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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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든, 젊다는 것은 에너지에 관한 문제이다. 젊은 작가 - ‘누가 누구를 누구 마음대로 젊고 늙은 작가로 규정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젊음의 기준을 생산의 힘으로 본다면 수긍할 만하다’는 성석제 작가의 말처럼-의 소설은 비극이든 희극이든 인상적인 에너지를 생산한다. 작년에 ‘제 1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덮고는 분명 일상에서 강렬하고도 자극적인 생의 투사적 기운을 얻었던 기억이 있다. 인간의 상상력이 미치는 스펙트럼이 무한대로 확장되었다는 놀라움과 우리가 공감하는 고민의 종류가 그토록 다양하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었다. 젊다는 것은, 젊은 소설, 젊은 작가라는 것은 그 상상력의 에너지가 들끓는 젊음처럼 폭발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대개 문학외의 장르에서도 마찬가지인 젊음의 보편적 기대가치일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같은 작가들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공중에서 한차례 폭발을 일으킨 후 제각각 예기치 못한 임의의 장소에 떨어져 입체적인 파편으로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들을 한데 모아 그러잡기엔 어쩐지 두려웠다. 대기는 무참히 침몰했고 계절은 희미하게 사라졌고 공간은 사방에서 분열했고 시간은 예고없이 소멸했으며, 그 속에 위치한 나와 타자들은 모두 불구인 상태로 존재했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그날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었다.

  이 책을 덮은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이번에 나는 막연한 슬픔에 잠긴 채 함부로 젊음을 입에 담기는 어려웠다. 그건 젊은 사람이 암에 걸리면 더 빨리 죽는 이치와도 비슷했는데 나는 최대한 슬픔의 세포가 진행, 확산되는 시간을 늦추고 싶었다. 그러곤 왜 내가 하필 암에 걸렸을까, 하는 심정으로 왜 이들은 이럴 수 밖에 없었을까를 여러 번 질문했다. 단편이라는 것이 어느 계간지, 어느 소설집에 같이 엮이느냐에 따라 사뭇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 수상집은 꼭 이 시대 젊음의 대재앙 특집으로 부러 모아 구성한 단행본마냥 뚜렷한 색깔과 동일한 방향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젊음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 일정한 방향성이 없다는 것이 그 매력이자 특징일 것인데 이번엔 달랐다. 그런데 나는 그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어쩐지 그들의 젊음과 나의 젊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젊음이 많이도 눈물겨웠다. 젊음의 양이 곧 슬픔의 양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번엔 젊음이 슬픔으로 귀결되던 시간들이 결국 슬퍼지는 독서였다. 나는 그 이유를 찬찬히 따져 묻고 싶었다. 슬픔 끝에 괴로운 심정에 대한 보상이라도 바라듯 이 슬픔을 꼭 치유의 에너지로 바꿔놓기라도 하겠다는 듯. 다행히 기쁨과 슬픔이란 감정을 기초로 인간의 내면을 성찰한 철학자가 있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치욕과 복수심, 두려움과 유사희망, 공황과 불안 등의 모든 감정들은 슬픔의 감정들이라 말한다. (『에티카』, 2007, 서광사) 감정을 예민하게 구분짓고 싶은 내게 그것은 모두 슬픔의 종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번 독서에서 각자의 소설 끝에 희미하게 감지된 어렴풋한 희망의 끈마저도 하나같이 슬픔으로 다가왔다. 외려 모두 불타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라도 있을 것 같아 이 슬픈 감정을 무르고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들을 모두 몰랐던 것으로 하고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그것은 오지에서 탈출해 힘겹게 목숨을 건진 생존자가 느끼는 두려움만은 아니었다.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벽돌을 쌓는 일꾼의 심정도 아니었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허기를 느끼는 비루함이나 사라진 것을 보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부질없음도 아니었다. 내가 느낀 슬픔은 아직은 살아있기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종의 ‘가능성’이었다. ‘가능성’은 아직 희망이라 말하기엔 불안한 생 날것이었고 긍정일 수도 부정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기다리면 누군가는 올 지 모르고, 다시 꽃은 필지도 모르고, 언젠가 글은 써질지 모르고, 마음은 서서히 누그러질 지 모른다는, 비록 지금은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지옥과도 같은 세상이지만 이것을 통과하고 나면 지금보다는 나을지 모른다는 아니 적어도 지금처럼은 아닐 것이라는 일말의 희박한 ‘가능성’이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젊고 어쩌면 세상은 우리 때문에 아름다울지 모르니까. 아니 우리 때문에 아름다워야 하니까. 아니 우리 때문에 아름다웠으면 싶으니까. 사실 젊다는 것은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도전을 의미하고 이것 말고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기회를 상징한다. 미래는 그 가능성의 결과이며 그것의 실현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아무런 가능성이 없으면 사실 슬플 일도 없는 것이다. 가능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욕망도 소망도 많아지는 것이고 그것이 좌절될지 모를 확률도 커지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절망은 차라리 안전하다. 그래서 비겁한 사람들은 보다 쉽게 포기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가능성은 얼마든지 무한대로 슬픔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것은 곧 젊음의 속성과도 꼭 일치 하는 것이었다. 이번 수상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저마다 최악의 고통 속에서도 아직 절망할 수 없는 젊음이라는 가능성을 최후의 카드로 숨겨놓은 증거들의 집합이었다. 나는 그들의 카드를 확인하는 고통을 슬픔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두려움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을 갖도록 자극되는 슬픔이다. 유사희망은, 자신이 그 결과에 대하여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기쁨을 가장함으로써 현재의 슬픔을 위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안은, 자신의 욕망이 침해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정할 때 비롯되는 슬픔이다. 공황은, 작은 악을 통해 큰 악을 피하려고 하는 욕망조차 방해당하는 일반화되고 대규모화된 두려움이다.’ 그렇다면 가장 많은 양의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는 시기가 젊음의 시간이라고 보았을 때 그들은 젊기 때문에 가장 많이 슬펐을 것이 틀림없다. 더 많이 젊은 작가가 더 많이 슬펐을 것이고 그것은 곧 더 많은 가능성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처음으로 많은 가능성이 사라진 지금의 내가 위안이 되었다고 말하면 바보같은 것일까. 우리는 아플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멈추지 않는 인간이라는 존재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가능성을 바라고 원하였던 젊음을 원한다. 젊어지고 싶다는 건 미처 정해지지 않은 나의 미래, 지금보다 더 많았던 그 가능성이 그립다는 뜻일 터이다. 나는 그들의 슬픔을 보며 그 슬픔에 동참하는 것으로 젊음에 참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슬픔도 전염되는 성질을 가졌다는데 혹 이 소설을 집어든 독자들은 나처럼 젊음의 슬픔에 빠져들곤 도리어 이율배반적인 회복의 에너지를 건질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겠다. 일곱 가지 애끓는 에너지들은 흡사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빛깔의 슬픈 애상곡(哀傷曲)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누가 더 슬프고 그리하여 나를 슬프게 하였던가. 나는 그 애닯은 일곱 곡조에 몸과 마음을 맡겨본다.


