만, 사례자를 조작하고 편집을 자극적이게 이어 붙이고 협찬사를 급조하는 등의 제작과정이 꼭 박 PD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소리로 들렸어요. <귀를 기울이면>이 방송국 입장에서 보자면 시사 프로가 사회 곳곳의 잘못된 것들을 찾아내서 고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잘못되기까지 우리가 들어주지 않았던 잘못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뜻으로도 들렸어요. 지금은 거대한 ‘잘못’, 볼거리가 될 만 한 ‘잘못’을 미리부터 기획해 놓고 그에 맞는 ‘잘못’을 찾으러 다니는 것일지 모른다구요. 이렇듯 방송제작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이 작품 곳곳에 주도면밀하게 숨어 있어요.
방송사에서 그렇게 운영을 하겠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이다. 세상에는 프로덕션도 넘쳐났고 피디와 작가, 촬영기사, 조명기사, 리포터와 그 지망생들은 더욱 많았다. 방송사는 그럼에도 일하겠다는 사람들 중에 구미에 맞게 골라 쓰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원칙이고 시장경제의 원칙이었다. 절은 몰랐다. 그래서 중들이 점점 저질이 되어간다는 것을, 중들은 절에 대한 애정이 없어졌고, 책임감도 없어졌다. 먹여주고 사람대접해준다면 교회든 성당이든 갈 판이었다. -p89
요즘 MBC가 파업 중이잖아요. 물론 소설과는 다른 이유지만 시청자를 위하고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시청률 위주의 방송을 제작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 시청자에게 피해가 돌아오는 것이더군요. 이 책을 읽다보면 좋은 시청자 되기도 쉬운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저만해도 TV 프로 하나 보는 것을 단순한 오락시간으로 여기기 때문에 우리나라 방송환경 및 프로그램 발전을 위해 어떤 프로를 시청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전보다 똑똑해진 시청자도 많아졌고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창구가 많아진 덕에 요즘은 시청자가 비판의 도가니가 되가는 건 아닐까 싶어요. 작년에 한예슬이 드라마 펑크 내고 도저히 못하겠다며 미국으로 날아간 적 있었잖아요. 그때 한예슬 덕에 같은 드라마에서 쥐꼬리만한 임금으로 맨날 밤새던 스탭들이 잠잘 수 있었던 건 아닐까요. 소설에선 제작자 박 PD가 이렇게 말하네요.
씨발, 어지간한 건 약하다고 컨펌을 안 해줬잖아. 정신과 통해서, 상담실 통해서 정식으로 섭외하려면 돈이랑 시간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몰라서 묻냐? 우리한테 그만큼 제작비랑 제작기간 줘봤냐? 컨펌은 늦게 주지. 걸핏하면 약하다고 엎어버리고 다시 찍으라고 하지.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어딨어? 그나마 우리가 밤새 뺑이치고 있으니까 사고 안 나고 방송 꼬박꼬박 나온 거야. -p96
아마도 작가는 이렇게 목구멍까지 차올라 꼭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가 봅니다. 제가 다 속이 시원해 지더라구요. 작가는 이슈가 될 만한 기사거리를 두고 언론과 대중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세밀하고 단계적으로 묘사하더군요. 제목만 보면 의혹도 사실로 추정되는 무차별적 기사와 네티즌의 광분에 가까운 집단 심리가 마치 ‘복음이 전파되고 전염병이 옮아가듯’ 퍼트려진다구요. 그러니까 우리는 대회 참가비로 시장 개보수를 하겠다는 정기섭 총무나 장애 아들을 앞세워 상금을 챙겨보겠다는 일우 부모님이나 일단 화제성을 창출해서 회사의 매출을 끌어 올려 보겠다는 박 PD의 발상을 아무도 욕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설령 그것이 ‘돈 놓고 돈 먹기’라는 비 윤리적이고 선정적인 도박성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우리는 아무도 그들이 비도덕적이라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네오 프로덕션 사장도 나름 피디의 저널리즘이 있고 세오시장 상인회 총무도 나름 책임감이 있고 김일우 부부도 간절한 사정이 있는 걸요. 그것이 야바위 대회면 어떻습니까. 전 재산을 걸었다고 누가 손가락질을 하겠습니까. 사실 시청자인 우리들이야 말로 늘상 극적인 드라마를 기다리고 성공이라는 환타지를 꿈꾸지 않습니까. 제작진과 협의된 어느 정도 위선이나 거짓이라는 것도 알면서 눈물짓고 환호하고 감동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기왕이면, 예, 멀쩡한 집안에 멀쩡하게 생긴 소년보단 찢어지게 가난한 중국집 배달부의 자식이면서 지적 장애를 가진 소년이 도전하여 우승한다면 더 좋지 않겠어요? 그들이 참가비 열배의 상금을 가져가는 것이 더 공평하고 더 옳은 것이고 더 감동이라 믿지 않나요?
