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의 식탁 - 최재천 교수가 초대하는 풍성한 지식의 만찬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은 꼬리를 물고

 

 

 

   벌써 십 년도 더 되었다. 저자가 서울대 교수로 있을 때 나는 한창 생태박물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우리나라 이 분야 최고 전문가를 소개해주며 자문을 받아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 당시 나는 이과분야의 교수들을 만나는 것을 거의 시간낭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과학관 프로젝트를 하다보면 해당분야(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등) 교수들을 한번은 꼭 만나게 되는데 -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나 - 그들은 거의 일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적인 감각도 떨어지고 아이디어 면에서도 원리와 법칙만 설명하며 천재라 불리우는 어느 교수는 말투까지 어눌한 경우도 있었다. 많이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 표현하고 생각을 입체화하는 것은 각기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과학분야 교수들에겐 가장 중요한 핵심 컨텐츠만 과외 받듯이 찍어달라는 수준에서 자문을 마무리하곤 했다. 당연히 최재천 교수도 그럴 분(?)으로 생각하고 나는 틀에 박힌 질문들을 가지고 연구실을 방문했다.

 

 

 

   처음 방문을 열었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방안은 거대한 헌책방처럼 곳곳이 책더미에 쌓여 있었고 교수님은 방 한가운데 무슨 열반에 이른 수행자처럼 정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계셨다.(책상도 어깨높이 까지 쌓아 놓은 책으로 여분의 공간이 전혀 없었다) 머리와 수염과 의복의 상태는 며칠 밤을 새우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초췌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흔쾌히 웃는 얼굴로 먼저 악수를 청하셨다. 더 말이 필요 없는 연구자의 진중한 아우라에 나는 흠칫 충격을 받았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건 대화하면서 그가 전혀 과학자라는 (내 편견의)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유창한 인문학적, 문학적 언어구사 능력이었다. 그때 나는 미래 지속가능한 에콜로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왜 인간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되는지를 강의 받듯 전해들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생태박물관 전체의 주제나 공간 연출까지도 아이디어를 얻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든지 시간이 허락한다면 세세한 항목마다의 전시연출에도 모두 설명 드리고 자문을 받고 싶었다. 같이 동행한 영업부장이 나오면서 혀를 내두르며 저분은 과학계의 이어령(이어령은 업계에서 이빨로 통함)이라고 농담했던 것도 기억난다. 단순히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래 묵혀온 생각을 풀어 놓는 듯한 느낌. 그때 나는 저자가 가진 학문에 대한 열정과 동물과 환경을 향한 사명감,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미팅 순간의 집중력 등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조금 더 공부해서 가지 않은 것을 땅을 치며 후회했고 돌아가는 내내 ‘최재천’이라는 이름 석자를 되뇌었다.(그땐 지금만큼 유명하시지 않을 때 였다. 유명하긴 해도 스타는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2006년도에 국립대구과학관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을 때, 전체 컨셉을 통섭으로 하기 위해 서점에서 책을 뒤지다가 바로 <통섭, 에드워드 윌슨 저, 사이언스 북스, 2005>의 역자가 최재천인 것을 확인했다. 그분은 과거 전시하는 회사에서 자문 받으러 온 일개 기획자를 기억할리 없겠지만 나는 당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을 때라 마치 ‘통섭’이라는 책이 나를 위한 구세주로 느껴지던 시기였다. 저자가 주장하는 ‘삶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인연이란 이런 것이었을까. 그 책을 밤새워 읽고 과학관 컨셉을 도출한 후 (당시 막 뜨기 시작하던)통섭에 관한 브리핑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다.(그러니까 나도 최재천 교수의 통섭을 얼마간 널리 알린 사람에 속한다 ㅋ) 그 책과 하워드 가드너의 <체인징 마인드, 이현우 역, 재인, 2005> 미셀 루드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 박종성 역, 에코의 서재, 2007> 훗날 이어령의 <젊음의 탄생, 생각의 나무, 2008>등은 우리가 과학관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항상 참고서처럼 지니고 다니던 책이었다. 그 후 내가 조직생활을 때려 치고 사업에 손대었을 때 저자는 서울대에서 이대로 스카우트 되셨고 내가 보는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기 시작했다.(내가 조선일보를 끊지 않는 이유 중에 최재천 교수의 칼럼도 속한다 ㅠ) 지금은 내가 처음 뵈었을 때보다 엄청나게 유명한 사회인사가 되셨고 그동안 많은 책들이 소개되어 일반인에게도 사랑받는 작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저자의 책을 서점에서 만날 때마다 웃기지만 나는 마치 나 혼자만 알았던 어떤 과학자의 비밀을 다 같이 공유하게 되는 것 같은 서운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 내가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음을 매번 환기하곤 한다. 그는 짧은 대화만으로도 과학이니 인문학이니 하는 경계가 필요치 않은 통섭학자임을 인식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때 내가 말로만 통섭학자의 아우라를 느꼈다면 이번에 <통섭의 식탁>은 글로 된 증명서 같았다. 이 책을 덮은 지 벌써 사흘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배가 부르다. 모두 영양가 높은 지식만찬의 덕택이다.