#1. 나뭇잎 배, 그 구원의 가능성.............................................................................물속 골리앗 / 김애란

  이 소설을 덮는 다는 건 참 어려웠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의 마지막은 지난 3.11 일본 대지진 참사시 바다로 흘러간 지붕 위에서 홀로 버티며 3주 후에 구조된 강아지를 떠올리게 했다. 참았던 눈물이 베어 나오던 건 이미 아버지가 실족사 하였고 어머니가 급류에 휩쓸려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비로소 깨닫게 된 완전한 고립감보다 그래서 생겨난 인간의 본능이 더 목메였다. 어떻게든 물 밖으로 나와 떨리는 파란 입술로 “누군가 올 거”라고 중얼거리는 소년의 목소리가 먹먹해진다. 나는 소설의 끝무렵에 가서야 화자가 소년인지 알았고 그래서 더 소름이 끼쳤던 것 같다. 열네 살 소년이었기에, 설령 아무도 오지 않을 가능성보다 터무니없게 낮을지 모르지만 누군가 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더 온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는 소년을 가만히 안아주고 싶었다.

  이 작품은 점점 싱거워지는 여름날 수박처럼 ‘세계가 점점 싱거워 지던 날’의 이야기라 하기엔 속절없이 야속하다. 그건 세상을 잘 모르고 속단한 젊음의 오해가 아니었을까. 상중인 이들 모자에게 닥친 어둠은 물리적, 정신적, 영적인 어둠으로서 마치 눈을 감고 독서를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언제 그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빗소리와 바람에 흔들려 물이 우는 소리, ‘내장 깊숙한 곳에서 흐느끼는 바람을 타고 새벽 내내 들려‘오는 개가 죽어가는 신음소리는 점진적으로 인간 내면의 공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종반부에 이를수록 작가가 연출한 배경음이 장중한 진혼곡의 멜로디로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 작가가 슬퍼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작품에서 소년과 어머니는 풍수해라는 재난을 맞아 힘겹게 사투를 벌인 끝에 어머니는 실종되고 소년만 살아남는다. 그 소년의 앞날도 불투명하다. 그곳은 어디인가. 내가 아는 김애란은 도시의 변두리 밀폐된 고시원 방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20대 여성들의 현실을 당당하게 노래하는 작가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녀의 밀폐된 공간도 균열이 시작된 듯하다. 바깥에 시선을 돌려보니 이 세계는 여전히 공사중인 것이다. 도시는 끊임없이 리모델링되고 ’마치 지구상에 살아남은 유일한 생물처럼‘ 거리엔 타워크레인이 점령한다. 거대 자본주의의 초대형 공장인 메트로폴리스에서 주거, 교통, 환경, 교육, 예술, 이 모든 분야는 중산층 이상의 삶에 적합하도록 설계되며 타워크레인의 기계적 작업에 의해 소수자는 도시를 떠받치는 희생자로 전락한다. 재개발지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야 하고 그들이 물러선 자리엔 고층의 첨단빌딩과 그에 걸맞는 사람들이 들어 설 터이다. 서울의 한 재개발지대에 사는 신혼부부에게도 A구역은 철거중 이었다.(『벌레들』, 2010)


