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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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만난 사람

  이 책을 하필 여름이 시작되려는 찰나에 만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책 덮고 나니 새삼 지금이 가을이나 겨울이 아닌 것이 참 좋았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 작가도 여름을 좋아하지 싶은데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더욱 설레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도올 김용옥 선생이 사상의학을 설명하면서 사람도 체질에 따라 자신과 맞는 계절이 있고 반대인 계절이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봄만 오면 (남들 다 병든 닭처럼 졸고 있어도)천금을 얻은 것처럼 팔팔한데 다른 사람은 의욕도 나지 않고 기운도 없이 알려진 병든 닭 마냥 매번 같은 패턴을 산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잘 견디는 계절이 있고 맥도 못추는 계절이 있다는 건 얼추 사람마다 체질이 틀려서 그렇다는 말씀이었다. 내 경우 정신이 번쩍 들고 생기가 돌아 그래도 일의 의욕이 느껴지던 계절은 단연 여름이었다.(반대로 봄은 사망의 계절) 나는 여름에 땀도 잘 안 흘리고 불면증도 없는 편이다.(에너지 고효율 효과) 운 좋게도 에어컨, 선풍기 없이도 크게 더위를 잘 못 느낀다. (여름에도 늘 뜨거운 커피를 고집) 학교, 직장다닐 땐 우연인지 꼭 여름에 의미있는 성과를 올리곤 했다.(취직이나 대학원 졸업도 여름) 한 해중 여름을 삼, 사 개월로 보았을 때 그 시기에 그해의 성과를 몰아서 이루는 경향이 많았다. 내 기억에 덥다고 생각해 입 밖으로 ‘덥다’라고 투정을 하는 시기는 딱 한 여름 사나흘이었다. 그러니 내가 덥다고 한 날은 정말로 최악의 더운 날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돌이켜보면 사랑도 매번 여름에 했다. 정확히는 사랑의 시작을 여름과 함께 출발했다. 새로운 사람(?)을 늘 여름이 오면 만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오월의 청명한 하늘을 너머 장마가 지고 폭염과 폭우가 교차되는 변화무쌍한 날씨는 꼭 천둥과 번개가 치는 청춘의 가슴과 잘 어우러졌던 듯하다. 누구나 여름에 비교적 추억을 다작할 수 있어서 그런 걸까 갸우뚱해 보았지만 별스런 추억없이도 내 사랑은 모두 여름의 품안에서 싹트고 키워가고 성장, 발전했던 것이다. 대체로 여름에 이별을 겪었던 기억은 전무하고 그들 모두는 여름과 함께 아직도 뜨거운 채로 인 듯하다. 그래서 나는 여름만 오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生의 관용된 습관에 의해서 두근두근 거리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여름은 색(色)이 많아 좋은 계절이었다. 여름은 통(通)하라고 있는 계절이었다.    -336p
여름은 색이 발(發)해 힘센 계절이었다.    -342p


  바야흐로 내 인생의 색(色), 통(通), 발(發)의 시간이 바로 지금의 계절이었다. 이 책은 여름과 내 인생의 역학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달까. 그러나 굳이 이런 내 체질과 성향을 말하지 않아도 이 책은 처음부터 초여름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구석이 많았다. 이미 단편으로 많은 문학상을 수상한 문단의 기대주, 김애란의 첫 장편이라는 건 소설좋아하는 독자에게 충분히 두근두근할 만한 뉴스였다. 요즘 주변을 둘러봐도 한국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드문 편이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한국소설, 특히 순수문학은 어렵고 지루하고 우울하기까지 하다는 게 총평이다. 그중에서도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선 염세적인 분위기에 해체적 기운까지 느껴져 페이지 넘기기가 무섭다는 말도 들린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무슨 말인지, (이런 말하면 돌 맞겠지만)이것이 시라는 것인지 도통 모르기만 하라는 요즘 시집들을 (자발적으로)집어 들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서점가면 (시집으로선)왜 이해인 님의 시집이 늘 십년 째 베스트 셀러인가. 보편타당한 감성으로 위로해주시니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시인의 한줄 눈물이 우리가 다 헤아릴 수는 없어도 이해하기 어려워도 그 느낌만은 공감하고 싶어야 하는데 우리 세대 대부분은 요즘 작가들에게서 그런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바이다. 그런 와중에 ‘그나마’ 김애란은 꽤 재미나면서 가볍지 않은 소설을 쓰는 (젊은)작가로 자리매김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김애란 단편의 짜릿함, 만족감은 마치 가창력 좋은 어느 아이돌 가수에게 거는 대중의 기대처럼 그 공감의 폭이 넓어진 것이다.