 

 

엄지를 치켜 세우며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신간 중에 어엿한 인기 장르가 된 것이 바로 ‘책 이야기’이다. 예전엔 문학 비평가들이 자기 이름을 걸고 시나, 소설, 고전을 해석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모음집을 출간했는데 요즘은 평론가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유명 인사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읽어온 책들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리뷰어로서 이런 책은 늘 관심의 대상이며 그들은 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어떻게 해석하고 소개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책을 이야기하는 책속에서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듯 강렬한 호감을 느끼며 책을 찾아 읽게 되는 경우도 많다. 내가 읽지 않았어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허세부리기도 그만이다. 단점이라면 같은 이유로 책 이야기만 읽고 정작 해당 책은 패스하게 될 경우도 있다는 것.(고전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최재천 교수의 책 이야기는 설사 이 책에 나온 그 어떤 책도 들쳐보지 않는다 해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막강한(치명적인) 장점이 있다. 다른 분야와 달리 과학은 문턱이 높아 나같은 문과출신은 미리 포기하게 되는데 그나마 이런 책때문에 눈과 귀가 트이는 시간이기 때문에. 또 하나 읽다보면 어느새 과학과 인문의 구분이 스르르 허물어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저자의 책은 들어가는 입구는 분명 과학이었지만 나오는 출구는 인문으로 변해있다. 과학분야의 책을 소개하는 책 자체도 많지 않지만 저자처럼 인문학적 통찰이 문학적으로 제시된 글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저자가 주장하듯 배우는지 모르면서 깨우치는 방식이 가장 훌륭한 공부라고 저자는 스스로 우리에게 그 효과를 입증하는 과학자로 남을 듯하다.

 

 

 

   우선 이 책의 구성은 식탁이라는 컨셉 하에 이루어지는 각종 요리의 향연으로 볼 수 있다. 총 56권의 책이 한 권마다 어엿한 하나의 꼭지를 이루며 메뉴판에 소개되어 있다.(359p나 되니 만만한 분량은 아니다. 비율을 보면 56권 중 세프 추천 3, 애피타이져 7, 메인요리 31, 디저트 5, 일품요리 6, 퓨전요리 4) 동물과 생명, 진화, 우주, 과학자에 관련된 자연과학 책이 삼분의 이 정도 차지한다. 나머지는 인문사회분야 혹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책들인데 주제도 가족, 여성, 경제, 역사, 문명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와 범위를 말 그대로 경계 지을 수가 없다. 저자는 맨 처음 셰프가 추천하는 책으로 제인구달의 <인간의 위대한 스승들>과 조너던 와이너의 <핀치의 부리>, 그리고 리처드 랭엄의 <요리의 본능>을 콕 집어 소개하고 있는데 각각 인간과 동물과의 교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삶, 요리의 진화적 중요성을 언급하며 마지막에 음식을 준비하는 요리사를 찬양하고 있다. 우리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준 그래서 가장 인간답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구절이 마치 자신이 이 책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로 인식하는 것 같아 의미심장하다고 느껴졌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오랫동안 음식을 준비해온 요리사였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는 저자가 왜 비빔밥을 예로 들며 책 이야기를 식탁으로 꾸렸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요리가 인간을 동물이 아닌 인간적인 존재로 도약할 수 있게 만든 것이기에 요리사는 가장 인간다운 사람인 것이다. 단순히 책을 나열하고 요리의 순서에 따라 형식적인 의미로 책을 구분한 것이 아니라 저자는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어 인간에게 영양을 섭취하게 하듯 (그러한 인간적인 마음으로) 책으로 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내가 존경하는 부분은 이런 식의 지식이 체화된 혜안이다. 이것은 편집자가 책의 리스트를 받아 테마대로 끼워맞추기 식으로 단순 분류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확실히 감명 받은 (전공분야) 책에서 얻은 주제의식이 반영된 통섭의 결과이다. 그는 음식이 맛있다면 요리사를 향하여 엄지를 치켜세우면 된다고 한다. 우리는 이 책을 덮고 다른 말이 필요 없이 엄지로 수백 번 인사해야 하지 않을까.

