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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양장)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가끔 동화를 읽는다. 아이가 어렸을 땐 아이를 위해 동화책을 사주었지만 막상 아이가 크고 나니 이젠 내가 동화를 집어 들 때 가 있다. 모두 아이로부터 알게 된 책이지만 동화라 하기엔 그 울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요즘 동화는 우리 때처럼 틀에 박힌 교훈을 주입하거나 뻔한 결론으로 마무리 하지 않았다. 가끔 잔혹하거나 현실의 우울을 적나라하게 반영한 작품들도 있었다. 세상은 발전했고 작가들은 성장했고 아이들도 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그래서인지『마당을 나온 암탉』과의 첫인상은 그다지 세련되진 않았다. 그냥 우리 어린 시절 시골 이야기겠지 하는, 이름만으로 이미 읽어 본 듯한 작품이었다. 아이의 책꽂이에 눈에 띄는 표지의 책들과 함께 꽂혀 있기로는 이미 몇 년 전 부터였고 나는 오며 가며 그림도 내용도 대충은 알고 있는 척을 했다. 그렇게 낯익은 이웃처럼 눈인사만 한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성인용’이 비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내심 놀라웠다. 어른용이 어린이용으로 재구성되는 건 보았어도 어린이용이 어른용으로 변신하는 건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내용상 달라지거나 더 어려워 진 것도 아니었다. 분명 같은 작가의 같은 책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다른 책인 것처럼 끌렸다. 그 순간 비로소 정독하고 싶은 욕심이 불끈 생긴 건 무엇이었을까. 오래전부터 들추어보지 못한 미안함, 아쉬움, 혹은 부끄러움이었을까. 어쩌면 뒤늦게 어른 된 치기를 들켜버려 자존심이라도 회복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본능적으로 이 책은 성인이 필수로 이수해야 할 최후의 동화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로 그와 똑같은 어른용을 구입했고 또 얼마간 책꽂이 한 켠에 보험처럼 모셔두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소장만으로도 그 책을 이미 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야 책을 덮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당을 나온 암탉이 그럭저럭 내 집으로 들어오기 까지 세월이 길었다. 감회가 새로웠는지 나는 바보처럼 이 책을 쉬이 넘기지 못했다. 어른들의 소설에 비해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지금 내 곁을 떠나기라도 할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 마냥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이 책과 좀 천천히 이별하고 싶어 일부러 늑장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두어 구절에선 나도 모르게 서러워진 마음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누구나 살아가는 이유가 한 가지씩 있다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제일 많이 났다. 앞으로 내 아이를 품에서 떠나보내야 할 어미된 내일도 미리 슬퍼할 수 있었다. 내 어머니, 내 아이, 그리고 지금의 나로 이어지는 生의 아릿한 모습들을 곳곳에서 예고없이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천천히 문장을 곱씹고 글자 하나하나 꾹꾹 눌러 내 마음에 새겨두고 싶었다. 이 책은 동심은 물론이고 아주 오래된 그리움, 향수의 정서를 자극하는 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문장들이 꼭 지금은 떠나온 옛 고향의 구석구석을 뒤돌아보게 하는 마력을 지녔달까. 마치 문장이 혼자서 시골길을 타박타박 걸어가 시냇물을 건너고 잠시 나무 그늘 아래서 숨을 고르듯. 새소리, 물소리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그 흙내 나는 사계절을 온몸으로 배워가듯. 문장은 자신만의 그리움의 시공간을 능숙하게 계획대로 여행하듯 자유롭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우스운 건 내가 전혀 시골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회색빛 아스팔트의 유년시절을 지내었음에도 나는 이 책의 문장이 마치 내 고향처럼, 내 어머니처럼 포근하고 따스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잎싹’은 암탉이 아니라 그 시절 누군가의 어머니였고 ‘초록머리’는 청둥오리가 아니라 그 시절 키워낸 누군가의 자식처럼 느껴졌다.