장미빌라 앞 건물 철거가 시작된 건, 산달이 가까워졌을 즈음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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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들』, 김애란,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 92p

  출산을 앞둔 이들에게 ‘굴삭기는 다음 차례인 집을 향해 천천히 전진’했으며 ‘동이 트면 굴삭기가 저 아래를 다시 뒤집어엎고 갈고 망가뜨려 놓을’ 까봐 고민에 빠진다. 이들에게 철거가 예정된 자신의 주거지, ‘A 구역은 세상만사를 삼킨 심연처럼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채 시치미를 떼고 있’을 뿐이었다. 이 모습은 치명적인 홍수로 마을이 사라져 자신이 살던 주거지의 형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년의 시선과 겹쳐진다. ‘기역자 모양의 4층 건물로 총 열여섯 가구가 들어갈 수 있었’던 강산아파트 역시 재개발 아파트에 떠밀려 붕괴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평생 용접기술로 생계를 꾸려온 아버지가 이십년 동안 아파트 대출금을 다 갚았을 무렵 철거명령이 떨어졌고 공교롭게도 아버지는 신도시 아파트 건설현장 타워크레인에서 실족사한 상태이다. 이번 작품이 더 잔인하고 치명적인 것은 안그래도 철거명령을 받은 터에 아버지 사망과 장마라는 설상가상의 악재가 이중, 삼중으로 겹쳤다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화자가 애어른 같은 열네 살 소년으로서 자연재해와 가족상실, 사회문제까지 떠안은 우리 사회 최약자 층의 비루한 생존현장을, 필사의 탈출모습을 취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화자는 빗소리 때문인지 ‘잠을 청할 즈음엔 자꾸만 집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 나는 비로소 전 국토가 공사중이었음을 깨달았다. - 34p

  소년이 붕괴된 침몰현장에서 기를 쓰고 이어붙인 ‘나무문짝 배’는 곧 자기살 같은 자기 집의 파편들로 주형한 최후의 생존도구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던 베드민턴 채를 노삼아 급류를 헤쳐 가는 길목엔 무수한 ‘골리앗 크레인‘이 버티고 있고 그때 떠오르는 아버지의 얼굴은 ’물대포‘를 한방 맞은 축축한 사체였다면. 혹 ’물대포‘는 우리 사회 공권력을 암시하며 ’골리앗 크레인‘은 재개발로 상징되는 폭력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온 ’장마‘는 왜 만성질병인 어머니, 아버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빈민가정만 찾아가는 것인가. 최소한의 사회 안전장치가 배제된 그들에게 ’장마‘는 우리사회가 방치하고 공동 외면한 예정된 폭력에 다름 아니었다. 분명 약속된 타워크레인으로 밀어버리고 예기치 않은 홍수로 쓸어버리는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 이 작품은 가진 거 하나 없이 오로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기술력(용접), 유산(베드민턴채), 추억(수영)등의 무형의 가치로만 타워 크레인으로 무장된 골리앗 도시에서 살아남은 소년 다윗이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서 살아야 할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정말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나타날지 몰랐다. - 39p

  가만 생각해본다. 소년이 기다리던 마을은 어떤 곳이었을까. 나는 이 작품의 마지막을 덮으며 문득 어린 시절 엄마의 무릎에 누워 낮잠이 든 어느 꿈속같은 오후가 떠올랐다. 엄마는 내 기억에 자주 이런 노래를 나즈막히 읊어주셨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둥근 달과 흰 구름 둥실 떠가는 연못에서 살살 떠다니겠지’ .... 나는 소년의 ‘나무문짝 배’가 어느 평화롭고 따사로운 봄 날 연못에 놀다 두고 온 초록빛 ‘나뭇잎 배’가 아닐까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착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된 소년을 위해, 그 소년의 ‘나뭇잎 배’를 위해 그가 그랬던 것처럼 조금만 더 가면 다른 마을이 나타날지 모르는 가능성에 조용히 박수를 보낸다. 그건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선정하고 떠나신 故 박완서 작가의 마음도 헤아려 보고 싶은 내 눈물이기도 하다. 조금만 더 살면 더 나은 세상을 보겠지, 하는 그 애절한 가능성을.


#2. 체리 빛 소나타, 그 감각의 가능성...............................................................................여름 / 김유진

  시종일관 이 소설을 긴장하며 읽었다. ‘바닥에 온전히 맨발을 내려놓는 법이 없는’ Y처럼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끝내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소설은 페이지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린 듯했다. 소설이 끝까지 밀고 가던 것은 독자와의 거리감에 대한 작가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마치 어느 미술 전시장에 걸린 화가의 작품처럼 일정한 관람거리를 확보한 후 그 너머에서만 그림을 구경하라는 듯. 실로 회화적 표현을 한다는 작가의 이름답게 이 작품은 글로 쓰여진 그림의 느낌이 충분했다. 소설은 동거 커플로 보이는 Y와 B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들을 온전히 대결시키지도 서로 공감하게도 만들지 않았다. 심지어는 왜 같은 공간에 있는지 조차 의문이 가도록 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단절된 과거,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함만을 질료로 하지는 않았다. 그저 몇 개의 주어진 지금 상황과 회상의 파편, 주변 서술로 관계를 예측하고 갈등을 감지할 뿐이었다. 너는 너이고 나는 나, 이유같은 건 묻지 않는다, 는 식이었달까.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남 이야기 하듯 담담히 읊조리는 그들의 이야기. 이 작가의 고백하는 방식이 건조했기 때문인지 소설은 사막같이 쓸쓸했음이다. 김유진의 다른 작품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그 첫인상이 더 조심스러웠다.

