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스캔들 - 누구의 그림일까?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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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조영남 사건에 대해서만 다루지 않기 때문에, 현대미술의 개념(혹은 양상)을 이해하기에도 좋은 책이다. 확실히 글을 쉽게 읽히게 하는 재주가 있다. (진중권 씨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하시고, 미학, 미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으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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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20-02-09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튼 진중권의 논지는 1960년대 이후 현대미술에 들어서서는 조수를 활용하여 작품을 생산하는 경향이 크게 드러났고, 특히 개념미술에 있어서는 (작가가 그의 손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개념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된다는 것. 이러한 상황에서 조영남에게 인상주의 시절의 인식으로 회귀하여 ‘대작‘이라는 굴레를 씌우는 것은 넌센스라는 것이다. 더구나 이를 법정으로 가져가서 판결을 받는 것은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이기도 하다는 것.

맥거핀 2020-02-09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건 그렇고, 책을 읽지도 않고 낮은 평점을 주는 것은 여전하구나. 진중권 씨를 싫어하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만...(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별 4개 정도이지만, 이 책이 낮게 평가되는 것은 싫어서 한 개 더 줬다.)

AgalmA 2021-01-12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세벌이라도 하시려는 건지 본격적으로 진보 비판 책도 내고 있어 참...

맥거핀 2021-01-13 16:59   좋아요 0 | URL
교직에서 물러나셨으니 시간도 많으실 거고, 뭐 돈이 필요하기도 하겠죠. 위에서도 썼지만 그저 정치비평은 더 안하시는 게...보수에서 자신의 충고를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광대놀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본인이 (그 좋은 머리로) 잘 아실텐데..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 2019년 제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윤이형 지음 / 문학사상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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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이 이상문학상 우수상이라니, 이상문학상도 끝났구나, 라고 중얼거린 후, ‘바로구매‘ 버튼을 클릭했다. 이상문학상을 사는 건 새해의 어떤 정해진 일과 같은 것, 느릿느릿 읽으면서 봄을 기다려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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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일반판 - 재출시
박찬욱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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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자세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의 두 번째 작품 <올드보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한 리뷰를 등가교환으로 끝냈으니 그것으로부터 이어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신장과 신장의 교환, 익사와 익사의 교환과 같은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은 이 영화 <올드보이>에서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오대수(최민식)는 사설감옥의 사장 철웅(오달수)의 이빨을 장도리로 뽑아내고, 그에 대한 대가로 철웅은 오대수의 이빨을 뽑아내려 한다. 철웅은 미도(강혜정)의 가슴을 손으로 만지고, 그 대가로 손이 잘린다(이것에는 또한 오대수의 어떤 오해가 작용하고 있다). 물론 가장 크고도 근본적인 등가교환은 이 영화 그 자체이다. 즉 우리는 영화의 전체에 걸쳐서 오대수의 복수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이우진(유지태)의 복수이다. 그리고 그 복수란 자신(이우진)과 이수아(윤진서)의 관계와 동일하게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커다란 등가교환의 영화이고, 무엇인가가 무엇인가로 대치되는 영화이다. 오대수의 복수에서 이우진의 복수로 영화는 어느틈에 옮겨가고, 이우진과 이수아는 오대수와 미도로 슬그머니 대체된다. 어떻게 보면 <올드보이>는 모든 비밀이 담긴 보라색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달려오는 영화이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전작 <복수는 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점점 개연성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저 이 보라색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가 지금까지 왔던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리고 묻는다. 이 상자를 열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을 택하겠습니까. 이것을 열면 무엇인가를 보게 되지만, 그것을 본 대가는 당신이 치러야합니다.


이러한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 어떠한 것의 부재를 거의 그것과 동일한 실물로 보상받으려 하는 것은 거의 정신병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신병의 많은 징후 중 하나가 등가교환이지, 등가교환을 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신병을 가진 이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즉 간단하게 말해서 그들은 이미 광기를 가지고 있었고(오대수의 말이나 행동은 물론이고, 이우진의 모습에서도 광기를 지우기란 힘들다), 이 영화 <올드보이>는 두 광기를 가진 사내들의 대결이다. 15년간이나 사설감옥에 물리적으로 갇혀있음으로서 생긴 광기가 오대수의 광기라면, 이우진의 정신적인 문제는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의 정신적인 갇혀있음(고착)이다. 즉 그는 이수아의 죽음이라는 과거의 사건에 갇혀있고, 그것에서부터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둘다 무엇인가에 갇혀있고, 말 그대로의 '올드보이(즉 아주 오래된 소년들, 육체는 자랐지만 여전히 정신은 과거에 남아있는 소년)'들이다. 정신병이란 일종의 고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정신병에 걸린 주체는 어떤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과거의 어떤 순간, 그의 정신병이 촉발된 어떤 순간에 머물러 있다. 라캉의 이야기를 빌어서 말한다면, 정신병에 걸린 이들은 언어와 법의 세계인 상징계를 통과하지 못하고, 몸 이미지의 세계인 상상계, 혹은 몸의 리비도인 실재계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사건을 상징으로 대체하지 못하고, 때로는 실재 그 자체를 망상으로, 거의 완전한 실재에 가까운 망상으로만 만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동생의 아이를 뱄다는 소문 속에 휩싸인 이수아가 실제로 배가 불러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이것을 이우진은 "이우진의 성기가 아니라, 오대수의 혀가 임신을 시켰다"고 표현한다). 그 망상과 상상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해 마법의 진실, 혹은 고통스러운 진실이 들어있는 보라색 상자가 온다. 그리고 질문이 반복된다(그러나 조금 바꿔보자). 이 상자를 연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두 가지 정도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하나는 주체가 상징계로 나아갈 길은 애초에 완전히 막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이 정신병에 걸린 모습을 보여준다는 징후적인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박찬욱은 이 영화에서 법과 언어의 세계를 건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법이 스스로 그 역할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 영화에서는 거의 법의 흔적 자체가 없다. 서울 한복판에 사설감옥이 존재하고, 이우진이나 오대수가 수많은 살인을 저질러도 그것은 거의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 더욱 막혀있는 것은 언어의 세계이다. 이우진은 말한다. "오대수는요. 너무 말이 많아요." 그리고 그 대가로 오대수는 자신의 혀를 스스로 자른다(물론 이 자체도 일종의 등가교환이다). 사건은 언어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은 오대수가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제거함으로서 징벌된다. 그것은 이렇게도 볼 수 있는데, 이 영화 <올드보이>는 조금 색다른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아파트의 옥상에서 오대수는 자살하려는 남자(오광록)의 넥타이를 잡고 있고, 남자는 울먹이면서 말하다. "말투도 X같고, 당신 도대체 누구야, 씨발..." 그리고 오대수는 느리게 말한다. "내 이름은..." 그리고 이 때 플래시백되어, 경찰서에서 술이 떡이 된채로 '오.대.수.'라고 답하는(그리고 '오늘만 대충 수습'한다는 그 유명한 설명과 함께) 장면으로 넘어간다. 자살하려는 남자의 이 첫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것, 혹은 이 장면으로부터 영화가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대수의 사설감옥에서의 고행이 끝난 후 이 자살하려는 남자의 이야기는 다시 등장하는데, 이 부분을 보면 조금 이상한 장면이 있다. 오대수는 엘리베이터를 내려와 아파트를 나서고 있고, 그 뒤로 남자의 시체가 차 위로 떨어진다. 이 남자는 오대수가 살려주려 했음에도 왜 자살을 결국 감행한 것일까. 물론 오대수는 이 죽음에 물리적인 책임이 없다. 오대수가 어떤 위해를 가했다고 보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으니까. 그런데 대신 다른 책임을 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오대수는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 옥상에서의 장면은 조금 특이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짧게 구성되어 있는 시간과 달리, 오대수와 남자는 꽤 길게 이야기를 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오대수의 대사가 있고, 커팅 된 후, 아 그렇군요, 그럼 내 얘기를 할께요,라는 남자의 대사가 이어진다. 즉 우리가 보지못한 커팅된 이 사이에는 오대수의 긴 자신의 이야기(우리가 지금까지 보았으므로 생략된)가 들어있다. 다시 말해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15년간이나 감옥에 있었으면서도 오대수는 그 말하기 좋아하는 자신의 특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이것만 보아도 그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미심장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막 자신의 이야기를 남자는 하려고 하는데, 오대수는 벌떡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간다. 즉 오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다른 이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그에게는 공감, 혹은 동정의 능력의 결여되어 있다. 공감이나 동정의 하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물론 중요한 것은 이는 공감이나 동정의 수많은 형태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오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들으려는 생각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가 마지막 혀를 자르는 것은 이우진의 사건에 대한 징벌이면서, 동시에 이 남자에 대한 죽음에 대한 징벌은 아닐까. 그가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어쩌면 이 남자는 뛰어내리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그렇게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혀를 자름으로써 말하지 않고 들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며 언어의 세계는 근본에서부터 거부된다(오대수, 아니 최민식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에 대해 또 한번 징벌을 받기는 한다. 그 얘기는 다음번에 하자).