  그런 김애란이 ‘초록 한가운데서’라는 싸인과 함께 나를 찾아온 것이다. 유월의 장마가 시작되는 어느날 오후, 반짝반짝 경고음만 같던 총총 빗소리와 함께. (이런 말 어떻게 들릴까. 사인본에 쓴 글씨가 확실히 젊었다. 세월의 피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소설을 나는 작년 여름 <창비> 계간지를 통해 처음 만났다. 물론 그땐 나중에 단행본으로 출간되면 한 번에 읽을 생각으로 대충대충 페이지를 넘겨갔다. 그런데 총 4번의 계절을 통해 연재된 소설의 맨 처음, 그러니까 <두근두근 내 인생>의 첫 회는 제대로 읽은 기억이 난다. 첫 회에 아름이는 벌써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고 2/3 이상 완성한 상태였다. 부모님 이야기는 첫 회 이후 세 계절에 걸쳐 중간에 삽입되는 식이었다. 그때 내가 느낀 건 아름이가 그 소설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겠구나...하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그런데 출간 된 책에는 아름이의 소설은 맨 뒤로 위치가 이동한 상태였고 어엿하게 소설속의 또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탄생되어 있었다.(연재 때는 아름이가 죽으면서 끝이 난다) 완성도면에서 후자가 더 아름다워 보인 건 사실이다. 다만 연재할 때와 수정할 때 그 사이 변한 작가의 마음이 궁금했다. 아름이가 고민하던 시간과 작업과정을 중간에 나누어 배치하다가 돌연 그 완성된 결과를 마지막에 선물처럼 안겨준 것에.(소설 구조상의 큰 변화가 아닐까?)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어떻든 아름이가 죽는 이유보다는 태어난 이유에 더 힘을 실으려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 어짜피 죽는 존재지만 그건 태어났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후의 문제라는 듯. 중요한 건 우리가 태어났다는 걸, 누구나 한번은 축복 속에서 태어난 적이 있었다는 걸 잊지 말자는.... 아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십 칠년 동안 살았던 이유는 십 칠년간 자신이 느낀 세상 경험으로 부모의 이야기를 만들어 놓고 가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그건 결국 자신이 세상에 탄생한 과정을 말하는 일인데 아름인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누구보다 소중하고 아름답게 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가치있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기에.

  그렇게 이 소설은 자식이 쓰는 자신의 자전 소설에서 자식이 쓰는 부모의 연애소설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우리들 존재의 뿌리를 여름처럼 일깨워 주려 이렇게 여름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늘 여름이 좋아 죽겠는 나 같은 독자앞에.


