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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꽃잎이 지는 것이 슬픈 이유는 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하루건 열흘이건 최고로 아름답게 피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영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꽃이 영원히 피는 것이라면 꽃은 아름답지도 슬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꽃은 왜 어차피 지고 말 지 알면서도 온몸을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는 것일까. 혹시 꽃이 피고 지는 건 한 번의 아름다움이 시들어 버리는 일이 아니라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신과 약속된 과정은 아닐까. 한번 만개하여 분분히 떨어진 꽃잎도 다음 계절엔 어느새 꽃봉오리로 다시 움트고 예전처럼 피어나는 걸 보면 꽃은 한번 피고 지는 아름다움을 단지 영원히 반복한다는 생각이 든다. 온 종이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넘기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진 이토록 처연한 이야기를 보니 꽃은 영원하기 위해 지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져버린 생명에서도 이처럼 진하고 서러운 꽃의 향기를 맡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그미는 내게 그리움으로 눈물진 부용꽃이었고 붉은 빗줄기로 내리는 철쭉이었고 맨살로 벌거벗은 백일홍이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도 꽃으로 피고 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영원을 꿈꿀 수 있는 존재였다.
단지 삶의 비밀을 먼저 알아버렸기에 신의 질투를 사 생을 일찍 마감한 사람들은 많았다. 우리가 아는 요절한 시인들은 필요이상으로 고지식하거나 이상적이거나 정의로왔기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죽음에게 내어줄 수 있었다. 천재적인 시인으로 태어난다는 건 다분 속세의 형벌이라는 전언을 내포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미의 스승이었던 이 도사는 일찍이 ‘천재도 과하면 독이 된다’고 행여나 그미가 천재성의 대가로 불행의 늪에 빠질까봐 얼마나 염려했던가. ‘천재란 필연적으로 자신이 속한 시대와 불화하기 십상’이라는 그의 통찰이 말해주듯 그미가 요절한 이유는 범속한 세상에서 살아가기엔 너무나 고결했고 뛰어났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데 난설헌은 여덟 살에 이미 두보와 견줄만한 시를 써낸 신동이기도 했지만 하필 조선 땅에 태어났고 여성인데다가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는 3대 악재가 겹쳐진 인물이었다. 조선의 여인은 재능도 형벌이었다. 작가는 4백년도 더 된 이 여성의 핏빛 봉우리를 무덤 속에서 꺼내어 다시 숙연하게 꽃피우도록 하였다. 내가 지금의 나이만큼 한 번 더 산다면 꼭 작가의 나이가 된다. 나는 그때 내 재능을 꽃 피울 수 있을까. 질곡 많은 한국의 근 현대사를 몸소 헤쳐 나온 작가가 발굴해낸 봉우리는 난설헌으로 상징되는 우리네 여인들의 아까운 재능의 총체, 그 모든 눈물의 진액들인지 모른다. 흰 명주 수건에 붉게 물든 그미의 피눈물이 어찌 우리 가슴에 결결이 맺히지 않겠는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공교롭게도 그미가 살았던 조선중기와 동시대를 살았던 한 명의 서양 철학자가 퍼뜩 떠올랐다. 그도 그미처럼 부유한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언어와 다양한 학문을 교육받았으며 독서에 몰두하다가 문학적 사유에 재능을 보인 사람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도 가장 친한 친구와 아버지, 남동생, 자식을 연달아 잃으면서 고독의 시간과 투쟁하는 삶을 살아갔다. 하지만 그가 그미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건 조선이 아닌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남성이었고 여자와 결혼한데 있었다. 바로 전 생애를 통틀어 수상록 <隨想錄, Essais, 1586> 한 작품을 남긴 몽테뉴이다. 몽테뉴가 극심한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상실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은 죽기직전까지 ‘자기탑’에서 글을 썼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미에게도 시를 쓸 수 있는 자유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되었다면 하는 통한의 푸념을 해본다. 틀림없이 몽테뉴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답고 방대한 분량의 고전을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았을까. 작가의 넋두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분하고 슬픈 일이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싶어 새삼 안타까움이 복받친다. 사람과 시정을 나누며 글맥으로 세상을 배워온 그미에게 시를 쓰는 일은 물과 공기 같은 생명유지의 장치였을 터이다. 시인에게 한 줄 시를 쓰지 말라는 것은 곧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것이 아니던가.