두 가지 중의 다른 나머지 하나는 그 이후 주체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에는 바로 앞의 이야기, 즉 오대수가 말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오로지 듣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 관련되어 있다. 전체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올드보이>의 마지막에서 이우진은 참 잔혹해보인다. 그는 오대수에게 자신의 심장이 리모컨으로도 끌 수 있다며, 버튼을 누르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극도의 분노에 휩싸인 오대수는 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이 때 쓰러지는 것은 이우진이 아니라 오대수다. 왜냐하면 그 버튼은 이우진의 심장을 폭파시키는 버튼이 아니라, 오디오를 재생시키는 버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펜트하우스는 곧 오대수와 미도의 절정의 신음소리로 가득찬다(그리고 이때 이우진은 당신들도 서로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즉 이 마지막에서 입을 잃고 귀만 남은 오대수가 가장 처음으로 듣게 되는 것은 자신의 가득한 리비도이다. 상상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오대수에게 이우진이 내던진 것은 리비도로 가득찬 실재계, 혹은 리비도 그 자체였다. 즉 이우진은 아니 박찬욱은 상상계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체에게 상징계를 주는 대신에 실재계를 선물할 정도로 잔혹하다. 그렇다면 이 주체에게는 그 육체를 파괴시키는 일만이 남은 것일까. 즉 죽음으로 리비도만 남은 육체를 끝내는 것만이 남은 것일까. 박찬욱은 그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라는 반복되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자살하려는 남자가 하고, 다른 한 번은 오대수 자신이 한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자살하려는 남자는 처음 영화가 시작하면서 등장하고, 중간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나는 그냥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어떤 영화에서 어떤 장면이 다시 등장한다면, 혹은 어떤 대사가 다시 반복된다면, 그건 그 장면이 중요하다는 뜻이고, 그 말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즉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박찬욱의 말이고, 여기서 방점은 아무래도 '짐승만도 못한'보다 '살 권리'에 찍혀있다. 이는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제시되는 말이 있다면 다음의 이 말이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이 말은 영화 속에서 성경 구약 '잠언' 6장 4절이라고 소개되며, 그것은 오대수가 이우진의 펜트하우스 엘리베이터 비밀번호를 찾는 주요단서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잠언' 6장 4절이 아니라, 6장 5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본래의 6장 4절의 내용이다(나는 물론 박찬욱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실수라고 보지만, 실수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이 호사가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또 공교롭게도 그다음 6장 6절부터는 개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이 영화의 개미에 대한 비유와 맞물린다는 점이 또 재미있다. 그 이야기는 있다가 하자). '잠언'의 6장 4절은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이다.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고,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라는 것, 이는 '죽어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며, 동시에 '살 권리'의 다른 말이다. 즉 스스로 구원하라는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벗어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오대수가 택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결국 정신분열이다. 비밀을 아는 몬스터와 비밀을 모르는 오대수로 나뉜다는 이 마지막은 정신분열의 일종의 비유이며, 그렇게 해서라도 목숨을 유지시키는 것이 낫다는 것이 박찬욱의 복수연작의 두 번째 단계이다(그러므로 사실 마지막 오대수가 몬스터인지 오대수인지를 묻는 것은 주체를 두 번 죽이는 외설적인 질문이다). 복수연작의 첫 단계(<복수는 나의 것>)에서 인물들은 모두 죽었으나, 그 두 번째 단계에서는 비록 정신분열을 스스로 선택했을지언정, 오대수는 살아남았다(즉 박찬욱의 복수 연작에서 가장 양상이 다른 것은 마지막에 결국 주인공들이 처하게 되는 위치이다. 물론 그것을 일종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해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박찬욱의 대답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망상을 부서뜨리지 않고 유지시키는 것이 때로는 삶을 유지시키는 기제가 되고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정신의학의 관점과도 통하는 것이다(그것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박찬욱의 후일의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정신병이 그렇게 나쁜 것이라고 볼 수만도 없다. 지젝에 따르면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상징적 질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것, 즉 정신병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정신병자란 바로 상징적 질서에 의해 속지않는 주체이다." - <삐딱하게 보기> p.162. 그리고 이는 법과 언어라는 상징적 질서의 길을 애초에 막아놓은 박찬욱의 선택이 그렇게 기만적이거나 가혹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도 된다. 상징적 질서들이 벌이는 속임수들은 그에게도 경계의 대상이었고. 그에게는 상징적인 질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전에 이야기한 동정이나 공감과 같은 것들이고 그것은 사실 상징적 질서와 별다른 관계가 없다. 금자씨는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덧.
약간 반농담삼아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 <올드보이>는 동시에 개미형 인간과 거미형 인간의 대결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설감옥에서 개미에 대한 환상을 보는 오대수, 그리고 지하철에서 커다란 개미의 환상을 보는 미도가 개미형이라면, 오랫동안 덫을 놓고(15년간이나 이우진은 기다렸다)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이우진은 거미형이다. 이는 또한 <복수는 나의 것>과 교묘하게 연결되는데,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개미형이 류(신하균)라면 거미형은 동진(송강호)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영미(배두나)가 류에게 "개미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으며, 동진이 딸의 환영, 혹은 실재를 만나게 되는 장면 직전에는 동진 집의 텔레비전에서 거미에 대한 다큐가 방영되고 있다. 물론 그가 전기충격기를 문의 손잡이에 연결시켜 놓고 류의 집에서 자면서 류를 기다리는 장면은 거미의 사냥방식이다. 그렇다면 개미형 인간들이 거미형 인간들과의 대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개미가 아니라 '개미'라는 집단이 되는 것이다. 떼지어 다니는 개미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사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개미는 소도 무너뜨린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아니 개미는 사실 자신이 하나의 몸뚱이에서 자라난 두 머리임을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가끔 타인이 되어보아야 한다.
 
여담을 하나 붙여두자면, 아주 예전에 어쩌다 이 영화이야기가 나왔고, 누군가가 올드보이에 나온 개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길래, 농담으로 오대수는 개미형 인간이고, 그것은 주식시장의 개미투자자들을 의미한다고 말해줬다. 영화에 보면 이우진이 아주 돈많은 사람으로 뭘 팔고 어쩌고 하는데, 이 영화는 한 마디로 거대한 기업투자자가 개미투자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리면서 잡아먹는 이야기라고 말이다(실제로 오대수가 영화내내 농락당하지 않는가). 그는 놀랍게도 내 말에 수긍하는 듯한 눈치였는데, 이 자리를 빌어 개드립에 죄송한 마음을 전할 뿐이다(하지만 술자리에서는 누구나 개드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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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5-10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투브 음악 하나 링크시키려다 날려먹고 다시 올림..ㅠㅠ

올리려던 음악은...OST에 있는 The Searchers
'올드보이'는 사실 영화보다 음악이 더 좋음..


