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어제의 비현실


  소설은 짧았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한 번의 호흡으로 넘어가던 손놀림이 멈추었을 때 나는 잠시 엎드린 채 고개를 파묻고 더 이상 일상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우선 나 자신을 달래고 난 뒤라야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이런 소설이 나와야 하는지 누군가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이런 여자가 소설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지 길을 막고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도 이렇게 살 수 있는지. 아니 당신이라면 이렇게 까지 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작가도 여자이고 주인공도 여자, 나도 여자이니 꼭 여자들에게 물어야 했다.

  그러나 바보처럼 작가에게 묻고 싶진 않았다. 아니 바보처럼 보일까 봐가 정확하겠다. 서로 묻다가 답이 없으면 그냥 투덜대는 우리끼리 떠들고 소리치고 세상은 그런 거지, 인생은 그런 거야 그렇게 알은 체를 하곤 술잔이라도 부딪치고 싶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한 병이 되고 그 병이 몇 개로 보이면 어느 쪽은 고꾸라질 것이고 그럼 다른 쪽은 그를 부축해 별 수 없다는 듯 내일의 열차에 그를 실어 보내면 될 것이었다. 한번쯤 고꾸라진 그를 위해 끊어준 티켓일랑 다음번의 누가 될지 모를 아량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 갈 일이었다. 세상은 우리끼리 아무리 슬퍼해도 그런 건 상관없이 돌아가는 꿋꿋한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런 무심한 세상과 잘 어우러지기 위해선 같이 무정해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 몰랐다. 소설은 소설이고 나는 현실이고 당신은 세상이니까. 그래서 폭음과 폭정을 부르는 소설. 울화통이 터진 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이겠지. 오랜만에 가슴속 쌓인 울혈들이 한데 모여 심장을 쾅쾅 두드리는 소설을 만났다. 시원하게 욕하고 소리쳐 울고 나면 그래도 용케 살아는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설.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아침 그래도 다시 시작한다는 질긴 마음 그 뿐이라는 걸 깨우쳐 주는 소설. 그래서 헛헛하고 쉽사리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

  솔직히 말해 이 책의 문장들을 하나도 기억하기 싫었다. 그건 예를 들면 침대 매트리스에 들러붙어 있는 몇 백만 마리의 진드기를 현미경으로 확인하는 절차만 같아 그냥 포기하고 이불을 덮는 심정이랄까.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두어 번 ‘윤영’이라는 입에 붙지 않는 호칭으로 낯설게 등장한다. 화자가 ‘나’이기 때문에 내가 내 이름 부를 일은 살면서 많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시종일관 익명의 여자인 것처럼 등장하다가 그녀의 어머니쯤 되는 사람이 ‘윤영’이라 불렀을 때 나는 그녀의 단어가 순간 ‘운명’으로 보였다. ‘윤영’은 과연 ‘운명’인가, 싶어서.

  엄마 살아계실 때 사주를 보면 나는 꼭 징기츠칸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난관을 극복하면 또 시련이 기다리고 어떻게든 그것을 뚫고 나면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는 이른바 시련극복의 인생. 그렇게 극복하다보면 정말 자신도 타인도 세상을 극복하고 무언가 이룰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니 극복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속세의 내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들은 후 부터는 이상하게도 내 앞에 닥친 걱정거리가 대수롭지 않게 보이기는 했다. 극복해봐야 또 다음 과제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서두를 것도 없고 안 된다고 발구를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회사생활 할 때도 나는 조직의 문제를 부러 해결하지 않고 일단 갖고 있는 쪽에 속했고 꼭 제거해야 할 상황이라면 넌지시 다음 문제가 대두될 시점에 임박해 현존하는 문제를 타결하곤 공백없이 다음 문제를 그 자리에 위치시키곤 했다. 늘 스스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외려 살면서 나를 가장 안전하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외적으로 큰 문제가 없어보이는(?)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까. 이런 내 성향은 (중이 제 머리는 못 깎지만)남들의 인생사 골치아픈 문제 거리에 곧잘 해결사 역할을 자주 수행하곤 했다. 거기엔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이 핵심인데 나는 얄궂은 ‘운명’에 의해 훈련된 이차 운명을 잘 실행해 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고 여겨진다.

  이런 운명개척자(?) 인 내가 보아도 이 소설은 홧병을 부르기 충분했다. 최적의 숙면을 위해선 잠들기 한 시간 전에는 책을 들지도 생각을 하지도 말라는 어느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음이다. 잠들기 직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문장은 바로 작가가 다음의 마지막 문장 때문에 이 소설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기록했기 때문인데 나는 작가의 시작에 흔쾌히 동의하기 힘들었다.