여름을 만드는 사람

  열일곱의 나이에 부모가 된 사람들과 그들의 자식으로서 열일곱의 나이에 죽어야 했던 사람의 이야기는 소설로선 그리 충격적인 설정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드라마 미니시리즈에 등장할 법한 상투적, 작위적인 배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훌륭한 감독은 불륜도 독창적인 예술로 승화시키지 않는가. 가장 흥미로왔던 건 자식이 죽어야 하는 병이 ‘조로증’이었다는 것인데 어느 순간 자식이 부모의 노화를 앞지르고 마침내 부모같은 자식이 된 채로 막을 내리는 서사구조가 모든 비극과 희극의 원천이었다. 여기서 사람의 마음이 몸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즉 신체의 노화에 발맞추어 마음이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라 생각했다. 마음은 계속하여 성장하고 발전하여 성숙하는 것이지 한번 늙어졌다고 성장을 멈추고 병약해지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얼굴이 아무리 늙어도 소년은 소년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그건 우리 몸이 아무리 남들보다 빠른 시간을 살아도 마음은 자신이 겪은 철(계절) 만큼만 철이 든다는 말이기도 했다. 사람은 자신이 체험한 계절의 횟수만큼 그 계절을 잘 알게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계절의 나이테만큼 어른이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여지껏 작가 김애란이 알고 배워온 여름이라는 계절이 모두 녹아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무엇보다 나이와 탄생, 죽음을 말하는 이 소설에 있어 중요한 사실이었다. 김애란은 꼭 나보다 십년이 젊은 소설가였다. 나보다 어리고 혹은 나이든 작가보다 경험이 적다고 덜 성장했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조로하는 직업인 작가로서) 꼭 그 나이의 정점에서 가장 완성된 감성을 완벽하게 토해내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김범수라는 가수가 지금 막 신인이 된 백청강이라는 청년의 노래를 듣고는 저 목소리는 딱 저 나이 때 밖에 나오지 않는 맑고 귀한 소리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건 노래 실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의 그만이 낼 수 있는 유일성, 희소성, 순수성을 말한 것이었다. 김애란은 더 나이 들어서 혹은 더 어려서는 볼 수 없는, 느낄 수 없는 만큼의 모든 여름을 자기 소설로 노래했다. 그건 젊음을 한숨 넘긴 내가 오랜만에 체감하는 더없이 순수한 여름이었고 그래서 더 시리고 아픈 여름이었다. 어떻게 그런 여름일 수 있는가. 어떻게 여름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내게도 그런 여름은 있었는데. 그녀가 다른 무엇이 아니고 작가인 것이 얼마나 고마운 여름인가 말이다.

  속된 말로 아름인 하마타면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할 존재였다. 나란히 열일곱 살인 태권도 특기생 한대수와 노래가 꿈이었던 최미라가 저지른 하룻밤 불장난으로 아름인 그들 인생의 최대 실수이거나 치명적인 추억이 될 뻔 했다. 모든 생명은 그렇게 모두 사라질뻔 한 사건속에서 극적으로 피어나는 존재가 아닐까. 자꾸 혼란스러웠던 건 아름이의 이름이 여자같았다는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내 사촌 여동생 중에 꼭 ‘한아름’ 이라는 녀석이 있다. 80년대 초에 한글 이름 짓기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여자 이름 짓기 참 좋은 韓氏(한혜숙, 한고은, 한예슬, 한은정, 한가인, 한지혜, 한채영, 한지민, 한효주, 한혜진을 보라) 성에 무수히 많은 아름이가 탄생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들의 아들을 남성으로 생각하기 정말 어려웠다. 작가가 굳이 여자이름의 뉘앙스를 가졌으면서도 아름이를 남자로 한 이유를 이해하고 싶었다. 본 서사에서도 글쓰는 사람으로서 자주 작가 자신의 대리인처럼 느껴지던 아름이를 왜 남자로 운명지었는지. 아니 왜 여자로 하지 않았는지. 솔직히 남자로 할 거면 이름만이라도 한대수의 확실한 아들처럼 지었으면 바랐다. 이름의 표면적 의미만으로는 병을 ‘앓고’ 있는 ‘아름’, 혹은 세상을 일찍 ‘알아’버린 ‘아름’, 삶과 죽음 모두를 두 팔 벌려 안고 있는 ‘아름’이로 상징할 수 있었지만 줄거리상 아름이가 남자이어야 하는 개연성은 작품 전체로 보았을 때 드러나는 이유로 보이진 않았다. 어떤 작가의 오래되고 내밀한 바람같은 것이었을까. 작가의 전작들에서 아버지는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가는 대개 철부지 아버지로서 좀 대책없고 우스운 인물들일 경우가 많았다. 이른바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는 부성은 아니었다. 이번 작품에서도 한대수는 태권도를 잘하는 학생이었지만 아름이를 보고 난 후로는 뭣 하나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패배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대수가 사회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인물일 수 있지만 가정적으로는 누구보다 자신이 뿌린 생명을 소중하게 책임지는 진솔하고 따스한 인간성을 보여주었다. 아름이는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아버지로 태어나 자신을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다고 말한다. 아름이 입장에선, (남자로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를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엄마이고 여성인 내 입장에서도 감동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순간, 왜 이 노래가 생각났을까.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에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은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리라 -  <부모> 가사 中