 

 

개미만큼만 알아도

 

 

 

   책을 덮고 나니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가르침은 역시 ‘알면 사랑한다’ 였다. 저자는 끊임없이 서로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더욱 사랑하게 된다고 설득한다. 모르는 게 약이 아니라 모르면 사랑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책의 전반에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게 쓰며들어 있는데 저자는 그들을 하나라도 더 알면 지금보다 더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다 같이 잘살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것이 우리 못지 않게 ‘이곳에서 삶을 누릴 자격과 권리를 지닌’ 그들과 함께 사는 방법의 시작이라 주장한다. 그는 침팬지, 고릴라, 야생 원숭이, 개, 개미 등을 평생 연구하는 과학자들과 저서를 소개하며 그들이 외치는 주장을 전해주고 있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통나무집을 짓고 숲속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고, 삶의 절반을 나무위에서 보낸 여성생물학자도 있었다. 꿀벌이 날아다니는 모습에서 꿀벌이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춤을 해독하여 꿀이 있는 곳까지 날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도 있었다. 아무도 지켜 달라 말한 적 없는 아프리카의 동물을 지키다가 밀렵꾼의 손에 살해된 비극의 과학자도 있었다. 저자인 그 역시 물개 소리를 흉내 낼 수 있으며 갈매기의 깃털에서 채집한 진드기의 아름다움에 전율이 돋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지금도 열대생물학자로서 타잔 네 동네를 드나들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사는 동안 평생 열대 한번 못 가 본 사람이 가장 불쌍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소개하는 책을 하나 읽지 않고도 전해 받은 메시지는 너무나 명확하고 경건하다. 인간은 스스로가 만물의 영장으로서 생명체중 가장 스마트하다는 오만을 버리고 자연과 함께 공생하는 겸허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의 인간은 아직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 지나친 인본주의 혹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 그리고 같은 생명체로서의 상대적 존중과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인간은 그가 말하는 인간의 조건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만물의 영장이라 생각하는 인간은 산업경제에서 ‘성장’과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자연을 당당하게 파괴하는 주범이었기 때문에. 주의와 편의를 앞세워 야생동물을 박멸했고 국토균형발전이라는 이념으로 서식처를 파괴해 왔기 때문에. 그는 다른 저자들의 목소리를 빌어 개인 소비 수준으로 측정하면 세계의 부는 계속 증가하고 있지만 미래세대에도 사용해야하는 생물권의 건강상태로 측정해보면 부는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지구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며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모독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멸망하리라 예언한다.

 

 

 

   그는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는 담론 외에도 의생학이 어떻게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간단한 아이디어를 들려준다. 예를 들어 개미의 위대함은 이런 식으로 연구가 된다. 두발로 걷는 우리보다 험한 지형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넘나드는 다지류의 특성을 이용해 재난구조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로봇이 개발된다면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대형참사 현장에서 더 많은 인명을 구조하지 않을까? 그는 공룡같이 무시무시한 동물의 필요성도 알게 쉽게 정리한다. 알파포식자들이 사라지면 남은 동물 중에서 가장 야비하고 경쟁력이 강한 소수가 생태계를 지배하여 지구를 황폐하게 한다는 경고는 이런 식이다. 그들은 시장을 독점하려는 몇몇 대기업들의 횡포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정부의 기능을 대신한다고. 기실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에게는 그 무엇도 아닌 우리 인간이 가장 잔인한 짐승인 걸 알고는 있느냐고. 인간만이 다른 동물의 행동과 감정을 해석하는 것이 아닌데 왜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듯이 구느냐고.

 

 

 