   
 


나는 누구보다 참는 건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 193p

 
   


  여기서 ‘시작’이란 말이 내가 아는 희망으로 보이지 않고 분명 반복이나 착취, 소모, 탕진, 타락, 악습, 퇴행 등의 전혀 반대의 의미로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잘 참는 사람이고 질긴 사람이니까 이를 악물고 다시 시작한다는 자기 암시가 꼭 자신을 버리는 말로 들렸기 때문에. 현실을 박차고 나올 수 없기에 다시 그 현실 속에서 희뿌연 아침을 맞이하는 자의 시작은 어제 고통의 연장이지 어디 새로운 시작이란 말인가. 무언가를 끝내고서야, 끝이 있어야 시작도 의미있는 것이지 끝도 없이 시간에 끌려 현실을 좇는 것이 어찌 시작이란 말인가. 그 여자, 윤영이 자신을 시작하지 말고 그냥 무언가를 확실히 끝내기를 바라면서 나는 잠이 들었다. 
 

#2. 오늘의 현실


  주말을 앞두고 나는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냉정하게 현실을 생각해보면 글로 그려진 소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젯밤 꿈에 하필 살면서 되도록이면 마주하기 싫은 사람이 등장했다. 소설의 영향탓인지 꿈자리도 퍽이나 뒤숭숭했는데 그녀는 사채를 쓰는 바람에 패가망신 당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결혼을 두 번했고 첫 번째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였기에 사회보호시설인 여성의 집 같은 곳에 피신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맞아 고막이 터지고 이빨이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사랑은 찾아와 총각인 남자와 재혼을 했고 그들 사이 어여쁜 딸 하나를 둘 수 있었다. 그녀에게 다시 찾아온 행복을 시샘하는 것들은 많았다. 전 남편의 아들은 오토바이 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었고 교도소에 가 있는 전 남편은 아들을 돌볼 수 없었다. 그녀는 급한 김에 사채를 쓰면서 병원비를 대기 시작했고 새로 재가한 시집과 남편의 돈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그 후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때문에 그녀는 결국 쫓겨나 숙소가 달린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녀는 결국 자기 뱃속으로 낳은 두 명의 자식 모두를 버릴 수 밖에 없었고 식당에서 만난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고 들었으나 그 후로 소식이 끊겼다.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는 무척 의연했는데 그녀 역시 ‘다시 시작해’야죠 하며 서로 어색하고도 구태의연한 인사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구구절절히 그녀의 불행을 서술한다면 소설속의 윤영못지 않은 캐릭터로 탄생될 만한 인물이었다. 현실은 소설보다 가까이 있었고 그것은 더 잔인한 얼굴, 더 끔찍한 상처로 전시된 상태였다.

  내가 이 소설을 덮으면서 깨달은 건 바로 글은 언제나 현실보다 못하거나 겨우 현실만하다는 것이다. 에이, 소설이니까 그럴 수 있지가 아니라 과연 이 소설이 소설일 뿐일까를 생각하자. 혹시 현실은 이 보다 더 하지 않을까를 상기하자. 누구든 글로 이어붙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사는 이곳엔 더 얼마든지 참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 그것을 글로 적고나면 더 무섭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숨쉬는 현실이라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눈으로 확인하는 다큐 영상이나 그 상상을 가공하는 영화, 스틸 컷, 포스터, 실사사진들은 외려 덜 잔인할 수 있다. 똑바로 낱낱이 확인할 수 있으니까. 시각은 바로 확인이라는 절차 후에 반드시 있는 그대로의 인지적 수용을 거치게 되어있다. 그것이 충격이거나 고통이더라도 잔상은 기억속에서 사실화될 수 있다. 그러나 실체를 보지 못하는 글의 연속은 얼마나 광대하고 비현실적인가. 거기엔 물흐르듯 작가의 생각이 들어있고 문장의 의도가 촘촘히 박혀있다. 때문에 행간의 여백에서 느끼는 우리의 고통은 실제보다 배가되어 하나의 두려움으로 각인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쓰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사실 소설은 거짓말로 된 사기극이지만 사회에서 합법화된 문서로 기능한다. 소설가는 주어진 법을 잘 이용해 최상의 거짓말을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린 거짓말을 알고서도 잘 울고 웃어주는 적법화된 위선자들이다. 이 사회에서 적극 용인된 합법과 적법의 동종 커넥션이 정작 그것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려면 이런 소설은 더 나와야 하고 우린 그걸 더 읽어야 하는 것이다. 불편함의 승리야 말로 이 시대 작가가 바라는 최상의 소원이 아닐까.