  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하다면 그건 내가 부모가 되어 나같은 생명을 만들어 보는 수 밖에 없다는 노랫말. 내가 생겨난 이유, 생물학적 나의 시초를 따져 묻고 그 답을 알아보기엔 어쩐지 생겨난 후 나를 낳은 어머니 보다는 생기기 전 아버지가 제격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태어난 이유야 말로 아버지가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유를 공감하기엔 같은 남자인 것이 더 낫겠다 싶어진다. 그래야 좀 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겪지 못한 과거’와 앞으로 ‘오지 않은 미래’를 모두 체험해 볼 수 있으니까. 가만 생각해보니 그것은 참 스마트한 발상으로서 완전히 자신이 되어보지 못한 아름이가 마지막으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소망은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는 사내가 되고 싶은 사내, 여름이 되고 싶은 여름      -329p
어머니는 자기가 되고 싶은 자기, 여름을 간섭하는 여름      -330p


  아름이의 유언과도 같은 <두근두근 내 여름>엔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렇게 표현한다. 자신의 여름을 여름처럼 창조하고 싶은 아버지는 사내로서 뿌리가 되고자 했고 그 여름 속에 들어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어머니는 열매가 되고 싶어 한 것이다. 모두 여름을 자신처럼 자신을 여름처럼 만들고 싶은 청춘들이 아닌가. 또 아름인 구십의 치매 아버지를 둔 육십대 동네 장씨 할아버지와도 농담 따먹기를 하는 친구사이로 지내게 되는데 장씨 할아버지 역시 아버지가 늙어서 이루게 될 철없는 할아버지의 표상으로 보였기에 이번 이야기는 각 세대를 상징-손자(아름)-아들(한대수)-아버지(장씨)-할아버지(장씨 아버지)-하는 남자 인물들이 여름안에서 소박한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오랫동안 여름을 만들어온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누구보다도 생명의 시작, 인간의 성장, 죽음의 마지막을 성찰하기 위해 아름이는 남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아름이는 아버지와 장씨 할아버지를 보고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하는 질문에서부터 ‘부모는 왜 아무리 어려도 부모의 얼굴을 가질까’, 혹은 ‘자식은 왜 아무리 늙어도 자식의 얼굴을 가질까’하는 질문들을 같은 남자 소년의 시각에서 제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아름이는 세상에서 가장 빨리 늙는 슬픔(恨)을 가졌기로 가장 크게(한) ‘아름’다운 ‘한아름’이 합당해 보인다. 아름이야 말로 한여름의 아름다움을 만들었기 때문에.