동물이 등장하는 동화에서 이토록 인간의 정서를 담뿍 느껴본 적은 실로 어린 시절 이후 오랜만 이었다. 개인적으로 개나 고양이를 키워본 적도 없었고 동물과의 교감을 느껴본 적도 없으며 외려 혐오감까지 지니고 있는 나로서는 의외였다. 처음엔 낯설기도 하고 조금은 부끄럽기까지 했다. 동화 속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개성이 강하다기 보다는 하나같이 심성이 섬세하다는 느낌이어서 그랬을까. 닭이나 오리, 개나 족제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동물의 외양, 그 익숙한 시각적 이미지와 연결되지는 않았다. 동물로서의 서식 및 집단행위나 생존을 위한 먹이 채집 과정등이 자세하게 묘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동물은 저마다 소중한 생명을 지닌 자연 속 아름다운 주인공들일 뿐이었다. 작가가 그들의 시공간에 인간이 사유하는 감성들을 잘 부여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의 이름이 곧 캐릭터의 성격을 말하는 서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작가는 동물에 부여하는 실명으로는 드물게 서정적인 이름, ‘잎싹’이라는, 어찌 보면 암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인공의 네이밍을 하셨다. 그런 ‘잎싹’이 품어낸 청둥오리는 상큼하고 생생한 ‘초록머리’로, ‘잎싹’의 친구이자 은인인 청둥오리는 ‘나그네’로 분하도록 하여 자연스럽게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셨다. 그 중에서도 알을 얻기 위한 품종으로 길러진 난종용 암탉을 잎사귀의 생태적 운명과 연결시켜 ‘잎싹’이라 호명한 건 이 작품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가장 불러보고 싶은 이름으로 남는데 충분했음이다. 알 낳는 암탉의 이름이 꽃피우는 ‘잎싹’인 것이야 말로 이 책이 이루어낸 거의 모든 성취가 아닐까. 아카시아 나무 잎사귀가 부러워 스스로 ‘잎싹’이 된 암탉은 청둥오리라는 ‘꽃’의 어머니가 되었고 족제비라는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소망이라는 ‘햇빛’을 간직하였기에 스스로 눈부시게 하얀 눈발 속으로 흩어지며 우리에게 감사와 사랑의 향기를 전해주었다. 정말로 ‘잎싹’을 나지막히 불러보니 아카시아처럼 ‘꽃’이 되어 우리들 가슴에 흩뿌려진 것이다. 잎사귀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나무처럼, 사람들은 사랑없이 계절은 꽃도 없이 아름답기는 힘든 법이 아닐까. 그렇다면 ‘초록머리’는 조건없는 사랑을 베푼 ‘잎싹’이 자신의 뜨거운 가슴만으로 품고 싹틔워낸 초록색 봉우리, 즉 내일의 희망을 상징하는 꽃이 분명했다. 이 작품은 이렇듯 자연의 생태적 운명을 인간미 넘치는 동화로 승화시키며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웅숭깊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동물이었음에도 나는 아카시아 꽃 향기에 흠뻑 취했던 것이다.
우리네 인간사와 다를 바 없는 동화 속 이야기는 잔잔한 파도처럼 여러 번 반전을 겪으며 더욱 탄탄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야기가 흥미로와진 것은 잎싹이 더 이상 알을 낳을 수 없게 되자 폐계 처분되어 죽음의 구덩이에 버려진 순간부터였다.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나 목숨을 구해주고 잎싹이 그토록 원하던 마당으로 이끌고 가던 청둥오리는 우리에게 아직 절망할 때는 아니라 말해주는 수호천사인 듯했다. 알을 낳기만 해야 하는 운명적 역할, 기계처럼 정해진 규칙, 날갯짓을 가로막는 갑갑한 철망을 뚫고 잎싹은 마당에 살기를 소원했다. 보통의 암탉처럼 수탉의 보호를 받으며 둥우리에서 알을 품고 오리들과 산책하고 싶어 했다. 나같은 여성으로 치자면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과 이웃을 가지고 싶다는 소박한 꿈, 그런데 그 평범함이 간절한 꿈이 되는 애틋한 사연에 다름 아니다. 주어진 역할, 주인의 법칙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꿈을 찾아 박차고 나오던 잎싹은 어쩐지 강요된 교육현장, 억압적인 조직에서 자기 이상을 찾아 처절한 야생의 현장으로 뛰어든 청년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평소 잎싹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 기계적으로 ‘알’을 생산하는 것에서 발전해 자의적으로 그 ‘알’을 끝까지 품고 길러내는 것이 소망이라는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느껴졌다. 이 작품에서 잎싹은 결국 ‘알’을 품고 어렵게 키워내 온갖 위험에도 그 ‘알’을 지켜내는 희생적인 모성의 이상향을 상징하고 있다. 잎싹은 ‘알’에서 깨어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아기를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며 아기가 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기어이 성공한다. 또 ‘알’을 품고 싶어 했던 잎싹의 마음을 배려한 외톨이 친구, 나그네 청둥오리는 가족의 무사 안전을 지키려는 묵묵한 아버지를 표상한다고 느껴졌다. 나그네는 그들을 지키려다 족제비에 대신 희생됨으로써 숭고한 가족애를 실천한 가슴아픈 주인공이었다. 잎싹과 나그네가 그들의 ‘알’을 지켜내는 것은 감동적인 노스탤지어로 기억될 듯하다.