우리는 무수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면서 늘 일등의 기가 막힌 사연을 기다리고 그들의 드라마가 승리하는 것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니까요. 감동적인 인생 역전 드라마야 말로 현실에선 절대 역전할 수 없는 지금 우리들을 위로하는 것이니까요. 그것은 두뇌 스포츠가 되었든 춤이 되었던 연기나 노래가 되었든 상관이 없는 것이죠. 중요한 건 어느 서바이벌에서도 더 기구한 사연을 가진 참가자는 등장할 것이고 반드시 우승자는 일우만큼의 상처가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들어야 하는 이야기
“삶이 벼랑 끝이라고 느껴지십니까? 더 이상 돌파구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포기하고 싶으십니까?
이제 당신이 인생의 챔피언이 됩니다.
더 챔피언, 그 마지막 게임이 시작됩니다!”
챔피언이 되기 위해 TV속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은 흔해졌습니다. 이제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쓰리컵 대회'만큼이나 발상이 자극적인 프로는 얼마든지 채널을 돌리면 쉽게 마주치는 것 같아요. 한 달 전 인가, ‘괴물녀’라는 별명으로 일상 생활이 힘든 이십대 여성이 미인을 만들어 주는 프로에 출연했더군요. 사연이 누가 봐도 충격적이고 기구하면 여러 닥터들의 검증을 거쳐 얼굴 및 구강은 물론 체중까지 거의 전신 성형을 무료로 해주는 형식이었어요. 너무 못 생겨서 저 정도면 해주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저도 모르게 생기더군요. 시청자들은 그 ‘괴물녀’가 시간에 걸쳐 점차 괴력의 ‘미녀’로 변하는 전 과정을 지켜보게 됩니다. 이 소설 말미에 박 PD는 일우의 부모에게 일우의 갱생프로젝트로서 재활과정을 담아 이른바 ‘서바이벌 휴먼다큐 리얼리티 쇼’라는 형식의 프로를 연출하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이른바 바보가 똑똑해지는 과정이나 추녀가 미녀가 되는 과정이나 핵심은 남의 불행을 자세히 구경하며 내 처지를 위로 받고 그들의 성공을 확인하며 내 희망을 버리지 않는, 시청자와 참가자간 사연거래의 맥락은 같다고 봅니다. 그리고 프로그램 핵심에 돈이라는 자본과 성공이라는 욕망이 은밀히 숨어 있어요. 돈이 있어야 똑똑해질 수 있고 예뻐질 수 있는 것. 그래야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수 있는 것. 그러니 인생을 바꾸는 건 돈이라는 확신을 제공하는 것이죠.
소설에서 가장 권력자로 등장하는 엔조이 채널의 정용준 국장은 박 PD에게 마지막으로 ‘판결이 어떻게 나든 결국 힘 있고 돈 있고 시간 많은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충고합니다. 글쎄... 저는 이 소리를 끝까지 듣기 싫었던 주인공 일우가 그 옳지 않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남들이 듣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일우가 들었던 소리는 ‘소리 없는 소리’ 였고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이 말하지 않고도 전해주는 소리였습니다. ‘소리 없는 소리’ 와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는 어떤 소리였을까... 어떻게 귀를 기울이면 그 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돌아온 일우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듣기 싫었던 것일까...
‘소리 없는 소리’란 어쩌면 처음부터 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 소리를 내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요?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란 어쩌면 일우처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닫은 것은 아닐까요? 아, 그렇담 우리가 들어주지 않고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들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서번트 증후군은 좌뇌가 발달이 되지 않은 것의 보상으로 우뇌의 특정 부분이 발달하게 된 결과 청각 같은 특수한 재능이 천재적으로 발달하는 것이래요. 우리는 말로는 다 듣고 귀로는 모두 이해하는 듯이 말하지만 결국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맘에 드는 것만 이해하면서 편하게 살아왔네요. 이 소설은 사회, 가정 곳곳에서 우리가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천천히 환기시킵니다. 이미 들었으나 오해하고 잊어 버렸던 이야기, 반쪽 짜리 진실만 알고 있는 이야기, 그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쩜 소설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지만 작가는 혼자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주장하는 듯해요. 무엇보다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듯 해요. 비록 버스 정류장은 아니지만 소설을 정류장 삼아 가만히 기다려 보고 싶어요.... 소설 속 이야기들이 한자 한자 말을 걸어 오네요. 지나가는 바람처럼 촉촉한 빗님처럼. 이제야 알겠어요. 소리란 바로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 느끼는 것임을.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 마음이 이렇게 들리고 진심이 알아진다는 것을. 어때요? 나는 안 보이는 당신을 듣습니다. 당신도 들리나요? 혹시 우리에게도 천재적 재능은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