여름을 시작하는 사람

  또 인상깊었던 사실 중 아름이는 죽음을 앞두고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아름이는 부모님의 연애담을 완성하기 위해 자주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 작가로서 고충어린 목소리가 겹쳐지는 기분이 들었고 어쩐지 작가의 실제 고민이 그대로 노출된 듯한 생각에 친근함을 많이 느꼈던 이유이다. 아름이는 말한다. ‘글쓰기는 매 순간이 결정과 선택의 연속’이라고. 기부 프로그램에 출연한 후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보고 ‘어쩌자고 인간은 이렇게 이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나버리게 된 걸까?’ 자문한다. 그리고 왜 자신처럼 사람들은 ‘그토록 자기가 느낀 무언가를 전하려 애쓰는 걸까?’ 알고 싶어 한다. 이는 그대로 작가 김애란을 움직이는 실시간 화두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인간은 타자에게 이해를 바라기 때문에 자신이 느낀 것을 무던히도 전하려 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이는 병들어 부모님에게 우등생도 학사모도 드릴 수 없으므로 그들의 추억을 잘 다듬어 선물해 드리는 일로 글쓰기를 택한 것이었다. 이것은 몸이 빨리 늙어 감에 따라 그 성장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마음을 책으로 채운다는 아름이의 생존전략으로 생겨난 고유의 능력이었다. 결국 아름이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의미있게 살기 위해 글을 썼다는 것과 같은데 이는 꼭 조로한 정신이 자기도 모르게 경쟁력이 된 이 시대의 모든 작가들의 항변만 같았다. 자꾸 이 시간에도 골방 어느 구석에 앉아 밤을 새며 홀로 글과 싸우고 있을 수많은 청춘들을 생각나게 했다. 작가를 꿈으로 가진 나보다도 더 절실할지 모를 그들 젊음이 안타까워 보였던 건 아름이에게 가공의 편지를 보낸 시나리오 작가 이서하의 공도 컸음이다. 이 책 후반부에 아름이와 이서하가 주고 받은 서신은 감수성의 극치라 할만큼 이 작품의 백미로 기능했다. 아름이는 이서하의 편지를 보고 ‘한 줄의 문장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고, 한 번의 호흡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하루’라며 그 행복을 어쩔 줄 몰라하지 않았던가. 꿈이 무엇이냐는 아름이의 질문에 ‘사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어서’라는 이서하의 답신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머무른 구절이기도 했다. 그 구절이 왜 그렇게 울컥하며 눈물이 나던지 나조차도 의아했다. 어쩐지 나는 아름이가 불치병에 걸린 소년 소녀의 시나리오 때문에 거짓 편지를 보낸 또 다른 젊은 작가를 십분 이해할 것 같았고 가공이라도 자신의 심장을 설레게 해준 그에게 고마워 할 것 같았다. 그건 지난날 우리가 거짓사랑에 눈물 짓다가도 먼 훗날 사랑의 기억으로 감사해하던 용서의 느낌과도 비슷했다. 무엇보다 아름인 이서하로부터 첫사랑의 ‘큰’ 실망을 얻었지만 그가 보낸 글 때문에 ‘잘’ 실망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 않는가. 


어른이 되는 시간이라는 게 결국 실망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글이란 게 그걸 꼭 안아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보다 ‘잘’ 실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무엇인지도 모르겠어. 언젠가 나도 네 글을 보고 싶어. -260p


  상처를 준 상대에게 그래도 진정한 ‘네 글’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아름이는 어쩐지 조로한 작가 김애란이 아직 철 안든 내게 말해주는 격려처럼 느껴졌다. 아주 오래전에 꼭 부모님의 연애이야기를 한번 소설로 써볼까도 싶었던 나였기에 그녀와 한아름은 내 여름의 심장을 노크하는 반가운 손님이 되고도 남았다. 여름 내내 ‘언젠가 나도 네 글을 보고 싶어’ 이 말이 귓가에 울리는 시간이 될 듯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물리적으로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매력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아름이는 태어나 ‘엄마 가슴에 안겨 처음으로 엄마의 심장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아는 소리라는 안도감’에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죽기 직전 아버지가 자신을 안아줄 때 아버지의 심장과 자신의 심장이 포개어지며 같은 소리를 듣게 되어 그 파동안에서 사랑의 힘을 오롯이 체험한다. 사람의 심장이 하나 뿐인 것은 그 심장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나는 심장의 소리가 같은 사람은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심장의 소리를 포갤 수 있다면 그들은 심장보다 더 뜨거운 추억들을 공유한 사람들 일테니까. 아름이가 언젠가 병원을 다녀오며 아버지와 둘이서 찾아갔던 놀이공간, 둘이서 하늘높이 점프하며 심장을 뛰게 하던 그 축복된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같은 심장이 뛰는 사람들이 서로의 심장 때문에 행복해 하는 그 순간, 가슴이 터질 것 같아도 멈추고 싶지 않은 그 순간을.   