  특이했던 건 이 소설에서 어떤 의미있는 족적을 남긴 듯한 ‘먼지’와 ‘벌레’였다. ‘먼지’는 희미한 안개처럼 이들 일상을 뒤덮고 있었으며 ‘벌레’는 이들과 같이 숨쉬고 서식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벌레와 먼지는 서로 상관은 없어 보였지만 그림같은 이 작품을 생물처럼 살아움직이게 하는 유기적인 배경으로 존재했다. Y는 인터뷰의 녹취록을 정리하는 사람이고 B는 무언가를 깍아 내고 부수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헐값에 산 곰팡내 나는 집에서 하루 종일 먼지를 통과하면서 각자의 작업에 몰두한다. B가 Y에게 말하는 집이 아름다워질 ‘가능성’이란 곧 이들의 소박한 꿈과 행복을 암시하는 듯 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이 견고하게 축조되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져 가는 것처럼 보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중요한건 김유진을 거쳐간 이들 작업 공간의 서사적 분위기였는데 그곳에 바로 ‘먼지’와 ‘벌레’가 지속적으로 이들을 물리적,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여성으로 보이는 Y는 ‘생략된 말을 찾아 문맥에 맞게 끼워 넣는’ 것이 주된 작업이었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간, 대화와 대화 사이의 간극, 언어로 표현하기 전에 눈빛이나 손짓으로 대체하는 대화들’을 잘 손질해야 하는 일이었다. 즉, 주어진 문장을 말이 되도록 재정립하고 틀린 것은 법칙에 의해 교정하는 것이 자신의 업무였던 것. 이에 반해 남성으로 보인 B는 남이 버린 재료라도 자신의 필요에 맞게 조립, 가공하여 일상의 물건(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기술인 사람이었다. Y와 B는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은 미완성인 현실, 심지어는 타자가 훼손한 현실까지도 자기 생각과 몸으로 재완성해 나가는 우리 사회 재활용꾼, 리메이크 전문가들이다.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사회공동의 필요에 의해 그 나머지의 시간과 공간을 담당하는 보조적 일꾼으로서의 사회구성원, 예를 들면 배달원, 운전수, 청소부는 아니었을까. Y와 B는 어쩐지 배울 만큼 배우고 능력도 있었지만 신체적, 지적으로 가장 활력적인 청춘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이나 단순노동, 사무보조 등의 노동에 내몰린 젊은이로 생각되었다. 이들에게 닥친 재난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는 기회상실의 현실은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개수구 안에 버티고 있는 벌레’나 ‘온 집안에 살아있는 듯 태어나고 이동, 번식하는 먼지’는 익히 알고는 있지만 서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말해봤자 소용없는 이들 사이 자조적 현실로 여겨졌다. 이 소설의 제목이 불같은 청춘을 상징하는 ‘여름’이지만 그 여름의 바닷가에 이들보다 더 생생한 풍경으로 자리매김한 바다벌레는 Y와 B의 여름을 옥죄는 무시무시한 현실-병, 가난, 일자리, 아이, 집-로서 심볼화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이 작가의 슬픔에 거리두기 작법이 외려 서늘하고 시리게 느껴진다. 남의 슬픔을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하게 하는 작가의 계획된 고집이 마음에 든다. 가령 체리주를 담그고 다음해 겨울에 먹고 싶다는, 아니 명절음식도 먹고 싶다는 남자가 여자의 테이프에서 흘러나온 남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피칠갑을 두른 연극을 하게 하고 남자가 쌓은 체리나무 그늘아래 작은 봉분위로 화관처럼 체리가 떨어지게는 물론이요 마침 여자는 겨울을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봉분을 밟은 채로 체리나무 가지를 꺾게 하다니. 이들의 여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녹색의 잎사귀 위로 떨어지는 검붉은 체리같이 낭만적이고 강렬하다. 꽃이란 무엇인가. 세상의 수많은 먼지와 벌레의 공격에 맞서 싸워 이긴후 마침내 터뜨려지는 꽃망울이 아니던가. 꽃이 되지 못한 청춘은 얼마나 슬픈 것인가. 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계절은 얼마나 아픈 것인가. 그러나 이들은 말한다. 계절이 한바퀴를 돌아 설령 다시 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해도 그때 꽃잎의 색깔만은 누구보다 화려하게 그릴 수 있다고. 그건 자신들과 같은 색이기에 분분히 기억할 수 있다고.  젊음은 바로 그런 감각에 대한 자신감이며 그것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집이 아름다워질 ‘가능성’이라고.
  