  이 소설은 막연한 공통의 미래를 기대하기 보다는 지금 우리 주변의 현실을 좀 더 섬세하게 자각하자는 뜻으로 들린다. 이 소설의 희생자가 여성인 것은 같은 여성으로 목이 메이는 설정이지만 분명 이 사회에 윤영같은 운명을 가진 여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 소설에서 윤영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인간은 남녀를 따 질수 없다. 누구보다 인물분석을 해온 나이지만 여기 등장하는 윤영의 가족은 뚜렷한 표상을 가진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닌 어쩌면 늘 우리 곁에 머무는 엄마, 동생, 남편, 이웃의 속된 얼굴들을 하고 있다. 이 소설이 불편한 이유는 그야말로 그런 우리의 현실을 사진찍듯 그대로 적었기 때문인 것이다. 현실은 원래 적어놓고 나면 누구도 심각하지 않은 현실이 없다.

  다시,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를 생각한다. 나는 작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성도 있으니 우린 희망을 가지고 삽시다,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남편은 평생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시고, 아버진 그 와중에 암투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셨고, 엄마는 폭력적인 남자에게만 얻어 맞는 팔자이시고, 여동생은 제 잘난 맛에 가족 무시하다가 봉변을 당한 꼴이고, 남동생은 자기 재산을 빼돌려 담보로 잡히게 하고, 설상가상으로 아이는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갈듯 하다면, 이 모든 짐을 벗을 수 없는 나는 아이 때문이라도 몸을 팔아야 하는, 그런 뭣 같은 세상이라도 지금껏 잘 참아왔기에 여전히 참으면서 매일 아침을 똑같이 시작하겠다는 긍정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참고 살라는 뜻으로 곡해할 수 있으며 무조건 견디라는 오해로 보일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이 소설의 제목인 <환영>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고 싶다. 시와 도의 경계를 지나쳐 만나는 ‘안녕히 가십시오’ 혹은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말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그깟 이정표 하나로 선을 그어 놓고 여기 부터가 현실이라고 하는 그 당돌함과 무례함을 똑바로 쳐다본다. 오는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어디의 누구란 말인가. 누가 누구의 현실을 맞이하고 또 보낼 수 있단 말인가. 환영歡迎의 인사는 어쩌면 우리가 현실이라 오해하는 표지판의 환영幻影이 아닐까. 현실은 우리를 반기지도 그렇다고 떠밀지도 않는 냉정한 무감각의 세계는 아닐까. 이 땅의 모든 것들이 흔적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유령이며 모든 전통은 유령의 역사라고 말했던 데리다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미 현실은 가장 비현실적인 무책임의 가능성을 가장 성실히 완벽하게 수행하는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현실은 안녕의 인사를 지속하는 친철한 세계가 아니다. 현실적인 표식 역시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위선 일뿐이며 그것을 인사로 여기는 이유는 우리가 희망적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김이설의 <환영>은 우리가 인지하는 <환영: welcome>의 인사라는 현실을 그것으로 견뎌내려는 인간들의 <환영: illusion>이라는 것을 담담히 방증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바뀌지 않은 현실의 탈출구는 발견할 수 없어 보였기에. 중요한건 환영歡迎이 환영幻影이냐 아니냐가 아니고 환영歡迎을 환영幻影으로 환영歡迎하면서 자신의 현실을 묵묵히 걸어 나가는 우리 사회 무수히 많은 윤영(倫影)의 오늘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자 이름은 왜 윤영, 민영, 아영인 것인가? 비칠 映인가 그림자인 影인가) 누구나 각자 처한 현실은 기막히고 슬프지만 오늘도 변함없이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일 끝날지 아니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지만 당신과 나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공평한 입장이 우리의 준엄한 현실이니 그것을 깨달은 우리는 현실이 그리 두렵지는 않겠다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얼마나 환영받을 만한 현실적 소설인가.

  김이설의 현실로 당신을 무조건 환영歡迎하는 바이다.
  나는 당신과 나, 우리 모두가 이 소설의 비현실에서 각자의 현실을 긍정하는 참으로 벅찬 환영幻影을 떠올린다.

  소설이라는 현실을 극복하는 것. 썩 괜찮은 현실처방이 아닌가, 말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물선 2011-07-02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널 나와 같은 우울에 빠뜨리는게 좀 미안했지만
너라면 환영의 두가지 한자의미를 해석해 줄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역시~!!

그러고 보니 우리딸도 영이네~ 榮쓴다^^


한사람 2011-07-01 16:36   좋아요 0 | URL

소설 너무 지독했어 ㅠ.ㅠ
어떻게든 좋게 해석하지 않으면 내가 몸살이 날 것 같아서
억지를 쓰고라도 리뷰를 써내었네..

안그러면 소설이 공중에서 마구 울고 있을 거 같아서...

2011-07-01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2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2-03-13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깐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말씀인가요? 이러한 상황이 누구에게나 맞딱트리는 현실은 아니지 않나요??

한사람 2012-03-14 08:52   좋아요 0 | URL

모르겠어요.
저런 글을 썼나 싶기도 한데 ㅋㅋㅋ
그땐 이 소설을 극복하자 !!! 이런 생각이 많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