만일 인생의 가장 환한 장면이란 게 따로 있다면, 바로 그런 순간이지 않을까? 시원하고 개운한 바람. 펄떡이는 심장. 발밑의 탄력. 넘어지며 웃고, 웃으면서 자빠지던 우리의 활력. -145p

 

  나이들면서 내 심장이 뛰는 순간을 자각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건 일상이 아니라 생각하고 일상이 아닌 것은 대개 일탈이라 치부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걸 원하는 것 같아도 실은 매일 매일 보통의 순간을 살고자 심장을 움직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애써 가라앉혀 놓고 뛰지 않는다 불평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인 것이다. 허나 내가 생각하기에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은 살아보니 점점 기적이 맞다는 생각을 한다. 보통의 삶이라는 건 남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평범함 여러 개를 모두 모아 이루어진 아주 특별한 인생이 아닐까 싶어서다. 끊임없이 우발적인 만남으로 사랑과 이별이 반복되는 인생에 있어서 보통이 되기는 여간 보통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모두는 각자가 특별할 수 밖에 없고 그 특별함이 결국 자신의 매력이 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자신의 심장은 물론 상대의 심장도 뛰게 할 수 밖에 없는 소중한 본성이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특별한 재주를 가졌고 재주가 많을수록 상대도 특별하게 하는 능력을 가진 게 틀림없다고 믿게된다. 

  바로 김애란은 고통과 슬픔, 기쁨과 환희에 대한 감수성을 보다 정확하고 풍부하게 전달하는 육감적 능력을 가졌다. 남의 심장을 두드리고 끝내 벅차올라 터지도록 하는 특별한 재주말이다. 그녀의 육감은 다섯 가지 이외의 감각이 아니고 다섯 가지를 모두 합한 것 이상의 감각일 터이다. 나는 육감이 탁월하게 발달된 작가의 작품으로 이 여름을 반갑게 맞이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이 여름의 色을 나의 色으로 하고 싶고 이 여름을 통과한 것들과 제대로 소通하고 싶고 이 여름으로부터 發한 것들을 모두 놓치지 않고 싶다. 또 다시 내가 도망치려 했던 ‘시작’이 다시 내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설렘과 두려움을 느꼈다는 아름이에게서 내 모습을 부끄럽게 확인한다. 내가 두려웠던 건 사실 여름이 무섭게 닥쳐 온다는 사실이었는데 그것은 여름에 시작을 하고(해야 하는) 싶은 마음일 것이었고, 그 시작은 언제나 고통일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여름을 사랑하는 건 고통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그건 내 심장이 아직은 뛰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러므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 내가 여름이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이로써 여름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으로 여름을 시작하는 사람이고 싶다.

두근두근 내 인생, 그건 이 설레는 여름과 함께, 지금부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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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1-07-0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여름이 있었구나.
난 여름체질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여름을 거의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 같아.
콕찝어주니 끄덕거려진다~

이책이 좋았던건, 가독성이 훌륭해서 내게 간만에 한쾌에 끝내는 기쁨을 줬었던 것과
죽음이 전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우울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닌가 싶어.

저 말 딱 맞다. 백청강의 노래를 듣고 평한 김범수의 말.
적절한 비유를 콕찝어내는 것도 너의 탁월한 능력이야. 문단의 아이유라니^^

2011-07-03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3 00: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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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3 1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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