넙치 2013-05-11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감독 영화들 다시 보기 중 이신가 봅니다.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셨네요..

맥거핀 2013-05-14 13:16   좋아요 0 | URL
사실 이미 다 다시보기는 했어요. 글로 쓰는 게 오래걸릴뿐이죠.
박찬욱 영화들은 다시 봐도 또 새롭게 보이는 지점들이 있어서 참 좋았어요.

Mephistopheles 2013-05-1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마지막 "개드립"에 빵 터져버렸습니다....ㅋㅋㅋ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이 복수 시리즈를 4부나 5부까지 만들어 사회의 제도적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등장시켜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는데, 영리한 분이다 보니 그 부분만큼은 살짝 비켜나가는 것 같더군요.)

맥거핀 2013-05-14 13:18   좋아요 0 | URL
아..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박찬욱 감독이 만드는 지배자의 복수란 어떨지 궁금하기는 하네요. 올드보이는 다시 봤더니 예전에 느낀 것보다 훨씬 영화가 잔혹하더군요. 물리적인 잔혹함보다는 정신적으로 몰아붙이는 게 이정도였나 싶은 영화였습니다.

Shining 2013-05-1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개드립... 맥거핀님은 술김에 그런 생각이 나오나요? 아님 혹시 미리 준비해둔...-_-
이 기세라면 <친절한 금자씨>에 대해서도 글을 쓰실 것 같군요. 좋아요 좋아-_-*

덧) (피터 사스가드와 매기 질렌할이 혼인관계란 것을 알았을 때 무지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언에듀케이션>에서의 모습을 떠올리고 개츠비 역으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마이클 패스빈더(패스밴더,가 맞나요?), 피터 사스가드 둘 다 이미 캐리 멀리건과 연기한 적이 있군요. <셰임>과 <언에듀케이션>.

민머리라... 브루스 윌리스, 섹시하지 않나요?ㅎㅎㅎ

동생이 <아이언맨 3>를 보고 최고의 오락영화 블록버스터 히어로물 어찌고 하길래 뭬야? <다크나이트>를 이길 순 없어, 라면서 싸울 뻔 했습니다... <아이언맨3> 안 봤지만 제깟게(ㅋㅋ) <다크나이트>를 이길 순 없다, 고 저는 믿습니다...

맥거핀 2013-05-1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일 1개드립을 실천중입니다. 네..아마도 다음번의 글은 <친절한 금자씨>가 될 것 같군요. 그 전에 좋은 영화를 보게 되면 다른 것을 쓰겠지만..

민머리..하기는 민머리와 뭐 정력의 관계 같을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죠.ㅎ 사실 브루스 윌리스는 별로 섹시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요. 저는 <언에듀케이션>이나 <셰임> 두 개 다 본 적이 없어요. 피터 사스가드와 매기 질렌할이 부부라는 것도 Shining님에 의해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아이언맨이 다크나이트에 비견될 정돈가요. 뭐 둘이 진짜로 싸우면 아이언맨이 배트맨을 이길 것 같기는 하지만, 저는 오락적 완성도로 봤을때도 다크나이트에 한 표를 던집니다. Shining님이 맞아요.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3-05-22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샤이닝님 답글이 독자적 댓글로 버려져있어요(대단한 발견!).
그런데 강혜정은 왜 이 영화 이후로는 더 나아가는 배우가 되지 못했을까요.
미녀는 괴로워 이후 에이급 스타가 된 김아중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김아중보다는 강혜정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

오랜만에 와서 댓글 참 쓸데없네요, 맥거핀님. 미..미..미안..

맥거핀 2013-05-23 12:06   좋아요 0 | URL
아..맞아요. 댓글 달고 며칠 뒤에 발견했는데, 귀찮아서 그냥 놔뒀어요.ㅋㅋ 강혜정은 좀 아쉽지요, 괴물 같은 배우가 나온 줄로 알았는데, 여러가지 논쟁들(?)에 휘말려 배우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저도 사실 아중씨는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아이리시스님도 살아있군요! 생존 신고를 좀 하세요.ㅋ

2013-05-23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3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 (2disc)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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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용이 자세히 들어 있습니다.)



2002년 3월 개봉한 박찬욱의 네 번째 장편 <복수는 나의 것>은 이른바 '복수 연작'의 서두이며, 박찬욱 특유의 세계를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영화 그 자체로 보면, 이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의 중반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둘로 나뉘어지는 듯한 구성을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아이러니한 사건의 중첩이다. 일은 계속 예상치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한 가지 사건은 다른 한 가지의 사건을 불러오며, 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양상을 띤다. 그리고 그 결과 영화 중간의 한 가지 사건, 즉 아이의 죽음이 발생한다. 그리고 후반부는 아이의 죽음이 불러오는 죽음의 연쇄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전반부에 등장했던 거의 모든 인물이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이 <복수는 나의 것>의 플롯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먼저 전반부의 사건을 짚어보자. 사실 돌이켜보면 아이의 죽음, 그러니까 중소기업체 사장 동진(송강호)의 어린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 이 사건은 매우 발생할 확률이 낮았다. 아니 어떻게보면 낮다고 말하기보다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싶을 정도다. 아이의 죽음은 다음의 사건들이 중첩되어 발생했다. 1. 신장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아픈 누나를 둔 류(신하균)가 장기밀매업자들에게 사기당해 가지고 있던 돈 전부와 자신의 신장을 털린다. 2. 그런데 그 때 누나가 이식을 받을 수 있는 기증자가 나타난다. 3. 류는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영미(배두나)와 함께 유괴를 계획한다. 4. 원래 유괴하려던 아이는 다른 아이였지만, 자신들이 노출될까 두려웠던 류와 영미는 유괴의 대상을 그 아이의 친구, 즉 동진의 딸로 바꾼다. 5. 이때 자신 때문에 유괴를 저질렀음을 누나가 우연히 알게 된다. 6. 누나가 죄책감에 자살한다. 7. 누나를 어릴 때 같이 놀던 곳에 묻으려한다. 8. 그 누나를 묻으러가면서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어 데리고 간다. 9. 아이는 류가 누나를 묻을 동안 차에서 자고 있었지만 목에 건 목걸이를 뺏으려던 동네 지체장애인에 의해 깨어난다. 10. 류를 찾으러 차 밖으러 나온 아이는 실수로 강물에 빠진다. 11. 구해달라고 소리치지만 류는 청각장애인이라 듣지 못한다. 12. 뒤늦게 아이를 발견한 류는 아이를 구하려했지만, 물이 자신의 키를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뛰어들 엄두를 못낸다. 그러나 이는 류의 착각이었다(어릴 때 이후 그곳에 가보지 못한 류는 물의 깊이보다 훨씬 자신의 키가 자랐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1. 류가 사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2. 기증자가 그 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3. 유괴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더라면 4. 원래의 아이가 유괴되었더라면 5. 누나가 그 사실을 몰랐더라면 6. 누나가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7. 누나를 다른 곳에 묻으려했다면 8.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9. 아이가 차에서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10. 아이가 강물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11. 류가 청각장애인이 아니었더라면 12. 그리고 류가 자신의 착각을 빨리 알았차렸더라면, 적어도 동진의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당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즉 이 '아이의 죽음'이라는 무서운 사건은 무려 12개의 우연이, 혹은 12개의 운명이, 아니면 12개의 오해, 오인, 혹은 잘못된 선택이 중첩하지 않았더라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아니 박찬욱의 잔인한 장난으로 사건은 발생했고, 동진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 즉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뚝뚝 물을 흘리는 죽은 아이의 환영 혹은 실재(아이가 나타난 뒷날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바닥에 흥건한 물을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환영이 실재였다는 보장은 없다)나 아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게 된다. 물론 그로 인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만나는 것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류와 영미는 자신을 추적하여 찾아온 전기고문기를 손에 든 동진을 보고, 장기밀매업자는 자신을 찾아온 가위를 든 류를 보고, 다시 동진은 칼과 성명서를 손에 쥔 4명의 사내들, 즉 영미의 복수를 하러 온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을 본다.