#3. 악몽의 축배, 그 탈출의 가능성..........................................................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이장욱 

   이장욱은 이번 수상에서 김성중과 함께 두 번째 젊은 작가의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내가 느낀 이 작가의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장욱은 독자에게 질문하고 은밀하게 힌트를 제시하는데 있어 독자의 선험적 지식이나 경험, 정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치밀한 구석이 있었다. <고백의 제왕>에서는 학창시절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그 시절 친구를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하고 <변희봉>에서는 소설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배우 ‘변희봉’을 서사적 미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스토리는 더욱 속도감이 붙게 되고 그 결말이 궁금해 흥미는 배가 되는 식이었다. <고백의 제왕>, <변희봉>으로 이어지는 서사적 모티브엔 언제나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이라는 대립장치가 있었고 작가는 그 속에서 치열하게 진실을 파헤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에서 러시아 작가로 등장하는 ‘이반 니콜라예비치 멘슈코프’ 역시 실존인물이 아닌지 의심스러웠고 ‘만기’가 ‘변희봉’에 집착했듯이 작품 속 ‘나’는 ‘이반 멘슈코프’를 파헤치는 것이 소설의 핵심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변희봉’이 우리네 인생의 진실에 물음을 던지는 기표였듯이 그도 그러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작가는 실존인물은 아니었고 외려 러시아 문학도인 ‘나’는 실존인물 이장욱인 것으로 보였다. 학생시절 러시아에서 몇 개월 기거한 경험과 그곳에서 신학 전공의 룸메이트를 만나 긴 여행이라는 추억을 공유한 이장욱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동주택에서 19세기 여행자인 자신과 재회한다. 20여 일 동안 그 도시에 머물며 기록한 작가노트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은 불면의 밤과 악몽의 기록으로 탄생한 결과물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직후에 경험한 소비에트 연방과 십삼 년이 흘러 작가 된 후 다시 찾아간 도시 사이에서 무언가 고통스런 작가로서의 균열감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온 듯하다. 그 괴로움이 이반 멘슈코프의 방을 그토록 춤추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의 방을 마치 자기 몸처럼 치열하게 춤추게 함으로써 그 공간을 탈출하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탈출하지 않아도 좋으니 자기만의 묘법과 작가적 구상으로 탈출구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여행의 목적은 흔들리는 작가적 자아의 원인을 찾고 그 자아를 미치도록 깨부순 후 또 얼마간 흔들리지 않을 튼실한 자아를 구축하고 돌아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익숙하고도 낯선 도시에서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 속에서 작가가 발견한 탈출구는 무엇이었을까.

  19세기로 표상되는 도시는 작가의 꿈을 키우고 의지를 다지게 된 희망의 원형지, 꿈의 생산지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몰락한 도시의 원형은 이제 자본주의의 불안을 생산하며 자신이 탈출해온 그곳과 닮아가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바실리섬. 스례드니 15번가 98번지. 5층 7호’에 살았다는 룸메이트 안드레이의 친구, 러시아 작가 이반 멘슈코프는 작가 이장욱이 재회한 자신의 이상향, 즉 또 다른 자아로서 기능했다. 그는 소비에트의 몰락 이전에 전위적인 반체제 작가였고 자본주의 물결 이후엔 공포소설로 전향해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다. 그는 ‘잠을 잘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꿈속에 들어가게 되는 소녀’의 이야기로 소설가가 독자들의 ‘꿈’속에 들어가 그들을 ‘꿈’꿀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존재임을 역설한 작가였다. 그의 작품인 <꿈>이 공포소설이었다는 것이 인상깊었는데 공포는 작가 이장욱이 19세기의 방에 머물며 체험한 특별하고도 지배적인 정서였다. 또한 룸메이트였던 안드레이가 러시아 작가의 친구로서 그를 살해한 용의자일수 있다는 것, 안드레이도 그를 따라 공포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서사구조를 뒷받침하는 코드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만 보면 러시아 작가의 방이 춤을 춘 것은 결국 밤이면서 동시에 낮인 백야에 꾸는 악몽, 환각과 같은 비현실이며 안드레이는 그런 공포스런 현실에 가장 잘 적응한 친구에 불과했다. 즉, ‘자신이 살해한 작가의 방에 앉아서 아무도 읽지 않는 공포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독백은 악몽과 환각에서 깨어난 작가 자신이 바라본 꿈속의 자아는 아니었을지. 작가는 ‘이 악몽이 과연 누구의 것인지’, ‘무엇의 악몽이었는지’에 대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장편소설을 써야 할 것임을 친구의 목소리를 빌어 대답했다. 그리고 그 악몽의 결과를 이렇듯 소설로 완성했다. 작품을 썼다는 것은 이반 멘슈코프의 방에서 의미있는 탈출구를 발견했다는 뜻이 아닐까. 작가라는 존재는 그 어떤 현실에서도 글로써 탈출할 가능성을 찾아내는 가장 고통스러우면서도 또 가장 축복스런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이 아닐까. 그런 작가의 젊음은 바로 탈출이라는 가능성의 여부에 달려있는 건 아닐지. 그렇다면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샌다는 말은, 꼭 이 작품에 어울릴 관용어가 아닐까.  