이렇듯 모성으로서의 ‘잎싹’과 부성으로서의 ‘나그네’는 서로의 공통분모인 초록머리에게 각자 유언과도 같은 생의 가치를 직접, 간접적으로 전달해준다. 나그네는 자신은 ‘날지 못하는 야생오리이고 잎싹은 보기 드문 암탉으로 서로 다르게 생겨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똑 같을 순 없지만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집단이기주의에 물든 조직 사회, 계층 간에 만연된 배타심,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주의 등을 꼬집는 따스한 경고로 받아들였다. 나그네가 잎싹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의 성격을 가지는 이 말은 꼭 자기 자식에게도 당부하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을까. 마찬가지로 잎싹이 어미로서 자식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같은 족속이라고 모두 사랑하는 건 아니며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타이름이었다. 마당식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초록머리에게 잎싹은 ‘달라도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의 다른 버전, ‘같아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역설적 세상 이치를 가르쳐준 것이다. 중요한 건 같으냐 다르냐가 아니라 누가 되었건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이라는 것. 둘 다 보여지는 겉모습보다 안 보이는 속 알맹이를 들여다보라는 말로 생각되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의미심장하게 두어 마디로만 깊은 속마음을 전해준 잎싹과 나그네는 아이들에겐 보이지 않는 선생님이었다. 작가는 아이들에게 자신과 다르며 많은 사람들과 다르다고 친구를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 무시, 외면할 수 있는 마음을 잘 이해해 주면서도 그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공감어린 설득을 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가족의 의미와 사랑을 되돌아보게 하면서 이웃과 타인에 대한 배려, 그리고 이해심을 물흐르듯 스며들게 하는 작가의 환유는 어른인 내게도 친근하고 다정하게 다가왔다. 이 책은 가족처럼 편안하면서도 친구처럼 익숙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그런 나의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기도 했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악역을 맡은 족제비는 가족의 잠자리를 지키던 나그네를 사정없이 짓밟으며 자기 배를 채우는데 급급한 이기적인 동물로 출연했다. 아기를 지키려는 잎싹의 필사적인 대응에 한쪽 눈을 잃은 후 그는 끈질기게도 초록머리의 신변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잔인할 것만 같던 족제비에게도 누구보다 끔찍한 자기 새끼들이 있었고 새끼를 살리려면 한겨울에도 사냥을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잎싹이 족제비 새끼를 위협하며 초록머리를 지키려 할 땐 족제비도 어미된 모성으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각자의 모성을 발휘하던 그 순간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 것은 의미가 없었다. 족제비나 암탉이나 청둥오리 모두 다 같이 현실의 생태계에선 생존하려 발버둥 치는 공평하게 고달픈 존재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자고나면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태어나는 삶의 진리가 그렇다고 슬픈 것만은 아니라고, 아니 슬퍼만 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이 작품이 말하는 우리네 인간들이 짊어진 공통된 삶의 무게와 다르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전하는 작가의 진한 연민에 가슴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잎싹은 어떻게 슬픔을 헤쳐 나갔을까. 잎싹은 철망에 갇힌 삶이 싫어 뛰쳐 나왔지만 그토록 바라던 마당에서도 갈대밭의 보금자리에서도 편하게 살 수 가 없었다. 하지만 철망속에서 시간이 되면 알을 낳기만 하는 삶을 반복하는 것은 행복했을까. 生을 대하는 잎싹의 번뇌와 선택, 그리고 그 행보는 팍팍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작품에서 잎싹이 자신의 꿈을 좇아가는 과정은 여느 드라마처럼 기적적이진 않았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피그말리온 조각가처럼 잎싹은 알을 품게 되지만 그 알맹이의 모습은 자신이 원하던 바와는 달랐다. 그래도 소중한 생명을 보호하고 어미된 모성을 발휘해 청둥오리를 키워내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나그네가 봉변을 당한다. 슬퍼만 하고 있을 수 없었던 잎싹의 눈앞에선 초록머리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게 된 것이다. 이 처럼 세상살이는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취와 좌절이, 이별과 만남이 이어지는 그 반복된 과정일 뿐인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건 이처럼 당연한 우리네 삶의 과정, 일상의 편린들이었다. 꿈을 이루려 자기가 속한 현실(마당)을 뚫고 다른 세상(저수지)에 나왔지만 그 세상도 여전히 현실 속에 위치한 가시밭길인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아닐까. 중요한 건 마당이냐 저수지이냐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것만이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은 잎싹에게 연속적인 기적만을 선사하진 않았다. 나그네 덕에 기적적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초록머리의 재롱도 느꼈지만 족제비의 위협은 변함없었고 초록머리도 품안에 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잎싹처럼 초록머리도 ‘꿈’이 있었던 것이다. 잎싹이 아기를 지키기 위해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도 굴복하지 않은 것처럼 초록머리도 자신을 외면하는 무리로부터의 시련을 견뎌야 했다. 바다를 건너고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는 건 어쩌면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자신을 뛰어넘어 날아오른다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초록머리는 같은 무리에게로 떠나라고 말하는 잎싹에게 떠나기 싫다고 말하지만 잎싹은 말한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네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초록머리가 엄마를 부르면서 비로소 날개를 펴고 먼 하늘을 날아갈 때 나는 그 모습을 오래 지켜보던 잎싹의 마음과 함께 조용히 울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엄마의 품을 떠나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나를 향해 손 흔들던 엄마의 미소를 떠올리며, 먼 훗날 내 품을 떠나게 될 내 아이와 아이를 배웅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서.