즉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 돌고도는 복수의 양상, 혹은 복수의 연쇄를 본다. 동진은 류에게 복수하고, 류는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고, 영미는 다시 동진에게 복수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복수는 이것이 전부인 것일까? 어쩌면 동진이 류에게가 아니라, 류가 동진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는 동진의 딸의 죽음을 류의 복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류가 동진의 딸을 죽게 만든 것에 큰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복수의 실행 같은 것이 아니라 실수였다.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으며(이 논리는 나중에 <친절한 금자씨>에 그대로 반복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류와 영미는 돈을 받으면 아이를 얌전히 돌려줄 생각이었다(혹은 받지 못했어도 돌려주었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그 12개의 오해 또는 실수를 재론할 이유는 없으리라. 문제는 그 이후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 나타났을 때이다. 이들은 스토리 상으로는 영미의 복수를 위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불현듯 나타난 시점은 참으로 수상쩍다. 이들은 동진이 류에 대한 복수를 완결한 후, 아이의 보호자임을 부인한 후에 나타난다. 여기서의 아이란 동진의 딸이 아니라, 동진이 병원에 데리고 간, 자신이 해고하여 죽은 노동자의 아이다.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내팽개친 후에야 어디에선가 유예되었던 그들이 나타난다. 즉 스토리로 보았을 때 이들이 여기에 동진을 죽이러 나타나는 것은 뜬금없지만, 플롯으로 보았을 때, 즉 아이의 보호자를 거부한 후에 나타나는 이들은 유예되었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영화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뒤로 물러나 있다가, 동진이 노동자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부인했을 때 비로소 어디에선가 불려나와 이 자리에 섰다. 아이의 보호자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동진에게 걸려왔던 전화는 동진에게 주어진 마지막 살 수 있는 기회였고, 그가 노동자의 아이를 거부했을 때, 비로소 그들에게 의해 사형이 언도되었다. 물론 그 기회는 처음이 아니었다. 무려 그 전에 3번의 기회가 있었다. 동진은 영화에서 3번의 배를 칼로 가르는 장면을 본다. 첫 번째에는 자신의 회사에서 해고된 노동자(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배를 칼로 자해하는 장면을 보고, 두 번째에는 자신의 딸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고, 세 번째에는 류 누나의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본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에는 놀라지만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았고, 두 번째에는 차마 쳐다보지 못했으며, 세 번째에는 마치 물건을 보듯 무심하게 보았다. 마지막 그의 배에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성명서가 꽂히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까. 그의 무심한 시선, 타인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는 이 무심한 시선, 자신의 딸의 배를 가르는 이 장면을 차마 보지 못했던 그 시선과 너무나도 달랐던 그의 무심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미가 중간에 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 머리를 두 개 가졌으니까 그만큼 머리가 아팠고, 그래서 하나의 머리를 잘라버렸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왼쪽과 오른쪽 중에 어느 쪽을 잘랐느냐고 물었던 류의 멍청한 질문으로 이 장면은 끝났지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지 않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안다. 아마 그 사람은 죽었을 것이고, 이제 그는 다시는 머리가 아플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 동진과 류를 연상시킨다. 동진과 류는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다. 물론 정치적으로 이야기해서 하나의 사회에 공존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그들이 공존하는 것이 아닌 하나를 자르는 것을 선택했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류와 동진은 처음에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방음이 되지 않아 온갖 소음이 들려오는 류의 집과 전자동으로 커튼이 쳐지는 동진의 집의 대비 같은 것 말이다(류의 집에 온 아이는 묻는다. "아빠 후배(류는 자신을 아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가 왜 이렇게 못 살아요?"). 그런 그들이 어느 틈에 점점 비슷해지다가, 중후반부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을 추적하고, 동진이 류를 뒤쫓을 때 보면 거의 같아진다(이 때 박찬욱은 <스토커>에서도 여실히 보여준 그의 장기인 교차편집을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들 둘은 모두 동일하게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진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없는지에 대해 묻는 형사에게 나름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고, 류에게는 그의 목숨을 거둬가기 전에 네(류)가 착한지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 사회의 나름 착한 사람들이고, 착한 두 머리이다. 그러나 착한 그들은 왜 모두 죽음을 맞아야만 했을까. 착한 그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복수는 나의 것>의 영어 제목은 한글제목과 조금 뉘앙스가 다른데, 'Sympathy for Mr.Vengeance'이다. 어쩌면 이것에 힌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 sympathy(동정)라는 것. sympathy의 어원은 'syn(같이 혹은 함께)+pathy(고통, 치료법)'이다. 즉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동정(同情)'이라는 한자어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마음 혹은 뜻, 생각 같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 함께 느끼는 것이다.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이 되어 본다는 것이다. 즉 타인의 위치에 진정으로 섰을 때만이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고, 그것은 그 타인이 나와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님을, 혹은 한 몸뚱아리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 중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장난을 시작한 김에 조금 이어가보면) '복수는 나의 것'의 '복수'란 어쩌면 復讐가 아니라 複數, 즉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가 아닌 두 개란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즉 '복수는 나의 것'이란 두 개의 머리가 나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혹은 腹水이거나 말이다. 타인의 배에 들어찬 물을 보는 것. 그 물을 보면서 그의 고통을 짐작하는 것, 동진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단지 사물로만 보았고, 그래서 자신의 배에 꽂힌 성명서를 내려다보려고 낑낑대는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이 sympathy 혹은 동정은 동진에게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류나 영미에게도 그렇게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푸른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블루워커 류(이 영화에서의 류의 노동의 장면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고, 전반부의 분위기를 크게 좌우한다. 거의 지옥과 같은 소음이 울려퍼지는 공장의 풍경과 밤샘근무를 하고 녹초가 되어 공장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남자들의 눈을 부시게 하는 햇살, 그리고 거의 얼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거리를 걷는 류의 모습)와 붉은색의 전단지를 나눠주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영미(그러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라는 이 단체의 이름과는 달리 이들의 구호는 조금 수상쩍은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영미가 주로 외치는 두 개의 구호인 '미군축출'과 '재벌해체'는 학생운동의 두 가지 세력의 각각 가장 대표적인 구호이다. NL의 미군축출과 PD의 재벌해체)가 결국 선택한 것이 단지 유괴라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유괴라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에 내재한 어떤 속성과 같은 것이다.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나쁜 유괴와 착한 유괴가 있으며, 나쁜 유괴는 아이를 죽이는 것이며, 좋은 유괴는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를 들어 아이와 돈은 동일하게 교환될 가치가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세계이고, 그 교환의 표면적인 원칙은 '등가'라고 이야기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밤샘근무는 보수(돈)와 교환되고, 이것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교환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논리이다. 그러나 그 가치의 비중이 같은가의 여부는 둘째치고, 그 가치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즉 애초에 그것들이 교환할 수 있는 것들일까. 앞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또 있겠지만, 박찬욱의 복수 연작과 후속작들은 등가교환을 매번 시도한다. <올드보이>나 <박쥐> 등에서 나오는 등가교환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 <복수는 나의 것>에서만 예를 찾아보자면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려 찾아간 류는 자신의 신장을 탈취해간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똑같이 신장을 탈취하고, 자신의 딸이 익사했음을 아는 동진은 류를 동일하게 익사시키려 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세계이고(이 <복수는 나의 것>이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공권력을 해체한 후에 후반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인데, 이는 <올드보이>에서 사설감옥이 등장하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사설재판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사건의 해결을 동진에게 맡겨버리는데, 따라서 스토리로 보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거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어간다. 즉 서사적으로 구멍이 생긴다), 거의 정신병적일 정도의 등가교환의 시도이다(예를 들어 일부 정신병을 가진 환자들의 경우 동일한 물건, 혹은 신체의 훼손은 반드시 동일하게 보상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경우 실제 등가교환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교환되는 것의 가치가 달라서가 아니라, 교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교환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환은 동시에 잉여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 잉여들이 어떠한 것을 낳는지는 이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가. 동진이나 류는 복수나 유괴로 동일한 교환을 시도했지만, 복수는 잉여를 낳았고, 잉여물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돌고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서 자신을 해했다.) 밤샘근무라는 노동과 보수는 혹 교환이 가능할 수가 있더라도(물론 이도 논의의 여지가 있다), 아이의 생명, 혹은 아이의 존재와 돈은 교환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미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그리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최민식)도 그게 가능하다고 금자(이영애)를 속였다. 백선생은 아이들을 죽인 이유가 요트를 사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그것은 그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 혹은 당대의 학생운동에 대한 허상 같은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샌델의 일부 논의처럼 현재의 자본주의는 점점 무엇이든 교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교환,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 그 환상은 점점 커지고 거의 정신병적이 된다. 그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은 박찬욱의 다음다음다음다음 영화 <박쥐>에서 부서질 것이고,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에서 먼저 몇 개의 죽음들, 혹은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들을 만나야만 한다.