#4. 자기정복, 그 치유의 가능성......................................................................................................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 김사과


   분노의 리듬으로 작품 전체의 서사를 장악하는 능력이 무척 인상깊었다. 작년에 이 작가의 단편 중 <매장埋葬>이라는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 어떤 평론가는 김사과의 세기말적 환유를 보고 ‘2010년 식의 분신자살’이라는 자극적인 표현(『현장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 2010)을 했다. 김사과는 괴물들이 모여 사는 도시, 이곳 서울에 사는 인간은 영혼이 없다고 말한다. 맥도날드나 커피 전문점, 대형 쇼핑몰의 매장(賣場)은 김사과의 글을 통해 매장(埋葬)되는 신세로 전락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소설은 이번 소설의 원인이 되는 배경으로서 느껴진다. ‘도대체 이 모든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하는 화자의 질문에 그 분노의 출처는 바로 이곳이오,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번에도 실패했듯이 이번에도 또 실패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파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들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확실한 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돈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들 누구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황은 점점 더 나빠 질 것이고 우리는 자식에게 부랑자라는 직업을 선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결국 우리의 자식들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정신적/물질적 빈곤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세계를 바꿀 수 없으므로(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우리는 이제 그만 세계를 끝내려 한다. 그 방법은 더 이상의 번식을 중단하고 집단학살과 자살을 병행하여 인류 전체가 멸종에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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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埋葬』, 김사과, 현장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  83p

  스물다섯 살의 화자가 자신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 종말론적 선언은 그대로 오늘의 청춘을 대변하는 현장의 목소리만 같다. 도무지 바뀌어 질 것 같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음 세대를 위한 역할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니 얼마나 섬뜻한 외침인가. 이번 수상작을 읽고 다시 <매장埋葬>을 들쳐보았을 때 <매장埋葬>은 이 작품의 전야제 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처절한 외침이 세상과 길거리와 회사와 가정을 뚫고 나와 마침내 자신마저 뚫고 나온 상태로 통제불능의 상황이 전개된 것이 이번 소설이었다.

  이 작품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보이는 화자는 회사를 나와 평소 자주 들르는 국밥집 아주머니를 우발적으로 살해 한 후 연이어 그곳을 방문한 중학생을 살해하고 집에 돌아와 사소한 시비 끝에 아버지와 어머니마저 살해한다. 마지막 장면은 무심해보였던 누나와 대치하는 설정이었다. 윗 세대와 다음 세대를 제거하고 자신처럼 희망이 전무한 같은 세대, 누나에게만 분노를 표출하지 않은 것이다. 이른바 묻지마 범죄의 단적인 케이스였지만 누나는 동세대로서 작가가 그녀 스스로 세계를 끝낼 기회를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모든 끔찍한 일을 자행하는 화자는 특별히 범죄에 노출될 환경에 살아오지 않았고 피해자 또한 살해당할 만한 개연성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슬프고 가슴아팠던 것은 바로 분노의 주인공이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열심히 살아왔으며 ‘해롭고, 더럽고, 불길한 정적으로부터’ 철저히 보호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본 적이 없는 별 문제시 할 것이 없어 보이는 젊은이였다는 것이다. 작가 김사과의 나이를 보니 내가 중학생일 때 태어났다. 그녀가 주장하는 스물다섯의 세상에서 나는 불혹의 기성세대였다. 그녀와 나 사이의 십오년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비정상으로 병드는 시간이었을까. 그(화자)가 왜 은폐된 분노를 세대 간 단절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표출하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은 화자가 자타공인 이미 미래가 없는 불안한 청춘세대임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소설가 김사과로부터 설득되는 에너지 전환에의 가능성 때문일 터이다. 김사과의 세상 종말을 위한 세대적 소설혁명은 계속 될 것이고 그것은 여전히 미래가능성으로 치환될 확률이 많다. 분노한다는 것은 젊다는 것이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가 출신의 93세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창조적인 행위라 말하였다. 문제는 에너지의 향방이다. 격분하여 희망을 놓쳐버리는 것은 역사를 퇴보시키는 만행일지 모른다. 분노로 한평생을 살아온 스테판 에셀은 답한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이고 그 다음에 타인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이라고. 김사과의 분노의 에너지가 창조적인 저항(문학)을 통해 반드시 자기 자신과 타인은 물론, 우리 사는 이 어지러운 세상까지도 감싸안을 치유의 에너지로 발전될 그날을 기다린다.


#5. 황금빛 야화, 그 성장의 가능성........................................................................허공의 아이들 / 김성중

  작년 수상작 <개그맨>을 생각하면 이 작품은 장르의 전환에 이어 주제마저 심화, 확장된 느낌이 들었다. 공통으로 떠오른 키워드는 여전히 ‘상실’에 대한 기억, ‘소멸’에 대한 연민이었달까. <개그맨>이 스무살의 첫사랑이 어떻게 상실되는지 그 과정을 아련하게 포착한 비극적 희극이었다면 <허공의 아이들>은 아직 여물지 않은 소년, 소녀가 다가올 자신의 성장과 미래를 어떻게 예감하는지를 그려보는 동화 환타지였다. 이번엔 상실되고 소멸되는 것이 시간과 기억뿐 아니라 공간과 육체에까지 확대되었다. 그 대상도 성인이 아닌 성장하는 미성년으로서 그것은 잔인한 설정이었다. 과거의 상실보다 미래의 소멸이 더 뼈아픈 상처가 아닐까.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이 작가가 작가노트에서 자신은 여전히 ‘꿈의 바다를 헤매는 보트피플’이며 구조가 아닌 조난자로서 계속하여 표류를 원한다는 말이었다. 그가 바다위에 서 표류하며 깨달은 것이 소설의 결과라면 이번 조난은 작가에게 어떤 고통을 선물하였을까.