하지만 나는 그리 오래 울고 싶진 않았다. 이 작품을 다 알고 있다는 어른들 시각처럼 쓸쓸하게만 받아들이긴 싫었다. 한번은 아이입장이 아닌 순연한 내 입장이 되어 보고도 싶었다. 마당을 나온 후 온갖 시련을 헤쳐 가며 꿋꿋하게 자기 길을 걸어가던 잎싹, 그 길의 끝에서 마지막 꿈이 실현되던 잎싹의 최후는 비장하고도 숭엄했다. 하지만 더 이상 슬퍼해선 안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미 알을 품은 적이 있고 알을 키우고 알에서 깨어난 아이의 성장을 한창 도우고 있는 나였지만 그 순간 아름다운 모성보다는 솔직한 내 본성이 더 절실했다. 그것은 잎싹이 계속하여 멈추지 않은 꿈에 더 반응하는 결과였다.
이건 내 알이야, 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아기, 나만의 알 !
나는 잎싹이 외친 ‘내 알’이 이 동화를 읽는 모든 어른의 가슴에 못다 이룬 꿈처럼 알알이 박히는 절박한 그리움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꿈처럼 드는 것이다. 그 ‘알’에서 깨어나 친모를 잃은 청둥오리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인생 행로는 꼭 우리 꿈을 발견하고 그것을 찾아 떠나는 과정처럼 다시 보인다. 그 ‘알’을 품고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이 소망이라던 잎싹은 꿈이 실현되었지만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초록머리를 멀고 먼 북쪽 겨울나라로 떠나보낸 뒤 잎싹은 말한다. 오늘까지 산 것은 오늘까지의 소망이며 이제부터는 날고 싶다는 새로운 소망을 가지겠다고. 초록머리가 떠났다고 모두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자기만의 꿈을 떠올리고 그것을 이루려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것. 작가가 말하는 내밀한 희망의 기쁨이란 혹 절망앞에서도 다시 꿈을 꿀 수 있는 용기, 죽는 순간까지도 꿈을 잃어버리지 않는 의지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 인생이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날에도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 나오며 첫걸음을 떼는 벅찬 행복을 안겨줄 수 있는 것이다. 어제 누군가와 쓰라린 이별을 했지만 오늘 더 귀한 인연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동화책 한권이 이렇게도 인생에 묵직한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일까. 그것도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게. 이 책을 찬찬히 읽어 내는 동안, 내가 알을 품고 알을 낳은 적이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키워낸 사람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는 그 꿈같은 ‘알’일랑 더 이상 간직하고자 생각조차 않았던 구멍난 내 가슴에 오랜만에 충만한 격려와 위로를 채워가는 느낌이다.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알차고 따스한 이야기로 깊고도 풍부한 生의 성찰적 시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보기드문 성취를 이루어 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고, 소망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가야할 이유인 것이다. 꿈을 찾는 다는 건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 소중한 책에서 사랑과 소망과 꿈의 목소리가 시냇물처럼 흘러 내린다. 이 책을 덮고 나는 다시 꿈을 꾸고 싶어지는 나를 발견한다. 나만이 간직한 이야기,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이야기, 나만이 행복할 그 알토란 같은 이야기를 자아내는 것이야말로 나의 소망이 아니었나. 그것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아니었나. 오늘부터 나는 내 이야기라는 꿈의 ‘알’을 다시 품어 소망의 여행을 찾아 떠나볼 터이다. 나도 이제부터는 훨훨 날아보고 싶은 까닭이다. 자유롭게 날기 위해 내 이야기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동화는 동심(童心)을 위한 책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 동심을 잃어버린 내게 꼭 필요한, 꿈을 다시 꾸고 그것을 찾아가는, 굳게 닫혀 진 마음을 움직이는 동심(動心), 그것에 한껏 동화(同化)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