덧.
그리고 박찬욱의 계단이나, 거미와 개미 같은 것도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이 영화가 개봉한 10년 전 그 때, 나는 군복무 중이었고, 누나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로 기억한다. 그 때 누나는 "너는 이런 영화가 좋니?"하고 물었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 질문만 또렷하게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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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데 이미 본 영화라는 이유로 다시보기가 안되고 있는 넘버원의 영화죠. 저는 데이트하면서 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대다수 영화가 그렇고, 동생이랑은 극장 안가고 국밥집이나 갈비집으로만. 누나랑 보셨다기에!

제동생은 영화를 정말 많이 보는데 그다지 계보는 없는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씩 얘기하는거보면 또 계보가 있는것 같고. 걔는 좋으면 그냥 좋은거더라고요. 많이 보면 확실히 보는 눈은 높아지는것 같아요. 저는 영화를 통으로 기억하는 편인데, 그래서 뭐가 좋았니라고 물으면 컷이나 씬을 얘기못하고, 걔는 잘하더라고요. 맥거핀님처럼.

저는 영화에서 늘 부조리를 찾아서 그걸 현실에 대비시키려는 버릇이 있고, 그 부조리를 깨부수려는 노력을 하는 직업을 갖고싶었던 것 같아요. 예를들면, 늘 말했던 형사,판사,국제공무원같은. 자유를 엄청 갈구하면서 내 자유 대신 남의 자유를 찾아주고싶은 이 부조리한 마음가짐은 또 뭐란 말입니까!

1등댓글안쓰려고 했건만 :)

맥거핀 2013-04-30 14:25   좋아요 0 | URL
좋은 영화는 나무를 보건, 숲을 보건 좋은 법이죠. 영화라는 건 사실 대부분 영화 그 내용 자체라기보다는 그 이후에 기억남는 건 다른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날 영화를 보고난 후 주고받은 얘기라던가, 보고나와서 먹었던 음식의 맛이라던가, 짜증나게 했던 뒷자리 사람이라던가..뭐 그런거요. 그런 것과 나중에 영화의 내용과 짬뽕되어 그 총체로 기억하는 거죠. 집에서 보는 영화가 좋은 것도 있지만, 그래서 그런지 집에서 무엇을 보고나면 기억에 잘 안남는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최근 집에서 DVD로 다시 봤지만요.)

근데 이 영화는 데이트용 영화로는 아주 최악에 가까운데 말이죠..좀 다른 얘긴데 예전에 설날인가, 추석 때 온가족이 모여 앉아있는데 특선영화라고 <올드보이>를 하더군요. 저는 편성담당자 저 인간이 제 정신이 아니구나..싶었지만, 부모님이 유명한 영화라고 기대감을 가지고 보시기에 잠자코 있었죠. 역시나 한 중반부 넘어갈 때쯤에 어른들은 이거 뭐 이상한 영화네..그러면서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셨고, 저만 남아서 끝까지 봤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입니다.ㅋ

부조리에 부조리를 더하면 조리가 되죠. 아이리시스님 우리 1등 댓글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잘 살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4-29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리뷰 멋진데요. 전혀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긁어주셨습니다.
전 그동안 맥거핀 님을 여성ㅇ라고 생각하다가 누나 라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영화본지 오래도어서 가물가물하네요...ㅎㅎ. ㅎ여튼 박찬욱의 최고걸작은 늘 복수는 나의것이란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맥거핀 2013-04-30 14:31   좋아요 0 | URL
곰곰생각하는발님의 글들이야말로 저도 읽으면서 가끔 오호..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는데, 예전에 느낀 것보다 훨씬 영화가 좋더군요.

아..근데요. 누나라고 부른다고 해서 남성이라는 법은 없지요(옛날에 여성들이 형이라고 부르던 시대도 있었잖아요. 남성들이 언니라고 부르고..). 물론 여자도 군복무를 할 수 있고요. ㅋ

Mephistopheles 2013-04-3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직접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아도 충분히 잔인한 상황을 묘사해주는 장면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송강호의 전기고문에 소변배출하는 배두나의 모습이나 마지막 송강호가 신하균을 죽인 후 강가(?)에 널브러진 신하균의 옷과 피범벅이 된 그리 크지않은 보따리 묶음(토막)등등은 뭐랄까 직접적인 고어의 느낌보다 강렬했어요.

맥거핀 2013-04-30 14:34   좋아요 0 | URL
예전에 <올드보이>에서 그런 대사가 나왔죠. 인간은 상상함으로써 비겁해진다고, 상상하지 않으면 졸라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죠. 박찬욱 감독이 뭐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꺼리는 류의 감독은 아닙니다만, 말씀하신대로 이 영화들에서 상상이나 뉘앙스로 조금 더 잔인하게 느끼게 하는 면이 있죠.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다보면 아무래도 영화를 많이 본 티가 나고,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의 효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넙치 2013-04-30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본 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기억에 또렷이 남은 건 그 영화 개봉 당시 분위기, 그리고 영화를 봤던 때가 제 인생의 "화양연화"였다는 것 밖에 없네요.
맥거핀님 글 읽고 난 후 제가 썼던 리뷰를 봐도 생경하기만..;;;

맥거핀 2013-04-30 14:36   좋아요 0 | URL
앞으로 어떤 화양연화가 또 올지 모르죠.^^ 예전에 쓰셨다는 리뷰가 어떤건지 궁금하네요. 저도 예전에 어렴풋이 남아있던 기억과 이번에 새로본 영화의 느낌이 상당히 달랐어요. 아무래도 영화라는 건 보는 이가 나머지 퍼즐조각을 맞추는 모양입니다.

Shining 2013-04-3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읽었는데 댓글은 이제 남겨요. 저는 가끔 실은 종종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저랑 맥거핀님은 정말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인데 뭐라고 할까 이를테면 사고의 회로도가 다르다는 느낌? 뭔가를 바라보는 투영도나 설계도, 농도, 질감 그런 것들이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이요. 그런데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맥거핀님의 글을 읽는게 즐겁다가 좌절하고 좌절하다 자극받고. 네, 그래서, 좋다구요 :)

저도 가끔 저 영화 짱이야, 라면서 혼자 TV 차지하고 같이 영화 보다가 가족들이 대개 짜증내거나 벌컥 화를 내기도 합니다(이건 슬픈 이야기).

맥거핀 2013-05-02 01:44   좋아요 0 | URL
아..그래서 말입니다. 아마 예전에도 그런 얘기한 것 같은데, 저도 Shining님의 어떤 글을 보면서 이건 못써, 이건 절대 나는 이렇게는 쓸 수 없어 하는 글들이 있어요. 그건 좋은 거겠죠. 네..아마도 좋은 걸 겁니다.