  야구 후보 선수인 소년과 피아노 건반을 치는 소녀. 다세대 주택과 타운하우스로 대변되는 이들에게 닥친 재앙은 집이 허공에 떠오르고 사람은 투명해져서 결국 사라지는 세상이었다. 앞선 수상작과 비교해보면 재난의 종류 면에서 <물속 골리앗>과 같은 계보에 속하며 서사의 표현 면에서 <여름>과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람이 불고 땅이 무너지고 불이 나고 길이 없어지는 것은 어느 재난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 결과로 집이 허공에 떠오른다는 설정은 무엇보다 흥미로왔다. 상상만으로도 내 존재가 이곳 세상과 멀어지는 느낌이었고 이들이 소멸되어도 천사가 되어 하늘로 승천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꿈처럼 연장하고 싶었다. 소녀는 자신의 아래에 위치한 타운하우스를 ‘허공의 금빛 무덤들’이라고 불렀는데 작가노트에 보니 태국에서 세에라자드의 꿈을 꾸고 이야기에 대한 환상을 품고 돌아온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천일야화의 연장선상에서 피어난 슬픈 동화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저 재미난 하룻밤 이야기가 아니라 보다 냉혹한 시선으로서 작가는 ‘사라지는 세계에서 성장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즉, 부모가 사라졌고 곧 이 세상도 붕괴될 것이 뻔한 상황에서 계속하여 키가 자라고 마음도 성숙해 지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작가는 재난의 동반자였던 소녀가 사라진 후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 속에서도 단연 반짝이던 ‘뼈가 자라는 소리’를 소년 자신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것은 이제 곧 내 차례가 되었지만 계속하여 성장하고 있는 자신을 자각할 수 밖에 없는 생존자의 유일한 기쁨인가, 잔인한 슬픔인가. 어쩌면 이 소년의 유일한 생존방식은 성장이 아니었을까. 성장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생존도 불가능 한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은 어짜피 모든 성장을 다 하고서도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결국 소멸하려고 성장한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다만 성장하는 동안은 소멸이 목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의 소년이 자신의 성장을 인식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바로 내일 소멸할지라도 오늘을 죽도록 열심히 살게 하는 동력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성장이 가져올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인 것이다.


#6. 가질 수 없는 것들, 그 소유의 가능성 .....................................................................너의 변신 / 김이환


  이 작품은 이 책에서 가장 자극적, 충격적이었다. 처음에 말이 안 된다고 웃다가 나중에 울게 되는 이야기였다. 작가가 제시한 상황이 가장 미래적이었지만 전달하는 주제는 어느 작품보다 고전적이었달까. SF적 서사의 구조가 흡사 박민규 작가의 『더블』에 수록된 <깊>, <크로만, 운>, <굿모닝 존웨인>등의 작품을 떠올리게 했는데 절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은 형식면에서도 단문으로 종합적인 구성을 시도하는 실험성이 돋보였다. 기억되기 쉬운 단어들이 산만해 보일 수 있는 텍스트의 요약처럼 강조되어 보였다. 소재면에서도 동성애 코드와 신체성형이라는 충분히 있을 법한 미래지향적 소재를 잘 믹스하여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성찰과 사랑이라는 오래된 명제에 신선한 질문을 남겼다. 전개되는 양상은 세기말적이었지만 스토리의 신선함 때문에 가장 젊다고 느껴진 소설이었다. 그래서인지 가공된 소설의 마지막은 다른 작품들 보다 슬픔의 정도면에서 강렬하지는 않았다. 외려 기발한 아픔, 상상하는 고통, 보류된 슬픔, 불쾌한 고독과 같은 감정들이 복합되어 걱정스런 맘이 더 많아졌다고 할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남자는 연인이고 한 명은 의학적 기술을 이용해 자신을 완벽하게 변신시키고자 한다. 시대적 배경은 ‘새로 개발된 이식뉴스’나 동물에 의해 ‘만들어낸 신체’, 혹은 개인의 기호대로 버려지는 신체, ‘얼굴을 바꿔 이식한 배우’등으로 이슈화 될 수 있으며 대중화된 신체 개조수술로 인간은 자신을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설계, 건축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목적이 의료이든 미용이든 결과는 환타스틱했다.

