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창작물은 무엇인가를 '미화'한다. 예를 들어 그 대상은 언뜻 보면 매우 복잡해보이는 누군가의 일대기일 수도 있고,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누구나 긍정할만한 추상적인 무엇일 수도 있으며, 혹은 전화기이거나, 달력이거나, 컵이거나 하는 (사무실 눈앞에 보이는 아무 것이나 쓰고 있다) 무생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안기부일수도 있다. 아니, 벌써부터 화를 낼 필요는 없다. 나는 '단지 예를 들고 있을 뿐이지' 안기부에 대한 미화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단 '미화'라는 단어에는 면죄부를 주고 싶을 뿐이다. 사실 최고의 예술작품은 역설적으로 '고도'의 미화가 성공했을 때 나오는 법이기도 하니까.
2.
즉 다시 '예를 들어 말하자면' 진짜 그 드라마가 안기부나 독재정권을 미화하고자 하는 것이라면(물론 사실은 안기부나 독재정권을 미화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시 1로 돌아가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럼 무엇을 미화합니까?), 나의 관심은 그런 것을 미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미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 손을 들어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미화의 양상이나 미화의 성공 여부에 있다. ("호오, 용케 그런 것을 미화하려고 생각했군. 근데 미화를 잘 하기는 한 건가?")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논쟁, 이 드라마가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 혹은 무엇인가 매우 잘못된 것을 미화하고 있다,라는 주장에 조금은 나는 비껴서 있다. 정확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드라마를 자세히 보지도 않았거니와 자세히 본다고 해도 잘 모를 것 같다. 아직 2회밖에 하지 않은 드라마에 그것을 정확히 말할 수가 있나? 영화로 따지자면 초반 10분을 보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3.
그런데 여기서, 그러니까 방영 중지! 이렇게 얘기가 돌아간다면 나는 그것에는 단호히 반대한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아직 2회밖에 하지 않았으니까 판단하기가 어렵고, 그러니까 방영을 중지해야 한다는 주장에 찬성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창작자가 아닌 타인들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 창작자가 아닌 이들이 어떤 창작물에 대해 최고의 형벌을 내리는 것은 '무관심'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넘어서는 폭력을 저지를 권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주어지는가?
덧.
별 시덥잖은 길지도 않은 글을 1과 2와 3으로 나눈 이유는, 이 모든 것이 혼재되어 돌아가는 지금의 논란에 머리가 아파서다. 1과 2와 3을 나눠서 생각하는 것, 그것부터가 일단 시작인 것 같다. 단지 나는 그냥 2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창작물이 아닌 논문의 경우지만, 굳이 아래의 글을 덧붙여 봄.
(그리고 한 가지 더, 촘스키는 유대인이다.)
1979년, 프랑스 리용2대학에서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던 로베르 포리송 박사는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거짓말”이며
“히틀러에 목숨을 잃은 유대인은 다행스럽게도 한 사람도 없었다”는 논문으로 법정에 기소되었다. 그러자 박해를 받지 않고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요청하는 국제적인 탄원서가 작성되었다. 촘스키는 친구의 요청으로 500명의 서명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서명자 가운데 그가 가장 유명했던 탓에 프랑스 언론은 이 탄원서를 ‘촘스키 탄원서’라고 불렀다. 촘스키는 이 일로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자, 네오나치주의자, 유대인을 혐오하는 인종주의자로 낙인 찍혔다. (중략)
드니 로베르와 베로니카 자라쇼비치가 촘스키와 했던 인터뷰를 정리한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창,2002)에서 촘스키는 “나는 포리송의 글을 전혀 읽지 않았”으며,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데 그 내용을
검토할 이유는 없습니다”라고 밝혔다. 포리송이 “반유대주의자고,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정말로 신나치주의자라 하더라도 그런 이유로
표현의 자유까지 박탈당해서는 안 되며, 표현의 자유는 어떤 이유로도 제한될 수 없는 권리”이다.
[장정일 칼럼] 촘스키가 반유대주의자 처벌을 반대한 이유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4291485267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