저도 가족들과는 거의 영화를 같이 안보게 되는 것 같아요. TV영화들도 거의 같이 본 적이 없는 것 같고...그리고 보다가 민망해질 것 같은 영화는 알아서 도망가구요. 뭐 특히 박찬욱 감독 영화라면 가족이나 애인과 같이 관람은 안하는 것이...

cyrus 2013-04-30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글은 영화 장면을 세밀하게 기억하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수월하게 잘 풀어내시는거 같아요. 저도 가끔 영화 한 편 보고나서 나름 영화에 대한 생각을 글로 끄적거리고 싶은데 책 읽고 글 쓰는 것과는 좀 느낌이 달랐어요. 책은 기억 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그 페이지를 찾아서 볼 수 있는데 영화는 그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영화 서평은 영화 한 편을 한 번 봤다고해서 쓰는게 아니라 여러 편 보다가 그게 여러 가지 생각이 모아서 한 편의 글로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맥거핀님은 영화 서평을 이렇게 쓰시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오랜만에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드네요 ^^

맥거핀 2013-05-02 01: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른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 혹은 다른 일을 하면서 든 생각을 영화글에다가 그냥 씁니다. 그러고 마치 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처럼 구라를..^^

근데 DVD로 영화를 보다보니까 조금 달라지는 면이 있더군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DVD 같은 경우에는 보다가 끊고 자꾸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싶어져요. 그 충동을 참는 게 힘듭니다만, 생각해보니 왜 참아야하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우끼 2016-01-22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제 `복수는 나의 것` 영화를 보고, 이 리뷰를 보니, 정말 멋지네요.. 맥거핀님 글 잘쓰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읽고 새삼 감탄했습니다. 이 리뷰를 쓰시는 데 쓰인 시간과 노고를 가늠해보니.. 이 글이 더 값지게 보입니다. 복수라는 단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신 부분이라든가, 두 머리에 대한 우화와 연결지은 류와 동진의 관계, 자본주의의 위선적인 등가교환 신화에 대한 지적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자연스러운 이야기 속에 감독의 작위적인 메세지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군요.. 인간의 괴물을 여실하게 드러내면서도 감독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괴물을 비판하는 방법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괴물로 살고 싶지 않은데, 겨우 허덕이며 위선을 베푸는 게 전부인 요즘, 어떤 삶을 살아야 괴물을 마주하면서도, 괴물로 남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하던 지점에서, 이 글이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6-01-25 16: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우끼님. 댓글로 얘기나누는 건 처음이죠? 제 글 읽어주시는 거 알고 있었는데, 제가 먼저 인사드려야하는데 늦었습니다. 일단 칭찬 먼저 감사드리구요.

박찬욱 감독은 제가 참 좋아하는 감독이라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메시지를 다층적으로 풍부하게 담아내기도 하고, 영화 테크닉적인 면에서도 완성도가 높죠. 아무래도 영화가 좋아야(물론 책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그만큼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할 말이 더 많아지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제 글은 물론 그 중에 일부만 다룬 것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 분명히 다층적으로 볼만한 내용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저도 마찬가지,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 느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온갖 부조리와 폭력이 만연하는 이 사회에서 아마도 대부분 자신들만의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한 작은 투쟁을 해나가고 있지 않을까요. 매일 또 지면서 말이죠. 예전에 누군가 한 말대로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싸움이 있는 법이니...
 
자전거 탄 소년 - The Kid with A Bike
영화
평점 :
현재상영


 

 

(영화의 전반적인 줄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다르덴 형제의 인물들은 늘 그랬다. <로제타>의 로제타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자신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었던 사람을 고발했다. <약속>의 이고르는 아프리카 불법이민자를 죽인 일에 동참하였던 것도 모자라, 이제 그의 아내를 팔아넘기는 일에도 연루될 참이다. <아들>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소년범을 만나 그를 죽이게 될지도 모르는 충동에 휩싸인다. <로나의 침묵>의 로나는 자신과 위장결혼한 마약중독자를 죽이는 음모에 동참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르덴 형제의 새 영화 <자전거를 탄 소년>에서는 소년 시릴(토마 도레)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의 꾐에 빠져 야구방망이를 휘두르고 돈을 빼앗는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거의 과오를 저지른다. 과오를 저지른다는 것은, 그들이 선택의 순간을 마주한다는 의미도 된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큰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였고, 때로는 길을 잃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잘못된 길에 들어섰음을 깨닫고 길을 거슬러 올라 다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늘 쉽지 않았다. 그들은 때로 운놓게 아주 좁은 돌아오는 길을 발견하기도 하였고, 애타게 돌아올 것을 소망했으나, 너무 많이 나가 도저히 돌아올 길을 찾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여러 갈림길 사이에서 주인공들을 내버려둔 채, 아니 그것을 보는 우리들을 내버려둔 채 영화들은 극장 밖으로 우리를 밀어냈다.

 

이 영화 <자전거 탄 소년>에 대한 이야기에서 다르덴 형제의 새로운 변화를 말하는 목소리는 많았다. 형식상으로 보았을 때 롱숏은 확실히 줄어들었고, 밝은 이미지의 컷들도 꽤 빈번하게 등장하고, 음악이 본격적으로 삽입되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확실한 변화는, 위에서 말한 전작들과 비교한 결말의 변화, 즉 다르덴 형제가 우리를 선택의 갈림길에 내버려둔 채로 영화를 끝내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를 놀래킨 것은 단지 그 결말의 변화가 아니다. 놀라게 한 것은 전작들보다 결말은 명확해졌지만, 다르덴 형제의 문제의식은 이 안정적인 결말 속에서도 그대로 빛을 발한다는 사실이다. 자전거를 가지고 가는 도둑을 끝까지 물고늘어지며 놓지 않았던, 그래서 '핏불'로 불렸던 소년이 병원에 같이 가자는 남자에게 괜찮다며 태연히 떠나는 이 마지막은 이상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 감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해주고 있는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영화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의 새로운 변화를 내비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의 익숙한 인장들도 드러내보이고 있다. 영화의 첫장면은 왠지 익숙하다. 소년이 달리고, 카메라가 흔들거리며 그의 뒤를 쫓아간다. 흔들리는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주인공의 어떤 불안한 심리를 그것을 보는 우리들에게 그대로 전이시키지만, 이 효과는 그들의 정면샷을 결코 잘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배가된다. 정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을 몰래 관찰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몰래 관찰하는 자, 즉 우리들은 당연히 불안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장면이 다르덴의 장면이기도 한 것은 이 장면은 아무런 설명이 없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년이 왜 뛰고 있는지,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려고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소년이 자전거를 찾으려, 그리고 보육원에서 아버지를 찾으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의 어떠한 이야기들이 생략된 채 관객을 영화의 한가운데에 던져두면서 펼쳐지곤 했다. 그리고 곧 이야기의 또다른 주인공 사만다(세실 드 프랑스)가 등장한다.

 