  이 소설에서 변신을 하는 남자는 결국 더 잘보이기 위한 상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독히도 사랑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사랑(Amor)은 외부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사랑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소유하고 유지하고자 한다. -에티카

  슬픔에 일가견이 있었던 스피노자는 나의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소유하고 유지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기쁨이 슬픔이 되는 이유는 바로 변신을 꿈꾼 남자가 사랑한 대상이 자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남자는 완벽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형체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하나의 인격체로 기능하긴 하지만 살과 뼈와 피가 없이 오로지 오르가슴만 느끼는 인간의 새로운 버전. 그것이 전류가 흐르는 단백질 덩어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자는 자신의 기쁨만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는 자신을 소유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그의 변신은 긍정적인 변화인가 절망적인 변질인가. 이 작품은 물질만능, 외모중심의 한국사회가 성형천국이 되어버린 현실을 씁쓸히도 조롱하며 경고하는 준엄한 텍스트였다. 성형의 끝간데를 미련없이 보여주며 문학으로 미래도를 제시한 점은 이 작품의 가장 큰 성취이며 우리에게도 서늘한 교훈을 주기에 충분했음이다. 이 작품이 전하는 치명적인 가능성, 그것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심, 가지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쾌락, 바로 인간이 소유하는 인간에 대한 슬픔은 아니었을까.


#7. 놀이공원의 추억, 그 소통의 가능성.......................................................................정용준 / 떠떠떠, 떠


  이야기니까, 슬프고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만약 현실이라면 기구하고도 구슬픈 사연이 아닐 수 없는 소설이었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수록작인 <떠떠떠, 떠>가 약간의 신파성을 지닌 사랑을 지향한 것이 좋았다. 물론 에버랜드 같은 놀이공원이 그 배경인 것도 좋았다. 비록 주인공은 간질과 말더듬이라는 치명적인 장애를 가진 남녀였지만 사자와 곰의 탈을 쓴 캐릭터로서 분했던 것도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주고받던 사랑의 방식이 어쩐지 향수를 자극하는 매력을 지녔기 때문일까. 이들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각자 자신의 장애로 인해 이미 결정적인 수모와 모욕을 당한 공통의 경험을 지니고 있었고 같은 현장에 서로의 증인으로서 자리하기 까지한 운명적 인물들이었다. 장애와 상처의 공유는 이들이 이미 불완전한 공감에서 완전한 소통으로 발전될 필요조건을 함의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들 남녀의 공통점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 없었다’는데 있었다. 동물의 탈을 쓰고 잠시 인간이길 유보하는 것. 그런데 이들이 서로 사랑을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 이전보다 많아진다.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사랑을 소통할 수 있는 상징적 장치로 서로의 ‘혀’를 주장했고 이들은 열심히 자신의 ‘혀’를 사용해 상대의 상처를 위로했다. 정확히 의사를 표현할 수 없고(말할 수 없는 입) 언제 어디서 거품을 물고 발작을 일으킬지(불치병에 걸린 입) 모르지만 이들의 ‘혀’는 각자의 한계를 뛰어 넘어 그 이상의 소통을 이루는 메신져로서 제 2의 아름다운 입이 된다. 그래서 제목으로 기재된 <떠떠떠, 떠>는 말을 더듬기 시작할 때 소리나는 표음인 ‘떠’의 분절음에서 시작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의 행복한 기분, 마치 비행기를 타듯 붕 ‘떠’ 있는 상태의 순간을 포착한 언어이면서 앞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소통하고자 하는 소망의 언어 모두를 담고 있는 복수의 타이틀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마치 벙어리와 장님이 소통하듯 세계를 놀라게 하는 사랑의 힘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놀라운 힘은 결국 말더듬이의 입을 열게 하고 우리를 울게한다.

  그건 당사자는 행복해도 바라보는 자는 가슴아픈 명장면이다. 그들의 소통이 슬픈 건 아마도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노력이 담겨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을 보며 우리가 슬픈 건 혹 우리 자신의 소통방식때문은 아닐까. 예를 들면 곰의 탈을 쓴 여자가 발작을 일으켜 바닥에 누워 있을 때 사자의 탈을 쓴 남자는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보려 열심히 춤을 추는 그 애절한 마음, 그것처럼. 우린 그들의 방식이 눈물겨운 것이고 그렇지 못한 우리의 소통이 슬픈 것이리. 곰이나 사자의 탈을 쓰지 않고도, 그들보다 멀쩡한 인간이지만 곰이나 사자만큼의 노력도 아니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더 초라한 사람들 이기에.


  이제, 슬픈 노래들은 끝이 났다. 일곱 편의 이야기는 마치 애상곡의 모음집처럼 그렇게 절실하게 연주된 것이었다. 때론 진혼곡이 되어 누군가를 애도했고, 때론 소나타가 되어 계절을 연주했다. 때론 한밤의 야상곡으로 고독한 랩소디로, 보랏빛 환상곡 혹은 오렌지빛 세레나데로 그 슬픔을 처연히 축복했다. 마지막엔 무반주로 싱그러운 아카펠라음이 들려오듯 청명한 사람의 목소리도 기억에 남았다. 이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노래한 건 슬프지만 그걸 알고서도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라는 누구보다 명징한 지속적 가능성이었다. 시련과 상처, 고통과 분노, 상실과 소멸을 안고서도 치유와 사랑, 성장과 소통의 가능성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은 젊음이 가진 특권이자 가장 소중한 의무일 것이다. 산다는 건 젊음으로 성장하고 그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그 어떤 가능성도 버리지 않는 눈물겨운 여정은 아닐까. 그렇다면 젊음의 완성이 곧 인생의 완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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