   그는 생명과 진화를 말할 때엔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생명의 의미 즉, DNA의 영속가능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금 슬프기는 하지만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면 내 생명은 물론 생명이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골고루 소중하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에 머리가 숙여지지 않느냐 반문한다. 많은 세계적 과학자들은 현대 인류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사회 및 환경 문제로 생물다양성의 고갈을 꼽았다고 한다. 숲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동물이 멸종하고 생태계의 질서가 혼란스러워 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불행이 천천히 진행된다고 혹은 나 사는 동안엔 별일 없을 것이라고 눈을 감는다. 그는 바로 우리 다음 세대의 운명을 걱정한다. 자연 환경이 지속되지 못함은 물론 사람의 가족환경도 붕괴될수 있다는 섬칫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사실 ‘이 모든 것이 다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아 시작된 일이다‘라며 출산율 저하의 문제를 반 이상 여성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 같아 그 부분은 내심 서운하기도 했다.(그 부분에서는 나도 할 말이 많지만 저자가 몰라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다행히도 인간은 생명과 생명 다양성을 사랑하게끔 태어났다는 것이다. 퍼뜩 집에서 열심히 장수하늘소를 키우던 아이 생각이 났다. 과학관에서 가져온 장수하늘소였다. 마트에서 집도 사고 먹이도 사고 육 개월을 키웠는데 어쩔 수 없이 밀폐된 공간에서 돌보다 보니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아이는 장수하늘소 때문에 삼일을 울었다. 어른들의 영혼보다 순수한 아이들의 눈에는 장수하늘소도 자신과 같이 숨을 쉬고 일상을 교감하는 어엿한 생명체였던 것이다. 저자는 생물학자들이 매일같이 바라보고 관찰하던 동물의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업무상 스트레스 이상의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라 말했다. 조금만 넓게 생각해보면 이는 꼭 자신이 기르던 동물에만 해당되는 감성은 아니다. 문제는 이성인 것이다. 과학과 기술도 그 폐해를 비난만 하지 말고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다시 과학과 기술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자고 설득한다.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양보, 관점의 전환. 미래사회를 공상하는 인간이 아니고 현재사회에 공생하는 자연. 이 말을 하고 싶어 그는 수많은 반찬을 대접했던가 보다. 특정 영양소가 필요하다고 주입하거나 강요 혹은 위협한다면 더 멀어질 수 있으니 이렇게 음식에 골고루 버무려 천천히 섭취하게 만들었나 보다. 

 

 

 

   저자는 자신처럼 통섭형 인물이 많아져 문학과 과학의 만남이 하나의 ‘문화적 담론’으로 거듭나길 학수고대한다고 하였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가 파도에 씻기듯 모래처럼’ 스러지는 풍경을 자세히 목격한 독자로서 다시금 알아야 사랑한다는 말씀을 되새겨 본다. 알고 사랑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과연 모르고 사는 것보다 편해질 수 있을까? 인간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사는 것이라지만 분명 사랑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살기도 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렇다면 알아야 하는 건 살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목숨 같은 일이 아닐까. 아는 건 사는 것이다. 아니, 알아야 살 수 있는 것이다. 몰라도 살수는 있지만 그건 사실 죽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같이 살아가는 존재가 지켜야 할 가장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이 지구를 양분하고 있는 두 지배자는 인간과 개미라 했다. 개미가 인간을 존중한다면 기꺼이 인간도 개미를 존중해야 한다. 딱 개미만큼만 알아도 우린 우리 아닌 것들과 영원히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존재인지 모른다. 몇 년 째 까치를 연구한다는 그만큼은 못되어도 우리가 몇 년 동안 개미만큼은 알려고 눈을 떠야하는 이유이다. 개미를 안다는 건 인간외 나머지를 다 안다는 것이니까. 그건 참 기특하고도 아름다운 그래서 진정으로 스마트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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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3-06 0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지 않아도 미안하지 않다'고 느끼도록 하는 책이야기는 부질없다고 느껴요. '읽지 않으니 미안하다'고 느끼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내 이웃 이야기는 내가 이웃하고 부대끼며 느껴야 '참답게 알'지, 누군가한테서 말만 듣고서는 하나도 알 수 없거든요...

저는 요즈음 쏟아지는 '책을 말하는 책'이 하나같이 너무 재미없어요. '소개하는 책을 읽고 싶어 죽도'록 이끌어 내지 못하거든요...

cyrus 2012-03-07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책'들에 대한 책이 나와서 좋긴 한데 너무 소개하는 데만 그치지 않을까 한편으로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특히 과학 관련 도서 같은 경우는요 ^^;;
자신들이 추천한 책들도 직접 읽어보게 만드게끔하는 어필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연 2012-03-0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윌슨은 그런 생명체와 생물 다양성에 대한 근원을 알 수 없는 사랑을 'Biophila'라고 불렀었지요. 최재천도 윌슨의 사상에 많이 빚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책 전반적으로 생명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 이르기 위한 앎이 군데군데 숨어있는게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한사람님만큼 이렇게 즐겁게 읽지는 못한 것 같네요ㅠ 통섭형 인물이 어떤 것인지 사실 잘 감이 안오기도 하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