이 사만다야 말로, 다르덴 형제의 생략의 드러나는 인물이다. 아무런 전사(前事) 없이 불쑥 등장하는 사만다는 시릴에게 호의를 베풀고, 그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한다. 시릴과의 관계 외에 어떤 그럴듯한 이야기가 붙지 않는 사만다는 그럼으로써 영화상으로 볼 때 미스테리해 보이기까지 한다. 영화에서 그럴듯한 이야기가 없으면서도 비중있게 나오는 인물은 두 가지 중의 하나다. 아주 악인이거나, 아니면 성인(聖人)이다. 오직 보통의 인간만이, 그 인간의 복잡한 정신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이야기가 붙는다. 그러므로 이 <자전거 탄 소년>에서의 새로운 결말에서의 변화는 이 사만다의 등장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에서 인물들은 대체로 어떠한 조력자도 없이 혼자서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시릴에게는 사만다라는 강력한 조력자가 있다. (물론 나는 이 부분에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사만다와 같은 인물들은 어쩌면 '보통의 인간'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만다를 일종의 성녀로 규정하는 나의 말은 비참한 사회에 길들여져 버린, 회로가 망가진 비참한 말일지도 모른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해 보자. 가장 상층의 인간이 사만다라면, 가장 하층의 인간들은 시릴의 아버지(제레미 르니에) 또는 시릴을 꾀는 불량청소년이다. (물론 이것은 도식적인 나눔이고, 시릴의 아버지의 경우와 불량청소년은 또한 같지 않다. 이 영화에서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은 시릴이라기 보다는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하는 그의 아버지이다. 이 아버지는 왜 이런 선택을 하는가,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다르덴 형제가 늘 묻고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하층과 상층 중간 어딘가에 우리들, 예를 들어 영화의 마지막에서 쓰러진 소년을 놓고 중간의 애매한 선택을 하는 피해자 아버지 같은 인간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각각의 지점, 즉 사만다의 미용실, 시릴 아버지의 식당, 풀숲가의 트레일러에 고정되어 있고, 자전거를 탄 소년은 이 고정점들을 자전거로 이동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약속>과 마찬가지로 소년이 달리는 순간은 그가 변화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 된다(착한 고정점에서 나쁜 고정점으로의 이동, 혹은 그 반대의 이동). 즉 자전거로 달리는 소년은 물리적으로는 하나의 고정점에서 하나의 고정점으로 이동하는 변화 과정을 겪고 있지만, 동시에 그의 내면에서는 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시릴의 내면의 가장 극적인 변화가 영화의 후반부 그가 두 번의 버림(불량청소년과 아버지에게)을 연달아 받고, 사만다의 미용실로 자전거를 탄 채 달릴 때 일어나는 것은 상징적이다. 이 컷은 짧게 생략되어 있지만, 가장 큰 변화를 보여주기에 가장 심리적으로는 길고 큰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이 '자전거 탄 소년'임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생략은 여기에서만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시 사만다에게로 돌아온 시릴과 마지막 쓰러졌다 일어나서 태연히 걸어나가는 시릴과는 큰 차이가 있다. 마지막 시릴의 모습은 마치 사만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별다른 저항없이 돌아서는 시릴의 대응 방식은 그 전의 사만다의 대응방식들과 비슷하다. 즉 이 마지막에서 시릴은 거의 사만다化되어 있다. 두 번의 버림 후 사만다에게로 돌아왔던 시릴과 미 마지막 시릴과의 차이는 무엇으로 가능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돌아옴 후 그 마지막 장면들이 있기까지 다르덴 형제가 생략시킨 시간들, 즉 사만다와 함께 했던 좋았던 시간들로 가능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짧은 시간에도 엄청나게 변하는 법이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다르덴 형제의 영화의 미학 중 어쩌면 핵심적인 것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생략의 지점에서 존재하는 리얼리즘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소위 다르덴 형제의 고유한 형식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이 있다. 흔들리는 카메라, 정면샷의 배제, 롱숏의 활용 등 흔히 말하는 '날것의 카메라'라 하는 것들. 그러나 이것으로 다르덴 형제의 특유의 리얼리즘이 만들어진다고 오인한 어떤 다르덴류 영화들은 이 형식만을 그대로 따와 인물들 뒤에 카메라를 위치시키고, 인물들이 뛸 때, 그들을 따라서 카메라를 들고 뛰면서 모든 것을 천천히 모두 보여주는 것으로 리얼리즘이 완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현실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말 그대로 리얼리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화면을 보는 인간들은 아무 것도 상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것을 보여주는 화면을 그대로 볼 뿐이다. 리얼리즘은 그의 눈만 스치고 지나갈 뿐, 그들의 머리 속은 눈앞에서 보여준 (가짜로 만들어진) 화면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극단의 '리얼리즘'이라고 해서 그것이 현실인가? 물론 아니다. 모든 영화는 현실을 모사한- 설혹 다큐멘터리일지라도 -가짜일 뿐이다. 오직 현실과 가깝거나 멀거나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리얼리즘의 핵심은 어쩌면, 리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자에게 리얼을 생각(상상)하여 채워넣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까. 다르덴 형제의 이야기에서 그 이야기의 빈공간에 존재하는 상상을 가능케 하는 것은 생략의 앞과 뒤에 존재하는 윤리의 질문이 담긴 장면들이다. 하나의 윤리에서 다음의 윤리로 진화한 인간을 보여주는 것은 그 생략된 장면들에 가득 담긴 것들을 그 순간 우리의 머리 속으로 슬그머니 밀어넣는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는 아마도 사만다의 무한한 사랑이다.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물론 그것의 정답은 없다. 다만, 다르덴 형제의 다음의 말들에서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씨네21>837호 다르덴 형제 인터뷰에서: "우리에게 이 마지막 장면은 신적인 것의 개입과는 무관하다. 다만 우린 처음부터, 아버지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 끔찍한 사실을 시릴이 받아들이기를 바랐고 또한 그만큼이나 그가 사만다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바랐으며 동시에 우리 모두가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바랐을 뿐이다") 사랑은 신이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랑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 마지막에서 다시 그들의 처음을 돌이켜 보게 된다. 영화의 시작, 보육원 관계자들을 피해 병원에서 시릴은 우연히 사만다의 품으로 뛰어든다. 사만다와 시릴의 첫만남. 이 넓은 황량한 세상에서 시릴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소중하고도 따뜻하고 유일한 품. 이 기막힌 우연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는 그런 기막힌 우연들에 때로 다른 이름을 붙인다. 우리는 그 다른 이름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모든 사랑은 기적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기적은 오로지 인간들의 세계에서만 큰 의미가 있다. 우리 세계에서 기적이란 신의 세계에서는 그저 아이들 장난같은 시시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기적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의미가 있으며,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 그 기적 중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손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랑이다. 리얼리스트 다르덴 형제가 말할 수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최선의 긍정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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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5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별 다섯개일 줄 알았어요! . 그러므로 안 읽을 거예요! (주말에 보려고요.ㅎㅎ)

맥거핀 2012-01-26 00:13   좋아요 0 | URL
아니 언제 또 바람같이 댓글을 달고 가셨나요..다르덴 형제 영화는 별 5개 줘야지요..안주면 배신! 배반이야..!

꽃도둑 2012-01-2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의 전당에서 매년 여름 즈음에 영화비평 교실이 열려요.
별 일이 없다면 이번 해에 도전해볼까 해요,
접근법에 따라 달라지는 오묘한 영화의 세계로 빠져볼까 하는데
그러면 맥거핀님처럼 영화평을 쓸 수 있겠죠?,,아주 분석적이고 명석한!
가능하다면 특이하게도 쓰고 싶어요. 새로운 접근법을 개발해서리,..ㅎㅎ

잘 읽고 갑니다~

맥거핀 2012-01-27 00:44   좋아요 0 | URL
잘 배우시면 저처럼 쓰시면 안되죠~! 저는 야매라. 야매보단 정통의 방법을 배우셔용. 나중에 좋은 영화비평 많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정말 좋은 영화비평은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 영화의 가치를 전달해줄수 있는 비평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영화비평은 영화와 별개로 그 자체로서도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와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나 본 사람이나 어떻게든 그 영화를 다시 찾아서 보게끔 만드는 비평, 그런 글들을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갈 길이 매우 멉니다.

아이리시스 2012-01-2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이제 저는 <로나의 침묵>이랑 <약속> 봐야지!

고마워요, 맥거핀님. 그렇잖아도 뭘 하나 더 볼까 하다가 한 줄짜리 줄거리보니 두 개가 맘에 드네요ㅋㅋㅋ 맨날 훔쳐가는 거 맞죠, 저?

저는요, 결말이 미심쩍어요. 이렇게 끝나버리면 안되는 거잖아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잖아요. 뭔가 달라지면 좋겠다고 계속 바랐었나 봐요.

맥거핀 2012-01-27 00:47   좋아요 0 | URL
결말이 미심쩍나요. 저는 그 영화의 그 이후를 계속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년은 다시 돌아가서 사만다와 계속 살테니까 점점 달라지겠죠.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 사만다와 같은(아마도 그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그 이후를 생각하게 하는 뭔가 남겨진 잔향같은 것들이 있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이왕이면 <로나의 침묵>보다는 <약속>으로 시작하시는 것이 다르덴 형제를 느끼기에는 더 좋을 듯..아무래도 <로나의 침묵>은 다르덴 형제의 범작이라는 평판들이 있으니까요.