그미는 시집이라는 억압과 남편이라는 폭력, 아버지와 오라버니, 그리고 자식의 죽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그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방법을 철저히 차단당했기에 스스로 소복을 입고 철쭉화관을 쓴 채 자신의 장례를 치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피가 통하는 혈관을 막듯 시의 소통을 막았기에 그미는 영혼의 질식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미에게 시집은 시를 쓸 수 있는 집과는 아주 멀었다. 조선조의 수많은 여성들이 붓과 서안 대신 실과 바늘로 창조해낸 조각보의 예술성을 보라. 내 어머니는 손재주가 뛰어나 전후 시골 기와집 대청마루에 일제 미싱을 몇 대놓고 동네 처녀들에게 양장기술을 가르치셨다. 당신이 제대로 배우고 돈이 있었다면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서울 명동에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었을 거라고 늘 아쉬워 하셨다. 그래서 더욱 굴하지 않고 뒤늦게 꽃을 피운 작가의 집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소설에는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자신의 산산 조각난 가슴을 기를 쓰고 이어 붙여온 여성들이 그미 주변에서 그 아픔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조선 땅에서 여자로 태어나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인권을 무시당하고 본성을 억압당했다. 남편이 먼저 죽으면 서방 잡아 먹은 팔자가 되고 과거에 낙방하면 아내의 기가 너무 세기 때문이고 자식의 돌림병은 어미가 부실한 까닭이었다.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인 그미의 외할머니는 전실 자식이 셋이나 되는 후처 자리로 시집간 딸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어머니 김씨는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남편이 밖에서 딴 살림을 차려도 말없이 방에 틀어박혀 수만 놓을 뿐이다. 시댁의 영암 외숙모는 남편을 먼저 보낸 죄로 동서시집살이가 고달프기 짝이 없다. 주인집 아들과 합방을 한 달이였지만 결혼 소식을 듣고는 종년의 딸로 태어난 신세를 비관하여 자결을 하고 만다. 친정에 있을 때 몸종이었던 덕실이는 도도한 안방마님들에 앙심을 품고 그미의 남편을 유혹한다. 오라버니를 연모해온 수연은 벼슬아치의 첩실 소생이었기에 자발적으로 기생이 된다. 동지나 단오같은 몸종은 억지로 시집보내어져 소박을 맞거나 남편의 폭력을 못 이겨 도망 나오는 신세가 된다. 따지고 보면 열등감 때문에 그미를 평생 억압해온 시어머니 송씨도 잘나지 못한 아들로 속을 썩이며 질투와 미움으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다. 이 책을 덮고 내가 시집갈 때 할머니, 이모님, 외숙모, 고모님이 하나같이 ‘꼭 잘살아야 한다’고 두 손을 꼭 잡으시며 눈에 살짝 눈물이 고이던 순간을 떠올렸다. 엄마의 장례식 날에도 변함없이 헤어 질 때 내 손을 당신 두 손으로 힘주어 흔들며 ‘어떻게든 잘 살아야 한다’고 눈물 훔치시던 모습이 선연하다. 여자로 태어나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것, 시부모를 모신다는 것, 친정의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이 얼마나 당신들의 가슴을 너덜거리게 하였을지 나는 미처 몰랐었다. 그들은 내게 자신들의 어머니와 자신이 겪어왔을 그 모든 상처들을 미리 어루만져 주시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미와 이어진 인연이라고 우리네 여인들의 슬픔만을 되새기며 울고 싶지는 않다. 작가가 이 땅의 여성들에게 원한과 절망을 안겨주려 난설헌의 영혼을 복원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작품은 대를 이어 전해지면서 세대를 초월해 교류하는 상호작용으로 모두가 한자리에서 조우할 수가 있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에 피어난 난설헌의 모습은 독자를 한마음으로 모으는데 충분 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난설헌과 똑같은 여성으로 태어나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내 어머니와 같은 연배의 작가가 분명 우리와 같은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고민했기에 그 아픈 과정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싶었다고 믿는다. 여성철학자 뤼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 1932~)는 여성이 열 달 동안 자궁 속에 이물질과 같은 태아를 잉태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타자와 공존하며 차이를 견뎌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바로 여성적 문화란 차이를 견디는 문화, 타자를 포용하는 문화라는 것을 난설헌과 작가를 보면서 다시금 깨닫는다. 그미도 그녀도 그 차이를 견뎌내고 세상을 포용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더욱 자신으로 살기 위해 시를 쓰고 소설을 썼을 터이다.
소설의 마지막, 죽기 전에 그미는 주변의 여인들에게 아껴온 거울을 선물한다. 그미가 건네고 간 거울은 어쩐지 긴 시간을 거쳐 우리 앞에 어렵게 당도한 유품인 듯하다. 거울 앞에 하나로 모여든 우리네 심장이 유독 붉고 뜨겁다. 그것은 아마도 지난 세월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그네들의 서러운 꽃향기에 흠뻑 물들여진 탓일 터이다. 지난 겨울은 많이도 서럽고 외로웠다. 다시 꽃이 피는 봄이 그립다. 이번 봄에는 어디에서든 이름 모를 꽃이 더 많이 피어 주기를 기다려본다. 그미의 하얀 거울에 꽃이 피는 봄을 활짝 비추며 그 옆에서 난설헌이라 가만히 읊어 보리라. 뜨거운 심장이 다시 뛸 수 있어 고맙고 그 옛날처럼 활짝 피었기에 이번엔 잊지 않겠다 말하리라. 올봄의 여인들은 그렇게 모두가 아름다워지리라. 내 그미와 꼭 약속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