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영화천국> 3/4월호에 '영화여행을 시작하는 시네필을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으로 정성일 평론가가 쓴 몇 편의 글이 실렸다. 100편의 영화, 영화사(史)의 순간들,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의 저자 구회영(김홍준 감독의 필명)과의 대담 등등 흥미로운 글들이 많은데, 그중 '10권의 책'에 대한 글이 있어, 나중에라도 찾아보기 쉽게 여기에 목록과 소개의 일부를 옮겨둔다. 모두 한글로 출판된 책이다. 개중에는 절판된 책도 있지만, 중고서점에서라도 찾아볼 수는 있겠지.
먼저 이 책들은 '바로 시작하면 좋은 책'으로 추천한 책들이다.
트뤼포, 앙투안 드 베크 & 세르주 투비아나, 을유문화사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마치 소설처럼 읽기에 딱 좋은 수준의 독서라고.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로버트 맥키, 민음인
영화는 결국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할 것.
쇼트, 엠마뉴엘 시에티,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시점, 조엘 마니,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몽타주, 뱅상 피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출간된 일종의 가이드 형식의 책들. 가방에 넣고 들고 다니기에 부담없는 책들이다.
위대한 영화, 로저 에버트, 을유문화사
화장실에 꽂아두고 하루에 세 번(혹은 좀 더 자주) 틈틈이 그저 손 가는 대로 제목이 잡히는 대로 두서없이 읽으라고. (아..근데 큰 일을 하루에 세번이나 보지는...이라는 쓸데없이 더러운 첨언.)
세계영화사, 데이비드 보드웰 & 크리스틴 톰슨, 시각과 언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책상에 앉아서 볼 책. 그러나 여기에 두 가지의 난점이 있는데, 하나는 이 책이 3권으로 분절되어 있고, 게다가 절판이라는 점...그렇다면?
세계 영화 대사전, 제프리 노웰 스미스 책임 편집, 미메시스
위의 책의 대안. 정성일의 충고. 시험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면 절대로 처음부터 읽지 말 것. 당신이 관심 있는 영화들의 시대를 중심으로 읽을 것.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허문영, 강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당신이 본 영화에 대한 비평을 써보라. 할 수만 있다면 그 글을 길게, 그 영화에 대한 생각을 밀고가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끝까지 가보는 경험을 해보라고 정성일은 충고한다. 이 책은 일기처럼 쓰여진 영화비평이라고...(그러나 '나'는 이 글이 일기처럼..이라는 데에는 그다지 동의를 하기가..)
필름메이커의 눈, 구스타보 메르카도, 비즈앤비즈
영화를 만들어보는 것도 일종의 다른 방법의 독서. 이 책은 거기에 매뉴얼 같은 역할을 할 것.
그리고 아래의 책들은 '지금은 독서를 말리고 싶은 책'. 물론 여기에서 방점은 '지금은'에 있다.
시네마 1 : 운동-이미지, 질 들뢰즈, 시각과 언어
시네마 2 : 시간-이미지, 질 들뢰즈, 시각과 언어
"당신이 철학 프로그램에 훈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제목과 영화감독 이름에 질릴 것이다. 반대로 시네필들은 첫 장부터 베르그송에 관한 긴 주석으로 진이 빠질 것이다." 두 권의 책의 번역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도 이유라고.
그러니까 먼저,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시네마>(동문선)를 읽을 것.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길
"브레히트로부터 받은 영향과 나치 시대의 파시즘 영향들을 바라보면서 영화와 대중 관객의 역할을 '기대하는' 미래의 영화를 위한 '서설(序說)'"이나 그 전에 좋은 안내자를 만나 먼저 설명을 들을 것.
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시각과 언어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 할리우드의 정신분석, 슬라보예 지젝, 한나래
진짜 눈물의 공포, 슬라보예 지젝, 울력
"이 책들은 영화책인 척 하면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용어를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먼저,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비, 도서출판b)를 먼저 읽으라고. 자신(정성일)이 알고 있는 한 가장 쉽고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다고.
영화의 맨살, 하스미 시게히코, 이모션북스
"이 책은 몹시 위험하면서도 유혹적인 무시무시한 책"이며 "읽고 나면 괴상하게도 하스미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지"나 "그건 하스미 '센세이(先生)'의 견해이지 당신의 생각이 아니"라고. 하하.
덧.
물론, '읽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일 테다. 어제 조금 지나간 영화, 오승욱의 <무뢰한>을 보았다. <무뢰한>은 몇 가지 것들(예를 들어 어떤 허세들 같은 것, 혹은 불친절한 생략들)을 견뎌낸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 순진무구해 보이는 남자감독이 만들어내는 여성 캐릭터' 김혜경(전도연)인데, 영화 속에서 끝내 바닥에 이르르는, 그래서 그 바닥으로 내려보내지는 것이 너무 잔인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 여성캐릭터가 영화가 끝난 후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사실이다. 사실 영화의 중심축은 정재곤(김남길)에게 끝까지 머물러 있는데도. 어스름에서 시작해서 어스름으로 끝나는 영화. 그러나 전혀 다른 두 개의 어스름이 있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