아이리시스 2012-01-27 02:09   좋아요 0 | URL
결말이 이해가 안된다거나 안좋다거나 그런 게 아니고(엄청 좋더라고요) 소년이 달라지는 걸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나 봐요. 잔향이 엄청나고 감독이 계속 고민했다는 것도 알겠고요. 영화는 기대보다 훨씬 좋았어요. 저 예전에 형제들 싫다고 했었잖아요. 근데 맥거핀님이 저 포스터 <약속> 맞죠? 계속 고수하신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알았어요, <약속> 먼저 볼게요^^

맥거핀 2012-01-29 00:38   좋아요 0 | URL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마음에 드셨다면, <약속>은 필히 봐야할 영화죠. 영화관에서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그 먹먹하던(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이보다 더 마땅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네요) 감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2012-01-2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우와 영화 잘 만들었다." 이랬는데, 맥거핀 님은 어떻게 잘 만들었는지 조목조목 설명해 놓으셨군요. 그리고 다르덴 영화의 특징도 잘 설명해 주셨고요.
리얼리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2-01-29 00:41   좋아요 0 | URL
뭐 그냥 제 나름의 이해(혹은 오해)를 쓴 것 뿐입니다만, 조금이라도 글이 영화의 감상을 더 풍성하게 해줄 수 있다면 좋겠네요. 주말에 영화보신다더니 빨리 보셨네요. 다르덴 영화는 사실 특유의 스타일이 있어서 영화를 보다보면 보고 싶지 않아도 스타일 같은 부분을 보게 되요. 근데 특유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강점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2012-01-29 13:04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특유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강점이면서 위험한 부분도 있는 것이네요. 근데 이건 조금 다른 얘기지만, 모든 사람들의 모든 창조물이 결국 다 한 가지 스타일을 가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는 평생 한 작품만 쓴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제가 예전에 페이퍼에 쓴 적 있는 건데, 진짜 "Tne man is the style."(문체는(스타일은) 사람이다.)이지요. 그런 게 정말 재밌어요. 그런 걸 관찰하는 것, 그런 사실 자체, 둘 다요.

맥거핀 2012-01-29 12:34   좋아요 0 | URL
그렇죠. '글'이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특유의 문체가 있어야죠. 뭐 꼭 소설같은 것만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알라딘 리뷰들에도 보면 각자 나름의 스타일들이 있는 글들이 있구요. 비평에도 각자의 스타일이 있고, 몇 문장을 읽어보면 아..이거 누가 썼구나 하고 알게 되죠. 근데, 그 문체와 스타일이라는 것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까..식상함을 동반하는 법이고, 어떻게 보면 발전을 못하고 있다는 얘기도 되니까, 그 스타일을 어느정도 유지하면서, 새로운 부분들을 담아낼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해지겠지요.

그런 면에서, 다르덴 형제의 이번 영화는 인상적이었어요. 그 전의 <로나의 침묵>이나 <더 차일드> 등이 너무 스타일에 매몰된 범작이라는 인상을 준 반면에 이번 영화는 몇 가지 새로운 요소의 도입으로 영화가 꽤 흥미로워졌습니다.

2012-01-29 13:0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누구나 타고난 유전자에서 나온 (듯한) 고유한 스타일은 있지만, 그것을 나름대로 새롭게 바꾸는 것. 그건 할 수 있겠고, 다들 하고 있겠고, 또 하려고 하겠군요. 그리고 다르덴 형제가 이번에 그렇게 했군요.
그래서 '재미'가 중요한가 봐요. '재미있다'는 것은 그런 게 있는 것, 창작자 입장에서도, 감상자 입장에서도. (예전에 저 알던 후배가 '내가 추구하는 美는 '재미'야~' 이랬던 생각이 나고...ㅎ)
좀 더 생각이 정리되었습니다.^^

맥거핀 2012-01-30 17:21   좋아요 0 | URL
섬님 말씀대로 일단 본인부터 계속 하던대로만 하면 재미가 없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도 좀 새로운 형태의 리뷰를 써봐야 하는데, 매번 그냥 그렇게만 쓰고 있으니 슬슬 재미가 없어져요. 좋은 글들을 봐야 좀 자극이 되는데, 요새 시간이 없어서 영 글들을 못 읽고 있어요.ㅠㅠ

네오 2012-01-30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르덴의 영화를 엄청나게 좋죠???? (긍정의 대답을 원합니다^^V) 저도 그의 열혈빠휴먼이지만 매번 칸에서 놓치지 않는 상복에 대해선 조금은 아쉬워요~ 그러니깐 출품만 하면 오토매틱으로 황금종려 혹은 감독은 수상하져 다른 감독들은 불만일꺼 같은데요 헤헤 물론 좋은 작품에게 줘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거의 심사위원들이 그의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명쾌하게 설명이 안되서요~ 저에게요~ 이글에서 나타내듯이 인간이 펼칠수 있는 그 무언인가에 대한 대답이겠지요^^

맥거핀 2012-01-30 17:24   좋아요 0 | URL
그래도 그런게 있지 않습니까? 그 먼 벨기에에서 온 어떤 나이든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고, 전세계의 사람들(우리를 포함해서)이 삶의 무언가를 생각하게 된다는 게 참 경이롭지 않습니까?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아마도 그 심사위원들도 보셨을 것 같고, 전세계적으로 다르덴 감독의 영화가 칭송받는 것을 보면 결국 인간들의 시각이란 살아온 환경이 달라도 참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한 것 같고...

좋죠..좋지요.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은 늘 좋지요.

네오 2012-01-30 17:53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네오 2012-02-01 21:49   좋아요 0 | URL
아무리 생각해도 "소년이 병원에 같이 가자는 남자에게 괜찮다며 태연히 떠나는 이 마지막은 이상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 감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해주고 있는가." 라는 대목이 정말로 정말로 제가 가지고 의문하고 백퍼씽크로 일치했습니다!! 다르덴의 영화가 뭘랄까 더 좋은 방향으로 가는것 같다는 확신이 드네요!! 아무런 사전정보없이 보고나서 마지막 그 마지막 소년이 살가? 죽을까?를 가지고 영화안에서 흐르는 짧은 시간안에서 한참을 고민했답니다. 설마! 설마! 하면서요~ 다행히 소년은 살아서 제가 원하는 이미지로 중심이동하던데요! 간만에 조금은 이 영화가 흥분하게 만드네요 ㅋㅋㅋㅋ 그런데 정말 맥거핀님 말씀대로 바꼈더라고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의 작품들중에서 거의 음악이 없었는데 베토벤의 교향곡5번 황제 2악장이 나오는 순간 깜짝 놀랐어요..거의 <블루>의 효과처럼 씌여졌다는 막연한 생각만요 ㅋㅋㅋㅋ 다르덴이 참 흥미로워졌어요^^

맥거핀 2012-02-01 23:03   좋아요 0 | URL
다르덴 형제라면 이제 거장으로 불러도 좋겠죠? 그 짧은 마지막에서 보는 사람을 애타게 만들고, 결기있게 나가는 그 뒷모습은 다르덴의 새로운 변화, 아마도 좋은 쪽으로의 변화를 믿고 싶게 만들어요. 그 뒷 이야기를 또 상상하게 만들구요. 음악도 대체로 그렇지만, 기존의 스타일에서 새롭게 변화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기존의 스타일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아무래도 우려를 많이 하게 되잖아요. 많은 뮤지션들이 그래서 수많은 팬을 잃기도 하구요. 저도 이 영화 보기 전에는 그 변화들을 우려를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 변화를 긍정하기로 했고, 또 다음의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게 됩니다. 이미 다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거장의 새로운 발전을 볼 때에 그것만큼 즐거운 것이 있을까요.